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대전쟁사

중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강희대제

작성자예수제자|작성시간10.09.25|조회수460 목록 댓글 0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는 청(淸)나라 제4대 황제로 이름은 애신각라 현엽(愛新覺羅 玄燁 : 1654~1722)이고 순치제(順治帝)와 효강장황후(孝康章皇后) 동가씨(佟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위기간이 61년으로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가장 길며 중국 최고의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킨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년에 한번 나올만한 황제)로 칭송받는다. 그는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들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청나라에 러시아의 일부 지역과 외몽골을 합병시켰고 티베트까지 세력판도를 넓혔으며 대만을 정벌했다. 4개의 대외무역항을 개항했고 서구의 교육, 예술, 천주교의 도입을 장려했다.

 

유년시절

 

애신각라 현엽은 1654년 5월 4일에 북경 자금성의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효강장황후(강희제 즉위 직후 사망)는 유명한 만주족 장군인 동도뢰(佟圖賴)의 딸이었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랐기 때문에 부황 순치제와 할머니 효장태후(孝莊太后)의 총애를 받았다. 7살인 1660년(순치 17년)에 황태자가 되었는데 이는 어머니 동가씨의 가문이 다른 후궁들의 가문에 비해서 위세가 대단했고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순치제는 총명한 현엽을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그 해 겨울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자 순치제의 애첩인 동악씨(棟鄂氏)가 천연두로 죽고 그녀로부터 전염된 순치제도 1661년(순치 18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순치제는 죽은게 아니라 동악씨를 잃은 슬픔에 오대산으로 출가한 것이라고도 한다.

 

부황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현엽은 8살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고 이듬해에 연호를 강희(康熙)로 고쳤는데 강희(만주어로는 에레타이핀)는 평화로운 조화를 의미한다. 황제가 아직 8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제(先帝)의 유지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索尼), 병부상서 오배(鰲拜), 형부상서 소극살합(蘇克薩哈), 호부상서 알필륭(遏必隆)이 중당보정대신이 되어 새 황제를 보필하였다. 이들 4명의 대신이 취한 첫 조치는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고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한 것이었다.

 

십삼아문은 선제인 순치제 때 도입한, 황실 내의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 황조인 명대에 번성했던 환관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십삼아문은 모두 한족(漢族) 출신 환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줄곧 만주족들의 혐오를 받아왔다. 내무부가 설치되면서 그 구성인원도 만주족 출신의 충성스런 종복들로 바뀌었고 황제의 사생활은 이들이 관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조는 환관들이 정사(政事)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여 황제가 환관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막았다. 이 점은 여타의 중국 황조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특히 명대에는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국가의 혼란을 초래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강희 1년인 1662년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남명(南明)이 청군과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에 의해 멸망당하고 황제 영력제(永曆帝)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명나라의 황통은 끊기게 된다.

 

실권 장악

 

어린 황제를 대신해 국사를 맡은 보정대신들은 모두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의 권력이 가장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점거하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으나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첫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윤잉을 낳고 난산으로 사망)이다. 1667년(강희 6년) 강희제의 보호자인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자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고 알필륭을 위협해 복종시켰다. 이로써 조정의 실권은 모두 오배가 쥐게 되었다.

 

오배에게 핍박을 받으며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던 강희제는 1669년 할머니인 효장태황태후와 황후의 숙부이자 색니의 아들인 색액도(色額圖)의 도움을 받아 오배와 알필륭을 제거하였다. 오배가 체포된 곳은 황제의 알현실에서였다. 황제는 자신과 함께 씨름하며 놀던 어린 내시들을 시켜서 갑작스럽게 오배를 체포한 것이다. 15세의 어린 강희제는 이로써 황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군주임을 입증했다.

 

삼번의 난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삼번왕(三藩王)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삼번왕은 중국 남쪽에 영토와 함께 자치권을 부여받은 3명의 한족 번왕을 말하는 것으로 운남의 평서왕 오삼계,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이 그들이다. 이들은 조국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 건국과 남명 토벌에 지대한 공을 세워 영토까지 하사받아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개국초의 혼란기는 지났기 때문에 이들은 청 조정에게 더 이상 효용이 없었으며 그들의 강력한 군사력은 오히려 큰 위협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같은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1673년에 찾아왔다.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왕은 조정에서 자신들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일종의 시위를 목적으로 삼번의 철수와 낙향을 청한 것이다. 강희제가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삼번의 강력한 군대와의 일전(一戰)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어전각의에서 젊은 강희제는 오삼계의 군대를 쳐부수겠다는 단호함을 보이면서, 삼번왕이 결국은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 확실한 이상 이 기회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결정에 충격을 받은 삼번왕은 오삼계를 맹주로 하여 1673년(강희 12년) 즉각 군사를 일으켜,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났다. 개전 초기에 관군(官軍)이 밀리게 되자 차하르 몽골족(만주족이 1635년 내몽골을 정복하기 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던 부족)의 부르니가 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다른 동아시아 지역들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전황은 물자가 많은 조정에게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圖海), 주배공(周培功)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八旗軍)의 활약으로 삼번을 대파하였다. 그 결과 1676년(강희 15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尙之信)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다.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북경으로 진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1678년 스스로 황제를 선언했으나 그 해 8월에 죽었다. 이로 인해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고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吳世藩)이 곤명에서 자살함으로서 8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종결되었다. 이 반란 이후에 강희제는 친왕(親王)들에게 최소한의 사병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팔기군에 배속시켜 친왕들의 군 지휘권을 거의 뺏어버렸다.

 

대만정벌

 

삼번의 난을 끝으로 중국 본토는 일단 잠잠해졌지만 강희제는 곧 대만에 눈길을 돌렸다. 대만과 팽호제도, 금문, 하문 등 동남 36개 섬들은 복건 출신 대만 호족인 정(鄭)씨 일가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광대한 중국 연안에서 해상무역을 독점해온 해상세력이었으며 반청세력이었다. 만주족에게 복속되는 것을 거부한 명의 유신 정성공(鄭成功)은 1662년 네덜란드로부터 대만을 탈환해 이곳에서 계속해서 반청운동을 벌였고 그가 죽자 아들 정경(鄭經)이 이어 받았다.

 

청은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대만 정벌을 수행할 수 없었다. 강희제는 일단 대비책으로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과 대만의 무역을 금지시키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하여 대만을 고립시켰다. 강희제는 이어 과거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施琅)을 수군 총제독으로, 요계성(姚啟聖)을 병부상서 겸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강희제는 잘 훈련된 팔기 수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대만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이에 정경은 죽고 그의 아들들인 정극장(鄭克藏)과 정극상(鄭克塽)이 연평왕(延平王) 자리를 놓고 싸워 결국 정극상이 왕위에 올랐으나,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결국 정극상은 1683년(강희 22년) 7월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청에 항복하여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러시아와의 전쟁

 

중국 본토를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자, 강희제는 북방의 적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17세기 중반에 흑룡강(黑龍江) 유역까지 남하했던 러시아는 강희제의 통치 이전부터도 야크사와 네르친스크까지 내려와 요새를 세웠으나 청군에 의해 격퇴된 바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그 뒤 요새를 곧 수복했고, 그 지역에 더 많은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강희제는 이들에게 일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1685년 청군은 야크사를 공격하여 며칠 만에 그 요새를 함락시켰으나 청군이 철군하자마자 러시아인들은 그 요새에 또다시 병력을 배치했다. 강희제는 그 이듬해 다시 정벌을 명령했고, 포위공격은 오래 지속되었다.

 

양군이 흑룡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운 끝에 1689년(강희 28년)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국경을 확정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네르친스크에 파견한 청의 대군에 압도되어 맺게 된 이 조약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흑룡강의 외곽지류인 고르비트사 강 유역과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정해졌다. 이로써 흑룡강 유역은 청나라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몽골과 티베트 원정

 

강희제의 할아버지인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 이후 몽골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자치권은 인정받고 있었다. 그중 외몽골의 서쪽에 사는 준가르 부족의 칸인 가르단(爾丹)은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력을 모아 몽골을 통일하여 청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가르단이 이끄는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칼카(할하)족의 땅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로부터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영토를 빼앗긴 많은 수의 칼카족 난민들이 내몽골로 피신해 와서 청의 보호를 요청했다.

 

1691년에 강희제는 내몽골의 돌론노르에서 칼카족의 대표들을 접견했고 그들의 공식적인 합병맹세를 받았다. 1696년에 강희제는 불모의 고비 사막을 건너 외몽골 원정에 나섰다. 과감하면서도 대단히 위험스러운 그 원정에서 강희제는 군사들을 손수 지휘했다. 하지만 청군은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군사를 돌려 북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 강희제는 다시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오늘날의 울란바토르 동쪽인 준모드에서 준가르군을 궤멸시켰다. 칼카족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외몽골은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가르단은 그 다음해 알타이 산맥의 은신처에서 음독자살 하였다.

 

이후 20여년간 청과 준가르 간의 평화가 지속되었지만 1717년 준가르의 신임 칸인 가잔이 6000명의 군사로 티베트를 침입하여 라싸를 함락시키고 달라이 라마를 폐위시킴으로써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강희제는 1720년 티베트로 군대를 보내, 준가르군을 라싸에서 축출하면서 이 지역을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가잔은 전사하였다. 강희제는 1712년 준가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7세기 초반에 남러시아로 이주해온 투르구트족, 또는 볼가 칼미크족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무수한 수로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전역을 여행한 만주사절들은 3년 뒤에 돌아왔고, 그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인 도리침(圖理琛)이 <이역록(異域錄)>이라는 상세한 여행기를 썼다.

 

강희제의 정치

 

강희제는 천부적으로 놀라운 정력과 뛰어난 궁술(弓術)의 재주를 지닌 탁월한 군사지도자였다. 그는 일상적인 행정업무에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쏟았다. 중국의 전통적인 황실제도에 따르면, 제국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소한 일도 황제가 몸소 보살피게 되어 있었다. 강희제는 자신에게 제출되는 보고서와 비망록들을 모두 읽으면서 아주 사소한 오자(誤字)도 지적해냈다. 또 하루에 300~400건에 달하는 문서를 모두 결재했고, 심지어 전시(戰時)에도 이렇게 했다.

 

강희제가 늘 신경 썼던 문제는 황하(黃河)의 치수(治水)였다. 오랫동안 치수사업을 하지 않은 탓으로 황하와 회하(淮河)가 합류하는 지점 근처 유역은 자주 침수되었다. 이 때문에 강서(江西) 북부지역은 큰 피해를 당하곤 했다. 1677년 강희제는 근보(謹甫)를 치수사업의 총책임자로 임명했고, 근보는 1683년에 제방축조와 준설사업을 완성하여 황하의 흐름을 안정시켰다. 아울러 황하과 남쪽의 양자강을 잇는 대운하의 개수작업이 활발히 진척되어 남쪽의 곡창에서 생산되는 곡물들을 북쪽으로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치수사업의 결과를 검사하고, 남쪽의 문화ㆍ경제 지도자들과 친교를 돈독히 하기 위해 강희제는 양자강 이남의 지역을 1684~1707년 사이에 6번이나 방문했고, 그때마다 여비는 황제의 사재를 털어 충당했다.

 

개인생활은 근검절약으로 일관했고, 시중을 드는 궁녀와 환관도 몇 사람에 불과했다. 강희제는 세수입(稅收入)을 증대시키는 일이 결코 없었고, 전시에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통치시기에 세금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감면되었다. 1711년부터 3년 동안 각 성(省)은 도합 3,000만 은량이 넘는 세금감면을 받았으며 강희제는 1711년부터 인두세를 내는 성인(成人)의 수를 당시의 수준에서 영원히 동결한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대만 정벌 이후 강희제는 연안무역의 규제를 해제하고 광동(廣東)을 포함한 4개의 항구를 외국 선박들에게 개방했다. 외국 상인들은 차, 비단, 도자기 같은 중국제품을 사기 위해 중국에 은(銀)을 가져왔다. 이 같은 교역과 내부의 평안은 특히 양자강 이남 지역에 엄청난 산업성장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뛰어난 정치력으로 강희제는 다민족 국가인 청나라를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로 우뚝 서게 만들었으며 이후 건륭제까지 이어지는 청나라 전성기의 기틀을 다졌다.

 

강희제는 또한 학문을 매우 좋아했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깊어져 과로로 병석에 누웠을 때에도 책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 1677년 자금성에 남서방(南書房)이라는 서실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철학, 역사 등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그는 특히 주자(朱子) 철학에 심취하여 주자가 내세운 유교적 이상을 열심히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만주족이 세운 청조가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의 신임을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유교철학으로 교육을 받은 중국관리들을 선발하는 전통적인 과거제도 외에도 강희제는 1678년 학문과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갖춘 사람들을 추천에 의해 관리로 등용하는 특별제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임명된 50명의 인사들은 명조의 공식 사서인 <명사(明史)>를 편찬했다. 강희제가 편찬을 명한 다른 책들로 유명한 것은 4만 2,000자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康熙字典)>, 중국어의 운율(韻律) 사서인 <패문운부(佩文韻府)>, 운율의 백과사전인 <연감유함(淵監類函)> 등이 있다. 또 다른 훌륭한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은 10만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또한 강희제 때 시작된 것이다.

 

교육분야에서는 1669년 16개조로 된 칙서를 반포했다. 이것은 선제인 순치제가 반포한 6개조를 수정ㆍ확대한 것으로 향리의 생활실천수칙을 상술한 것이다. 이 교육이념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옹정제(雍正帝)에 의해 확대되었고, 거의 250여 년 동안 중국인들의 도덕적 지침이 되어왔다.

 

유럽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열렬히 받아들였던 강희제는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고용했다. 페르디낭 베르비에스트로부터 기하학을 배웠으며 그는 포 제조에도 간여했다. 이 대포는 삼번의 난과 준가르 정벌 때에 위력을 발휘했다.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 조아섕 부베는 강희제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강희제는 또한 피에르 자르투, 장 바티스트 레지 등에게 명하여 제국의 정확한 지도를 편찬토록 했다. 측량조사는 1708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들은 제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했다. 장기간에 걸친 끈질긴 측량조사 끝에 1717년에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가 완성되었다. 장 바티스트 부르귀뇽 당빌이 펴낸 유명한 <중국, 타타르, 티베트의 새 지도>는 이 중국어판 지도를 프랑스어로 펴낸 것이다. 유럽의 회화도 역시 강희제를 매혹시켰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부베가 데려온 이탈리아인 조 기라르디니는 강희제가 총애했던 궁중화가였고, 이들은 유럽식 원근화법으로 중국회화에 영향을 끼쳤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같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청조에 기여하게 되자, 강희제는 로마 가톨릭교를 좋게 보게 되어 1692년에는 로마 가톨릭교의 중국 내 포교를 공식으로 허락했고, 그 뒤에는 자금성 안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또 자신이 말라리아에 걸려 병석에 누웠을 때 자신을 완치시켜 준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북경에 교회를 지어 이들에게 하사했다. 황제가 로마 가톨릭교에 호의를 보이자, 도미니쿠스, 프란체스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종단(宗團) 출신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건너오게 되었다. 제사나 공자사당 및 천신단에 의식을 올리는 전통적인 중국의례에 관대했던 예수회와는 달리, 이들 다른 종단의 선교사들은 이 같은 전통의례가 로마 가톨릭교 신앙과 배치되는 미신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의례논쟁은 1704년까지 맹렬하게 계속되었고, 이 해에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중국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이 같은 의례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회칙을 내렸다. 자신의 제국 내에 이 같은 내정간섭이 벌어지는 것에 격분한 강희제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명하여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중국으로 오는 교황특사를 체포했고, 1706년에는 예수회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축출했다. 1720년에 또 다른 교황특사인 카를로 암브로조 메차바르바는 황제의 명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 당했다.

 

후계자 문제

 

강희제는 4명의 황후와 15명의 비(妃)에게서 모두 35명의 아들을 낳았다. 둘째아들인 윤잉(允礽)은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어머니가 1674년(강희 13년) 난산으로 죽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는 이듬해에 그를 바로 황태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왕자들에게 동등한 황위계승권을 인정하는 만주족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왕자들 사이에 황위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 중 4남 윤진(胤禛), 8남 윤사(胤祀), 14남 윤제(胤褆)가 가장 실력 있는 아들들이었다. 하지만 강희제는 윤잉을 후계자로 고집하여 제위는 윤잉이 승계 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갔다.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른 황자들이 받는 교육보다 더 수준 높고 엄격한 교육을 시켜서 윤잉을 완벽한 차기 황제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윤잉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색과 동성애를 즐겼으며 음험하고 성격도 패악했다. 한때 부황의 총애를 받았던 윤잉은 점차 부황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태자 윤잉의 작은외조부인 색액도를 중심으로한 태자당이 결성되어 정사를 주도하려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결국 1708년(강희 47년)에 색액도에게 사약을 내리고 윤잉을 폐위하였다.

 

윤잉의 또 다른 경쟁자였던 큰 아들 윤시는 윤잉이 폐위되자 부황에게 그를 죽이겠다고 말했다가 진노한 강희제에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윤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강희제는 1709년 그를 다시 황태자로 삼았으나 여전히 윤잉은 반성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고 문제를 일으켰다. 부황에게 올라온 공물을 가로채는가 하면 숙부들을 구타했고 심지어는 강희제의 후궁을 건드리기까지 했다. 1712년(강희 51년)에는 부황을 태상황으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즉위한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다시 폐위되고 연금되었다. 아들들의 권력투쟁에 크게 상심한 강희제는 다시는 황태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강희제의 아들 중 8남 윤사가 가장 많은 신료들의 신망을 받았다. 그를 비롯한 황자들은 서로 공적을 다투고 부황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강희제는 말년에 14남인 윤제를 총애하여 그에게 북방의 대장군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형제간의 암투는 더욱 격화되었고 8남 윤사와 윤제가 손을 잡고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 역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성군의 붕어와 암살설

 

1722년 봄, 강희제는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 및 퇴직 관리 1,000여명을 자금성 건청궁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천수연(千叟宴)이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붕어하였는데 이 때 나이가 69세였다. 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곤란이라 하나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에 돌연사했기 때문에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일설에는 대신 융과다(隆科多)에게 피살되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강희제는 죽기 전에 14째 아들 윤제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유서를 썼다고 한다. 당시 강희제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신하는 북경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보군통령(步軍統領) 융과다였다. 융과다는 넷째 황자 윤진의 측근으로 줄곧 윤진을 황위 계승자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윤진을 의중에 두고 있지 않았고 융과다는 적절한 때를 틈다 “1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十四子).”라고 되어 있는 유서의 내용에 획을 추가해 “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于四子).”라고 바꾸고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설일 뿐이지 정식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강희제의 병세가 위독해졌을 때 그는 친히 아들들을 불러놓고 유서를 공개하였으며, 서북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윤제와 구금되어 있던 윤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황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유서가 수정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서는 만주어로 쓰여졌으므로 글자에 획을 추가해 고쳤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이 하나 제기되고 있다. 윤진은 평소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32세 때는 친왕에 책봉되었으며, 일찍이 황명을 받들어 조정의 군정(軍政)과 재정의 대권을 관장하였다. 여러 황자들이 노골적으로 황태자 쟁탈전을 벌일 때 윤진은 비록 암암리에 세력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거기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강희제의 환심을 사는데 치중했다. 이에 성조는 윤제와 윤진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윤정을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윤진은 황위에 올라 옹정제(雍正帝)가 되었다.

 

출처

 

http://winever.tistory.com/285

 

http://blog.naver.com/joba34?Redirect=Log&logNo=140018203858

 

http://kr.blog.yahoo.com/leehc8080/698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