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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5 - 이집트를 정복한 위대한 정복군주 셀림 1세!

작성자은혜|작성시간25.04.21|조회수244 목록 댓글 0

 

오스만 제국5 - 9대 술탄으로 이집트를 정복한 위대한 정복 군주 셀림 1!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며 콘스타티노플

을  함락해 2천년간 이어진 로마제국을 멸망시킨후 콘스탄티노플을 새 수도로

삼아 로마 황제를 선언하고는 재상 등 튀르크멘 귀족들을 제압해 중앙집권을 강화 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은 세가지 의미가 있으니 첫째 오스만의 영토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뉜지라 수도를 아나톨리아의 부르사(Bursa), 발칸 반도에 에디르네(Edirne)

2군데 두어야 했는데, 이제 통치가 편리해지고 국력이 강해지니 세력은 더욱 멀리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 오스만이 세력을 확장할때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전까지 항상 콘스탄티노폴리스

부근을 예의주시 해야 했는데.... 서유럽의 어느 나라가 이교도 박멸을 외치며

십자군을 일으킨다면 대()오스만 전진기지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번째로는 술탄이 주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함으로써 술탄의 권위가 수직상승하여, 황제를

칭할수 있게 되었으며.... 방해꾼인 재상 할릴 파샤를 처형하고 데브시르메 징집자

출신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 를 신임 재상으로 임명해 전제군주정을 확립할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메흐메트 2세는 스스를 로마 황제 (Kayser-i Rum) 라고 선언했고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는 로마제국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부정했는데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며 영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서로마 제국은 일찌기 476년에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으니..... 서로마의 멸망으로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데천년이 지나고 동로마의 멸망으로 중세가 끝났다고 보며

우연히 이 해에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도 끝이 났으니 확실히 중세가 끝난 것입니다?

 

 

사실 오스만 베이국의 2대 군주인 오르한이 동로마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사실도 있었으니, 팔레올로고스

황가와 오스만 가문은 먼 친척이기도 했는데.....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노바()

로마에 만족하지 않았고 죽는 날까지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시()를 점령하려는 야망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채 전사했으며 모레아의 군주이자

형제인 디미트리오스는 교황령 로마로 망명하였고...... 동생 토마스는 포로가 되었으며 첫째 조카는

무라트로 개명해 메흐메트 2세가 총애하는 측근으로 베일레르베이에 임명되었으며 발칸 반도가 주어집니다.

 

둘째 조카는 메시흐로 개명했으며, 오스만 함대 제독과 갈리폴리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나중에 메흐메트 2세의 아들인 바예지트 2세 때 대재상 (Vezir-i âzam) 에 임명되기도 합니다.

 

 

동로마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학문과 문헌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는데, 그리스 고전에 대한

자료와 연구 결과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전에는 이슬람을 거쳐서, 아니면

수없이 중역된 고전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야만 했던 라틴 학자들에게 단비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모레아 전제군주국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타 제국, 14세기 크림 반도

세워진 테오도로 공국이 있었으니 메흐메트 2세의 다음 목표는 이러한 제국의 마지막 잔재를 소탕하는데,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지 못한 가톨릭의 수장 교황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종교 개혁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미스트라스에 수도를 둔 모레아 군주국은 1348년 설립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영역으로 한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

으로, 황제의 동생이 군주에 취임해 왔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때 모레아는 위기에 처한 수도를 구원

하려 했으나 몇년전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선왕인 술탄 무라트 2세의 공격으로 입은 피해를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모레아는 형 디미트리오스는 수도를 미스트라스에 동생 토마스는 수도를 글라렌차에 두고 반목하자 지긋지긋한 대립

에 지친 알바니아계와 그리스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위기에 빠진 두 통치자는 메흐메트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오스만 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은 진압했지만 1454년 모레아는 메흐메트 2세의 속국이 됩니다.

 

두 형제가 반목을 계속하자 메흐메트 2세는 디미트리오스의 요청을 빌미로 1460년 모레아를 침공하여 모레아를

멸망시키니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로마로 망명했고 디미트리오스는 투옥돼 1470년 에디르네에서 사망합니다.

 

 

이후 파디샤의 칼날은 동쪽의 트라페준타 제국한테로 향하니 트라페준타 제국은 몽골족 백양 왕조등 주변

세력 및 서방 가톨릭 국가와의 연계를 통해 오스만을 막으려 했으나 모레아가 멸망한 이듬해

1461년에 멸망하는데... 황제 다비드는 처형당했고 황실 여자들은 노예가 되거나 하렘으로 끌려갔습니다.

 

크림반도 테오도로 공국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부터 오스만에 저항했고 1465년 라이벌 제노바와 연합해

오스만에 저항하는 등 골칫거리였으니 메흐메트 2세는 14년이나 걸려 기어이 테오도로 공국을 쓰러트립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4차 십자군으로 탄생한 동로마 정권중 하나였으나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후 이탈리아계 오르시니 가문이 장악했다가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이

점령했지만 이후 이탈리아계 귀족 토코 가문이 집권했으나 1479년에 오스만에게 정복당해 사라집니다.

 

오스만 제국 후예 튀르키예에서는 자랑스러워하는 역사로 보니 2012년 튀르키예 영화 "정복자 (Fatih) 1453"

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는데, 메흐메트 2세야 멋지게 그렸다쳐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한 군주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정치 모략을 일삼는 간사한 군주로 왜곡하여 그리스에서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킬때 로마 집정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비록 적국이지만

위대했던 도시가 아비규환에 빠진 것을 보고 비탄에 잠겨 로마 또한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을 것이라

예언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1600년이 지나 실제로 동로마제국이 똑같은 비참한 상황에서 멸망한 것입니다.

 

동로마 제국 보다 천년 전에 먼저 망한 서로마 제국의 경우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두번 함락되긴 했어도 망한 건

아니었고 알라리크와 가이세리크는 불필요한 학살은 하지 않는 쪽으로 노력했기에 이 일은

스키피오의 예언과는 무관하니 서로마 제국은 카르타고나 동로마처럼 화끈하고(?) 장렬하게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속국이나 산하 이민족을 다루던 방식인 조약 혹은 동맹(foedus)의 형태가 서로마 정부에서 더 이상

제대로  이민족을 통제할수 없게 되자 하나하나씩 게르만족 장군들에게 넘어가는 형태로

해체 순서를 밟았으니 그러한 과정이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위를 폐지한 걸로 완결된 것입니다.

 

서로마 황제위가 사라진 것이며 애초에 서로마 제국 정부 자체가 그걸로 없어진 건 아니었으니, 이탈리아의

서로마 제국 정부는 게르만 왕국들 중 하나인 정권으로 바뀌었고 더이상 서로마 제국 지역에

권위를 행사할 수가 없게 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로마 제국' 이 광대한 서방 영토를 잃은 걸로 볼 뿐입니다.

 

 

2012년에 개봉한 영화 "정복자 1453" 이 이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역사왜곡이 매우 심하지만 공방전

장면은 볼만하니..... 전 국회의장 김형오가 쓴 책인 '술탄과 황제' 도 이 공방전이 배경으로 황제의

일기와 그에 답하는 술탄의 비망록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뒷쪽은 작가의 이스탄불 답사기가 적혀 있습니다.

 

2020124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메흐메트 2세를 주인공으로 제작한  'Rise of Empires:

Ottoman', 한국 명칭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꿈' 이 방영되었으니 총 6편짜리

드라마지만 중간 중간 사학자들이 다수 등장에 해설하는 형식이라 다큐멘터리 성격도 있습니다.

 

 

큰 줄거리만 역사와 일치하고 곳곳에 가공인물이 등장하거나 실제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한 부분이 많지만 어디

까지나 재미를 위한 것으로,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암군 비슷하게 만든 정복자 1453 보다는 훨씬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하며 마지막 재상인 루카스를 소인배 처럼 묘사했고 메흐메트의 양어머니 비중을 늘렸습니다.

 

이 사건을 그린 당신은 번개처럼 오시리라 (Θά 'ρθεις σαν αστραπή) 라는 그리스 노래가 있으며 이스탄불에

있는 파노라마 1453 박물관에는 여러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엄청 크니 벽 여러 면을 장식할 정도입니다.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를 장악해 서양 상인들 대상으로 몇배 관세를 매기기 시작하면서 동방에서 들여오던 물자의

시세가 폭등해 새로운 항로 개척의 욕구가 가중되었고, 결국엔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신대륙 진출의 동기가 됩니다.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해왔던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 전통적인 지중해 상권이 몰락하고, 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등 새 대서양 상권이 눈부시게 발전함과 동시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 로마 - 그리스계 학자와 예술가, 기술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 르네상스가 가속화 됩니다.

 

 

메흐메트 2세는 1458년  라구사 공화국을 속국으로 하고 1459년 세르비아 공국을 손에 넣고 1460

모레아, 1461년 잔다르 베이국과 트라페준타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1462년 왈라키아 공국을 속국

으로 삼고 1462년 보스니아, 1468년 알바니아를 점령하고 1478년 크림 칸국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1300년부터 1453년 즈음까지 오스만 지도층은 이슬람의 세력을 확장, 유지하려는 가지(Gazi) 들과, 성직자,

학자 등 일미예 (İlmiye) 들로 대체로 튀르크계였는데, 몽골이 맹위를 떨치자 서쪽으로

피신하던 중에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오스만에게 주목해 합류하니 귀족계급 입니다.

 

 

이후 오스만의 개국공신으로 군사와 행정 양쪽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만, 그로 인해 술탄은 전제

주라기 보다 가지와 일미예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타협을 하는 등 제1인자에

불과하니, 벗어려는 술탄의 노력 결실이, 예니체리와 예니체리 징집 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입니다.

 

즉 군사적으로 '새로운 피' 를 수혈하려고 시도했으며, 효과가 있다고 판단되자 데브시르메로

관료 예비군도 징집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후 데브시르메 징집자들은 술탄 메흐메트

2세 치하에 이르러 여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니 왕권 강화 곧 중앙집권화 입니다.

 

 

징집한 소년들의 자질을 검사한 뒤, 군인 체질이다 싶으면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 이라는 과정을 이수

시켜 예니체리로 만들고, 영특함이 아깝다고 생각될 경우 이츠 오을란 (İç oğlan) 과정을 가르쳐

관료로 만들었으며..... 예니체리로 만든 뒤에도 건축등 분야에서 재능을 보일 경우 활약할수 있게 해줍니다.

 

 

1481년에 제8대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이슬람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선호했으니 부황 메흐메드

2세의 친유럽 성향 정책을 거부하고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 설립이나

정부에서 차압한 종교재산의 원상회복, 모스크 건립, 활발한 정복활동 등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정의로운 바예지드(Bayezid Adlî)’ 라 불릴만큼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무슬림이었던 그는 자선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했는데, 하지만 페르시아의 신흥

왕조였던 사파비 왕조나 국경분쟁을 벌이던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지는 못했습니다.

 

 

재위 말기에는 아들 셀림과 아메드의 제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는데, 결국 바예지드의 지지를 얻은 셀림 1세는

1512년에 제위를 넘겨받고는 바예지드 2세를 유폐시키니..... 바예지드는 바로 다음달에 사망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화기 (火機) 를 도입한 것은 14세기 말이었으나, 대체로 공성전에서만 사용되었는데

바예지드 2세의 시기에 야전에서도 화기 (火機) 를 사용하게끔 하는 군제 개혁이 이루어 졌습니다.

 

 

바예지드 2세의 치세는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대단히 발전한 시기이니 에디르네와 부르사는

이 시기에 지어진 모스크와 대상들의 숙소들을 비롯한 거대한 건축물들로 보건데,

계속해 급속도로 발전했으니 부황과 같은 위대한 정복자는 아니고 정복지를 단단히 굳힌 군주입니다.

 

이 시기는 후일 셀림 1세와 술레이만 1세가 위대한 정복을 할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니.... 고구려 소수림왕

떠올리게 하는데, 바예지드는 오스만 육군과 해군을 개혁했으며 화기 사용은

그후 셀림 1세가 이집트의 맘룩조나 이란의 이스마일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취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바예지드 2세 치세에 1484년 몰다비아 공국을 속국으로 하고 1501년 두라초와 1503

베네치아의 모레아 거점인 모돈과 코론 그리고 1504년 몰다비아를 합병했습니다.

 

셀림 1세는 1470년 아마시아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형 아흐메트와 왕위 쟁탈전을 벌였는데, 바예지트

2세는 아흐메트를 차기 술탄으로 정하고는 셀림에게는 트라페준타 (트라브존) 를 영지로 하사했습니다.

 

 

셀림은 1511년 흑해 북쪽에 있는 크림 칸국과 동맹을 성사시켰고 그 다음 바예지트 2세에게 유럽령 직할지

를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왕위법상 먼저 코스탄티니예를 개선한 자식이 차기 술탄으로 인정

받았기 때문이니, 기존의 멀리 떨어진 트라페준타에서는 부왕의 사망시 아흐메트 보다

개선이 늦을 수밖에 없으니..... 유럽, 즉 도나우강 근처에 직할지를 받아야 아흐메트와 경쟁할 수 있었습니다.

 

 

셀림이 아버지 바예지트 2세에게 직할지를 얻어낼 무렵 소아시아에서 시아파 반란이 일어났으니... 아흐메트는

소아시아에서 권력 기반을 쌓은지라 바에지트 2세는 재상 알리 파샤를 붙여 시아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오스만 제국은 군공이 중요했기에 반란을 진압하는 전공은 차기 술탄위에 영향을 미칩니다.

 

15116월 진압군을 이끌던 알리 파샤가 전사했지만 반란군 우두머리도 전사하며 반란은 끝났고

바예지트  2세의 예상대로 아흐메트의 권력 기반이 강화됐으니..... 셀림은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버지 바예지트 2세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예니체리와 바예지트 2세를 공격합니다.

 

 

15118월 바예지트 2세의 기병대에 참패한 셀림 1세는 동맹인 크림 칸국으로 도주했으며, 아흐메트는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했으나 귀족들은 예니체리를 얻지 못한 아흐메트를 차기 술탄으로 확정하는 것을

유보하니 실망한 아흐메트는 무력한 아버지와 결별하고는 소아시아의 영지들을 무력으로  점령

하자 바예지트 2세의 권신들은 아흐메트의 봉신이 되어버렸고 바예지트 2세는 군대를 동원할수 없게 됩니다.

 

 

그 점을 노린 셀림은 콘스탄티니예를 재공격해 결국 15124, 셀림 1세는 코스탄티니예를 점령하고

아버지의 술탄 위를 찬탈하고 1513년에는 소아시아를 장악한 아흐메트와의 내전 끝에 승리해

형 아흐메트를 생포한후 처형했으며.....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고 바예지트 2세는 양위한후 1달이 지난 다음 사망했는데, 셀림 1세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1514년에 셀림 1세는 옛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와의 전투를 위해 오스만 제국군을

이끌고 직접 출정하여 찰디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후 사파비 왕조의

수도 타브리즈까지 함락시켰고 내친 김에 이스마일을 잡아 죽이고 사파비를 멸망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급 문제로 진격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스마일이 다시 군사를 모으면 꼼짝없이 당한다는 예니체리들의

반대로 타브리즈에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전투로 셀림은 동부

아나톨리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오스만에 합병했고 아들인 쉴레이만의 치세에 확고한 오스만 영토가 됩니다.

 

 

1516년에 북아프리카 알제를 근거지로 한 해적 집단의 수장인 우르지를 신하로 삼았는데 우르지가

1518년에 스페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친동생인 하이르 앗 딘

이니..... 프레베자 해전이나 레판토 해전을 보면 알수 있듯 전성기 시대의

오스만 제국은 해적들을 해군으로 썼는데, 해적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하이르 앗 딘 입니다.

 

 

셀림 1세는 1516~ 1517년에는 몽골군을 물리쳤던 강국인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전쟁을 벌여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병합하였는데..... 이때, 맘루크 왕조의 보호를 받던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 마지막 칼리파 알 무타와킬 3세가 자신의 칼리파 칭호를 셀림 1세에게 양도합니다.

 

 

칼리파(칼리프) 가 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 시리아-이집트 정복으로 인하여 오스만 제국은 처음

으로  인구 비율 중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압도하게 되는데.... 이전에 오스만 제국이 영유하고 있었던

아나톨리아 해안 지대, 그리스, 발칸반도는 근본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유산인 그리스 정교도 지역입니다.

 

귀족가문 자제 같은 엘리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제국의 파워 엘리트에 편입됐지만

일반 주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관용 정책에 따라 개종을 하지 않앗으니, 피지배민 다수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고 칼리파의 칭호를 받으면서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 이슬람권 전반의 슈퍼

파워급 위상으로 떠오른 것인데, 셀림 1세 시기에도 오스만 제국의 종교 관용 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아토스 성산의 수도원들을 수리를 위한 비용을 대고 교회에 많은 혜택을 주기도 합니다.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2천년간 일관되게 이슬람이나 유대교등 타 종교에 대해서는 관용이란 전혀 있을

수가 없고 오직 박해를 지속하며 개종과 추방을 실시했으며 끔찍하고 잔인한 고문이 뒤따르는

잔혹한 종교재판 까지 유지했던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 정책과는 180도 다른 놀라운 "관용" 이었습니다.

 

 

 

셀림 1세는 역사적인 기독교 수도원 및 성당들을 보호해야 하며, 이를 훼손 및 파괴를 엄격히 금지하며, 이들이 천재

지변 등의 원인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리더라도 제국은 이를 복원할 책임이 있다라고 선포하였으며 실제로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정교회 성당의 명문들을 보면 셀림 1세를 칭송하는 문구가 붙은 곳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셀림 1세는 독실한 이슬람 수니파 황제지만 의외로 그리스 정교회를 포함 기독교 전반에 호의를 보였으며

반면에 수니파에 적대적인 이슬람 시아파를 싫어하다 못해 매우 증오했으니..... "이단은 이교 보다

더 나쁘다." 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댔는데, 이는 다름 아닌 시아파와 기독교를 비교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사파비로 원정을 떠나기 전에는 이슬람 법관인 카디와 율법학자인 무프티로 하여금 "시아파는 이슬람 교도

도  아니고 따라서 쳐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  는 파트와를 반포하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동을 시아파 제국으로 만들려던 페르시아 사파비왕조의 이스마일이 바예지트 2세 시절 오스만 동부에서 일어난

2차례의 시아파 반란을 사주하고, 셀림의 즉위 과정에서 정적인 조카를 지원하며 그후 오스만의 적국인

맘루크를 지원한 탓도 있겠지만..... 아들 쉴레이만이 그리 심한 발언을 한 바 없다는 걸 보면 개인적 감정이었습니다.

 

 

셀림 1세는 1520년에 구호(요한) 기사단이 점거 중인 지중해 로도스 섬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에 급사하였으니... 그의

정복 사업은 아들 쉴레이만 1세가 계승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니 동부 지중해는 완전한 오스만 제국 바다가 됩니다.

 

후궁으로 아들 쉴레이만의 모친인 하프사 술탄이 있으니, 오스만제국의 보호국 크림 칸국의 공주라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는 사실 무근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으며 다른 후궁으로는 아이셰 하툰 (Ayşe Hatun) 이 있습니다.

 

 

8년이란 짧은 재위기간에 제국을 2배나 늘린 빛나는 무훈을 쌓았으니 재위기간이 30년을 넘는 아버지 보다 훨씬

중요한 군주로 여겨지며, 할아버지인 메흐메트 2세 이상의 군사적 능력을 갖춘 정복자로 평가되니,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제119장에서 그를 조부의 명성을 능가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셀림 1세는 전쟁 말고도 내치에도 신경을 썼으며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를 격파하고,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이집트를 정벌하였으니 오스만 제국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만든 뛰어난 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태종이 정몽주에 정도전 등과 장인 및 네명 처남까지 모조리 죽인 것처럼 공신들을 적기에 숙청

하여 아들인 쉴레이만 대제가 이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니 이러한 면을 보았을때, 명나라의 홍무제와 같은 명군이라 평할수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홍무제는 1380년 좌승상 호유용(胡惟庸) 을 역모(?) 를 꾀했다고 처형하고 연루된

15천명을 죽였으며 훗날 확대해 모두 3만명을 죽였고, 한고조와 여후등....

개국공신은 다 죽여야 아들이나 손자대에 공신들을 의식하지 않고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른 오스만 술탄들과는 달리 턱수염을 깎은 대신 크고 아름다운 콧수염을 길렀는데 냉혈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계승 문제도 이유가 있겠지만....... 신하들을 함부로 다루었기 때문이니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면 충분히 포상했지만,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중벌은 물론 처형하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신하 : (농담조로폐하. 혹시 신을 처형하실 때가 되면, 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갈 수 있도록 사전에 미리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셀림 : (역시 농담조로) 실은, 짐은 오랫동안 그대를 처형하리라고 생각해 왔노라. 하지만 아직 뒤를 이을

적임자를 찾지 못해 살려두는 것이니라. 만일 적임자를 찾게 되면, 그대의 말을 기억하도록 하지.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넘긴 몰트케급 순양전함 괴벤에 오스만 제국 해군은 이 황제의 이름

을 붙였으니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까지 튀르키예 해군의 대표적인 함선이었던 야부즈 술탄 셀림으로

2016년 개통한 보스포루스 해협의 세 번째 교량인 야부즈 술탄 셀림교 역시 이 황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셀림 1세는 예니체리의 신임을 받는 왕자였는데, 바예지트 2세가 차기 술탄으로 내정한 아흐메트 왕자가 예니체리

들에게 "너희들은 셀림이 아니라 술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술탄은 어디 있는가?!" 라고 소리치자

"지금 네 앞에 서 있다네. 형제여."  라면서 형인 아흐메트 왕자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연극도 있습니다.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 오스만제국과 튀르키예 편에서는 술탄이 된후, 아흐메트를 옹립한

대신들을 모조리 참수하고는 아버지를 감금하라고 외치니 바예지트 2세가 네 이놈.

어찌 자식이 되어서 아버지를 가두라고 하느냐?! 눈물까지 흘리며 고함을 치자

원래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이제  이 제국의  주인은 나요!“

 

 

오스만 제국은 "형제살해" 라는 것이 기본적인 관행으로 메흐메트 2세는 그가 반포한 법에다가 다음 대의 술탄의

형제들은 다 세상의 질서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써놓았는데, 16대 술탄 아흐메트 1세 때에 이러한

관행이 바뀌니, '술탄이 후계자 없이 급사라도 하면 다음 황위는?' 이라는 이유로 형제

살해에서 감금으로 방식이 바뀌며 술탄의 형제를 가두어두는 방을 카페스 (Kafes) 라는데 새장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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