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행복과 기쁨의 길
································· 無爲其所不爲 無欲其所不欲(무위기소불위 무욕기소불욕)
『맹자』‘진심장(盡心章)’에 “無爲其所不爲 無欲其所不欲(무위기소불위 무욕기소불욕)”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로 해석된다. 이는 우리가 죄악을 극복하고 참 행복과 기쁨의 길로 나아가는 방도를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 박석무 교수(단국대)가 풀이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는 항상 상반된 두 의지가 동시에 나타난다. 여기가 인간과 귀신 세계를 가르는 관건이며 선악이 갈리는 곳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싸우는 곳이며 의(義)와 욕(欲) 중에 누가 이기느냐가 판가름 나는 지점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온갖 힘을 기울여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면 도(道)에 가까이 가게 된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고 욕심을 내서는 안 될 일을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은 도심(道心)이 발한 것이니 곧 천리(天理)이다. 내서는 안 되는 욕심을 내는 것은 인심(人心)이 발한 것이니 사욕(私慾)인 것이다. 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음은 인심을 극복하고 제압하여 도심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그래서 맹자는 ‘이것일 뿐이다.(如此而已)’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은 맹자의 이 구절이 극기(克己)를 강조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한편, 로마서 7장 14~24절에는 이 질문과 관련한 사도 바울(Saint Paul)의 고백이 있다.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罪)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질문에 대한 견해가 위의 다산 선생의 견해와 다른 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이 죽음의 몸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성(罪性)으로 인한 생래적 한계성을 말하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이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극기(克己)를 통해서 일부의 구원은 가능하나 완전한 구원에는 이를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백강 이경여 선생은 이 질문과 관련하여 효종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한 바가 있어 주목된다.
“이른바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德)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體)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利慾)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조선왕조실록, 1653년 효종4년 7월 2일 백강 선생 상차문(上箚文)에서>.
이러한 백강 이경여 선생의 견해는 인간의 죄악(罪惡)을 극복하고 참 행복과 기쁨의 길로 나아가는 방도는 오로지 학문을 강명하고 마음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함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도 이와 같아 성경을 배우고 묵상하고 마음을 개발하는 것은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이며, 특히 잠언 4장 23절에 이르기를 마음은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들이 죄악을 극복하고 참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훈련하고 수양(修養)하며 나아가야 하는지가 구체적으로 들어나는데, 성경의 말씀과 백강 이경여 선생의 견해는 주요한 공통부분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적어도 우리는 성경과 불멸의 경전(經典)들을 배우고 묵상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개발하고 수양(修養)해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관련된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2025. 7.24.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