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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자기 - 조선백자 논문(김영원)

작성자무궁화|작성시간09.10.10|조회수540 목록 댓글 0
 

17. 조선 백자



                                                               김영원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 머리말 

  2. 백자를 제작하던 가마(窯) 

  3. 백자의 종류와 특징 

  4. 광주 백자요지와 출토품의 특징 

  5. 광주 일대 요지 조사의 최근 성과 

  6. 분원관요와 청화백자 

  7. 백자의 조형 

  8. 백자를 굽던 사기장인(沙器匠人) 

  9. 백자 수요계층 

 



1. 머리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도자기는 주지하다시피 분청사기와 백자이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14세기경부터 그 특징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제작되어, 서민들의 소탈한 정서나 관청용의 정형화된 형식을 담아냈던 도자기다. 이러한 분청사기에 비해 백자는 실용성을 강조하거나 단정한 양식, 혹은 풍만한 양감을 지닌 조형 등으로 특징지워진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백자는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으나 여말 선초 중국 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에서 만든 단단한 백자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해서 제작되고 애용되던 자기이다. 조선 백자에는 순백(純白)에 대한 조선인의 미감(美感)을 철저히 반영되어 있다. 최상품 백자는 하얀 태토에 파르스름한 투명유가 입혀지고, 세종연간(1418-1450)부터는 왕실에서 어기(御器)로 전용했을 뿐 아니라 중국 황실에서 요구할 정도로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렀다. 세조연간(1455-1468)에 이르면 서민이라도 부유한 계층은 화려한 백자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반 서민들도 백자를 널리 사용하였다.

백자는 1467년 4월 이후 분원 관요(分院 官窯)시대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분청사기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1592년에 발발한 임난(壬亂)으로 한국도자사에는 100년 이상의 백자 침체기가 있게 된다. 백자의 제작이 활발히 재개된 때는 숙종연간에 들어서면서이고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왕실자기와 중앙관청용 자기에 대해서는, 1997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이 공동조사한 경기도 광주일대 도요지의 보고서가 1998년에서 2000년에 걸쳐 완간되어 많은 새 정보를 얻게 되었다.

조선시대 백자에 대해서는 ꡔ조선왕조실록ꡕ를 비롯하여 ꡔ승정원일기ꡕ  ꡔ동국여지승람ꡕ 그리고 기타 문집 등을 통해 비교적 자세하게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2. 백자를 제작하던 가마(窯)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제작된 백자는 세조 말에서 예종연간에 걸치는 시기(1467, 68년경)에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司饔院)이라는 관청의 분원(分院)이 설치되면서 상품백자는 분원을 중심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1) ꡔ세종실록ꡕ「지리지」의 자기소와 도기소

그러나 그 이전에는 ꡔ세종실록ꡕ 「지리지」에 표시되어 있는 자기소(磁器所)․도기소(陶器所)에서 번조(燔造)하였다. 이 도자기소는 전국적으로 도자기 굽던 곳을 표시한 것으로 자기소 139개소, 도기소 185개소에 달한다. 또한 각 소(所)를 다시 상, 중, 하품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어느 지방에서 어떤 종류의 도자기를 구워냈는지 곧 알 수 있도록 기록해 놓았다.

ꡔ세종실록ꡕ 「지리지」의 도자기소 수가 증명하듯이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으로 도자기를 구웠으며 따라서 도자기 수요가 증가하였던 것이다. 특히 도자기소가 밀집되어 있던 곳이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였으며 이 세 도에서 집중적으로 백자와 분청사기를 제작했다. 그리고 자기소에서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를 구워냈고, 도기소에서는 드물게 분청사기와 기타 옹기나 와기(瓦器) 등을 구웠음이 가마 발굴과 현존 유물들을 통해서 확인된다. 특히 상품 자기소에선 고급 백자를 정교하게 구워냈다.


2) 경기도 광주 분원 관요와 지방요

1467, 1468년경 한양에 가깝고 당시에 최상품의 백자를 번조했던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설치되었다. 분원은 사옹원이라는 중앙관청의 하급부서로서 왕실 진상용의 백자제작을 전담하던 조선 유일의 관요(官窯)였다. 사옹원은 궁중 내에서 왕에게 소용되는 모든 진상품 및 식사를 담당하던 관청으로서 식사에 소용되는 그릇들을 감독, 제작하는 일도 맡아 하였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설치되면서부터 광주 관요는 중앙가마[主窯]로서 운영되었고 기타 가마는 지방요로 되었다. 즉 분원은 왕실소용 자기(進上磁器)를 특별히 제작하기 위한 왕실용 가마[御窯:官窯]였다. 이에 반해 분원 설치 이후 지방요는 생산량의 대부분을 그 지방의 수요처에 공급하는 지방요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분원자기가 모두 왕실전용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광주 우산리 9호가마의 출토양상에 의하면 최상품의 왕실용 갑번(匣燔)백자와 조질 백자가 함께 번조되었다. 즉 광주 분원에서는 왕실용 뿐 아니라 중앙관청용 혹은 사용으로도 백자를 제작․공급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관요 주변에서 관요의 백자를 모방하던 주변요에서는 극소량의 상품백자와 청화백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중하품 백자를 제작하였고 그 수요처는 고급관리와 부호를 비롯한 서민들이었다.

경기도 광주가 최상품의 백자를 구워낼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좋은 태토인 광주토(廣州土)와 풍부한 땔감을 갖추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수도인 한양과 지리적으로도 가깝기 때문에 완성된 백자를 한강을 이용하여 왕실로 수월하게 운반했으므로 도자기 산지로소는 최적의 입지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광주 백자는 조선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실공히 백자의 중심지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광주 관요에 대해 지방요에서는 지방관청의 통제를 받는 지방관청용 혹은 지방민용 자기를 주로 제작하였다. 그러나 점차 지방요에도 관요자기의 영향이 파급되어 비교적 정선된 중상품의 백자가 소량 제작되기 시작하였며, 생산품의 대부분은 중하품의 백자와 쇠퇴해가는 조잡한 분청이었다. 다시 말하면, 주 생산품이 분청사기였던 지방의 여러 가마에서는 백자 위주로 생산 체계를 바꾸었다.

분청의 퇴락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편년자료는 광주 무등산 충효동요출토 「未四」명 (乙未年 四月; 1475), 「丁閏二」명(丁酉年 閏 2월; 1477) 분청편들과 「丁閏二」명 백자편, 「成化 丁酉」명(1477) 분청묘지편 등이다. 이 분청편들의 명문은 분명한 연대를 제시해 주는데, 그 양식은 매우 조잡하다. 「정윤이」명이 굽 안바닥에 각각 새겨진 분청과 백자를 비교하면, 분청은 매우 퇴락한 양식인데 반해 백자는 단정한 모습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같은 명문의 이 두 점은 1470년대 쇠퇴한 분청사기와 세련된 백자를 극명하게 대조해 준다. 또 「光公」(광주지방의 公物), 「光上」(광주지방의 上品), 「光別」(광주지방에서 특별히 구운 제품) 등의 명문은 중앙 관요가 운영되는 시기에 지방요에서도 퇴락한 분청을 관청용 공물로서 별번(別燔)했기 때문에 특별히 새겨졌을 것이다. 분청은 16세기 후반기부터 완전히 소멸하였다.

지방요의 하나였던 계룡산가마에서 예빈시, 내자시 등의 관사명 분청편들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분원이 설치된 후에도 지방요에서는 지방관청의 감독하에 外工匠이 제작한 생산량의 일부를 중앙관청에 상납했던 것 같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가마는 관요였다고 판단되는 것으로 경기도 광주 우산리 9호, 번천리 9호 등이 있고, 주변요로서 번천리 5호, 지방요로서 경기도 산본지구의 가마, 전남 무등산 충효동가마, 공주 계룡산 학봉리가마, 전남 승주군 송광면 후곡리가마 등이 있다.


3. 백자의 종류와 특징

백자의 색과 질은 시대와 지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 눈같이 흰 설백색과 회백색, 청백색, 유백색 등을 띠며 정교한 것에서 부터 거친 것에 이르기까지 양하다.

백자의 장식의장은 다양하여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나타낸 신선한 양식의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주목된다. 조선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청화백자는 여러 종류의 백자와 마찬가지로 중국 백자로 조선 전기간을 통해서 제작, 애용되었던 도자기다.

초기의 청화백자는 문양은 중국 도자를 모방한 문양과 구도를 보이지만 15세기 중엽 이후 중국식에서 탈피하여 곧 한국적인 특징을 갖추게 된다. 그러한 예로서 중국 자기의 영향을 받은 예들을 보면, 그릇표면에 당초문이 빈틈없이 꽉 들어 차 빈틈 없는 모습이지만, 한국화된 예들은 대체로 사실적인 회화수법에 의하였다. 따라서 매화가지 위에 두 마리의 새가 앉아 있고 그 나무 아래 들국화가 피어있는 적당한 여백을 가진 한 폭의 그림같은 무늬를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성종연간 대체로 15세기 4/4분기부터는 중국 명(明)나라의 화려한 청화백자가 무분별하게 밀수입되었고 또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회전반에 걸쳐 애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백자생산은 발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분원에서 왕실 진상용으로 제작된 백자도 왕실 외의 수요처로 유출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사회전반에 만연하였으며 이러한 풍조는 성종 이후 왕권과 국력이 나약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이 밖에 음양각문, 투각문, 상감문, 극소수의 인화문, 철회문, 진사문 등 그동안 우리에게 친숙해온 장식문양들이 백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들 문양에 따라 음양각 및 투각백자를 순백자(純白磁)라 하고 상감백자(象嵌白磁), 철회백자(鐵繪白磁), 진사백자(辰砂白磁) 등으로 부른다

상감백자는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기법을 그대로 계승한 백자이다. 고려시대의 상감백자에는 상감문의 원료로 철분이 들어 있는 붉은 색의 흙[자토] 뿐 아니라 회색의 청자 태토도 사용되었으나, 조선 백자에는 항상 검은 색이 나는 자토 만이 사용되었다. 경기도 광주 우산리, 번천리 등지의 가마에서 조잡한 상감백자 파편이 출토되었다. 상감백자는 15세기에만 번조되었으며 16세기부터는 사라졌다. 상감백자 가운데에는 같은 시대에 유행하던 분청사기의 장식적 요소를 보이는 예도 있다.

우리가 흔히 ‘석간주(石間朱)’라고 부르는 도자기는 철사안료(이를 석간주라고 함)로 무늬를 그린 철회백자나 혹은 그릇 전면 혹은 일부를 칠한 ‘철채자기’를 말한다. 또는 철분을 함유한 유약을 입혀 흑갈색이나 적갈색을 띠는 자기를 일컫기도 하는데 이를 흔히 ‘흑유(黑釉)’ 또는 ‘철유(鐵釉)’라고도 한다. 철사안료로 그릇을 장식하기는 임진왜란을 이후 17세기부터 빈번해졌다. 그 이유는 전쟁으로 정국이 불안하고 전국토의 가마가 파괴된 상태에서 청화백자의 안료인 코발트는 구하기 힘들었으므로 청화백자는 희귀해진 반면 철사안료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원료였기 때문에 철회백자의 제작이 활발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도 광주 관요를 비롯하여 지방의 여러 가마에서 두루 출토되고 있다. 석간주로 통칭되는 검붉은 색의 도자기는 제작이 용이하므로 생활자기로서 양산되어 임진난 이후부터 조선 말까지 특히 일반 서민들을 중심으로 애용되었다.

우리나라 도자기 가운데에는 붉은 색으로 장식된 예가 매우 드물다. 고려 청자 로서도 진사청자는 수를 꼽을 정도로 희귀한 편이며 조선 전기 백자 중에서도 진사백자는 그 예가 발견되지 않는다. 17세기 말부터는 조금씩 제작되었으며 18세기 경부터 진사백자로서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제품을 번조해내었다. 철회백자에서 볼 수 있었던 추상화된 문양을 진사백자에서도 접할 수 있다. 진사백자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중앙 관요나 그 주변의 주변요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지방요에서만 발견된다.


4. 광주 백자요지와 출토품의 특징


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 좌우에 분포되어 있는 백자가마 가운데 문헌에 등장하는 지명은 五陽洞(현재의 五香里), 伐乙川里(현재의 樊川里로 추정됨), 塔立洞(현재의 池月里) 등이다.

번천리나 우산리, 도마리 등지의 15-16세기 전기 백자요지에서는 경질백자가 주로 출토되며 일부 연질백자편이 섞여 나온다. 출토되는 백자의 종류는 순백자, 상감백자와 소수의 청화백자와 청자 등이다. 대접, 완, 전접시, 병, 항아리 등의 기형이 보이며 명문으로는 대접과 접시의 굽안바닥에 유약을 긁어 나타낸 「天」「地」「玄」「黃」의 문자가 각각 나타난다. 관음리나 정지리 같은 백자요지에서는 철회백자편도 수습되었고 명문의 내용도 달라져서 「左」 혹은 「右」의 문자가 굽안바닥에 선각되었다.

15-16세기 광주가마출토 청화백자편들과 전해오는 유물들을 보면,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크게 한국풍과 중국풍의 문양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송죽매 등과 간결한 절지문(折枝文) 및 달과 별 등이 회화적인 수법으로 표현되었고 후자는 세밀한 용문이나 혹은 다소 조잡한 당초문이 기면 가득히 시문되었다. 또 전자는 대체로 유태가 정치한 데 반해 후자는 다소 조잡하다. 양자의 이러한 특징과 양식의 상태을 근거로 하면, 15-16세기의 관요나 그 주변의 주변요에서 제작된 백자는 중국풍의 문양이 그려진 경우 정교하게 제작해야 하는 의기이거나 아니면 중국 청화백자를 모방한 다소 조잡한 기명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한국화된 문양이 시문된 백자는 대체로 상품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자기 양식의 수용 및 모방’ 그리고 ‘새로운 조선 자기 양식의 창출’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17세기 가마인 선동리가마에서는 전접시, 병, 편병, 항아리, 제기 등의 백자편이 출토되었는데 회백색이나 담청백색을 띠고 있다. 백자의 종류로는 순백자를 비롯하여 철회백자 그리고 청화백자가 발견되었다. 청화백자에는 그릇의 내면 중앙에 「祭」라는 명문이 쓰인 파편이 소량 출토되었으며 철회백자의 문양으로는 용, 대나무, 난초, 포도, 매화 등이 시문되었다. 이 곳에서는 「申巳」 「壬午」 「癸未」 등 1640년에서 1649년까지 10년분에 해당되는 간지가 새겨진 백자 파편들이 수습되었으므로 백자양식과 함께 이 가마의 운영시기를 증명해 준다. 따라서 선동리가마에서 출토된 여러 백자편들의 양식은 조선 중기 백자의 특징을 대변해 준다.

선동리가마 이후 금사리가마는 중기백자의 전형이 되고 있다. 눈같이 흰 설백색의 백자와 목이 길고 여러 면으로 이루어 진 각진 병 그리고 항아리 , 굽 높은 제기류 등은 금사리백자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그리하여 중기백자를 금사리백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금사리 이후 광주에서는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라는 곳으로 분원을 이설하여 분원리에서 광주 분원 백자의 마지막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는 금사리백자의 특징을 갖춘 백자편 뿐 아니라 보다 한단계 질이 떨어지는 말기적 특징을 보이는 조잡한 백자들이 출토되었다. 「祭」「壽」「福」 등의 명문이 굽 높은 제기의 내면 중앙에 나타나며, 도안화된 문자문, 특이한 구도의 산수어문, 십장생문 등이 시문되었다.

분원리요에서 제작한 왕실진상용 상품 백자의 경우 그릇의 외면 굽 안쪽이나 굽 주위에 제작시기, 수요처, 숫자 등을 예리한 도구로 쪼거나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한글로 표시한 백자가 제작된다. 명문의 내용은 ‘무신슈강저고간이유일듁오’ ‘무신경수궁二’ ‘分院甲子四月日’ 등이다. 이런 명문이 나타나는 것은 상인들이 분원관요에 개입하여 상품으로 유통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5. 광주 일대 요지 조사의 최근 성과

관요와 주변요 모두를 포함한 광주 일대의 요지 조사가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공동으로 실시되어 이미 보고서 3권이 발간되었다. 이 조사에는 1985년 사적 314호로 지정된 요지 뿐 아니라 그 외의 요지도 포함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관요를 포함하여 주변요까지 새로이 100여기 이상의 요지가 확인되어 지금까지 보고된 요지 수와 합치면 총 289개소에 달하며 광주 관요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조선 白胎靑磁의 제작시기가 송정리요(1649-1659) 시기까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운영시기가 한층 구체화된 요지도 몇 개소에 달한다.

상림리 요지의 경우 출토된 간지명 자기편을 근거로 하여 운영시기를 1631년에서 1640년까지라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최근 ‘97년의 조사 때 ‘己□’명 백자편이 발견되어 상림리요의 개시연대를 1629년으로 올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명문이 ‘己巳’인지 ‘己卯’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전자는 1629년, 후자는 1639년으로 ‘己巳’명(1629)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광주읍 탄벌리요지가 1606-1611년에서 1606-1612년으로 1년 연장되었고, 실촌면 신대리요지가 1665-1677년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초월면 지월리요지는 1677-1683년 이후로, 또 오향리요지는 종래 1717-1720년이었던 것을 1717-1721년과 15세기의 두 시기로 실연대에 근접하였다.

도척면 궁평리요지 조사에서도 새로운 상황이 드러났는데, 1680-1690년대의 가마와 18-20세기 초까지의 가마가 중첩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 곳에서 300년 이상이라는 매우 오랜 기간동안 궁평리 가마가 운영되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선 앞으로 정밀한 조사를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관요출토 명문자료로 ‘97년 조사에서 새롭게 발견된 한 예가 ‘玉壺春’명철회백자로 도합 2점이 도마리 1호와 상림리 11호에서 각각 수습되었다. 상림리출토 ‘玉壺春’명철회백자병편에는 명문과 함께 엽전꾸러미인지 칠보문 중의 하나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철회문이 그려져 있다. 이 외에도 굽안바닥에 노련한 서체로 쓰여진 음각명문이 송정리요지 등지에서 여러 점 발견되었다. 이런 명문은 그 서체로 보아 일반 사기장인이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번조법의 변천에 대한 조사결과 上品의 경우는 처음부터 가는 모래받침이 사용되었다. 하품의 경우는 대량생산을 위하여 포개굽게 되므로 고려말로부터 비롯하여 조선전기에 걸쳐 태토비짐 받침이 사용되었다. 또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는 태토비짐 받침이 점차 사리지는 과도기 현상으로 일부 모래비짐 받침이 혼용되다가 점차 모래받침이 정착하는 과정도 생생하게 드러났다.

이처럼 유태의 질이 매우 좋은 세련된 관요백자는 대체로 모래받침에 갑발과 받침 등의 요도구를 사용하였고, 그 주변의 요지에서 수습되는 태토비짐 받침의 조질 백자는 갑발 사용이 없으며 간혹 분청사기를 동반한다. 분청사기를 동반하는 요지는 분원 관요가 아니라 관요 설치 이전의 가마든가 아니면 관요와 동시대에 그 주변에서 요업을 하던 가마일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가마 가운데 갑번중심으로 최상품 백자를 생산한 관요로는 우산리 1, 8, 9, 15호, 도마리 1호, 관음리 11, 35호, 번천리 3, 6, 9호, 오전리 2호 무갑리 2, 9, 10, 11, 13, 14, 17, 19, 21, 23호, 학동리 14, 열미리 5, 귀여리 11, 금사리 2, 3, 7 등이다. 분원리 1호는 거칠지만 당시로서는 고급자기를 생산한 곳이다. 이들 주변요에서도 조질백자나 분청사기와 함께 갑번백자가 발견되는 요지도 있다. 조질백자를 주로 생산하던 가마는 번천리 5호, 선동리 3호 등을 꼽을 수 있다.


6. 분원관요와 청화백자


1) 문헌에 나타난 청화백자관련 내용

분원관요에서의 청화백자 번조는 조선도자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 이유는 조선 왕실이 세종 때부터 순백자를 전용하기도 했지만, 세조 때부터는 청화백자를 애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왕실의 도자기 선호에 관한 내용이 문헌에 전해 온다.

사실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서 청화백자는 조선 왕실 뿐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도 선호하였던 당시로서는 매우 새롭고도 특이한 도자기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조선 왕실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때는 고려 말이지만, 조선 초 중국의 청화백자와 청자가 조공품으로서 조선 왕실에 전해 진 것은 세종 즉위년(1418) 琉球와 세종 5년(1423) 일본에 의해서이다. 유구는 당시 중국 명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이 조공품으로 조선에 가지고 들어온 것은 중국 자기였다. 이 때부터 세종연간(1418~1450) 조선 왕실에 명 사신을 통해 전래된 중국 청화백자는 상당한 양에 달했다.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청화백자 꾸준히 애호하여, 세조 원년(1455) 6월에는 중궁전(中宮殿)에서도 청화백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조 9(1463), 10(1464)년에 강진․밀양․의성․순천․울산 등지에서 청료(靑料)를 구해 바치거나 청화백자를 번조하여 진상했던 일련의 사실들은 당시 왕실에서부터 사회전반에 걸쳐 청화백자를 본격적으로 제작하려 했던 노력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밖에도 세조연간(1455~1468)에 ‘雜用彩磁’했으며 청화 안료인 회회청의 입수가 어려웠다는 당시의 정황은 성현(成俔)의 ꡔ용재총화(慵齋叢話)ꡕ를 통해 파악된다. 이같은 왕실에서의 청화백자 수요는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분원 관요를 통해 소량이나마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일정하게 충당되었다.

당시에 청화백자가 왕실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사용되었다는 사실(史實)은 ꡔ경국대전ꡕ 형전(ꡔ經國大典ꡕ 刑典)에 서인(庶人) 남녀를 불문하고 청화주기(靑畵酒器)의 사용을 금했던 조항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청화백자는 아마도 15세기 4/4분기경부터 16세기에 이르러, 다시 말하면 분원이 설치된 후 그 수요처가 고급관원(高級官員)을 비롯하여 서인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 같다.

ꡔ성종실록ꡕ 3년(1472), 6년(1475), 8년(1477)의 기록에만도 중국제 청화백자를 사용했던 훈척(勳戚) 및 사대부, 거상(巨商), 부호(富豪)들에 관한 사치스러운 생활이 여러 차례 언급된 사실(史實)을 근거로 할 때, 대부분이 중국제였음이 확인되며, 이러한 시대풍조는 분원 관요의 발전을 저해한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중엽 중종대로 들어서면 청화 안료의 부족으로 중국에서도 청화백자의 제작이 매우 어려웠던지라 그 여파로 조선에서의 청화백자 제작 또한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의 제작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청료의 부족 뿐 아니라 관장(官匠)의 이탈이었다. 성종연간(1469~1494) 이후 전반적으로 관장의 이탈이 두드러졌다. 그럼에 따라 사옹원의 사기장인 즉 관장의 자손은 다른 일에 종사하지 못하고 무조건 그 직업을 세습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하여 광주 관요의 관장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조선시대 청화백자와 관련된 중요한 문헌기록은 제작 절차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과 문양장식에 관한 것이다. ꡔ용재총화ꡕ에는 성종 초 사옹원 관리가 서리를 이끌고 가서 어기제작을 감독했다고 쓰여 있으며,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 광주목 토산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만 화원을 대동한다 하였다. 이것은 성종연간에 사옹원 관리가 감독하고 화원이 어기에 시문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을 치루고 전국토가 피폐해져서 청화백자의 생산은 거의 중단되어 광해군 10(1617)년에는 왕실 연례에 사용할 청화백자 항아리(樽)가 없어 부득이 가화(假畵)로 대신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어려웠던 시기를 지나면 숙종연간 27(1701)년 청화자기를 손에 넣기가 수월해져서 산촌의 민가에까지 청화백자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자기의 밀수입으로 재화의 낭비가 극심하니 사대부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일체 청화자기의 사용을 금하라는 내용이 「승정원일기」 숙종 28년 8월에 보인다.

요컨대 임난 후 17세기에는 청화백자가 거의 제작되지 않았으나 후반기부터 소량 생산되었고, 18세기에 이르면 중국의 청화백자가 대량 수입되어 민가에까지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풍조가 심화되어 검약한 생활을 했던 영조연간의 왕실과는 대조적으로 사가(私家)에서는 화려한 생활을 했다. 청화백자를 비롯한 진사백자, 청화진사채, 진사채, 청화채 등 화려해진 조선 도자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또한 영조 임금은 자기의 문양에 석간주[철회백자]를 사용했던 17세기의 양상과 비교하여 회청(回靑: 청화안료)으로 그린 당시의 사치스러운 청화백자 양식을 개탄하였다.

2) 유물로 본 관요 청화백자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분원 관요산으로 추정되는 예들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몇 점 안되는 청화백자가 관요 양식을 보인다. 청화백자는 분원 관요에서도 갑발을 사용해 번조한 최상품의 갑기였다. 관요 설치 이전 세조연간에도 청화백자가 왕과 왕비의 생활용기와 국가의례용 의기로 극소량 제작되었음은 ꡔ용재총화ꡕ의 내용이 전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이 아닌 고급관료가 청화백자를 소유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은 고급관료 정식이 소유했던「鄭軾」명청화백자완의 존재나 세조 12년(1466) ‘백자 사용처 제재’ 조치나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금제(禁制)조의 세조 13년(1467) ‘청화백자 사용 금지’ 조치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정식의 이름이 그릇 바닥에 쓰여진 청화백자는 정식이 소유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같은 기형이 광주 번천리요지에서도 발견된 바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어 그가 세종 14년(1432)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라는 관직에 오르고 세조 13년(1467)에 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청화백자완의 연대는 1430-1467년 이전일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세조연간 분원 관요에서의 청화백자 유출을 알 수 있다. 이 정식의 청화백자는 임금의 하사품이거나 정식에게 분원관요와 관련된 종친이나 관료가 선물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관요산 백자는 ꡔ세종실록ꡕ 「오례의」(1451년 완성)나 ꡔ국조오례의ꡕ(1474년에 간행) 도설(圖說)에 소개된 산뢰(山罍)나 白磁靑花酒海[청화백자호] 등이 그 전형일 것이다. 이 가운데에는 수입 중국 자기도 포함되었을 것이나, 산뢰나 주해 등은 그와 같은 유물이 전해올 뿐 아니라 광주요지에서도 유사한 양식의 도편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조선 관요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양 오례의에 보이는 청화백자주해는 경기도 광주 우산리 9호요지(1466-16세기 전반)에서 유사한 청화백자운룡문편이 출토되었다. 우산리 9호요지에서는 「司果」명 청화백자묘지편(1466~?)과 「壬寅」명 백자음각묘지편(1482 또는 1542)이 나와 운영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어쨌든 청화백자주해나 청화백자운룡문호의 문양은 능숙하게 그려진 전문가의 솜씨이다.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 광주목 토산 자기조에 적힌 내용과 같이 매년 사옹원관리가 이끌고 간 화원이 그린 문양으로 평가된다. 이같은 청화백자와 더불어 많은 고급백자가 나온 우산리 9호는 왕실용 갑기(匣器)를 구웠던 관요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명품은 동국대박물관소장의 「弘治二年」명백자청화송죽문호(1489) 시문수법에서 화원의 필력을 감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유태와 제작수법, 기형 등에 있어서도 매우 세련된 관요 제품으로 간주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는 청화안료의 부족으로 간결하게 난초와 대나무가 앞뒷면에 그려진 국립박물관소장 백자청화난초문각병이라든가 능화형 창안에 산수문이 있는 백자청화산수문항아리 등을 통해 당시의 관요산 도자양식을 살필 수 있다.

조선 후기 분원리시대를 연 18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소장품으로 용을 웅장하게 그려넣은 청화백자항아리나 십장생문항아리 등이 대표적이다. 또 19세기에는 각종 궁중 전각의 명문이 있는 청화백자가 진상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청화백자 중에 흔히 보이는는 굽 높은 제기 내면 중앙에 「祭」 「壽」(수) 「福」(복) 등의 명문이 있는 예들은 왕실용으로만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관요 제품이라도 관료나 부호의 집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분원관요에서 匣燔한 청화백자라 해도 관료나 종친을 통해 왕실 외의 수요처로 유출된 현상은 사실 성종연간부터 시작되어 중종연간에 성행하였고 조선 중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개탄하는 정조 임금의 청화백자사용 금령이나 갑기 사용 금지 조치가 수 차례 내렸다. 실제로 갑기가 증가하였음은 광주 금사리나 분원리요지 출토 백자편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 갑기와 예번기(例燔器)의 수량이 비슷해진다.


7. 백자의 조형

백자의 기형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생활도자기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조선 전기부터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구부(口部)가 밖으로 벌어진 대접이라든가 접시가 제작되었고, 이 밖에 구부가 위로 서고 동체가 길다란 항아리며 동체가 구형(球形)인 항아리, 목이 긴 병 등도 널리 제작,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부적인 변형이 조금씩 가해졌을 뿐 기본적인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연적, 필통 등의 각종 문방구류와 제기(祭器)들이 만들어졌고, 민화의 유행과 더불어 도자기에도 민화가 그려져서 조선 후기부터는 백자는 지방민들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려 청자는 귀족들을 위한 우아하고 섬세한 취향을 반영하였고 조선 분청사기는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로 서민들의 정서를 담아 낸 거침없이 표현된 분청사기와 달리 실용성을 강조한 형태나 단정한 형태, 혹은 풍만한 대형 항아리들이 대부분이다.


8. 백자를 굽던 사기장인(沙器匠人)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초기의 장인 계층은 주로 천민이었으나 점차 기술을 가진 양인(良人)이 투입되어 장인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관청에 소속된 관장(官匠)과 개인에 예속된 사장(私匠)으로 구분된다. 조선왕조 최고의 법전인 예종 1년(1469)에 찬진된 ꡔ경국대전ꡕ(經國大典) 공전(工典)에 보면, 관장 중에 중앙관청인 사옹원에 소속된 경공장(京工匠)이 380人, 지방관청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이 99人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옹원소속 사기장인으로 경공장이 광주 분원 관요에서 왕실용의 진상자기 제작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조부터 점차 관장이 이탈하기 시작하여 연산군대에 이르면 왕실용 물품 제작에도 관장이 부족하여 사장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관장이 작업장을 이탈하게 된 이유는 당시에 이미 국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이 결핍되면서 관장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관장제의 유지가 곤란한 단계에 이르게 된 초기적인 원인을 정리해 보면 성종조의 왕권의 약화와 조정의 관요에 대한 관심부족 및 중앙관청의 관리 능력 부족 등을 들 수 있겠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분원에서 종사하는 장인의 수와 규모가 국가가 관리하기에는 너무 대규모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분원소속 관장이라 할지라도 생계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주문받아 자기를 제작하여 경제적인 댓가를 받는 사번(私燔)을 하게 되었으며 국가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이러한 일탈현상이 관행화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분원이 사옹원의 지시, 감독을 받아 백자를 제작한다기 보다는 상인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분원에 개입,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18세기 중엽 이후 분원 백자는 질이 급속히 저하되었다. 결국 1884년부터 분원은 더 이상 국가의 산하기구로서 운영되지 않고 민영화되어 상인의 영리추구 체체로 바뀌었다.


9. 백자 수요계층


분원 설치 이전 태조-태종연간 왕실과 관청에서 주로 사용한 도자기는 전국의 자기소 혹은 도기소에서 사옹의 감독을 받아 제작, 공납받은 분청사기가 주종을 이루었고, 세종-세조연간 왕과 그 측근인 왕족을 비롯하여 왕실관련 전각에서는 백자와 청화백자 그리고 최상품의 분청사기를 혼용했다. 그런데 세종연간에는 불법이었음에도 일부 고위관리들이 백자를 사용했다. 그 밖의 계층은 국초부터 분청사기를 전국적으로 사용하였다. 세조연간부터는 왕이 백자보다 청화백자에 관심을 두어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백자의 사용범위가 한층 확대되어 違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까지도 백자와 청화백자를 사용했던 것 같다.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설치된 후에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였고, 임진왜란 이후 더욱 만연하였다. 중종조 초부터는 평안도, 함경도에까지 그 사용범위가 확대되어 중종연간(1506 -1544)에는 지방의 집권계층까지도 분원백자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이처럼 백자가 계층과 지역을 초월하여 널리 사용되었던 사실은 우산리 9호와 번천리 5호가마출토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우산리 9호는 왕실자기를 굽던 가마였으나 기타 수요처를 위한 백자도 함께 생산하였던 것이다. 번천리 5호가마는 주변요에서 제작된 비교적 세련된 백자 및 청화백자가 고급관료계층 사이에서 사용되었음을 밝혀주었다.

숙종 후반기 이후 영정조시대에 이르면서 왕이 갑기의 번조를 금하고 일반 백자 사용을 권했으며, 사치풍조라 하여 청화백자의 번조 또한 금하였다. 그러나 조관에서 일반 백성들까지 관요에서 구운 백자양각청화채나 중국 청에서 수입한 화려한 다채자기를 사용했다. 중국 청화백자의 무역은 성종조로 거슬러올라가며 당시 사대부․거상부호의 사가에서 널리 애용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백자는 초기의 왕실전용시대를 지나면서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하여 특정한 제례(祭禮)나 일상생활에서 두루 향유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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