팔레스타인 지방은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처음엔 다른 속주국들처럼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을 총독으로 선출하여 위임통치을 하였다. 예수시대에 유대인을 다스린 인물은 남부 유대 출신인 헤로데였다. 그는 아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각지에 신전, 투기장, 극장 등을 지어 로마문화를 보급시켰다. 그가 바로 마태복음 2장 16절에 나오는, 말년에 갓 태어난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어린 사내아이를 죽인 장본인이다. 또한, 예수를 못박아 처형한 유대인 총독이 빌라도이다. 팔레스타인은 유일신앙이었던 특성때문인지 저항이 심했고 로마는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그 통치는 가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로마의 팔레스타인 탄압이 심했던 이유
유대인들은 유일신을 믿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해방시켜줄 구세주가 나타나리라는 믿음아래,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다른 속주민들보다 로마에 대한 저항도 거세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황제는 점차 신권적 성격을 띠게 되고 다신교를 믿던 로마 인들은 황제의 신상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는 우상숭배를 배척했기 때문에 황제숭배를 거부했고 이를 황제는 반역으로 치부한 일도 있다.
크리스트교가 박해를 피해 어떻게 종교활동을 했나?
크리스트교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쿰란동굴과 같은 은거지에서 종교황동을 하였다. 심지어는 카타콤바 지하묘지에서 박해를 피해 은거했다는 설도 있다. 그곳에서 그들이 한 일을 예로 들자면, 쿰란동굴에서 크리스트교인들이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할 것을 염원하며 ''사해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사해문서는 쿰란지역의 11개의 동굴에서 두루마리형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크리스트교가 로마제국에 승리한 원인
크리스트교는 처음에 세금과 가난으로 허덕이던 평미과 노예를 중심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부유하지만 신분이 평민이었던 계층등, 시회적으로 지위가 있으나 만족하지 못했던 계층에게 퍼진고 점차 상류층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트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한 ''복음서''와 초사돋ㄹ의 행적을 서술한 ''사도행전''이나 신약성경등의 문서화된 기록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의 체계화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파되기도 쉬웠다. 게다가 크리스트교는 내세의 영생을 약속하는 종교이다. 죽음의 단계 이후의 과정이나 결과를 얘기하는 신앙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철학의 경우 죽음에 대해 논설했지만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와닿을 리가 없었다. 즉,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삶의 안정을 제공했던 것이다. 또한 크리스트교는 성별과 계급을 가리지 않은 평등의 교리를 내세웠다. 이는 제한된 수를 수렴할 수 밖에 없던 다신앙과는 달리 다양한 계층을 수렴할 수 있었고 교인들의 수를 늘릴 수 있는 요인이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크리스트교의 조직력이었다. 물론 체계화된 조직이 갖추어진 것은 중세시기때였으나, 조직력은 로마시대때부터 존재했었다.
<크리스트교인들이 숨어지내던 쿰란 동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