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4 - 센고쿠 시대에 나고야 (오와리국) 의 오다 노부나가 교토로 진출하다!
흔히 말하기를 새장의 새가 울지 않으면 오다 노부나가는 꺼내 목을 비틀어 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맛있는 모이를 번갈아 주면서 울도록 달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스스로 울때 까지
기다린다고 했는데, 지어낸 우스개 소리이긴 하지만 세 사람의 성격을 제대로 나타내는 말인가 합니다?
1336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세운 일본의 2번째 아시카가 (무로마치) 막부는 1467년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를 두고 동생 요시미와 아들 요시히사가 대립하면서 동생을
지지한 호소카와씨와 아들을 지지한 야마나씨가 교토에서 전쟁에 돌입하니 “오닌의 난 (응인난)“ 입니다.
그러자 양군은 지방 세력을 불러들이는데... 호소카와씨의 동군은 24개국 16만이고 야마나씨의 서군은
20국 9만으로 처음에는 숫자가 많은 동군이 우세했지만 히로시마등 6국의 슈고인 백제계 다이묘
오우치 요시히로가 서군에 참전하면서 교토 시내 시가전은 무려 10년을 계속하니 민가 60% 가 불탑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호족들은 재산을 팔고 빚을 내 10년을 싸우며 채무로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쟁의 승패
가 나지 않으니 논공행상이 없는지라..... 1477년에 하나 둘 지방으로 내려가서 자립하니 일본은 200여개
나라로 갈라졌고 서로 침공하면서 전쟁으로 널을 지새는게 100년 넘게 이어지니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 입니다.
초기에 두각을 나타낸 무장은 하급 무사의 아들인 사이토 도산 (齊藤道三) 으로 주군에 배신을
거듭하며 결국 미노국 (기후현) 의 주인이 되었고 호죠 소운 (北條早雲) 은
이즈 반도를 거쳐 오다와라성을 함락하고 사가미국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을 손에 넣었습니다.
아시카가씨의 일족으로 명문 귀족인 이마카와씨는 스루가국 (시즈오카) 의 슈교로 우지치카는
1517년 서쪽 도토미국 (하마마쓰) 을 공격하여 두 나라를 지배했으며 북쪽 가이국
(야마나시현) 에는 오다씨가 세력을 잡으니 호죠씨와 이마카와씨 및 오다씨는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발한 제안을 하니..... 이마카외씨의 딸을 다케다씨에게 시집보내고 다케다씨는
딸을 호조씨에게, 호조씨는 딸을 이마카와씨에게 시집을 보내 3국이 겹사돈을
맺으니 이제 서로 등을 맞댄후 먼저 호죠씨는 간토 (도쿄) 지방으로 진출해 세력을 넓힙니다.
가이국 다케다씨는 북쪽 시나노(나가노현) 로 진출하니 가이국 서너배는 되는 넓은 땅에 스무명 가량의 다이묘가
자리했는데 십수년 전쟁으로 이들을 하나, 둘 거꾸러뜨리고 거의 차지하자 패한 무장들이 북쪽 에치고
(니가타현) 로 달아니니 우에스기 겐신의 세력이 남하해 다시 10여년간 다섯차례 가와나카지마 전쟁을 벌입니다.
이때 시코쿠섬에서는 도사국 (고치현) 의 조소카베씨가 10개가 넘는 세력들을 하나, 둘 쳐부수고 있었고
규슈 에서는 남쪽 사쓰마 (가고시마현) 의 시마즈씨가 북진하며 10여개 세력들을 격파하고
있었으며 서부 일본에서는 백제게 오우치씨가 모반으로 죽은후 모리씨가 차지해 6국을 지배한 상태입니다.
아이치현에서는 다케다 가문이 숱한 전투 끝에 서부인 오와리 (나고야) 국을 차지했고, 동부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마쓰다이라씨가 수많은 전투 끝에 미카와국의 지배하게 되었는데 미카와국을 두고
서쪽 오와리국 다케다씨와 동쪽 스루가국의 이마카와씨가 군대를 보내 서로 집어삼키려고 전쟁중 이었습니다.
결국 미카와국을 손에 넣은 스루가국의 이마카와씨는 교토로 올라가 쇼군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1560년에 속국인 미카와국에서 잡아온 인질인 마쓰다이라 이에야스(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선봉으로 삼아..... 2만 5천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국 (나고야) 을 공격해 들어옵니다.
5천에 불과한 오다 노부나가는 중과부적이라 낙담해 전투를 포기한 것 처럼 적은 물론 아군까지
속이고는 오케하자마에서 방심한 적군에 기습공격을 가해 이마카와씨를 죽이고
새로운 강자로 떠 올라 마침내 교토로 상경해 일본 중앙부를 차지하고는 통일의 포석을 놓습니다.
“ 생각하면 이세상은, 영원히 살 집이 못되는 것, 풀잎에 내린 흰 이슬, 물에 비치는 달보다
허무하다. 황금빛 골짜기에서 꽃을 노래하던 영화, 먼저 무상한 바람에 흩날리고
남쪽 망루의 달과 노래하던 이들은, 달보다 먼저 가버려 무상한 구름에 가리우고
인간 오십년, 돌고도는 인간세상에 비하면, 덧없는 꿈만 같구나, 인생은
일장춘몽 덧없어라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라, 생을 얻은자 누군들 죽지 않으리”
오다 노부나가는 1534년 오와리국(나고야)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로 태어나 2세때 나고야성(名古野城) 의
성주가 되었는데, 오다씨는 오다 단조노츄(弾正忠) 로, 오와리 지방의 슈고(尾張守護) 인 시바(斯波) 가문의
신하이며 오와리 하 4군의 슈고다이 (守護代) 인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의 가신인 키요스 삼 봉행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막부에서 지방장관(관찰사) 으로 내려 보낸게 슈고(수호) 인데 세월이 흘러 슈고는 지방은 대리인
인, 한두명의 슈고다이를 임명해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주로 교토에 거주하며 보고를 받는데....
센고쿠(전국) 시대에는 입에 혀 처럼 놀던 슈고다이가 주군인 슈고를 밀어내는 하극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가신의 가신이었던 셈인데... 노부나가가 탄생했을 즈음의 오다 가문은 오와리 슈고인 시바씨를 괴뢰로
만들고 정권을 잡은 센고쿠 다이묘였으며, 내부 분열로 인해 아버지 노부히데가 속한 오다 단조노츄가,
오다 야마토노카미가에, 오와리의 상 4군의 슈고다이인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등 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오와리는 시바 가문이 슈고로 통치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가신이었던 오다 가문이 실권을 차지하였으며,
이 시점에서는 다시 오다 가문의 방계이자 가신이었던 오다 노부히데가 실권을 쥐고
있었으니 오다 노부나가는 신분상 가신의 가신이었는데 센고쿠시대 일본은 이런 하극상이 많이 있었습니다.
노부나가가 나고야성에서 머무르던 어린 시절에 오다 가문에 인질로 잡혀왔던
마츠다이라 타케치요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친하게 지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대 사료에는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 보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만 13세인 1547년 원복 (성년식?) 하여 첫 전투에 나섰고, 이듬해인 1548년에는 오다
노부히데가 살무사로 불리는 미노 (기후현)의 사이토 도산과의 전쟁을 끝내고
화해의 징표로 정략결혼에 합의하니 만 14세에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결혼합니다.
부친이 사망하자 가신인 시바타 카츠이에등은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카츠를 옹립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장례식 때 노부나가는 아버지 시신에 향을 한사발 뿌리고
그대로 불을 붙여 화장을 시켜버렸으니, 매장을 했던 일본 문화권에서는 경악할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가신 중 한 명은보필을 잘못한 책임을 지고 할복 자결을 하였으니..... 이는 전통적인
것을 꺼리는 오다노부나가의 의 성향이기도 한데....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오다가의 세력들을 없애기 위해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모리 요시나리를 끌어들여 대립합니다.
1552년에 오다가의 종가인 키요스 오다가의 사카이 다이젠이 후카다성을 침공해 성을
함락하고 노부나가의 삼촌 노부츠구를 인질로 잡자..... 격노한 노부나가는
즉시 군을 이끌고 달려갔고 그후 가야즈 지역에서 키요스군을 맞이해 대승을 거둡니다.
1554년오다가 종가인 오와리 수호대 오다 노부토모의 지지로 동생 노부유키가 다시금 모반을 꾀하나 시바타
카츠이에의 밀고로 발각되어 노부유키는 살해당했고, 오와리의 명목상 최고 통치자로 노부토모와 일을
같이 하던 시바 요시무네가 노부토모의 음모를 노부나가에게 밀고했던지라 분노한 노부토모에게
살해되자 노부나가가 종가 살해의 죄를 물어 노부토모를 죽이고는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멸망시킵니다.
노부나가는 책략을 통해 미카와 호족인 미즈노 가문을 이마가와가에서 오다 가문으로 배반시키자 분노한
이마가와 측에서 미즈노 가문을 응징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침략해 미즈노 가문을 멸망시키고
무라키성을 건설해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는 군대를 이끌고 무라키성을 공격해서 승리합니다.
1556년 4월 장인으로 다이묘 토키 가문을 내쫒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사이토 도산이 "나가라가와 전투" 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남 사이토 요시타츠와 싸움에 사망하니, 노부유키 파는 노부나가가 도산의 지지를 잃게 된 것을 호기로
여겨고는 9월 27일 군사를 일으켜 노부나가와 "이노 전투" 를 벌이지만 패배해 스에모리성 (末森城) 에 틀어박힙니다.
노부나가는 어머니 도타고젠의 중재로 노부유키와 카츠이에 등을 사면했지만, 2년 후 노부카츠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노부카츠의 중신 시바타 카츠이에가
반란 계획을 미리 노부나가에게 밀고한 덕분에 노부카츠를 회유해 나고야성으로 끌어들인후 살해합니다.
또 다른 방계 가문인 이누야마 오다가의 가주 오다 노부키요와 연합해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의 거성 이와쿠라성을
함락해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도 멸망시키니, 방계 혈통이던 노부나가가 실질적으로 오다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오와리 동남부는 이마가와 가문이 점령한데다가 또 다른 방계 가문인 이누야마 오다 가문이 존속했습니다.
1560년 6월 스루가· 도토미(시즈오카현) 를 지배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 (今川義元) 는 교토로 올라가 쇼군이
되기 위해 속국인 미카와국의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를 선봉으로 2만 5천(3만?)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로
쳐들어오니 오다 노부나가는 군세가 5천 뿐이라 가신과 병사 모두 멸망이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불안해 합니다.
하지만 그는 동원령도 내리지 않고 전투 작전회의 한번 소집하는 일 없이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노래와
춤으로 날을 지새니..... 모두들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항복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간자들에 의해 이 사실이 이마가와씨에 전해지니 이마가와군은 경계심이 풀어져 항복받을 날만 기다립니다.
"적을 속이려면 먼저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카와씨가 오케하자마 (桶狭間)
골짜기에 6천 본진으로 주둔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6월 12일 새벽에 잠을 깨서는
시동에게 말을 대기하라 이르고는 부인에게는 갑옷을 내오라 하고 시녀에게 찬밥 3공기를
부탁해 물에 말아 마신후 벼락치듯 말에 올라 출진하니.... 뒤따르는 무사는 6기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주군이 갑자기 출진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병사들이 모여들어 뒤를 따르는데 노부나가는 도중에
아쓰타신사 에서 승리 기원제 (실은 부하 무사들의 도착을 기다림?) 를 지낸후
2천명 눈속임 군대는 오다씨의 깃발을 들려서 도로로 진군시키고 자기는 1천명 결사대로 산을 넘습니다.
이마카와씨는 간자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가 실의에 빠져 자포자기했다는 정보에다가 서전의 승리로 방심하여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와리의 오케하자마계곡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중에 젊고 무모한 오다
노부나가 1천 결사대에 기습당해 전사하니 아들 우지자네는 우둔하여 이후 스루가국은 쇠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적을 속일려면 먼저 아군 부터 속이라” 는 말을 생각하다가 문득 어느 영화가 떠오르는데.... 연합군
은 노르망디 상륙을 감추기 위해 그리스에 상륙할 것 처럼 정보를 흘리니, 상륙시
후방 교란을 위해 그리스인을 잠수함에 태워 독일군 치하 그리스인 레지탕스 부대와 접선하게 합니다.
그러고는 이 사실을 독일군에 흘려 상륙한 현장에 독일군이 총격을 가해 그리스인 레지탕스 요인들은 전멸하고 저
그리스인 첩보원은 잡히는데, 고문받으며 한계에 달하면 연합군이 언제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실토해 주어야
하는데 요원이 애국심이 너무 지나치게 강해서 끝내 입을 다물고 죽음으로써 연합군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1562년에는 멸망한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의 영지에 대한 배분 문제로 동맹이었던 이누야마 오다 가의
오다 노부키요와 갈등을 겪으니 결국 오다 노부키요가 반란을 일으켰고, 노부나가는 2년에
걸친 싸움 끝에 이누야마성을 함락하고 노부키요를 오와리에서 추방하니 이로서 오와리 통일을 완수합니다.
이후 처 조카 사이토 타츠오키의 사이토 가문을 격파해서 미노(기후현)를 수중에 넣고, 당시 교토로 가는 통로인
비와호수 북부 오미국(시가현)의 중견 영주였던 아자이 카타마사에게 여동생 오이치를 주어 결혼시킵니다.
노부나가가 미노(기후현) 에서 사투를 벌일때, 기나이(교토지방) 에서는 호족인 미요시
요시츠구가 1565년 5월에 정이대장군 (쇼군) 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죽이는
하극상이 벌어지니 무로마치 (아시카가) 막부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사건이었습니다.
에이로쿠 정변에서 요시테루의 친족들은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야마토 (나라현) 에 기거하던
요시테루의 동생들 중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그후 요시아키는 에치젠 (후쿠이현) 의 아사쿠라 가문과 교섭해 야마토를
탈출했지만 아사쿠라씨가 교토를 진공할 마음이 없자 실망해 다시 오다 노부나가에게 몸을 의탁합니다.
노부나가는 아직 미노국 (기후현) 전체를 수중에 넣은 상태가 아님에도 요시아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고 미노를 평정한후, 무로마치 막부를 중심으로 역도를 타도하고 천하를
되돌리겠다는 뜻의 천하포무 (天下布武) 의 기치를 걸며 다음 목표를 기나이(교토 지방) 로 정합니다.
1568년 9월 7일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미노의 기후성에서 출발하니 기나이(교토) 의
여러 세력들은 미요시 가문의 편에 서서 군사활동을 준비하는데, 미요시 가문의 세력이 된
사카이는 해자를 파고 망루를 세워 군사방어 시설을 구축했으며, 에고슈(会合衆) 또한 방비를 구축합니다.
9월 25일 비와 호수 남부 롯카쿠 요시카타의 오미국 간논지성을 무력으로 통과해 미요시 산닌슈
세력의 거점 야마시로국과 셋츠국 일대에 이르니, 야마시로 쇼류지성
에 있던 이와나리 토모미치는 노부나가의 군세와 싸웠으나 열세가 계속되자 항복하고야 맙니다.
동쪽 중요 거점을 빼앗기니 미요시 가문의 나가야스는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 셋츠 아쿠타가와
야마성에서 간레이 격에 위치했던 호소카와 노부요시를 데리고 아와 (지바현) 로 도망칩니다.
노부나가의 군세는 미요시 가문에 의해 옹립된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거처하고,
미요시 가문이 보호하던 후몬지 (普門寺) 또한 공격하는 기염을 토하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쇼군 요시히데는 아와로 물러났으나 10월에 병사하고 맙니다.
미요시 세력을 물리친 노부나가는 30일 아쿠타가와야마성에 입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는데,
상락 (교토 상경) 이후 노부나가에 대한 축하 인사가 끝도 없이
이어진 것을 생각해 보면 미요시 가문의 옛 거성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노부나가는 기나이의 세력을 물리치고 교토로 입성하는데 성공하니, 원래의 명분대로 14대 쇼군 요시히데를
부정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새로운 15대 쇼군으로 세워 무로마치 막부의 존속에 진력하게 됩니다.
또한 기나이 원정 세력들에게도 논공행상을 하여 요시츠구에게는 카와치의 반을, 히사히데에게는
야마토를, 하타케야마 다카마사에게는 카와치의 반을, 이타미 지카오키, 이케다 가쓰마사,
고레마사 세 명에게 셋츠의 치교권을 부여하여 기나이의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합니다.
노부나가에 의해 기나이(교토 지방) 는 평정된 듯이 보였지만, 미요시 가문에게 형과 어머니를 잃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미요시 가문의 반공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아직 기나이가 완전히 진정된게 아니라고 판단한 요시아키는 규슈 북부를 두고 히로시마의 모리 모토나리와
규슈의 오토모 소린의 사이, 시나노국(나가노현) 북부를 두고 가이국(야마나시현)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국
(니가타현) 우에스기 겐신의 전쟁을 조율하며, 분쟁 상태에 놓인 다이묘들을 통합시키려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과연 요시아키의 걱정은 적중하니 기나이 (교토 지방) 는 미요시 가문을 필두로한 여러 반 노부나가 세력
과의 다툼에 시달리게 되는데...... 1568년 12월 28일 산닌슈 세력은 기나이에 상륙해
요시츠구의 성들을 떨어트리며 1569년 1월 5일에 요시아키가 거처하는 혼코쿠지(本圀寺) 를 습격합니다.
기세에서 밀리게 된 요시아키였지만 요시츠구 등의 다이묘들이 혼코쿠지 습격 소식을 듣고 지원군
으로 달려온데다가, 노부나가가 10일 교토로 복귀했기에.... 산닌슈의 세력은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아와 (지바현) 로 다시 철퇴했고 노부나가는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같은 편에 섰던 야와타 (八幡) 를 공격하거나 아마가사키에 불을 놓는 등 후환을 제거해 나갑니다.
1569년 8월, 노부나가는 이세의 키타바타케 토모노리에 대한 공격에 나섰는데, 상락 (교토 상경)
이전에 노부나가는 북이세의 칸베 씨에게 자신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양자로 보내 후계자로 삼기로 강요했으니 칸베씨는 노부나가에게 굴복한 상태였습니다.
기나이 (교토 지방) 를 손에 넣게 된 노부나가는 도시를 보호하고 장악하기 위해 사카이에 대관을 놓거나
아마가사키의 소츄(惣中) 를 동원하여 죠온지(長遠寺) 등을 조성하는데, 동세토내해에서 미요시
가문과 혼간지 세력에 대항해, 아와지에서 수군을 이끄는 아타기 진타로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입니다.
1570년 4월 에치젠 (후쿠이현) 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비와 호수 롯카쿠 요시카타가 거병해 노부나가와
적대하기 시작하니..... 노부나가는 동맹 관계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끌어들여
롯카쿠 세력을 격파하고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을 멸하려고서 에치젠에 출병하니 가네가사키 전투입니다.
이때 매제인 오미국(북 비와호) 아자이 가의 나가마사는 아버지때 부터 아사쿠라 가와 동맹이었던 탓에 처남인
노부나가를 배신하니 가네가사키 전투이며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 동맹과 오다, 도쿠가와 동맹 사이에 큰
교전은 그해 6월에 벌어지니 오미 아네가와 (姉川) 전투로 승자는 도쿠가와군의 맹활약으로 노부나가 였습니다.
저 가네카사키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소수의 기병과 황급히 교토로
달아났고 본대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적군의 추격을 저지하는 부대를 정하는데
신가리라고 불리는 저 부대는 낙오되어 전멸을 각오해야 하니 죽음의 부대라 지원을 망설입니다.
그런데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씨) 가 자원해 책략을 써서 위계로 적의 이목을 분산시키며 저지해서는
일부 손실만 입고 임무를 완수하니 출세길에 열리는데.... 아네가와 전투로 아자이씨가 망하니 그 땅을
하사받아 새로 나가하마성을 쌓고는 다이묘가 되어 어머니와 부인 네네를 성에 불러들여 호강을 시킵니다.
4월의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매제 아자이씨의 배신으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넉달 만인 1570년 8월 9일 (음력 6월 28일) 동맹인 도쿠가와군과
함께 아자이씨를 응징하러 출진하니 아네가와 전투 (姉川の戦い) 전투라고 합니다.
아자이씨의 오다니성 (小谷城)까 지 진군한 오다군에 맞서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아사쿠라 가게타케
(朝倉景健) 를 파견하니 아네가와 강변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28,000명과
아자이 · 아사쿠라 연합군 18,000명이 비와 호수로 흐르는 아네가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합니다.
전투는 도쿠가와군 대 아사쿠라군, 오다군 대 아자이군의 구도로 벌어졌는데 아자이군은 오다군에 비해
병력에서 열세였으나,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 (磯野員昌) 가 오다군 선봉 사카이 마사히사
부대를 돌파한 것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나가 이케다 쓰네오키, 기노시타 도키치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바타 가쓰이에 진을 격파해 오다군 13단 진 중 11단까지 쳐부수는 맹공을 보입니다.
그러나 오다군 후방에서 요코야마성 (横山城) 의 견제를 맡고 있던 이나바 잇테쓰 등의 구원으로 오다군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으며.... 도쿠가와군과 교전중이던 아사쿠라군은 병력 수로는 우세했으나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전장에 나오지 않아 사기가 낮으니 정면 돌파한 혼다 다다카쓰와 우회해 배후를 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활약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본대가 가세하면서 아사쿠라군을 격파합니다.
이나바 잇테쓰의 구원군을 시작으로 요코하마성 공격에 참가하던 우지이에와 안도 등이 가세해
아자이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우익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니.....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은 홋코쿠 방향으로 패주하는 동안 오다 군의 추격을 받아 다수의 전사자를 내었습니다.
전투는 오전 5시에 시작되어 오후 2시까지 이어졌다고 전하며, 전사자는 아자이·아사쿠라군 1,800명,
오다·도쿠가와군 800명에 부상자는 그 3배 정도로 추정되는데.... 전장 부근의
치하라 (血原, 핏빛 평원), 치가와 (血川, 핏빛 강) 라는 지명에서 당시의 격전 모습을 짐작하게 합니다.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자이 가문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 중신 엔도 나오쓰네와 친동생 아자이 마사유키
를 비롯 핵심적인 많은 무장이 전사하였고 아사쿠라 가문에서는 마가라 나오타카·나오즈미
형제 등이 전사하였으며.... 개전 당시 고전하였던 오다 군에서는 사카이 히사쓰네 등이 전사했습니다.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은 패배하기는 했으나 히에이 산의 승병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잇코 잇키와 손을
잡고 비와호 서쪽의 시가군 등에서 오다 군과 격렬한 공방전이 펼치니시가의 진(志賀の陣) 이며,
오다군 피해도 적지않아 노부나가 친동생 오다 노부하루와 모리 요시나리·사카이 마사히사 등을 잃었습니다.
속을 끓이던 노부나가는 아자이· 아사쿠라를 지원하는 히에이산을 불태워버리는등, 주변 세력 정리에
착수하고, 군사력만으로 밀어부치기는 곤란하다고 판단해 아자이 가문의 내부 분열을
부추기는 모략을 실행하니 아네가와 전투에서 탁월한 공을 세운 이소노 가즈마사의 이반으로 이어집니다.
아네가와 전투 여파로 아자이 가문의 영지는 남북으로 분단되니 사와 산성(佐和山城) 의 이소노 가즈마사는 고립
되자 꾀많은 기노시타 히데요시는 아자이 가문에 가즈마사가 내통했다는 소문을 흘려 나가마사가
의심을 품게 만드는데 성공해서 물자 보급 요청을 거절하니 군량이 떨어진 가즈마사는 결국 오다군에 항복합니다.
아자이· 아사쿠라 가문은 1570년 9월 가이의 다케다 신겐과 혼간지 겐뇨 등과 손을 잡아 노부나가 포위망을
형성해 사카모토에 진을 놓고 야마시나고 (山科郷) 를 불태우고 다니는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니
노부나가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카게에 속했던 교토 엔랴쿠지 절을 불태우고 승려와 신도들을 무차별 학살합니다.
일본 중세사 연구에 절의 내부 문서가 중요한 자료이고, 엔랴쿠지는 역사가 깊은 절이기 때문에 엔랴쿠지 방화
때문에 날려먹은 사료의 규모가 큰데, 역사학자 이토 마사요시는 《사사(寺史) 세력의 중세》라는 책에서
"노부나가는 역사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원망스러운 인물이다. 노부나가놈!" 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했습니다.
셋츠에서의 공작에 성공한 미요시 산닌슈 세력은 1570년 7월 노부나가에 대한 병사를 일으키니, 노부나가는
히로시마의 모리 테루모토에게 "셋슈에서 착란이 발생했기에 4일 상락하였습니다. 로닌들은 무사히
소멸하여 하향하고 있으나 각별한 주의를" 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서장을 보내니 다시 기나이를 평정한듯 합니다.
하지만 셋츠 (효고현) 미요시 세력은 소멸되는 일 없이 오히려 세력을 불려나가니 8월에 거점을 노다
(野田)와 후쿠시마 (福島) 로 정하여 셋츠에 뿌리를 내렸으며, 9월이 되자 혼간지 세력을
노부나가 포위망에 끌어들였고.... 산닌슈 세력은 아와(지바현)에 남아있던 미요시 가문의
당주 미요시 나가하루와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9월 27일 시코쿠군과 함께 기나이에 상륙시킵니다.
혼간지 세력과 혼척관계인 나가후사에겐 혼간지 켄뇨의 맹약 서장이 9월 19일과 10월 1일 보내지니, 아와의 2만과
합쳐 3만의 군세를 규합하는 것에 성공한 미요시 가문은 셋츠의 카와라바야시성이나 이바라키성을 공략하고
교토를 목전에 두니... 미요시 가문이 노부나가 포위망에서 이시야마 혼간지와 함께 서쪽의 주력을 맡았던 것입니다.
혼간지와 미요시의 대세력에 가로막힌 노부나가는 오미국(비와호수)으로 출병을 계속하는 아사쿠라 - 아자이 동맹을
손수 막기 위해 미요시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노다, 후쿠시마성의 포위를 맡기고 사카모토로 떠납니다.
이후 셋츠 전선은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고, 주력 세력 중 하나였던 혼간지(오사카성)의 켄뇨는 10월 30일에 소렌인
(清蓮院) 의 몬제키(門跡) 손쵸 호신노 (尊朝法親王) 의 중개를 받아들여 노부나가와 강화를 맺게 됩니다.
미요시 가문 또한 한 달 정도를 버틴 11월 21일에 나가후사가 히사히데를 중개로한 강화를 받아들였기에,
노부나가는 서쪽의 전선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에 성공했는데, 중재의 결과 노부나가는
히사히데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여 나가하루와의 혼인을 성사시켰기에 미요시 가문과는 혼척 관계가 됩니다.
한편 적대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새로운 영지를 갉아먹는 와중에, 노부나가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관계는 점점 험악해져 갔으니 결국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다케다, 호조 등의
세력에 고나이쇼를 보내며 자신 또한 노부나가 적대세력으로 참전할 것을 결의할 지경에 이릅니다.
이로서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적대하게
되는데, 노부나가의 군세에 의해 친 노부나가 세력에 복속되었던
미요시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또한 쇼군의 움직임에 빠르게 반응해 나갑니다.
이들은 5년에 걸쳐 적대해온 미요시 산닌슈 세력과 강화를 맺어 자신들이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 참전한다는
것을 알렸으며, 히사히데 부자가 1571년 5월 6일, 요시츠구가 6월 11일에 거병하여 카와치의
하타케야마 가문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완전히 노부나가를 져버리고 쇼군의 편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이들은 7월 4일에 야마토, 15일에 셋츠 타카츠키성의 와다 코레마사, 8월 4일에 츠츠이 준케이,
10월 15일에 아와 세력의 원조를 받으며 야마토를, 11월 14일엔
다시 카와치를 공격하는 엄청난 활동을 보여주며, 노부나가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게 됩니다.
더욱이 규슈 비젠의 전선에서 군사를 물리고 돌아온 시노하라 나가후사 또한 요시츠구, 히사히데와
동맹을 맺고 7월 12일 즈음엔 기나이에서의 행적이 보일 정도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기껏 안정시켜 놓았던 서부전선이 급속히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11월 8일에는 나가후사, 요시츠구, 히사히데, 미요시 야스나가 등이 타카야성을 포위하고, 츠케지로 (付城)
를 쌓는 등의 군사활동을 보이면서 노부나가를 더욱 압박했는데, 이 기나이의 미요시 연맹은
신부이자 예수회 일본 포교장이었던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카브랄 인도 관구장에게 보내는 서한에 나타납니다.
1572년 9월 23일 서간에 "근처에서 아와(지바현) 및 하나의 쿠니의 주인인 시노하라공이 쿠보님을
살해한 미요시공과, 단죠 공 또한 함께 군사를 이끌고 쿠보 측의 성들을 포위
하고 있습니다." 고 나타나 있으니 미요시 세력이 격하게 노부나가의 영역을 들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와중에 동부 전선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아자이 연합과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1572년 아자이 나가마사
의 본성인 오다니성을 포위해 아네가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그후 1572년 10월 드디어
다케다 신겐이 대군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전력을 비교하면 노부나가의 전력이 신겐의 전력 보다 컸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였기에 노부나가는 군대를 더 모아 신겐을 막을 여력이
없었으니.... 2만여명 군세인 다케다 신겐은 1572년 음력 12월 22일 노부나가의 동맹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1만여명을 도토미국 하마마쓰성 근처인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격파합니다.
일본이 작은 나라는 아니니..... 규슈 사쓰마 (가고시마) 에서 일본 중앙부인 교토 까지 거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전라남도 목포에서 두만강 까지 가는 거리 보다 더 먼데.... 그럼 저
교토에서 또 북해도 까지 가는 거리를 더하면 일본이 지리적으로 큰 나라라는걸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