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영생은 인간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실재이기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준다. 영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언젠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영생은 로고스 찬가에도 나오듯이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킨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이 세상에 오면서 그 빛을 받아들인 이들은, 곧 주님을 받아들인 이들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살지 않게 된다. 빛의 자녀가 되어 빛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5,13)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복해 말하지만 영생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영생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하면서 영생의 현재성을 부각시킨다. 17장 3절을 보자.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사랑의 관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안다’란 단어가 현재형으로 쓰였다는 점과 그 단어의 의미 때문이다.
위 구절에서 ‘안다’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이란 먼 훗날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분을 아는 것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정신과 느낌으로 상대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 자신을 상대에게 완전히 귀속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대와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생이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고 그분들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두 번째 설명은 6장에 나온다. 6장 54절과 56절은 서로 평행되는 구절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6,56)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앞에 나오는 말은 서로 같지만 뒤에 나오는 말은 서로 다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영생이란 예수님과 우리가 갈림이 없이 일치되어 있는 상태임을 가리킨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시절,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한 최악의 형벌 가운데 하나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광산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광산으로 간다는 것은 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거나 화형대에서 불에 타 곧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다는 뜻이었다.
매일같이 이글거리는 태양 볕에서 죽도록 일하고 채찍질로 난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과 캄캄한 광산에서 극도의 피곤을 견디다 사고를 당하면서 서서히 조여 오는 죽음의 손아귀를 견디는 것이었다. 누미디아 광산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초대교회 신자들이 작업장 동굴 벽에 적어 놓은 신앙고백 표현을 보게 되었다. 많은 말이 적혀 있었지만 가장 많이 쓰인 말은 ‘그리스도’와 ‘생명’이었다.
다만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이우로 생지옥 같은 곳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생명’이란 말을 동굴 벽에 새기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얻고자 이 모진 고통을 겪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그랬을까? 또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돌보아 주심을 잊지 않으려고 그랬을까? 비록 육신의 목숨은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사그라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생명이 더욱 드러나고 있음을 각인하고 싶어 그랬던 것일까?
바오로가 코린토 공동체 신자들에게 썼듯이.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