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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50 - 강건성세를 자랑해 국위를 떨친 첫째 강희제!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6.03.21|조회수110 목록 댓글 0

 

중국 50 - 강건성세를 자랑해 국위를 떨친 첫 번째 황제인 강희제!

 

 

1643년에 청나라 2대 황제 청태종 홍타이지가 죽으니 9남 아이신기오로 푸린 (愛新覺羅 福臨 애신각라

복림) 이으니 순치제로 청태종 홍타이지가 못이룬 중국 정복은 6살에 불과한 순치제의 섭정을

맡은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 호쇼이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愛新覺羅 多爾袞) 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다음해 1644년에 이자성이 베이징을 함락해 명나라 숭정제가 자결하고 산해관의 오삼계기 청에

귀부하자 남진해 베이징에 입성하니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것인데, 만주족의 나라 청은

중국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남명 정권이 있던 강남 쪽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갔으니 양저우 (揚州) 나 쑤저우 (蘇州) 등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집니다.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은 뒷머리만 남기고 앞머리만 미는 그런 변발이 아니고.... 뒤통수에

동전 크기만 한 부분만 제외하고 모조리 밀어버리는 일명  '금전서미라 불리는 변발이니,

19세기 말 조선의 단발령 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한족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원나라 몽골인들도 변발을 했지만 만주족이 강요한 금전서미는 다른 이민족계 왕조들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강압적이라 한족에게는 큰 수치였는데, 청나라는 변발을 거부하는 한족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한인들이 학살당해 강남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었으니... 한족의 저항 의지를 영원히 꺽으려 한 것입니다.

 

이후 순치제는 굴복한 한족에게 융화정책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지만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강온 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는데, 황비홍 머리로 불리는 변발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고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만주족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다만 초기에는 장난(강남) 에서 수만명을 죽이고 장인시에서 십만명을 학살하는

잔혹한 수단으로 강요했으나 나중에는 혼란한 정세와 전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하게됩니다.

 

의복은 관리들에게는 만주족 의복을 강요하고 신민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결국 만주족의 의복을 입고

다녔으며... 그러나 전족은 홍타이지, 순치제, 강희제가 적극적으로 제거해도 근절하지 못했는데, 만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중시해 전족을 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죽이기도 했으나, 오히려 만주족에게 까지 유행합니다.

 

 

입관후 하급 행정구역 부나 현의 수장은 지나치게 적은 인구 때문에 한족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총독과 순무를

비롯한 고위 지방관들은 명나라 때의 총독, 순무가 누리던 권한을 팔기에서 파견된 주방팔기의 장군에게

상당부분 이양해야 했고 그나마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요충지의 총독, 순무는 기인 중에서만 보임되었습니다.

 

16612월 순치제가 죽고 3남인 강희제가 청의 4대 황제로 즉위했는데.... 강희제는 1654

(순치 11) 경인궁 (景仁宮) 에서 순치제의 3남이자 후궁인 서비 동 () 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강희제는 청나라 역대 황제 중에 처음으로 자금성에서 태어난 황제 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잘 읽고 활도 잘 쏘는 등 다재다능해 조모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사랑

받았으니 영특함으로 인해 순치제의 사랑도 받았다고 하는데...... 강희제 본인은

환갑이 되었을 때 부모 슬하에서 하루도 기쁨을 얻은 적이 없는게 평생의 한이라고 술회했습니다.

 

7살 때인 1660년 강희제는 황태자로 정해졌으니 어머니 서비 동씨가 승은공 동도뢰(佟圖賴) 의 딸로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황후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 위로 황차자

복전이 있었는데 복전의 생모가 집안은 좋았지만 복전이 한쪽 눈에 장애가 있어 황위를 잇기는 부적합했습니다.

 

 

그해 11,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져 현비 동고씨가 천연두에 걸려 죽으니 순치제는 그녀를 효헌단경

황후 동고씨 (孝獻端敬皇后 棟鄂氏) 로 올리고 명복을 빌게 했지만 아직 젊은 순치제는

비통함에 빠져들었으니 세상사에 지쳐버리고 의욕을 상실해 병에 굴복하니 어떤 처방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히오완예이가 8세가 되던 16612,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황제는 아담 샬에게 만약 자기가

살아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누가 황위를 계승하면 좋을지,

현명한 판단을 부탁하자 아담 샬이 불러준 이름은 히오완예이로 이미 천연두를

한번 앓고난 뒤라 오랜 재위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인데 순치제는 망설였지만 동의하고 죽습니다.

 

166125일 순치제가 사망하자 히오완예이의 할머니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문

황후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신료들과 친왕, 군왕들을 불러 후사를 논의하였고

이후 유조에 따라 황태자 히오완예이가 새 황제로 추대되어 청나라 제4대 황제로 즉위합니다.

 

 

강희제는 어머니 강비 퉁기야씨와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를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1662년에 연호를 순치(順治) 에서 안녕과 평화를 뜻하는

()' , 조화와 흥성을 뜻하는 '()' 자를 써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하는 연호 강희 (康熙) 로 개원합니다.

 

 

즉위 당시 너무 어려서 정황기 출신 감국 대신 겸 이부상서 허서리 소닌, 양황기 출신 병부상서 구왈기야 오보이

(瓜爾佳鼇拜, 과이가오배), 정백기 출신 형부상서 나라 숙사하, 양황기 출신 호부상서 니오후루 어빌룬

보정 대신 4인과 최종 결정권자 효장태황태후가 대리 통치를 담당했으며 결국 오보이가 최고 실력자가 됩니다.

 

중앙집권 정책과 한인등용을 놓고 순치제는 효장태후와 만주 원로대신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오보이와

어빌룬은 양황기의 원로대신이자 효장태후 파벌의 핵심인사였고 정황기의 소닌과 정백기의 숙사하는

순치제의 총신이었으니 효장태후는 자신의 측근 오보이와 어빌룬에게 힘을 실어주면서도

순치제의 파벌을 다독이기 위해 소닌의 손녀를 황후로 간택하고 숙사하를 보정대신으로 임명했습니다.

 

 

강희제는 부친 처럼 한시 (漢詩) 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인 유학자들을 회유하고자 유학자의 이미지

구축하기 시작했으니 오보이는 강경한 한인등용 반대론자였는데, 그러나 효장태후는

여전히 한족 문화를 혐오했지만 순치 연간 보다는 한인 등용에 대해 온건한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보이는 효장태후 뒷배로 방자하게 굴며 황권을 위협했고 숙사하를 죽이면서 선을 넘자 오만방자한 태도와 권력

남용은 성장중이던 강희제에게 위험했으니 오보이의 측근들은 조정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밀려났고 오보이는

1669년 강희제가 주도한 친위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잃게되니 16세 강희제는 죽을때까지 직접 나라를 다스립니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할 당시 앞잡이로 활약한 한족 무장인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3인은  공적을 통해

사실상 자치를 할수 있는 왕 직위를 받으며 이른바 삼번 (三藩) 을 형성했으니, 오삼계의 운귀(운남,

귀주), 경중명의 복건, 상가희의 광동을 차지해 왕 직위를 받은뒤 사실상 반 () 독립 왕국을 세웁니다.

 

그들 세명의 왕이 이 가진 군사력과 경제력은 청 정부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니 강희제는

삼번이 청 정부의 강남 직접 통치에 방해되는 애물단지라고 판단하고,

이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니 삼번은 강희제의 의도와 조정의 변화를 보고는 긴장합니다.

 

 

순치제의 측근 소닌과 순치제의 측근이자 오삼계와 사돈인 숙사하가 죽으면서 삼번

유지론자인 강력한 중신들이 조정에서 사라지고, 강희제는 삼번

폐지론자인 나라 밍주(납란 명주) 와 푸차 미스간 (부찰 미사간) 의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으니 삼번왕 중 상가희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것으로 상가희가

요동 사람인데, 나이가 많아 죽기 전에 고향이 보고 싶어진 것이니, 강희제는 대범하게 받아주긴

했지만.... 동시에 그가 지배하던 번을 없애버리는, 즉 철번 (撤藩, 번왕국을 폐지함) 을 해버리고 맙니다.

 

 

광동의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상가희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인데,

하지만  상가희는 본인이 왕위를 물러나고 싶다고 하였고 황제가 이런

무리한 제안을 들어준 것이라 철회하기도 어려우니 일단은 황명을 따르기로 합니다.

 

이에 삼번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오삼계는 강희제를 떠보기 위해 자신도 같은 주청을 올렸는데,

강희제는 상가희 때와 마찬가지로 대응하자 오삼계는 '강희제가 우리를 제거하려 하는구나'

라고 판단해서 이에 불응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1673년에 터진 반란을 삼번의 난이라고 합니다.

 

 

1673년 운남과 귀주를 다스린 평서왕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켜 호남성으로 진격하자 경중명의 번왕

자리를 세습했던 복건성의 정남왕 경정충이 합세하고, 상가희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장남 상지신이 아버지 평남왕 상가희를 감금하고 반란에 가담하면서 난의 규모가 커집니다.

 

오삼계는 직접 군을 이끌고 청군을 농락하며 강남 일대를 통째로 쥐고 흔들 정도로 위세를 떨치자

강희제는 진압을 명하지만....... 오삼계군은 팔로군을 격파하고 사천을 거쳐  서안

(장안) 까지 진격하고 강남은 한족이 수복했으며 오삼계는 형양에서 주() 나라 황제에 오릅니다.

 

 

조선은 병자호란후 심양에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어 명에 대한 의리와 삼전도 치욕을 씯고자 박서, 원두표

및 이완의 도움에 북벌을 위해 군대를 양성했으나 죽고 1673년에는 현종 치세인데 여진족은 인구가 100만에

불과하니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대거 이주한지라 만주는 심양을 제외하고는 비어 봉금지로 묶인 상태 였습니다.

 

때문에 삼번의 난으로 중국 강남과 서부가 모두 한인의 손에 들어가 청나라가 곤경에 빠진

이때 진격하면 텅빈 만주를 차지하는 것은 아주 쉬웠으며, 문제는 반격 인데,

청나라 자신이 위급한 지경이라 8기군을 되돌릴수는 없으니.... 고구려땅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였으나 소심하고 비굴하며 겁이 많았던 조선의 지도층은 끝내 결행하지 못합니다.

 

 

중국 주변의 나라들은 조선만 빼고 모두 다 중국을 정복했으니.... 중국대륙 전부를 정복한건 몽골족의  원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이고, 북부 황하강 유역인 중원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운건 흉노족, 갈족, 선비족, 강족, 저족

이었으니 저족의 전진은 100만 대군으로 강남의 동진을 공격했고 그후 탁발씨 선비족은 북위를 세웠으며

이후 거란족의 요나라는 북부 일부를 점령했고 여진족의 금나라는 북부를 차지하고 개봉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중국을 수시로 침략해 약탈하고 금은과 비단등 세폐를 받아챙긴 나라들은 흉노족에 이어 돌궐이 그러

했으며, 탕구트족의 서하는 송나라를 후려쳤고 티베트족의 토번은 국경을 침범해 수도 장안을

노렸으며 바이족운남에 대리국등 나라를 세웠고 베트남도 광동성 일부를 점령했었는데.... 현종때

효종이 물려준 군대로 압록강을 넘었으면 만주는 물론이고 북경까지 노릴만하니 중국은 3분 되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강남에서 3번의난을 일으킨 한족들은 자고나면 조선군이 만주로 들어왔느냐고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1674년에, 조선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해 조대비가 상복을

9개월(서인) 입을지, 아님 1(남인) 입을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국운(?) 을 건 당쟁에 빠집니다!

 

자칫하면 청 왕조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으나, 강희제는 서전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엄격히 병사들을 단속

하고 직접 전략을 총괄했는데, 친청 반민족행위자 오삼계는 중국 한족에게 조차 흔쾌히 협력하기 힘든데다가

오삼계가 갑자기 급사하는 천운을 얻은 청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하자..... 순식간에 오삼계의 세력은 줄어듭니다.

 

 

8년간의 전쟁 끝에 1681년 오삼계의 근거지 쿤밍이 함락되고 일족이 몰살되면서 삼번의 난은

왕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1644년 입관(入關) 40년만에 실질적으로 청 왕조가 중국

전토의 직접 통치권을 갖게 되는데, 난의 후반부에 조선은 숙종 치세로 윤휴가 북벌을 주장했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북벌론을 내켜하지 않았는데, 삼번의 난 주동자들은 명분이 적고 조선은 오랑캐에게 복수하자는

정도니 삼번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도 있지만 조선인들은 기개가 없었으며 문신들의 나라이다 보니 고구려

구토를 되찾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청군의 보복공격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입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 동안 강희제는 북방의 압박도 받았으니 제정 러시아가 지원한 러시아 탐험가들이 동방을

개척하는 시기였고, 시베리아를 지나 청나라 북방 영토인 만주와 내몽골로의확장을 노렸는데, 이에

몽골계 오이라트 계열 부족 연합체인 준가르가 러시아에 협력하면서 청의 북변 (北邊) 치안은 위태로워 집니다.

 

 

강희제는 1683년 대만 정복을 통해 남방의 변란 위협을 제거한 뒤에 북방 문제에 뛰어들었으니, 대만과

펑후제도의 36개 섬은 정성공이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 정경이 세운 동녕왕국

(명정) 이 지배하고 있었으니 이들은 삼번의 난에도 가세했던 만큼 큰 위협이었기에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정경이 죽자 풍석범이 정극상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사태가 변하는데, 정극상은 고작 12살이라 실권은 풍석범

쥐고 있었으니 전횡을 휘둘러 불만이 발생하게 되자 강희제는 때는 지금이라는 걸 깨닫고 요계성

(姚啓聖) 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고 수사제독 (水師提督) 시랑 (施琅) 을 파견하여 동녕 왕국을 침공합니다.

 

 

문제는 시랑이 과거에 정경의 부하였으니 배신할 것이니 뭐니 하는 말이 많았으나 강희제는 경을

믿는다고 말하였고 감격한 시랑은 맡은 일을 멋지게 해치웠으니, 강희제는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는 대신 오히려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면서 정성공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준 것 입니다?

 

그 전에 간쑤성과 산시성의 태수 왕부지, 차하르부 등이 베이징 교외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강희제는

침착하게 대응해 모두 진압했으며..... 1683년에는 동녕 왕국(명정) 을 펑후해전에서 승리해 멸망

시킨후 정성공의 손자인 정극상에게 해징공의 작위를 내려 팔기에 편입하는 노련한 유화책을 선보입니다.

 

 

루스 차르국의 로마노프 왕조는 모피 무역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가는

무장 탐험가와 개척자들을 후원했고, 무장 탐험가들은 청나라와 사사건건

계속해서 충돌했는데..... 당연히 청나라 정부는 러시아인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나선정벌이 있었던 시기도 바로 이 때, 물론 청나라쯤 되는 거대한 나라가 소규모 탐험대에게 깨졌던

이유는 순전히 남명 정권과의 전투에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해야 하는 상황 때문 이었습니다.

 

 

1차 나선정벌은 1654년으로 청군 사르후다 1천명에 조선군(조총병) 100명 합게 1,100명에 비해

적은  스테파노프 휘하 400명으로 승리했으나 적이 요새로 도망치니 돌아왔고, 2차는

청군만 밍안다리 3천이 대포 15문을 자지고 갓으니..... 우세한 가운데 식량이 떨어지니 돌아옵니다.

 

 

3차는 다시 청군 사르후다의 2,740명과 조선군(조총병) 260명 합게 3천이 군함까지 준비해

강에서 적 함대를 공격해 적 탐험대를 격파하고 스테파노프도 죽여버리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문제는 러시아의 탐험대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665년 체르니코프스키가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 아르바진에 요새를 세우고 수령이 되어 10년간 통치했는데 꽤나

번영했기 때문에 이웃 네르친스크에 식량을 대 줄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니 러시아 조정을 고무시켰는데

청나라는 관리들을 파견해 러시아인들이 청나라 영토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으나 이 정도로 끝날리는 없었습니다.

 

1667년 아르바진 근처 한 부족의 수장 간티무르가 15년전에 청나라에게 귀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

이끌고 러시아 제국에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지자 강희제는 청나라의 영향력이 상실될 것

임을 잘 알았기에, 러시아에 사절을 보냈고 러시아도 청에 사절을 보내왔지만 별 성과는 없었습니다.

 

 

청은 1674년부터 지린(길림)에 팔기주방을 설치했고, 1676년 청에 온 러시아 사절에 간티무르를 송환할 것을 요청

했지만 러시아 사절은 거부했고, 청은 무력 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6년간 소규모 충돌 몇차례 외에

별 일이 없자 러시아는 청이 이 지역에 별 관심이 없다고 보고 아무르강에 군사를 보내 아르군강까지 드나듭니다.

 

청은 삼번의 난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도발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됐지만 강희제는 신중히 상황을 지켜봤고, 1683년 대만의 동녕왕국이 복속되어 남방이 안정되니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는데, 강희제가 신경쓴건 러시아가 준가르의 갈단 체렝과 손을 잡을 것인지 였습니다.

 

 

 

강희제는 병기와 식량을 모으고 조총을 개조했으며, 홍이포 보다 강한 대포를 주조하고, 역참제를 정비하며

조선소를 건설해 대형 범선을 건조하는등 준비가 모두 끝나고 1683년 이번원 상서

아이신기오로 아무훌랑은 러시아군에 서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러시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청은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했으니 정예 기병 1,000여기를 보내 아르바진을 포위했는데 아르바진의 군사는

450명으로 수성측이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군사의 정예도나 머릿수, 무기의 질과 양 등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니 헤이룽강 상류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보트를 타고 아르바진으로 갔지만 상륙도  못하고 격파당합니다.

 

 

치밀하게 준비한 청군은 러시아 원군에 대비해 잠수병들을 미리 투입한 상태였는데, 잠수병은 등패와

칼로  무장한 상태로 물 속에서는 깊은 곳까지 잠수해 러시아군의 사격을 피했고 사격이 멈추면

즉시 튀어나와 칼을 휘둘러대고는 적이 반격이 할때면 즉시 잠수하고는 했으니 지원군은 오지 못합니다.

 

 

이후 청군이 아르바진의 포위를 풀자 러시아군은 간신히 도망쳤고 아르바진은 초토화

되었는데, 아르바진의 군사령관은 톨부진으로 네르친스크로 후퇴하던 중에

구원병을 만났으니 네르친스크 독군 블라소프였는데 두 부대는 다시 아르바진으로 향합니다.

 

 

청군은 아르바진을 불태운뒤 돌아가 버렸으니 이들은 요새를 재정비하고 장기전을 치를 준비를

하자 1686년 강희제는 아르바진 요새가 재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탐을 한 바 과연 요새는 재건되어 있었으니 지난번 보다 두배 많은 2,000여명의 군사를 보냅니다.

 

청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해도 악착같이 오는 러시아 탐험대를 완전히 막으려면 의지를 꺾어야 했으니, 강희제는

장기전을 위해 청군 사령관에게 아르바진 주변에 해자를 파고 포위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아르바진은 보급이 끊겼고,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러시아군은 다급한지라 뗏목으로 해자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청군의 총격과 포격이 러시아군에게 쏟아졌고, 러시아군 중 적은 숫지만 건넜으나

살해당했고 사령관 톨부진도 전사하니, 이후 네르친스크 지원군 사령관 바이돈이 지휘를

맡았지만 800명의 병력중 이제 부상병을 빼고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100명뿐이었으니

혹시나 러시아와 갈단의 연합을 우려한 강희제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러시아에 서신을 보냅니다.

 

16869, 답변이 청에 도착했고 1687년에 청군이 퇴각함으로써 아르바진 전투는 완전히 끝났는데.... 계속되는

패배와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 때문에 러시아는 만주로 영토 확장을 포기하고 러시아의 상업 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하니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아무르강 이북 지역 및 외몽골 일부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합니다.

 

 

조약을 맺을 당시 러시아의 전권 대사는 골로빈이었으니 16878월 셀렌기스크에

도착해 그 곳에서 대화하기를 원해 강희제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갈단의

위협에 노출될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결국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16896월 러시아 골로빈의 사절은 1,000여명이었으나 청나라 송고투는 통역사, 승려 및 군사 10,000

이었는데, 조약으로 청은 헤이룽강 북안을 확보했고, 러시아는 북경과의 교역을 계속할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양측은 외몽골과 시베리아에서의 국경 확정을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추가로 맺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유럽식 '대등 - 평등' 조약으로, 한자로 된 문서는 전혀

작성되지 않았고, 러시아어, 만주어, 그리고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니 양국은 라틴어문서에

날인했는데, 북경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2명이 통역으로 참가했으니러시아측 협상단과

유럽공용어 라틴어로 의사 소통을 할수 있기 때문이니 화이 (華夷) 개념에 입각하지 않은 조약 입니다.

 

 

훗날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일방적으로 무느지자 러시아도 이때 맺어진 네르친스크 조약을

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파기할 것을 요구해 수용되었으며 2차 아편전쟁 때는

영불과 청나라간의 중재의 대가로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톡등 거대한 연해주를 얻어내게 됩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킨 강희제는 북정 (北征)에 나서 오이라트 부족 계통인 세계

최후의 유목 제국 준가르 (Züüngar) 를 토벌하는데, 준가르의 갈단 칸은 외몽골을 통합하고,

티베트와 연합해 청나라를 압박하려는 가공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기에 절대로 좌시할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688년 갈단은 야망을 드러내 외몽골의 할하족을 공격하니 할하족은 죽을 힘을 다해 고비사막을 건너 이 소식을

전하자 강희제는 직접 대군을 동원해 고비 사막 너머에 사는 할하족의 복종을 받았으며, 원정에서 팔기군이

전면전에서 패하고 강희제도 병에 걸리는등 고전했지만 서양산 대포의 힘으로 갈단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강희제는 갈단을 추격하려 했지만 군량이 부족하고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 포기했는데, 갈단은

포기하지 않고 1695년 다시 군대를 진군시켰지만, 정보망을 통해 알고있던 강희제는 병력을 이끌고

갈단을 추격하여 대포와 총으로 공격하였고갈단은 병력의 절반과 부인을 잃은채 서쪽으로 도망칩니다.

 

 

강희제가 3번째 원정에 나서려고 했을때 신하들은, "비루한 갈단은 곧 죽을텐데 사막으로 가서 고생하지

마시라" 며 막았고, 사냥 계획을 잡기도 하였지만 강희제는 다시 8만 군대를 이끌고 떠나 차오모도

전투에서 갈단의 준가르군을 섬멸하니 수세에 몰린 갈단은  1697년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자결 합니다.

 

3회에 걸친 친정을 통해 강희제는 준가르 군대를 격파해 위협을 제거하였고, 1697년 외몽골 지역 전체를 제패해

엄청난 판도를 구가하였으니, "갈단은 죽었고, 부하들은 모두 귀순하였으니 짐의 큰 임무가 완수되었다. 두 해

동안 짐은 3번이나 원정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는 사막을 건너면서 이틀에 하루씩만 음식을 먹었다

 

 

사막은 초목도 없고 물도 없는 곳이며 황사가 심해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런걸 고난이라

하겠지만, 천신만고 끝에 큰 공을 세웠는데 갈단이 없었다면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들의 도움을 입어 성공하였으니 짐의 일생은 즐겁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몽골은 일찍이 후금에 복속된 내몽골은 물론 이제 외몽골까지 복속되었지만, 강희제는 몽골의

전통을 존중해 몽골의 고유 제도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과거 내몽골의 차하르족과 결혼

동맹을 맺어 만주-몽골을 일체화한 것처럼 몽골 공주를 만주 귀족들의 아내로 맞도록

함으로써 북방의 강력한 민족인 몽골족을 회유하려고 했으니 황후들 중 몽골 출신이 상당히 많습니다.

 

 

갈단의 조카 체왕 랍탄은 후에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지를 건너 티베트를 공격해 포탈라궁을 약탈하자

강희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냈지만 패배하자, 이번에는 아들인 14번째  황자

윤정을 대장군왕으로 삼고 사천과 차이담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기어코 그들을 쫓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강희제는 기존 달라이 라마를 쫓아내고 7대 달라이 라마를 세워 티베트를 중국 영토에 포함시켜 대략의

판세를 만들었는데, 강희제가 티베트 불교를 챙겼던 이유는 예전에 갈단이 차지하고 있던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 라는 타이틀을 뺏어 몽골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였으니,

만주족이 티베트 불교를 손에 넣게 됨에 따라 몽골은 정신적으로 만주족 휘하에 들어간 셈입니다.

 

 

강희제 시기 청나라 영향권은 북동쪽으로 스타노보이 산맥, 서쪽으로는 발하슈호,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와

사할린에 이르며 명실상부한 동방 최고의 강대국으로 군림하는데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백성등의 삶 개선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으며 한족에 대한 가혹한 대우를 완화하고 부정부패를 혁파합니다.

 

진푸와 유성룡 등 능력있는 인물들을 기용해 황하를 치수토록 하는 대업적을 남겼으며 6차례에 걸쳐

남방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형편을 직접 살피고 하천공사를 감독했으니, 남서방

창설 처럼 학식있는 한족 관료 등용은 물론, 유럽 선교사들마저도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중용합니다.

 

 

강희제는 사절을 보내 한인 사대부를 초빙하면 등용을 거부하니 가마에 억지로 태워

시험장으로 끌고와 응시하도록 해 관료로 등용하려고 했더니 도망쳐버리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보아 일부러 낙제했기에 한족 관료를 얻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관리들에게 신망을 얻고 중국의 황제로서 위엄과 지혜를 보이기 위해 강희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해 막대한 지식을 쌓아올려야만 했는데,

학구열과 호기심은 유명해 대신들에게 잇따라 질문 공세를 퍼부어 쩔쩔매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양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해 예수회 선교사로 대표되는 당대의 유럽인들은 강희제의 풍부한

지식 교양에 감탄해 "가톨릭을 믿지않는 점만 빼면 최고 군주" 라고 칭송할 정도였으니 유럽인들이

16세기 중국에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래 이와같은 평가를 받은 중국 군주는 오로지 강희제 뿐이었습니다.

 

강희제는 중국 문화를 애호해 강희자전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하게 했는데 선교사들을 옆에 두고

그들로 부터 지리와 역사, 기하학, 근대 수학 등을 배웠고 서양의 역법이 우수한 것을

인정하면서 배웠으며 심지어 라틴어까지 배우려 했고 하프시코드까지 친 적도 있으며

저녁을 먹은후 예수회 선교사들과 수학 계산을 하며 자기가 푼 문제가 맞는걸 기뻐하는게 일상이었습니다.

 

 

강희제 시대에 활약한 유럽인은 아담 샬 (Adam Schall) 을 시작으로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 Verbiest),

토마스 페레이라 (Thomas Pereira),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 (Jean-François Gerbillon, 중국명 장성

(張誠)) 등이 있으니 주로 예수회 소속 선교사이며 천문 역법(曆法)의 계산과 도입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황여전람도 (皇輿展覽圖)' 와 같은 세밀한 세계지도가 중국에 등장한 것도 이들의 덕택이었지만 이 같은 유럽인

들의 활동은 예수회의 성공을 시기한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고발로..... 교황청이 유교적 예식을 채용하지

않도록 지시함에 따라 1693년 부터 20년 이상 배척받게 되는데 1720년에 교황이 보낸 특사 덕택에 해소됩니다.

 

 

강희제는 명대의 1년치 궁정 예산으로 당대의 국가 통치를 꾸려갔을 정도로 간소한 정부를 운영했으며 검소를

미덕으로 여겼으니 명나라 시기 수만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400명으로 줄이고, 스스로도 옷을

꿰매 입으며 모범을 보였으니 서양 선교사 조아킴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보낸 보고에서 "강희제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군주인데도 그런 군주답지 않게 검소하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강희제는 홍무제를 영락제와 함께 높이 평가했으며, 남순중에 주원장 효릉에서 3번 절을 올리기도 했으니, 존경심

표현할 겸 한족을 포섭하려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는데 사람을 쓰면서도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으니 대만 정복 당시의 인사와 삼번의 난 진압 중에도 한족 장수들을 크게 등용했습니다.

 

강희제는 여러지역을 시찰해 강남을 6회나 순행 (巡行) 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의 남부 지역을 직접

관찰하였는데, 군주의 시찰이나 순행이라고 하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많았지만,

강희제는 호위 군사도 대폭 줄이고 소요되는 비용도 경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를 편찬하며 본기, 열전, , 표 등이 완성될 때마다 전부 다 살펴

보고 과도하게 명나라의 황제들을 비난하는 편찬자에게는 주의를 주면서 말했는데....

짐은 군주로서 그들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 또한 보고 싶다." 하지만 정통성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대처했으니 두 번의 문자의 옥 사건인 명사안, 남산안이 대표 사례입니다.

 

강희제가 아직 어린시절, 죄를 지은 관리에게 노하여 사형을 명했고 그 관리는 요참형에 처해졌는데,

목도 아니고 허리를 잘랐으니 당연히 사형수는 즉사하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고통에

울부짖으면서 서서히 죽어간지라 참혹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강희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강희제 통치 초반에 구왈기야 오보이는 사람을 마구 죽였고, 강희제도 오보이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훗날 오보이에게서 정권을 되찾고 내린 처벌은 사형이 아니라 연금, 구족 몰살이

아니라 타지로 이주시킨 것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소년 황제의 아량을 칭찬했으며 청나라

를  멸망시킬수도 있었던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처벌은 최고 우두머리들에게만 내려졌습니다.

 

부하로서 반란에 적극 참여한 인물들에게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대신 그곳을 바탕으로 먹고 살수 있게 해

주었고, 그 후에 자식들은 아무 문제없이 과거시험을 볼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니, 사상 탄압인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도 있었지만, 규모는 강희제 때가 작았고 옹정제- 건륭제를 거치며 매우 커진 것입니다.

 

 

청나라가 중국에 들어왔을 무렵, 명나라는 상황이 엉망이었고 여진족 역시 한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는데, 사방에 산적과 반란군이 들끓었으니 강희제는 이들을 진압했지만,

사정을 살펴보고 생계가 어려워 가담한 사람들은 오히려 살 곳을 마련해주고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습니다.

 

청나라는 강희제 통치 61, 옹정제 13년 그리고 건륭제 통치 60년으로 135년간 세계 최강대국 으로

영화를 누렸으니.... 고사성어에 "강건성세 (康乾盛世)" 1661년 부터 1796년 까지 135

동안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인데 172212월 강희제가 죽고 넷째 아들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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