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2 - 쇼군 승계전쟁 오닌의 난 내란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다!
(1) 하극상의 시대 :
1) 무로마치 막부의 쇠퇴 : 1467년 교토에서 벌어진 슈고 하타케야마 집안과 막부 쇼군 후계를 둘러싼 동서 양군의
전쟁인 오닌의난 ( 応仁の乱 응인) 이후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니 마침내 아시카가 요시미사의 아들로
9대 장군이 된 요시히사는 교토 근처 비와호수의 오미국 롯카쿠씨를 정벌하러 출정하였으나 진중에서 전사합니다.
그후 10대 쇼군 (장군) 아시카가씨는 다이묘 (대명) 들 에게서 쫒겨난후 아와지섬으로 추방되고 11대 쇼군(장군)
역시 야마구치의 영주인 백제 성왕의 후손 오우치 (大內) 씨에게 축출되어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12대 쇼군 (장군) 도그를 옹립한 오우치씨가 실각하니 미요시씨에게 축출되고 그후 13, 14대 쇼군이 비참
하게 생을 마친후 15대 쇼군 요시아키는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의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옹립되나 결국에는 추방되어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전락하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무로마치 (아시카가) 막부 관령가 중에서는 호소카와씨가 유일하게 살아남아 쇼군 (장군) 을 갈아
치우는등 위세를 떨쳤으나.... 상속을 위한 양자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서
서쪽 야마구치국의 실력자 오우치 (大內) 씨의 후원을 받은 다카쿠니가 호소카와가를 상속합니다.
하지만 그도 미요시등 시코쿠 세력의 공격을 받아 패하니 스미모토의 아들 하루모토가 관령가의
후계자가 되는데, 그러니 하루모토 역시 미요시 가의 나가요시에게 추방되고
그도 배신당해 부하인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정권을 잡으니 바야흐로 하극상의 시대인 것입니다!
2) 관동공방의 몰락 : 교토 무로마치 막부에 모반하여 죽은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아들 시게우지가 다시 관동
공방 (관동장군) 으로 오니 2인자로 관령인 우에스기 노리자네와 충돌이 일어나 내분이 생기게 됩니다.
이에 무로마치 (아시카가) 막부에서는 스루가의 슈고 (守護 수호) 이마가와씨에게 명해 관동공방을 토벌
하니.... 가마쿠라는 불길에 휩싸이고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동쪽 변경인 시모우사로 도망치게 됩니다.
이때 관동 공방의 2인자로 관령인 우에스기가는 고즈케의 야마노우치씨와 무사시의 오기가야쓰
씨로 갈라지는데.... 처음에는 관동 관령을 지낸 야마노우치가가 우세했으나,
후자의 가로 (家老 중신) 오타 도칸이 에도성 (江戶城 :후일 도쿄) 을 쌓으니 세력이 역전됩니다.
이무렵 야마노우치가에서 가로의 지위를 숙부에게 빼앗긴 나가오 가게하루가 주군을 배반하고 시모우사(고가) 공방
의 시게우지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에 오기가야쓰가의 가로 오타 도칸이 출정하여 이를 진압합니다.
하지만 전공이 크면 임금도 시기하고 하늘도 미워한다고 했으니 전쟁에 승리한 오타 도칸은 잠시 기세를 떨쳤으나
주군 오기가야스씨의 시기를 받아 살해되었으며...... 교토 막부에서 내려온 이즈의 공방(광동장군)
마사토모의 아들도 스루가의 고코쿠사의 성주 이세 나가우지 씨에게 죽으니 그가 바로 풍운아 호죠 소운 입니다.
3) 조정의 경제적 몰락 : 일왕(천황) 가와 귀족 및 사원 (사찰) 은 지방에 있는 장원의 수입에 의존했는데
전란의 시대를 맞아 연공이 들어오지 않으니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으니
심지어 교토 궁궐의 담이 무너져도 보수할 자금이 없어 방치하니.... 장사치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일본 전국이 200여개 독립 다이묘들의 전쟁터로 변해 지방의 장원에서 들어오던 수입인 연공이 끊어지니...
일왕 (천황) 이 죽어도 장례 비용이 없어 곤욕을 치르게 되니 조정의 귀족들도 유력한 다이묘(대명)
에게 딸을 출가시키거나, 상인과 백성들에게 시와 놀이를 가르치고 사례금으로 끼니를 연명하는 시대가 됩니다.
(2) 전국의 군웅
1) 사이토 도산 (齊藤道三) : 그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기름장사를 하였다
라고 하는데 미노국 (나고야 북쪽지방) 에 들어가서 슈고 도키가의 중신인 나가이씨의 부하 무사가 되었으며 상속
분쟁에서 패배한 요리아키에게 접근해 모반을 충동질 하여 1527년에 가와테성을 공격해 슈고 마사요리를 추방합니다.
그런 연후에는 사이토 도산은 그 공으로 한 고을의 성주가 되는데..... 은인 나가이씨를 요리아키에게
참소하여 죽이고 1539년 마침내 슈고 (守護 수호) 요리아키를 공격하여 오와리로
추방한후 이름을 바꾸어 미노국의 슈고(수호) 가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살모사의 별명을 얻는데
후일 아들 요시타쓰가 모반하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전투에 패배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2) 호죠 소운 (北條早雲) : 누이동생이 스루가국 (나고야와 도쿄 사이의 시즈오카) 의 슈고(수호) 이마가와씨의
측실이 되면서 고코쿠지성의 성주대리가 되었는데 1491년 무단으로 동쪽 이즈 (후지산 남쪽 이즈반도)
의 호리코시 공방의 어린 후계자를 공격하여 니라야마산을 점령하고는..... 이후 오다와라성을 함락시킵니다.
호죠 소운은 그후 미우라씨 마저 멸망시켜 사가미국 (가마쿠라) 을 손에 넣음으로써 동국의 지배자가 되었으니
직할지는 최소로 하고 영지는 새로 얻은 부하 무사들에게 분배하고 농민들에게 연공을 인하하여 민심을
안정시켜 5대 호죠 우지나오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망할때 까지 100년을 동국의 강자로 군림했습니다.
3) 이마카와 씨 : 무로마치 막부 쇼군(장군) 아시카가씨 일족이니 명문 귀족으로 스루가국 (시즈오카)
의 슈교였는데 4세의 어린 나이로 스루가의 슈고가 된 우지치카는 1517년 서쪽으로 도토미국
(하마마쓰)을 공격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그 땅을 합병하니 센고쿠 다이묘 (전국대명)이 되었습니다.
논밭을 재 측량하고 가법 (家法) 을 제정하며, 후지산 북쪽 가이국 (야마나시현) 의 다케다 신겐의
누이동생을 며느리로 맞는등 외교도 강화하였는데 가이국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죽자
이번에는 손녀딸 (다케다가에서 보면 외손녀) 을 다케다가에 시집보내 동맹을 굳건히 하였습니다.
스루가국(시즈오카)의 이마카와씨는 교토로 가는 길목인 서쪽 미카와국 (나고야 동쪽 아이치현) 까지
손에 넣은 다음에 1554년 드디어 새로운 막부를 설치해서 일본 전국을 호령하기 위해
교토로 올라가는데 도중에 오와리 (나고야) 의 슈고(수호) 오다 노부나가의 강력한 저지를 받게됩니다.
이 틈을 타고 동쪽 사가미국 (오다와라) 의 호죠 우지야스가 스루가 (시즈오카) 에 침공해 들어오는지라
군사를 돌리지 않을수가 없었으나 쉽게 승부를 가릴수가 없었는데 결국은 가이의 다케다씨의
주선으로 3국이 화해하고 스루가-가이-사가미 3국 동맹을 체결하여 배후를 든든히 하니,
다케다씨는 북쪽 시나노로 호죠씨는 동쪽 무사시노로 그리고 이마카와씨는 서쪽 오와리로 진출합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씨는 큰 뜻을 품고 1560년 2만 5천의 대군으로 미카와국 인질인 훗날의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앞장세워 상경하니 오와리(나고야) 의 오다 노부나가는 5천 뿐인지라 압도적인 군세로 인해 누구의 눈에나
방어는 불가능해 보였는데 야전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기습이라? 적을 속이려면 먼저 아군부터 속이라 했던가요?
적군이 국경을 엄어 전방의 성채를 함락했다는 긴급 보고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병사를 소집하지도
않고 중신 회의조차 한번 열지도 않으면서 술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니...... 누구의 눈에나
자포자기한것 처럼 보였지만 노부나가는 비밀리에 정보원을 풀어 이미기와씨의 본진을 염탐했습니다.
“ 생각해보면 이세상은, 영원히 살 집이 못되는 것, 풀잎에 내린 흰 이슬, 물에 비치는 달보다
허무하다. 황금빛 골짜기에서 꽃을 노래하던 영화, 먼저 무상한 바람에 흩날리고
남쪽 망루의 달과 노래하던 이들은, 달 보다 먼저 가버려 무상한 구름에
가리우고 인간 오십년, 돌고 도는 인간세상에 비하면, 덧없는 꿈만 같구나,
인생은 일장춘몽 덧없어라!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라, 생을 얻은자 누군들 죽지 않으리”
그런 중에 이마카와씨가 오케하자마 골짜기에 6천 본진으로 주둔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새벽에
일어나 찬밥 3공기를 물에 말아먹고 벼락치듯 출진하니 뒤따르는 무사는 불과 6기라?
도중에 아쓰타신사 에서 승리 기원제 (실은 부하 무사들의 도착을 기다림?) 를 지낸후
2천 눈속임 군대는 오다씨의 깃발을 들려서 도로로 진군시키고는 자기는 1천 결사대로 산을 넘습니다.
이마카와씨는 간자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가 실의에 빠져 자포자기했다는 정보에다가 서전의 승리로 방심하여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와리의 오케하자마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중에 젊고 무모한 오다 노부나가
1천 결사대에게 기습을 당해 전사하니 그 아들 우지자네는 우둔하여 이후 스루가국은 쇠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4)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 1541년 후지산 북쪽 가이국 (야마나시현) 의 다케다 신겐은 아버지 노부토라를
처가인 스루가로 몰아내고 영주가 되는데 21살 때의 일이니..... 이어 신관으로 시나노국의 소영주인
스와씨를 공략하고 가미이나를 차지한 다음 신겐가법을 제정하였으며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북 시나노 (나가노현) 의 무라카미씨를 공격하여 6년 전쟁 끝에 마침내 북쪽 바닷가 나라인 에치고로
몰아내니 에치고국 (니카타) 의 우에스기 겐신과 충돌하게 되는데 일본 역사상 유명한
가와나카섬 (川中島) 의 결전이 그것인데, 겐신의 본거지인 가스가야마성 (春日山城) 에서
불과 200리도 안되는 곳으로, 1553년 부터 전투가 시작도어 십수년동안 5차례나 대 전투를 치릅니다.
1560년에는 사돈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에서 노부나가에게 죽자 다케다 신겐은 이 기회를 노리는데 처가를
위해 말리는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고 며느리는 이혼시켜 친정으로 돌려보냈으며 이에 스루가를 공격하여
1570년 슨푸를 점령하고 태평양연안까지 진출해 도토미(하마마쓰) 를 점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하게 됩니다.
5) 우에스기 겐신 : 1507년 겐신 (아명 가게토라로 양자라는 설도 있다) 의 아버지인 에치고의 중신 나가오 다메카게는
주군인 에치고의 슈고 (수호) 우에스기 후사요시를 패사시키고 사촌인 사다자네를 옹립하니 조정에서 임명한
관동 관령인 후사요시의 형 아키사다가 8천기로 공격해 오자 다메카게와 사다자네는 엣츄 (도야마) 로 달아납니다.
나가오 다메카게는 1년후 아키사다를 패사시켰으나 반 다메카게파가 슈고 사다자네를 중심으로 집결하니 이를 타도한
후에 병으로 죽는데 장자 하루카게가 아버지를를 계승했을때 겐신은 불과 7살이었는데 하루카게가 유폐된
사다자네를 다시 슈고로 영입하려하자 나가오씨의 가신들이 동생 겐신을 받들고 형을 은퇴시키니 1548년의 일입니다.
1552년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이즈의 호죠 우지야스에게 패해 에치고국 (니이가타현) 에 몸을 의탁하였고
다음해 다케다 신겐에게 쫒겨난 북시나오 (나가노현) 의 무라카미씨가 도망쳐 오니 다케다 및 호죠씨
양자와 충돌하게 되는데 1555년 격렬했던 제3차 가와 나카지마 전투에서는 승부를 못내고 다케다씨와 휴전 합니다.
이후 다케다- 이마가와- 호죠씨의 3국동맹이 깨지자 이번에는 1561년에 멀리 남하하여 1만 5천의
대군으로 사가미국의 오다와라성을 포위하는 놀라운 전술을 벌이게 되지만..... 그러나
오다와라성이 워낙 견고하여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시나노로 철수하여 다케다 신겐과 대치하게 됩니다
이때 가마쿠라의 쓰루오카 하치만 신사 앞에서 우에스기씨로 부터 허울뿐인 관동관령자리를 양도 받는데
시나노 (나가노현) 에서 격돌한 쌍방 4만여 군세는 용호상박의 싸움 끝에 우열을 가리지 못하니,
이후 다케다 신겐이 죽은후 시나노 북부 지방에 침입하고 노토반도와 가가 (이시카와) 를 차지하게 됩니다.
6) 가와나카지마 전투 : 가이국 (야마나시현) 다케다, 스루가국 (시즈오카현) 이미가와, 사가미국
(가나가와현) 호조 가문의 3국 동맹이 체결되니.... 저 세 나라는 서로 등을
대고 결속해 후방이 안전해지자 호조는 동북쪽으로, 이마가와는 서쪽으로
그리고 다케다는 동, 남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북쪽 시나노 (나가노) 를 침공합니다!
다케다 신겐은 시나노 슈고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와 북 시나노의 영주 무라카미 요시키요등을 공격했고, 1547년에는
가마쿠라쿠보를 보좌하는 직책인 간토간레이 (관령) 우에스기 가문의 지원을 받은 시가성의 성주
가사하라 기요시게를 쳐서 큰 승리를 거두고는 “고슈법도지차제 (甲州法度之次第)” 즉 신겐가법 을 제정 합니다.
1548년 신겐의 시나노 (나가노현) 침공은 본격화되어 북부까지 군대를 파견하니 1550년 9월부터 무라카미 가문과
싸우는데 불리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으나 1551년에 이르러 우위에 서게 되자.... 1553년 무라카미는
우에스기 겐신의 영지 에치고(니가타현)로 피신하니 신겐은 시나노 동부를 손에 넣었고 북부 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쫓겨난 시나노 영주들은 우에스기 겐신을 끌어들여 옛 영지 회복을 도모하니 1553년 8월 에치고국 (니가타현)
우에스기 겐신은 시나노로 출진하니 가와나카지마에서 만나는데, 신겐과 겐신은 1564년까지 총 다섯차례에
걸쳐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벌였는데.... 겐신은 신겐의 군대를 물리치면서도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이국 다케다 신겐은 북쪽으로의 진출이 우에스기 겐신에게 막히면서 침공의 창끝을 서남쪽
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으니..... 시나노 남부로 침공하여 1555년
기소 요시마사를 쳐서 항복 시킴으로써 북부 시나노를 제외한 시나노 국 전체를 손에 넣었습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후 신겐은 고즈케 (군마현) 서부, 미노 동부, 히다 로 침공의 대상을 넓혔으니 1561년에 고즈케
서부로 진격했으며 때문에 겐신과의 싸움도 시나노 북부에서 고즈케 서부로 이동했고, 이 기회를 틈타
신겐은 시나노 북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1564년에 히다로 침공했으며 1566년에는 고즈케 서부를 장악 합니다.
한편 1561년 무렵에는 가이국 다케다 신겐은 빠르기는 바람과 같고, 조용히 기다릴 때는 숲과
같으며 쳐들어갈 때는 불과 같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다는
‘풍림화산(風林火山)’ 군기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일본 최강의 기마군단을 거느리게 된 것입니다!
1561년 8월 다케다 신겐 이 카이즈죠 (海津城 : 마츠시로성) 에 들어오자 우에스기 겐신은 5천명을 젠코지 부근에
남겨두고 1만 3천은 카이즈성 서쪽 사이조산 (처녀산) 에 오르자, 다케다 신겐 은 본대 8천은
지쿠마강 (千曲川) 을 건너 가와 나카지마 에 진을 치고 별동대 1만 2천은 비밀리에 사이조산 으로 올려 보냅니다.
다케다 진영 에서 저녁 밥을 짓는 연기가 더 많이 올라오자 야습을 짐작한 우에스기 겐신은
밤에 산을 내려와 우회해 지쿠마강 을 건너 가와 나카지마의 다케다 본진을 공격 합니다!
치열한 전투중에 다케다군이 무느질 무렵 사이조산 기습에 허탕을 치고는 전력질주해
강을 건너온 저 별동대 1만 2천이 도착 하는지라.... 우에스기 3천, 다케다측
4천이 전사한 가운데, 그만 우에스기군이 후퇴 하니 호족들은 다케다군에 귀부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하라 오스미의 창이 우에스기 겐신을 빗맞추어 돌을 꿰뚫다고
하며 또 미타치 나나타치라는 말이 전해지니... 우에스기 겐신이 말을 탄채 3번 칼을
내리치자 다케다 신겐이 엉겁결에 지휘용 쇠 부채인 군배로 막았다고 하는데, 7군데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다케다군 1만 2천이 도착해 우에스기 겐신이 후퇴하자 다케다군도 젠코지에 주둔한 5천 우에스기군을 의식해 추격
하지는 못하고 쿠비즈카 (首塚) 라고 해서 다케다 측 고사카 단조라는 장수가 전투후 근처에 널린 6천여
시체를 적, 아군 구분없이 모아 후히 장사지내자 후일 우에스기 겐신이 듣고 감동해 소금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야마모토 간스케는 미카와 출신으로 전국을 방랑하다가 44세에 다케다 신겐의 군사가 되어 3국 결혼동맹을 추진
했고 카이즈성 (마쓰시로성) 을 축성 했으며 사이조산을 기습하는 전략을 세웠다가 오히려 본진이 기습당하자
책임을 느껴서 선두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해 무덤이 있는데 NHK 대하드라마 풍림화산에 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 중 제 4차 전투는 1561년에 벌어져 '하치만바라 전투' (八幡原の戦い) 라고도 불리는데 간토 출병
을 준비하던 우에스기 겐신은 배후의 다케다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가와나카지마에 출진 했으니.....
제1차 부터 5차에 걸쳐 벌어진 가와나카지마 전투 중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7) 서국의 센고쿠 다이묘 (전국대명) : 1486년 이즈모 및 오키 (시마네) 의 수호 교고쿠씨
를 제거한 아마코씨와 수백년 된 야마구치의 오우치 (大內) 씨가
격렬히 대립하는 가운데 아키국(히로시마)의 모리(毛利)씨가 힘을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코씨 일문에 형제의 의를 맺고, 오우치씨에게 장남을 인질로
보내는등 줄타기외교를 벌였으며 한편 차남을 기쓰카와가에, 3남을
고바야카와가를 상속하게 한 후에 마침내는 양가를 탈취해서는 세력을 넓혔습니다.
1550년 오우치씨(大內)는 중신 스에 하루카타의 모반으로 멸망하는데, 1554년 모리씨는 히로시마만을
제압한후 다음해에 하루카타군을 이쓰쿠시마섬의 싸움에서 전멸시켰으며 같은해 차남을 보내 산음
(山陰: 시마네)의 아마코군과 전투를 벌여 3년만에 항복을 받으니 나이 70세에 서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8) 정략 결혼 :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에 상속권 까지 있었던 여성들도 센고쿠 (전국) 시대가 되면
인격마저 무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으니 정략결혼이 그것으로 다케다 신겐
의 며느리되는 이마가와씨의 딸이나, 사이토도산의 딸 노히메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시집간 것이나 (남편의 기밀을 부친에게 일러 바쳐라?) 스와의 공주 (영주의 딸을 그리 불렀다) 등....
호조 우지야스 딸이 다케다 가쓰요리의 아내가 된 경우, 노부나가의 누이동생으로 아사이 나가마사
의 아내가 되었다가 오빠가 응징해 시댁을 공격하여 몰락시키자 이번에는 세딸을 데리고
부하인 시바타 가쓰이에의 아내가 되었다가 도요토미의 공격으로 자결하는 오이치
등... 친정과 시댁이 적이 되면 자결을 강요 당하거나 이혼당한후 쫒겨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습니다.
9) 센고쿠 다이묘 (전국대명) 와 쇼군 (장군) : 교토의 쇼군 (장군) 의 권위는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름 뿐이라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고개를 숙이는 것은 무로마치 (아시카가) 막부 쇼군들이 일왕(천황) 이나 쇼군 (장군) 의 권위를
이용하여 일본 전국의 66국을 좌지우지하고 싶은 것도 있겠고, 또한 명분상 유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0) 센고쿠 다이묘 (전국대명) 의 정치 : 120여년간 이어진 센고쿠(전국) 시대는 일본이 200
여개 국가로 나뉘어져서 전쟁으로 낮과 밤을 지새는 시대였으니..... 자기 나라에서
분란이 터지면 바로 이웃나라 영주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는 것이니 수성에 치중하였습니다.
풍운아 호죠 소운의 경우 6명의 부하 무사로 시작하여 고코쿠성 성주가 되자 스루가
4가를 가신으로 조직하였고, 이즈 반도에 들어가서는 이즈 21가를,
오다와라에 들어가서는 사가미 14가를 조직해서는 가신단을 늘려 나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