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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11 - 떠이선 왕조 20만 청나라군의 침공을 쳐부수다!

작성자은혜|작성시간25.11.25|조회수171 목록 댓글 0

 

베트남 11 - 떠이선 왕조 20만 청나라군의 침공을 쳐부수고는 독립을 유지하다!

 

 

1225년에 세워진 대월 (大越 베트남의 쩐 왕조는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해 속국이 된데 비해 1차 몽골군

5, 2차와 3차는 몽골 중앙군에다가 항복한 송나라 병사등 합계 30만에 이르는.... 세계 최강의

기마군단인 몽골의 3차례 침략을 모두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유지했으니 세계사에 특기할 일 입니다.

 

 

몽골군은 고려를 9차례나 침공했으니 1차는 3만이었고 2차에서 9차는 5천에서 2만 정도였는데 이렇게 자주 침공

할수 있었던 이유는 몽골군이 본토나 중국에서 온게 아니라 만주에서 왔기 때문인데, 즉 징기스칸이 동생 3명

에게 만주땅에 분봉했는데 그 후손들이니 가까운지라 자주 올수 있었지만  소수인데다가 중앙군 보다는 약했습니다.

 

 

베트남은 고려를 침공한 병사의 10배나 되는 대군으로 침공해 온 몽골군을 3차례나 쳐부수었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법권신 레 뀌리가 왕위를 찬탈하니.... 수도를 탕롱에서 고향 타잉호아로 옮기고는

1400년에 황제에게서 억지 선양을 받아 국명을 "대우" 로 바꾸고 자기 성씨도 원 성씨인 호씨로 바꿉니다.

 

 

그러자 1406년에 명나라열영락제는 20만 대군을 보내 쩐왕조를 부활시킨다는 명목으로 침략해

오니 대우의 군민들은 저항 의지를 잃고 패망하자..... 명나라는 약속을 저버리고 베트남을

직접 통치하면서 수탈하니 쩐씨 왕족이 두차례나 일어서 저항했으나 다시 군대를 보내 진압합니다.

 

 

이제 2번의 독립 운동까지 꺽었으니 명나라의 지배는 탄탄대로인 것 같았는데 1418년에 레 러이가

람썬 봉기를 일으키자 다시 명군이 침공해 오니......  정면 전투에서 패한 이후에는

레 러이는 작전을 바꾸어 게릴라 전술로 명군을 괴롭혀 승리하고는 1428년에 후레 왕조를 세웁니다.

 

그나마 소종이 즉위해 허수아비 황제에서 벗어나 레 왕조를 다잡는가 싶었지만권신들을 견제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은데다가 성격이 급했으니결국 막당중에게  사로잡혀

시해당했고 막당중은 1527년 공제를 협박해 제위를 찬탈레 왕조를 멸망시키고 막 왕조를 개창합니다.

 

 

권신 막당중은 혼란스러운 후 레 왕조를 끌어내리고 1527년 막 왕조를 세웠지만 백성들 반응은 좋지 않았으니 

() 이라는 유교적 가치에 익숙해진 베트남 귀족들은 막 왕조를 찬탈자로 보았고 곳곳에서

엄청난 소요가 일어나니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3년 만에 아들 막등영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상황으로 물러납니다.

 

그런 이후에도 들불 처럼 일어나는 반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1533년 응우옌씨 가문의 응우옌낌

과 그의 사위이자 찐씨 가문의 찐끼엠이 함께 후 레 왕조 복원을 기치에 내걸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응우옌낌은 총사령관에 올라 장종을 새 황제로 추대하고 남부에서부터 밀고 올라갔으니 곧 홍강 이남의 모든 영토

가 후 레 왕조 부흥세력 아래에 들어갔고, 막 왕조는 하노이와 베트남 북부 일대만으로 영토가 축소됩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막당중은 명나라에 지원을 구걸했으니 심지어 스스로를 밧줄로 묶어 항복 자세를

취하고 조카 막문명 (莫文明) 과 신하 40여명을 거느린채 왕문성에게 대월의

토지대장모든 장적 및 나라의 중요 문서와 고평(까오방일대 특산물에다가 막대한 뇌물을 바칩니다.

 

 

명나라는 마지못해 베트남 북부는 막 왕조가남부는 레 왕조가 다스리는 중재안을 내놓았으나

레 왕조 부흥군은 이를 거절했고.... 1541년 막당중이 사망하자 점점 더 많은 영토가

후 레 왕조에 빼앗기면서 1572년에는 수도 하노이마저 함락당했다가 1년 만에 겨우 되찾게 됩니다.

 

 

1592년에는 찐씨 정권의 찐똥이 치고올라와 수도 하노이를 함락하고 영조가 잡혀죽으며 막 왕조가

멸망하니  잔존 세력들은 까오방 지역으로 도망쳐서 명나라뒤이어 청나라의 보호를 받는

작은 공국 수준으로 전락했다가 명종이 1677년 찐씨 정권에 잡혀 살해당하면서 완전히 몰락합니다.

 

 

 

후 레 왕조는 1527년 막당중이 제위를 찬탈하면서 멸망하는가 싶었지만찐씨 가문의 찐끼엠과 응우옌씨

가문의  응우옌낌의 주도로 부흥군이 일어나면서 목숨이 연장됐던 것인데 부흥군의 총사령관

응우옌낌은 장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실권을 좌지우지했으나 막 왕조의 첩자에게 암살 당합니다.

 

응우옌낌이 죽자 그의 양자이자 사위였던 찐끼엠이 실권을 독차지했으니..... 그는

후 레 왕조의 장종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1592년 막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막 왕조의 영조를 잡아죽이면서 후 레 왕조의 중흥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후 레 왕조는 완벽한 허수아비였으니..... 후 레 왕조의 황제들은 실권이 없었고 모든

권력은  공신가문인 찐씨와 응우옌씨 가문이 독차지한 상태였기 때문인데막 왕조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으니 찐끼엠은 응우옌씨 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장인 응우옌낌의 세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처남(장남) 을 독살했고차남 응우옌호앙은 남쪽으로 쫓아

버리니 응우옌호앙은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순히 남쪽으로 물러났으니.....  이후 베트남은

 14세기 일본 처럼 북쪽의 찐씨 정권남쪽의 응우옌씨 정권으로 양분된 베트남판 남북조 시대로 접어듭니다.

 

 

북쪽 조정을 장악한 찐씨 정권은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니 서열상으로는 황제를 손아귀에 넣은

찐씨가 응우옌씨 보다 우위에 있었고 국력도 더 강했으니찐씨 정권은 여러차례 응우옌씨 정권에

복종을 요구했지만 응우옌씨가 무시하자 1627년 찐씨 정권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찐씨 응우옌씨 전쟁은 무려 45년간 지속됐는데..... 찐씨 정권은 7차례나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포르투갈 포병과 강력한 요새를 세우고 농성하는 응우옌씨 정권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했으며 결국 1672년에 마지막 공세 이후 두 정권이 휴전에 합의하며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렇게 베트남은 무려 260년 가까이 한 나라 아래 두 정권이 들어선 사실상의 분단 상태로 고착화됐는데... 

이런 아슬아슬한 균형은 1771년에 남쪽인 중부 베트남 떠이선에서

응우옌씨 정권 폭정에 반발한 완악완여완혜 3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떠이선 왕조를 세우면서 종결됩니다.

 

 

1771년 응우옌 반냑응우옌 반르(阮文呂), 응우옌 반후에 3형제는 노동자농민기독교도소수민족참족 등 모든

반대 세력들을 끌어모으면서 세를 크게 늘렸으며.... 1774년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 푸쑤언이

함락됐고, 1777년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마지막 보루 자딘을 함락하며 응우옌씨 정권의 왕족들은 싸그리 도륙합니다.

 

 

삼형제들 중에서 장남인 응우옌 반냑은 스스로 칭제하고 떠이선 왕조를 세웠으며.... 막내 응우옌

반후에가 북쪽의 찐씨 정권마저 공격했으니기세가 한껏 오른

응우옌 반후에는 2달만에 찐씨 정권의 수도 하노이를 정복하면서 후 레 왕조 마저 끝장내 버립니다.

 

 

떠이선 왕조는 성이 응우옌()씨 이지만 원래 성은 후() 씨로 남쪽 응우옌씨 정권과는 성씨가 같지만 관계가

없으며응우옌씨 3형제의 이 봉기가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 운동인 떠이선 당(西山黨의 난입니다.

 

 

떠이선 형제는 평민 출신으로 그에 걸맞게 쯔놈을 공식문자로 지정해 공문서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다수의 평민들과 재야 선비들이 공직에 진출하고 땅없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부여되는등  많은 개혁정책이 단행되었으며외세인 청나라의 침탈을 거뜬히 이겨낸 개혁

시대이자 영광의 시대를 맞이했으나...... 차남 응우옌반르가 죽으면서 분열로 위기를 맞이합니다.

 

 

이후 화해하기는 했지만 셋째 응우옌 반후에와 장남 응우옌 반냑도 오래 살지는 못했으며이로 인해

어리고 능력이 없는 후계자가 황위에 오른 뒤에 지도층이 초심을 잃고 권력쟁탈에 매달리며

통치력에 공백이 생기며 민심이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 도망쳤던 응우옌 왕조에 멸망당하며

농민 반란으로 나라가 세워진 중국의 한나라와 명나라와는 다르게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한 것입니다.

 

 

반란이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해 고통받는 농민을 구제한다는 목적을

밝힘으로써 농민의 지지를 대거 끌어내고 참족과 중국인등 소수민족들의 협조도 얻었으며

한편으로 북쪽 장권인 찐씨 정권에 복종하는척 하면서 남쪽 응우옌씨 정권을 먼저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1771년에 거병해 빠른 시간에 세력을 다지는데 성공했고 1773년에는 옛 참파의 수도 꾸이년(비자야)

손에 넣어 근거지로 삼았으며.... 1774년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인 푸쑤언을 함락시켰습니다.

 

 

1777년에는 남부 자딘 (Gia Định, 嘉定호찌민시을 함락하면서 응우옌씨 정권의 일족을

모두 도륙했는데이때 진주군 부사령관이 된 레귀돈이 저술한 무변잡록

(撫邊雜錄)” 은 동시대 사료가 부족한 응우옌씨 정권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떠이선 정권은 장남 응우옌 반냑이 1778년 중부 지역의 황제를 선언한 다음막내 응우옌 반후에가 

중흥 레 왕조에 대해 북벌을 개시하여 1786년에는 찐씨 정권마저 몰아냈으니

남부의 응우옌씨 정권과 북부의 찐씨 정권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남북국시대를 종식시킨 것입니다.

 

 

이때 라오스 방면으로 세력 확장을 하던 떠이선 왕조의 태조 막내 응우옌 반후에는 응에안에 있던 카이산으로

하여금 씨앙쿠앙에 침입해 영주에게 떠이선 입공을 요구하자 위앙짠 왕국 (라오스의 란쌍 왕조의 후예

이자,  라오스 3왕국 시대의 하나비엔티안국왕 차오 난타센은 씨앙쿠앙에 파병해 카이산 군을 제압합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1788년에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린 카이산이 다시 침입해 결국 차오 난타센은

씨앙꾸앙의 떠이선 입조를 인정했으니그리하여 씨앙쿠앙은 위앙쨘

왕국의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의 세력하에 놓인 반독립적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위앙쨘 왕국이 멸망하면서 씨앙쿠앙은 시암 짜끄리 왕조의 영지가 되었지만, 1893년에 프랑스가 이전

루앙프라방 왕국의 종주권을 시암에서 획득하면서, 1899년에 씨앙쿠앙은 통킹과 루앙프라방

으로  분할된 형태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는데 지금은 양국 국경에 나뉘어 있는 마을입니다.

 

 

1788떠이선의 세력을 두려워한 중흥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 소통제 (昭統帝에 의해서 청나라 군이

들어오자 떠이썬 군은 건륭제의 청군 20만도 박살냈으니..... 일단 선봉군을 몰아낸 떠이선

정권은 청에 사대(事大)하는 조건으로 베트남의 통치권을 확인받게 되니 명분과 실리를 나눈 것입니다.

 

 

응우옌씨 3형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786년 7월 수도  탕롱(하노이) 을 점령해 그나마 명맥

유지하던  북쪽에 중흥 후 레 왕조 마저 멸망시키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였으니 1788년에 소통제는 청으로 도망갔고떠이선은  베트남을 통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청나라로 도주한 소통제가 구원을 요청하자 총나라 양광(광동성과 광서성) 총독 손사의는 황제에게

"본래 안남은 우리의 옛 영토이니 레 왕아조의 권위를 회복시켜주고 병력을 보내 지킨다면 안남을

다시 취할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성소문을 올리니 천나라는 손사의를 대장으로 20만 대군으로 침략합니다.  

 

 

베트남을 침공한 청나라군은 광서성과 운남성에서 두 갈래로 출발했고, 1788년 11월에 수도 탕롱에 입성

했는데 탕롱을 지키던 떠이선군은 급히 철수해 타잉화(Thanh Hóa) 에 진을 치고 퀴논에 상황을

알리니 이 소식을 들은 웅우옌 후에는 청나라의 출병이 레 황제 복위가 아닌 베트남 지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웅우옌 후에는  청나라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그해 11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꽝쭝으로

정했으며직접 10만의 수륙 양군과 2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북진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군에 맞서 전격전을 시도했으니 1789년 1월 양국의 대명절 구정을 이용합니다.

 

 

1789년 1월 5일 새벽에 떠이선군이 기습하자 청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지휘관 손사의는 말을 타고 간신히

쪽으로 도망치는데.... 응우옌후에는 탕롱에서 남쪽으로 90km 떨어진 닌빈에서 후레 왕조의 급조된

군대를  일거에 격파했고, 청군이 주둔중이던 탕롱으로 신속히 이동해 1월 5일 밤에 탕롱의 외곽 방어

거점이던 하호이와 응옥호이 요새를 점령하고 다음날 정오 탕롱에 입성했으니 청나라군이 대패한 것입니다.

 

 

대장인 손사의가 황급히 도망을 치자 운남성 일대에서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는  이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철수했는데..... 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는 불과  12일

만에 청나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렇게 끝난 것이 바로 베트남의 대청항쟁 입니다.

 

 

 이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에 낮은 자세를 보였지만, 청나라는 패배했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꼈으니

 청 조정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평정하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막상 실현하지는

않았으니.... 결국 청나라는 웅우옌후에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렇게 떠이선 왕조는 베트남을 통일했지만 변수가 있었으니 응우옌씨 정권의 생존자 응우옌 푹아인이었는데

떠이선 왕조의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응우옌푹아인은 무려 4차에 걸쳐서 베트남 탈환을 시도했는데

그는 시암(태국), 프랑스포르투갈영국캄보디아 등 외세의 손을 빌려서라도 떠이선 왕조를 쫓아내려 했습니다.

 

 

떠이선 왕조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났으니 응우옌 반후에가 죽자 아들 응우옌 꽝또안이 제위를 물려받았는데이후

응우옌 꽝또안이 백부인 응우옌 반냑과 내전을 벌였던 것이라.... 응우옌 푹아인은 이 기회를 잡아 떠이선 왕조

멸망시키고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건국하게 되니 나라 이름도 재월에서 월남으로 바뀝니다.

 

 

응우옌 왕조의 유일한 생존자인 응우옌 푹아인은 떠이선 정권이 중부로 물러나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응우옌씨 정권 시절의 일부 영토를

수복하기도 하지만...... 다시 떠이선 정권에 밀려서 도주하게 되니 1차 시도 입니다.

 

 

이후 외세인 시암(태국세력을 끌어들여서 원수인 떠이선 군과 싸우게 하지만, 1785떠이선 군과

3만 시암 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가 떠이선군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실패하니 2차 시도입니다.

 

 

이후 응우옌 푹아인은 선교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아드랑의 주교인 피에르 피뇨 드 비엔

 (Pierre Pigneau de Behaine) 을 통해 프랑스에 원군을 요청하자 아드랑 주교는 1787

프랑스에 돌아가 루이 16세를 알현하고베르사유에서 대월과 프랑스의 공수 동맹 조약에 조인합니다.

 

 

조약은 프랑스왕이 군대를 대월(大越에 파견해 도와주면다낭과 뿔로 꼰도르(꼰 다오섬의 영유권 및 주권을 양도

하고대월 전역에 대해서 프랑스가 상업권을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는데그러나 이 조약은 원정군 편성을

위임받은 인도 주재 프랑스군 사령관이 원정이 어렵다고 판단해 원정을 취소하면서 실현되지 못하니 3차 시도입니다.

 

 

그러나 응우옌 푹아인 못지 않게 근성이 있던 아드랑 주교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서 대월 (大越원정군을 조직하였으며.....  응우옌

푹아인도 포르투갈과 영국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 캄보디아 병력을 징병하여 기회를 노립니다.

 

 

1788년에 청나라 강희제가 보낸 20만 대군도 물리쳤으며, 후레 왕조의 찐씨 정권을 멸망 시키고

베트남을 통일한 떠이선 3형제는 1787년에 나라를 3개로 나누었으니구 광남의 영토는

첫째이자 황제인 응우옌 반냑(阮文岳, Nguyễn Văn Nhạc) 이 통치하며 중앙 황제를 칭했습니다.

 

 

남부인 가정성 일대는 동정왕(東定王응우옌 반르 (阮文呂, Nguyễn Văn Lữ) 에게구 찐씨 정권이 다스리던

북부는 북벌을 완수한 셋째 북평왕(北平王응우옌 반후에 (阮文惠, Nguyễn Văn Huệ) 가 나누어 다스립니다.

 

 

첫째 응우옌 반냑과 셋째 응우옌 반후에가 서로의 영토를 요구하며 충돌해응우옌 반냑이 응우옌

반후에의 처첩을 검탈하는등 인륜을 저버리자 응우옌 반후에는 남벌을 감행했고 응우옌 반냑

의 기반지 귀인을 공격했는데이후 평화협정을 맺어 정식 분할통치를 실시했으나 내분으로

잠시 혼란기에 빠지자,  응우옌 푹아인이 응우옌 반르가 다스리던 남부 가정을 침공해 빼앗습니다.

 

 

청나라가 침공했을 때 북부의 응우옌 반후에는 황제를 칭했으니 이른바 푸쑤언 조정(富春朝廷부춘조정

등장이며남쪽(중부중앙 황제의 조정은 꾸이년 조정 (歸仁朝廷귀인조정이라고 불렀습니다.

 

 

떠이썬 왕조에서 푸쑤언 조정과 꾸이년 조정이 공존했지만 북부 푸쑤언 조정이 더 힘이 강했기에, 연호는 꾸이년

조정의 타이득 (泰德태덕) 에서 푸쑤언 조정의 꽝쭝 (光中, Quang Trung, 광중) 으로 옮겨가게 되며 응우옌

반후에는 전 베트남의 통일에서 더 나아가 옛 베트남(南越) 의 고토인 중국 남부 광동광서를 수복하고자 했습니다.

 

 

1788년에 남부의 요충지인 자딘(사이공호치민)이 도로 광남 응우옌씨에게 넘어가면서광중제 응우옌

반후에는 응우옌 푹아인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계획했지만, 1792년에 39세의 나이로 병사

했으며 부춘조에선 광중의 뒤를 이어 응우옌 꽝또안(Nguyễn Quang Toản, 阮光纉이 뒤를 이었습니다.

 

 

응우옌 꽝또안은 응우옌 푹아인의 침략으로 멸망 직전에 처한 태덕제 응우옌 반냑의

귀인조를 지원하는 척 하다가 그 영토를 몰수했고 다시 서산을 통일했으나

힘을 잃은 뒤였으며 조카에게 배신당한 응우옌 반냑 역시 이듬해인 1793에 죽었습니다.

 

 

완주의 응우옌 푹아인은 프랑스 주교의 지원을 받아 차례로 싸 덱빈 롱미 토사이공을 점령하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으니..... 마침내 1802임시수도 탕롱이 떨어지면서 떠이썬 왕조는 멸망했으니 4차 시도인데응우옌

푹아인이 세운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하여 지배하게 되니 국호도 대월 (大越에서 월남 (越南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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