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바르고 다른 이야기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작성자바르고 다르자|작성시간26.06.17|조회수19 목록 댓글 0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성경의 첫책 창세기의 창조로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오실 예수를 기다리고, 오신 예수를 증언하며, 다시 오실 예수를 소망하도록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시고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성경의 유일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설 때 우리는 두 가지 차원의 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로 아는 ‘인지적인 답’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삶으로 고백하는 ‘실존적인 답’입니다. 그런데 모태신앙으로 자라거나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면서 귀로 들었던 성경적 지식으로 예수를 설명하는 수준과, 나의 삶의 가장 어두운 밤에 그분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느끼며 터져 나오는 눈물의 고백 사이에는 분명히 거대한 간격이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3년 동안 당신과 동고동락하며 모든 삶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을 향해 그 간격을 드러내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훌륭한 평가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평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 지도자, 사랑과 평화의 스승,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자신의 고백인가 하는 질문은 별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짜 목적을 가지고 다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알고 있으며, 삶 속에서 어떻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기 위해, 먼저 직시해야 할 거대하고 과격한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과 학문으로 예수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연구입니다. 과연 예수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가? 복음서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인가? 예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때로 신앙을 위협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며, 특히 보수적인 신앙 전통 안에서는 다소 불편한 질문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실제 역사 속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신화 속 인물처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 삶에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적 세계관 속에 갇힌 ‘다양한 신들 중의 하나’로 예수를 제한하는 불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차가운 이성으로 시작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과 연구는 오히려 예수의 완전한 실존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냈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예수와 그의 죽음에 대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나사렛이라는 가난하고 작은 동네 출신의 한 청년이 유대교 전통 안에서 성장했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마침내 본디오 빌라도의 선고로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가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는 신화 속 환상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가혹한 로마의 압제 아래 흘렀던 팔레스타인의 붉은 흙먼지 속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가셨던 진짜 ‘역사적 실존 인물’이셨으며, 실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배고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분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시고 인간의 역사 한가운데로, 죄와 고통,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 현실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역사학자들이 고증하는 당시 갈릴리는 평화롭고 한적한 곳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착취의 현장’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들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가혹한 세법과 예루살렘 성전 기득권층이 요구하는 종교적 세금이라는 이중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빚더미에 앉아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이나 일용직 노동자, 심지어 거지와 강도로 전락하던 비참한 약자들의 절규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당대 민중들은 이 가혹한 현실을 뒤엎어줄 ‘혁명가 메시아’를 자연스럽게 대망했고, 실제로 당시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이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그 지옥 같은 착취의 현장, 민중들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적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구속사적 죽음이었지만, 역사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자랑하던 정치적 평화(팍스 로마나)의 체제를 위협하고, 성전 중심의 유대 종교 기득권의 불의를 정면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 체제의 저항에 밀려 처형당한 가장 처절한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매 맞으실 때 흘리신 피는 진짜 인간의 피였고, 그분이 느끼신 고난은 관념이 아닌 ‘진짜 아픔’이었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숨멎음은 완벽한 ‘실제의 죽음’이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죽음은 관념의 탑을 무너뜨리고 우리 신앙의 생생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교리적인 정답만을 늘어놓는 종교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2천 년 전 내 삶의 자리와 똑같은 차가운 역사의 현장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신 분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저 높은 보좌에 앉아 인간의 고통을 관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의 가장 비참하고 냄새나는 현장 속으로 직접 당신의 몸을 밀어 넣으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이며 역사적 예수의 본질입니다.

 

교회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갇혀 추상적인 천국만을 노래하는 신앙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만난 자들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지금 내가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직장으로, 경제적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일터로, 세대 갈등과 깨어진 관계의 상처로 시한폭탄처럼 불타오르는 가정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타자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세상의 불의한 가치관에 저항하며,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번 한 주간, 입술의 고백을 넘어 여러분이 딛고 서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성육신적 삶을 그대로 살아냄으로써 그 질문에 온몸으로 답하시는 신실한 제자들이 되는 바다교회 가족의 삶을 축복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