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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인 1 - 고조선에 전해진 중국 문화와 멸망시 반역자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5.10.20|조회수218 목록 댓글 0

 

반역인 1 - 고조선에 전해진 중국 문화와 멸망으로 이끈 반역자들!

 

 

우리나라의 옛 소설들은 대개는 권선징악으로 끝나니 흥보전과 심청전에 춘향전과 콩쥐팥쥐가 그러한데... 그럼

지어낸 이야기인 소설 말고 실제 역사에서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반역자들의 말로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중국에 조조와 사마의는 닮은점이 많은데 두 사람은 40년간 동시대를 살면서 후세에 반역자로 적히는걸

꺼려했으니.... 한나라와 위나라의 실권을 쥐고 황제는 허수아비 였음에도 끝내 황위를 찬탈해 나라를

세우지 않고 신하로 죽었으니조조의 아들 조비와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 대에야 선양을 통해 황제가 됩니다.

 

 

고조선 시대는 당시에 쓰여진 역사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일기나 편지에 시나 시조 그리고 비문까지

전해오는 기록은 전무하며, 부여나 또 고구려와 신라 및 백제 초기도 마찬가지인데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고조선과 부여며, 동예, 고구려 그리고 삼한은 대부분  사기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등 중국의 기록에 의존합니다.

 

 

나무위키에 고조선이 최초로 언급된 우리 역사책은 고려말인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 이며, “한국의

고대사 기록은 훼손이 많이 되어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라고 적었는데.....

훼손이 된게 아니라 애초부터 아예 기록 자체가 없었으니 중국의 역사책에서 우리 역사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고대에 왜 기록이 전혀 없느냐 하면....  기록이란 것은 문자로 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은

고대에 문자(글자) 를 만들지 못했으니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문자를 만들지 않은

것은 인구가 적고 강역도 좁으며 통치체제가 간단해 굳이 문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아니 한자 (漢字) 가 있었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쉬운데, “한자는 중국 한나라 문자

라는 뜻이니, 만약 진시황의 진나라가 2대에 그치지 않고 몇백년 좀 더

계속됐더라면..... 우린 한자 (漢字) 라고 하지 않고 진자 (秦字) 라고 부를 것입니다?

 

 

알다시피 한자(漢字) 는 상( , ) 나라 시대에 소 등뼈나 거북이 뼈에 금을 내고 구워서 갈라진 것을

보고 점을 치던데서 유래된 것이니...... 한자라는 문자로 완성되는데는 무려 "천년" 이나 걸렸습니다.

 

따라서 저게 발전하던 초창기에는 한자 (漢字) 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는 전혀 없었고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은 우리나라를 침공하던 "적국이자 원수" 인지라 중국의 문물이 쉽게 들어

올수는 없었으며 고구려가 중국과 우호적으로 교류한 시기는 후연이 망한 407년 이후 북위 시대 입니다.

 

그러면 한자 (漢字) 는 한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하고 이 땅에 한사군을 세웠는데,

낙랑군은  중국인들이 통치하였으니..... 이때를 전후해 들어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한자와 함께 중국 말과 태극에 8괘등 음양 오행과 60갑자 간지에 유교, 불교, 도교 등이 들어옵니다.

 

 

한나라 문화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우아하다면 우리 문화는 거칠지만 소박하고 질박했다 고 생각되는데, 자연히

중국 명절인 설날, 한식, 단오, 칠석, 추석, 동지 등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우리 한민족 고유 명절인 5월에

삼한의 수릿날, 10월에 고구려의 동맹동예의 무천, 삼한에 상달제  그리고 12월에 부여 영고 는 사라졌습니다.

 

 

명절 뿐만 아니라 말 (단어, 낱말) 도 그러하니...... 백두산과 한강에 동해는 모두 다 중국 말인데,

() 과 강() 은 중국말 (2천년전 한나라 사람들의 발음) 이니 우리말로 하면

() 의 우리말은 뫼 이고, 강() 의 우리말은 가람이니 흰머리뫼(백두산) 와 큰가람(한강) 입니다.

 

그런데 동해는..... 동서남북을 뜻하는 우리 말이 분명 있었겠지만 중국말인 동서남북을 즐겨 사용하면서 우리 말은

모두 잊어 버렸는데강원도 사람들이 동풍을 샛바람이라고 하니..... 동쪽은 새() 로 새날, 새벽등이 있습니다.

 

 

東海 동해로 발음하는건 중국말 이니, 우리 말로 바다이지만

해당하는 조상의 말, 그러니까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우리 말을

모두 잊어버렸는데.... 누구는 = , = , 西 = , = 노 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니까 동풍은 샛바람 이고 남풍은 하늬바람, 서풍은 높새바람, 북풍은 마파람 이라니,

그럼 東海(동해) 를 우리말로 부르면 샛바다가 되고 중국 말인 백두산의

우리말은 "흰머리뫼" 이며, 중국말 한강(漢江) 의 우리 말은 "큰가람" 이 되는 것일까요?

 

 

조선시대에 천자문 (千字文) 에 보면 하늘 천, 땅 지, 누를 황, 검을 현, 집 우, 집 주..... 라고 외우는데,

앞에 나오는 하늘, , 누를, 검을, 집은 우리나라 말이고 뒤에 나오는 천지현황우주는 중국말 입니다.

 

중국의 강남 지방을 여행하면서 안휘성과 저장성 등지에서 Ticket 을 베이징 표준말인

부퉁화(보통화) 로는 피아오이지만 우리나라처럼 라 하고.... 身分證

베이징 표준화로는 신펭장인데 우리나라 사람들 처럼 신분증이라고 발음해 놀랐습니다.

 

 

베이징은 한() 나라 때만 해도 화화족 그러니까 한족 (漢族) 들의 땅이지만 그후 516

시절에는 흉노족과 선비족에 저족들이 나라를 세워 통치했고 그후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골족의 원 그리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세워지니..... 이민족의 말이 섞였습니다.

 

 

강남은 당시만 해도 이민족들이 사는 나라라 원래 한() 나라 사람들의 발음이 일부 유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만약에 2천년 전에 죽은 한나라 사람이 무덤에서 깨어나면

베이징 사람과 남경 사람에 한국 사람을 만나면 현재 한국인들과 말이 가장 잘 통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유학자인 사대부 선비들이 하는 말 중에 문법과 조사(토씨) 는 빼고 사용하는

단어(낱말) 만 보면...... 그 내용 중에 70 % 는 한국말이 아닌 중국말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조선(古朝鮮)” 이라는 말은 훗날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으니 구분하기 위해 엣날의 조선을 고조선이라

부른다고 아는 분이 많겠지만, 고려 말엽 원나라 지배기인 1281년에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보면.....

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니 단군조선이 위만조선 보다 먼저니 고조선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일연 스님은고기(古記) 를 인용해 단군 왕검이 즉위한지 50년에 평양성 (平壤城) 에 도읍하고 조선(朝鮮) 이라

칭했는데 나라를 다스리기 15백년 주()나라 호왕(虎王, 무왕) 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 를 조선(朝鮮)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아사달 (阿斯達) 에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니, () 198세 였다.

 

 

또 일연 스님은 단군이 왕이 된 시기를 위서(魏書) 에 요임금 시대 라고 했는데, 현전하는 위서

로는삼국지조위(曹魏) 의 역사가 기록된 위서가 있고, 북위(北魏) 역사가 기록된

위서가 있지만....삼국유사(三國遺事) 에 인용된 조선이나 단군에 내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는 중국에서는 기원전 2070년경의 하() 나라로 보지만 유럽과 미국등 서양에서는

기원전 1600년경인 상() 나라 시대로 보며.... 요임금과 순임금은 역사시대 로 보지

않으니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거나 단군이 1908세 까지 살았다는 것은 믿을게 못됩니다.

 

 

우리나라는 고대에 문자가 없으니 역사서가 없는지라 중국 역사서를 보아야 하는데, 조선이 처음 나타난건 기원전

7세기관자(管子) 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보이는데, 현대에는 관자가 기원전 4세기경에 직하

학궁의 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 인지라..... 그럼 기원전 4세기에 고조선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산해경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

나타나는데,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특정한 국가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요동지방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을 통칭한 것으로 봅니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 동검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로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연나라와 관련된 전국책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되며,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났고 연나라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  이라 칭했다고 전합니다.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초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조선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요동 영토를

상실하는데, 위략에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여리 땅을 빼앗겼으며, 만번한(滿潘汗)

경계로 하게 되었고 연나라가 고조선에서 빼앗은 지역에 요동군(遼東郡) 이 설치되고 장성도 쌓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정사인 24() 에 속하는 당태종때 편찬된 진서(晋書) 516국 시대 초기인 4세기에 선비족

으로 전연 (前燕) 을 세운 모용외 (慕容廆, 269 ~333) 가 조선공 (朝鮮公 : 조선왕) 이 되었고 이를

모용황 (慕容皝) 이 계승하였다고 하는데, 고조선의 옛 강역이던 요서와 요동을 차지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로마사에서 게르만족을 정복한 로마인을 게르마니쿠스라 하듯 모용외가 옛 조선땅을 얻었기에 조선공

이라 한 것이고.... 또 그 전인 2세기에 등장하는 선비족의 대영웅인 단석괴 (檀石槐) 또한 부여의 건국

시조 동명왕이나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 처럼 그 어머니가 햇빛에 의해 회임해 낳은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후금(청나라) 을 건국하는 아이신기오르 (애신각라, 누르하치 ) 도 장백산(백두산) 기슭에 놀던 선녀

셋 중에 막내 푸쿠룬이 까치가 떨어뜨린 붉은 열매를 먹고는 잉태했다고 나오니, 나라를

건국할 정도의 영웅이라면 남녀 관계가 아닌 아닌 하늘이 점지해 주어서 태어난다는 뜻인가 합니다?

 

 

기원전 221년에 진() 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

진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으며 부왕의 뒤를 이은 준왕(準王) 시기 진나라에 내란이 발생하고

뒤이어 유방과 항우가 전쟁을 벌이는 등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 유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이주합니다.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유방의 전한(前漢) 은 연· 진 시기의 장성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는..... 요동의 옛 장성을 수리하고 패수(浿水) 를 경계로 삼았다고 합니다.

 

 

1.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반역자 위만 (衛滿)

 

기원전 195년 한나라가 연나라 지역에 임명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큰 혼란에 휩싸이고  많은 사람들이 고조

선으로 망명하니 위만은 1,000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으니, 상투를 틀고 고조선의 복색을 하였다는데

성씨는 잠부론 (潛夫論) 삼국유사에서는 '' (지킬 위)가 아닌 ''(나라 이름 위)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해 박사(博士) 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는데, 위만은 기원전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했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위만조선 이라고 부르며준왕은 바다로

남쪽 마한으로 달아나 건마국을 세웠으며 족보에서는 기씨 (箕氏) 에서 한씨 (韓氏) 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위만의 출신에 대하여서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朝鮮王 満者 故燕人 也 (조선왕만자고연인야)' 

魋結蠻夷服 (퇴결만이복)’ 라고 되어 있으니 연나라 출신이라는 설과 과거 연() 나라가

정복한 고조선 지역의 주민 즉 고조선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현재 대한민국의 학계 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의 국호와 국체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사실을 들어 출신이 어디든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으며 중국에서

철을 가져와 고조선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眞番임둔(臨屯)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으며 왕위는 손자까지 이어지니 배신자인 위만은 천벌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죽었다고 여겨집니다.

 

 

 

2. 반역자 예군 남려 (濊君 南閭) 

 

위만의 손자로 왕이 된 우거왕 (右渠王) 은 고조선의 세역을 키워 남쪽의 진국 (辰國)

비롯한 여러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익을 독점합니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는 서기전 128년 자기가 다스리던 예족(濊族) 28만 명을  거느리고

() 나라에 투항하는데...... 28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인구로 보았을 때 저런 숫자는 믿기 힘듭니다.

 

한나라는 귀순한 예족의 땅에 창해군 (蒼海郡, 滄海郡) 을 설치했으며, 한편 사기·한서등 문헌

에서는 그를 예군(穢君 : 濊君)’ 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단순히 예족의 족장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수도 있겠지만, 달리 위만 조선이나 한으로 부터 수여된 칭호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예군 남려(南閭) 는 요동군(遼東郡) 인근 예족 부락의 군장(君長) 으로 보거나 지안(집안) 지역 압록강

유역의 대수맥(大水貊) 과 혼강(渾江) 의 소수맥(小水貊) 을 아우른 대부족 연맹체의

장으로 보는 견해, 동해안 함흥의 예의 군장으로 보는 견해, 부여 왕으로 비정하는 견해 등이 있습니다.

 

한편 예족사회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 (安鼎福) 의 강릉설 (江陵說), 유득공 (柳得恭) 춘천설 (春川說), 이마니시

(今西龍) 의 함흥(咸興) 또는 정평설(定平說), 이케우치 (池內宏) 의 영흥설 (永興說)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예군 남려가 이끌고 투항한 28만은 강력하게 통합된 지속성을 지닌 정치체라기 보다는 한()

위만조선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이해를 같이한 주민 집단들의 완만한 연합체로 여겨집니다.

 

또한 이들 지역에 설치한 창해군 (蒼海郡, 滄海郡) 의 경우 설치 후 인력과 경비 부담의 문제로 인해

3 뒤에 폐지되었다가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07년에 이 지역에

현도군 (玄菟郡) 을 설치하게 되는데..... 남려 역시 천벌을 받지 않고 편온하게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3. 반역자 조선상 역계경(歷谿卿),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 삼 (尼谿相 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 왕자 장(長) 

 

 

기원전 109년에 한 무제 (漢 武帝) 는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 등에게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각각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외교적 절충도 성과가

없자 전쟁이  재개되어 장기화 되니조선상 역계경 (歷谿卿) 은 화친을 건의합니다.

 

 

하지만 화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따르면 조선상 역계경

(歷谿卿) 은 자신의 무리 2000여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쪽

진국 (辰國) 으로 달아았으며, 그후 조선이나 진번과는 일체 교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위만 조선에 소속된 성읍국가의 지배자로 또 다른 조선상으로는 노인(路人)

있으며 그리고 성읍국가의 지배자로는 이계상 (尼谿相) 등이 있었습니다.

 

 

위만 조선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지배자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 이라고 불렀으니.... 이에 대해

한서(漢書) 조선전에 대한 응소(應劭) 의 주() 에서는, '조선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했지만,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 중앙과 지방의 장관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상() 이라 불렀다' 고 비판합니다.

 

또한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 한음(韓陰), 이계상 삼(尼谿相 參), 장군(將軍) 왕겹

(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면서......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입니다.

 

 

우거왕이 살해당하자 왕자 장() 까지 한군에 투항했지만 대신(大臣) 성기(成己) 가 항전하자 좌장군은

항복한 우거왕의 아들 장() 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주살

하도록 하니,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했으며 노인은 도중에 병으로 사망합니다.

 

 

한나라는 고조선 영역에 낙랑군 (樂浪郡임둔군 (臨屯郡현도군 (玄菟郡진번군 (眞番郡)의 한사군

(漢四郡) 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했는데, 저 반역자들은 노인이 병으로

죽었고.... 이계상과 왕자 장을 제외하면 한() 나라에 공을 세웠으니 말로가 비참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다만 이계상 삼(尼谿相 參) 1086월 우거왕을 죽였으니 그 공이 큰지라 한나라

에서 홰청후(澅淸侯) 에 봉해 졌으니 출세한 것으로, 전2

(기원전 99) 에 달아난 조선인 포로를 숨긴 죄로 하옥되어  병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오래 전에 제나라 니계(尼谿) 에서 망명해온 자이거나 후예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니계(尼谿) 란 명칭은 논어(論語) 에 나타나니 공자(孔子)

산동성에 있었던 노나라 사람이고 이 지역이 과거 제() 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우거왕의 왕자인 장() 한서에는 長降(장항) 으로 표기되었고 또 사기

후자연표 (侯者年表) 에는 張路(장로) 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장()이 본래 이름이고 뒤에 붙은 한자는 투항한 후에 받은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자 은 강, 항의 두 가지 음이 있는데 강이 기본음 으로써 내리다 라는 뜻이 있고, 항은 항복하다는 뜻인데,

문자가 없었던 고조선에서 인명은 고유어 발음의 음차에 불과하니 만큼 한자의 뜻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사기 조선전의 주(索隱) 에서 장항의 이름 항() 에 대해서는 음()이 각() 이라 하였고

() 은 고락반 (姑落反) 이라 하여 당시에는 각() 으로 발음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거왕의 왕자로 왕검성 전투에서 우거왕 사후 계속 항전하던 항전파 성기를 살해하고 투항했으니 그 공을

참작해 한나라에서 기후 (幾侯) 에 봉해졌지만..... 한나라 낙랑군 치하인 기원전 105년에 모반을  계획

하다가 발각되어 참형당해 죽었는데 그의 신분을 감안하면 '고조선 부흥운동' 을 기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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