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바위지대에서 길이 사라져
고개를 넘어갔을 때 산책(?)이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좀더 까탈스런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그제야 그레고리의 내공이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봉우리 몇 개쯤은 가볍게 산책 삼아 넘어 다니는 괴력의 사나이였다. 이미 이 지역에서만 10년 넘게 활동해 누구보다 지형에 익숙한데다 체력 또한 뛰어났다. 러시아 산악구조대 출신의 클라이머로 침간산 등반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스키 실력만큼이나 뛰어난 산악경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동굴 비박지에서 추모동판을 살펴보고 있는 답사팀. / 침간산 남쪽 능선의 그늘진 곳에 눈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침간산 서릉의 목초지에서 한 무리의 소떼를 만났다.
이 날 가벼운 트레킹이라는 말만 믿고 멋모르고 따라나섰던 일행은 초주검이 됐다. 밸더사이드 리프트 승강장에서 출발해 고개 두 개를 넘고 계곡 세 개를 가로 질러 침간 마을 부근의 도로까지 내려오는 데 4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산행거리는 총 10km. 거의 쉬는 시간도 없었고 비까지 흠뻑 맞았다. 우리는 완전히 속았다.
침간 마을의 빌라에서 출발한 것이 새벽 4시. 정상까지 거리가 약 7km로 왕복 6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새벽 5시경, 마을 앞 스키리프트 승강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곧바로 해가 떴고 강렬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날씨였다. 직선거리로 쳐도 4km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침간산 정상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예상대로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서릉에 오를 때까지는 잠시 숨 돌릴 틈도 없는 된비알의 연속이다.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능선에서 해를 피해 쉬어가며 정신없이 올랐다. 1시간 가량 발품을 팔고 나니 산길은 왼쪽 사면으로 비스듬히 방향을 꺾으며 숨을 죽였다. 잠시 뒤 서릉 상의 널찍한 평지에 올라섰다. 표고차 600m 이상의 고도를 올린 것이다.
“아이고 죽겠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고요.”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선두를 지키고 있는 그레고리에게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에게 육포를 건너자 “스파시바” 하며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온 요구르트 외에는 하루 종일 물을 마시지 않았다. 역시 고수는 고수인 모양이다.
고갯마루에서 본 주변 산군의 풍광은 정말 일품이었다. 서쪽으로 어제 우리가 올랐던 산자락이 한눈에 펼쳐졌다. 산꼭대기의 기상관측소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 뒤로는 끝이 없을 것 같은 광야가 펼쳐졌다. 시야를 남쪽으로 돌리면 하얀 갓을 쓴 듯한 침간산 부근의 3,000m급 봉우리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푸른 산과 흰 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바람이 차갑게 느껴질 즈음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여기서 지체할 수는 없었다. 주능선에 올라선 뒤로는 크게 가파른 구간은 없었다. 유순하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었다. 나무가 없는 고래등 같은 능선을 1시간 가량 걸어 오르니 주변에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밭을 보자 해발 2,800m가 넘는 고지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완만한 설사면을 가로질러 오르는 동안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이곳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설사면 아래쪽에는 천길 벼랑이 버티고 있어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 등반의 서막이 불과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눈으로 덮인 기존 코스를 우회해 암봉을 직등하는 곳이었다. 정상부에 작은 십자가를 세워둬 길을 찾을 수 있게 해두었다.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온 산을 가득 채운 바위들 분위기에 약간 긴장됐던 것은 사실이다. 이곳을 지나 사면을 트래버스하면 작은 동굴이 있는 큰 바위 아래 도착한다.
그레고리는 이곳을 식당이라 불렀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 중식장소로 안성맞춤인 위치였다. 악천후나 위급시에는 비박지로도 훌륭한 장소였다. 바위에는 동판이 두 개 붙어 있었다. 이곳에서 사고를 당해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식당을 지나면서 길은 더욱 거칠어졌다. 정면에 보이는 큰 암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한 뒤 곧바로 치고 올라 고도를 높였다. 경사는 갈수록 가팔라져서 거의 등반하듯 손발을 써야하는 구간이 점점 많아졌다. 바위 상태는 마구 부서져 내리는 형태로 불안했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돌이 떨어져 앞에 가는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도 깊어져 설벽을 치고 올라가는 곳도 있었다.
능선이 거의 끝날 즈음 잠시 쉴 수 있는 테라스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차르박 호수가 가물가물하게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왔다. 침간 마을 옆에 성벽처럼 솟아 있던 작은 침간산이 뒷동산처럼 보일 정도다. 주변 산세는 황량하고 거칠어 3,000m 높이의 바위산성 위에 올라선 것 같은 분위기다.
중간 중간 뚜렷한 길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레고리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말했다. 눈이 완전히 녹으면 훨씬 안전하고 좋은 길은 많기 때문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산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예전에 여덟 살짜리 아이와 함께 이 코스로 침간산을 오른 적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상 바로 아래 구간은 완전히 눈으로 덮여 긴 설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떤 곳은 눈이 단단하지 않아 허리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다. 그래도 노련한 가이드가 앞에서 길을 잡아준 덕분에 큰 고생 없이 정상에 섰다.
▲ (왼쪽 위)하산길에 본 침간산 전경. 날카로운 봉우리가 범상치 않다. /(오른쪽 위)그레고리가 푸른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서릉으로 오르고 있다./(왼쪽 아래) 트레킹 도중에 만난 목동과 텐트./(오른쪽 아래) 밸더사이드 리조트 밑의 리프트 승강장. 이곳에서 침간산 외곽 트레킹을 시작했다.
천산산맥 한눈에 담는 멋진 조망
침간 마을에서 정상까지 거의 5시간 가까이 걸렸다. 4시간 정도라던 그의 설명은 순수하게 산행에만 걸리는 소요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정상에는 커다란 삼각형 철제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러시아어로 쓰인 간판과 군복을 입고 있는 산악인의 추모 동판도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침간산 중앙봉 정상이고, 실제 정상은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솟아 있었다. 두 봉우리는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40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정상 능선에서 보니 동쪽 멀리 하얗게 눈이 쌓인 산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3,000m는 훌쩍 넘을 것 같은 고봉들이었다. 이들 설산은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즈스탄 국경 즈음에 형성된 천산산맥이었다. 푸른 산들 뒤로 솟은 설산을 보니 히말라야와 다를 바 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침간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널찍한 고산평원이 솟아 있었다. 남서쪽을 제외한 모든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절묘한 지형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은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단 한 가닥으로 외곽의 트레킹 코스를 도는 데만 이틀이 넘게 걸리는 지역이라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에도 이런 산행지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정상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끝내고 하산에 들어갔다. 얼마 전에 지나온 길인데도 까마득한 경사에 오금이 저렸다. 가이드는 올라올 때와는 다른 길을 택해 하산을 시도했다. 주로 설사면을 곧바로 치고 내려가는 코스로 하산했다. 바위지대는 낙석이 심해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도 안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상 아래 500m 지점에서 옆 능선으로 트래버스하는 지점은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경사가 50도 가까이 되는데다가 발밑은 끝이 보이지 않는 설벽이 펼쳐졌다. 아이젠도 피켈도 확보줄도 없었기에 긴장된 순간이었다.
“발을 세게 차서 눈 속에 박으면 괜찮아요.”
설벽을 먼저 넘어간 그레고리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나선 일행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대로 트래버스를 모두 끝내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목이 타들어가고 심장이 벌떡거렸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동굴에서 점심을 먹고 곧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십자가가 있는 작은 암봉을 넘어서면 길은 좋아진다. 시원하게 조망이 터지는 능선에는 많은 길이 나 있었다. 올라오는 도중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산양처럼 가볍게 뛰어가던 그레고리는 언덕에 서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간 반에 침간산을 오른다는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님이 분명했다.
동굴에서 침간 마을까지는 정확히 2시간이 걸렸다. 왕복 14km 거리에 7시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는 곳이다. 천산산맥의 해발 3,000m가 넘는 봉우리를 이렇게 짧은 일정으로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침간산은 알프스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풍광에 모험적인 등반까지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모험을 즐기는 트레커라면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새로운 산이다.
(출처 : 월간 산, 2008. 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