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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이야기

LA에서의 1년 (끝-귀국하다)

작성자듀크|작성시간15.09.17|조회수1,601 목록 댓글 19

4. 한국으로 떠나다. (2010년 11월 23일)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나보다 오히려 아이들이 걱정했다.


“아빠, 오랫동안 떠나온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사시려고요? 힘들어도 미국이 낫지 않겠어요. 다시 뉴저지로 돌아오신다면 제가 아빠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어요. 알아볼까요?”


기가 찼지만, 아이의 성의가 기특해서 즉시 대답하진 않았다.


“그래, 생각해 보마.”


미국생활을 포기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포기하고 나니 모든 것은 간단했다. 패배감, 배신감과 함께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 무능한 내 탓인 걸.

 

결정하고 나자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아파트 사무소에 들려 한 달 후 이사 나갈 것을 통보했고, 해외이사 업체를 불러 견적을 받았고,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제주에서 은퇴생활을 하는 큰 동서에게 연락하여 살 집을 알아보았으며, 인터넷에 낸 귀국세일 광고를 보고 연락해 온 사람들에게 승용차 두 대는 헐값에 넘겼다. 나는 LA영사관에 들려 재외동포 비자(F-4)를 신청하고 집사람의 영주권은 포기하기로 했다. 결정을 내린 후 귀국 비행기 예매까지 모든 일에 2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LA에 와보고 싶지만, 회사일이 바빠 짬을 낼 수 없다는 아이들을 대신해 동부로 날아가 아이들과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차를 렌트했다. 떠나는 길을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나머지 일주일은 주변을 정리하며 보냈다.


이삿짐을 보내고 난 빈집에서 이틀을 더 지내며 인터넷, 전기, 전화, 은행구좌와 크레딧 카드를 클로즈하고 남은 돈을 찾아 한국으로 송금했다. 전기, 인터넷, 전화요금은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지불하면 갚지 않은 돈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남긴 것은 있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401K 은퇴연금’과 ‘Roth IRA’는 60살 이후를 대비해서 남겨놓았다.


아, 또 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이들 셋.

똘똘하고 성실한 아이들이니 걱정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을 팽개치고 떠나는 것 같아 마음만은 매우 아프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인이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나왔으니 미국인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미국인에게 살기 좋은 곳이다, 한국이 한국인에게 살기 좋은 곳처럼.

 

예외가 있다.

돈이다.

돈이 잘 벌릴 땐 예외가 된다.

한국에서 1년 벌어야하는 돈을 미국에서 한 달 만에 벌 때는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에 사는 불편함보다 돈이 보상하는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이나 중국동포들이 가족과 떨어져 살더라도 기를 쓰고 한국에 와서 불편한 삶을 감수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그들처럼 과거에 많은 한국 분들이 미국에서 그랬다.


영어에 서툰 핸디맨들도, 비디오 가게만 차려도, 세탁소만 운영해도 한 달에 만 불은 쉽게 벌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사는 외로움이나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갑갑함은 주말 골프나 바비큐 파티와 같은 풍족함으로 보상 받았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아버지 생신, 일 년에 세 번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보상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과거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은 백년만의 불경기를 겪고 있으며 한국은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외로움과 갑갑함만 있을 뿐, 더 이상의 보상은 없다.

 

20여 년 전, 나를 많이 아껴주었던 직장상사가 있었다. 2008년 초 모친상 때 그분은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 인편을 통해 부조금을 보냈다. 상을 치룬 후에 인사차 그분께 연락을 드렸다. 만나자고 해서 뵈었다.


- 너는 그 회사에서 얼마나 받고 있나?

- (다소 자랑스럽게) 보너스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 몇 년째 10만 불 넘게 받고 있습니다.

- 에게, 그걸 받고 미국에 있냐? Y 연봉이 얼만지 알아? 1억 5천이다.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그분 밑에서 나와 Y가 과장으로 있었는데. 나이도 많고 승진도 그가 다소 빨랐지만, 우리는 친구처럼 말을 트고 지냈다. 승진에 있어서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 Y는 지금 1직급 지점장이라고 했다. 그렇게 비교 당하고 나서 솔직히 옹졸한 내 마음은 한동안 허탈했다.

 

내가 살아본 미국은 대단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랜드 캐넌, 옐로우 스톤, 나이아가라, 라스베이거스 등, 가 볼만한 곳은 끝이 없다. 거대한 대륙의 자연과 도로, 항만, 공항 등의 인프라, 잘 정리된 농경지,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 시스템과 룰의 공평한 적용 등 세계 최강국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런 부러운 조건들을 외로움과 갑갑함 없이 즐기기 위해서는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미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미국인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우선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다. 최소한 고등학교라도 이곳에서 졸업해야 한다. 다음은 타고난 재주나, (재주가 없다면)불굴의 정신과 노력으로 외로움과 언어의 답답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평범한 능력과 남들과 비슷한 노력으로 외로움과 답답함을 극복하지 못한 나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어색함과 불편함 속에서 살았고, 이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뉴저지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금요일에는 부사장이 주재하는 회의로 오전을 보냈다. 부서간 의사소통을 위한 회의라지만, 언어가 부족한 내겐 긴장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수요일 저녁부터 걱정이 되어 식욕을 잃었고, 잠자리에서도 시나리오를 생각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4시간이 넘게 계속되는 회의가 끝나야 일주일이 지났다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레이오프 되었을 때는 회의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한동안 기쁘기까지 했다.


급한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언어는 내겐 극복하기 힘든 대상이었고, 그로 인해 지난 14년 동안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누가 나보고 영어를 잘 한다고 하면 그냥 속으로 웃는다. 글쎄다, 장사를 한다거나 노동을 한다면 내가 구사하는 영어도 충분히 통할 것 같기는 하다.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서울에서 며칠 보내고 이곳 제주에 와서 집을 보러 다닌다. 제주의 날씨는 LA와 비슷하다. 운이 없는지 이곳 제주는 다른 곳과 다르게 주택 가격이 최근 1~2년 사이에 20~40%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작년 가을에 보았을 때는 전세 4~5천, 매매 7천 정도의 24평 주공 아파트가 전세는 거의 없고, 매매가 9천이다.

 

이제 내 분수에 맞게 살려고 한다. 가난하지만 마음 편하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벗어던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 작년 7월 LA로 온 후, 어떻게든 미국에서 살아보고자 했던 두 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경제적 데미지와 상처만 남겼다. 굳이 LA에서 살려고 하면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노후로 접어드는 마당에 그렇게까지 험한 일을 하면서 생존하고 싶지는 않았다. 옷에 억지로 몸을 맞추는 일은 더 이상 하기 싫었다.


두 내외가 사는데 무슨 큰돈이 필요할 것인가?

 

<후기>

직장생활만 30년 한 제게 선택의 폭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관리한다든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한다든가,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운영방안을 마련한다든가하는 조직에서 필요한 일에는 익숙하지만, 조직을 떠나서는 매사 서투르기만 했습니다.


가난하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시애틀 박 선생님(내글을 보고 연락을 주신 분)의 조언이 쉽지 않았던 결정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결국 이민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행하게 된 것입니다.


슈퍼에 들려보니 물가는 미국보다 훨씬 비싸더군요. 파 한 단에 3,500원, 고기류는 한 팩에 2~3만 원으로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었지만, 제주의 주거비는 많이 쌌습니다. 집사람이 사고 싶어 했던, 그러나 집주인의 변덕으로 결국 포기하고만 34평짜리 잘 지어진 해수욕장 부근 아파트가 11~12만 불(1억 2~3천) 정도로 싼 편이었습니다. 오렌지카운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원주택도 20~30만 불 정도면 충분하더군요.


어제 저는 30평짜리 3 Bed 2 Bath 연립주택을 계약했습니다. 전세를 구하려고 했지만, 전세는 나온 게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부에나팍’에서 살던 월 $1,350짜리 아파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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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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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돛대 | 작성시간 15.09.18 엘리트들이 한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던 즈음 한국은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네요. 지기님의 아프지만 소중한 경험은 한국에서의 생활에서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직은 너무나도 젊은 나이입니다. 가지고 계신 소중한 경험과 지식은 개인과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중국 한 번 다니러 오십시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아이템들을 꼭 찾을 수 있습니다.지금은 제주-상해 간 비행기가 수없이 뜨고 있습니다. 국경과 시간의 공간을 초월한 시대에 살고있는것이 행복입니다. 중국에 다니러 오시면 제가 아무 조건없이 안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듀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19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중국도 꼭 배낭여행을 해보고 싶은 곳입니다. 회사 일로 텐진은 몇 번 가보았습니다. 뵐 날이 있을 거로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소노마마 | 작성시간 15.09.19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는 좋은 일만 많이 생길것으로 믿어요. 그럼, 늘 행복하세요!!
  • 작성자삼류인생 | 작성시간 15.10.17 은퇴를 하면 저도 한국가서 살던지 혹은 반반씩 거주 해야지 하던 생각으로
    카페에 가입해서 좋은 말씀들 듣고 있읍니다.
    하지만 얼마전 한국에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서둘러 귀국하고 정신없이 장례를 치른후...
    과연 가족들과 떨어져 있다가 죽음을 맞는다는것에 많은 생각을 합니다.
    물론 모두다 그렇타고는 할수 없지만요
  • 작성자임경업장군 | 작성시간 15.11.16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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