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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19 - 명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진해 한성을 되찾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6.04.01|조회수45 목록 댓글 0

 

일본 19 - 임진왜란 도성 함락후 명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진해 한성을 되찾다!

 

 

조선군이  도주하는 바람에 한성을 무혈 점령한 일본군이 북상하자, 조정은 5월 3일 개성에서 평양으로 향하며

김명원에게 임진강을 지키게 하는데....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과 함께 양주 산에서

군사들을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하다가 함경도 병마 절도사 이혼이 이끄는 군사들과 합류해 반격을 기도합니다.

 

 

5월 16일 신각은 한양에서 나와 흩어져서 민가를 노략질하던 소수의 방심한 왜군을 복병으로 격파해 60여명을

죽였으니 개전 이래 최초의 육전 승리로 해유령 전투로 불리는데.... 장계 한장도 없이 어디

있는건지 알 길이 없어진 부원수를 두고, 김명원은 적전도주한 것으로 판단하고 도망갔다며 조정에 보고합니다.

 

비변사는 우의정 유홍이 주도해 신각의 참형을 건의했고 선조는 허락하니 이런 성급한 결정은 온건한 류성룡

이 탄핵당하고 강경파 신료들이 득세한 영향으로 보이는데.... 정규군이 모두 왜군에게  비참하게 깨진

상황이라  '일단 누구라도 걸리면 무조건 엄벌을 내려 일벌백계를 내릴 필요가 있다라는 여론이 대세였습니다.

 

 

그런데 신각을 참하라는 명을 받은 선전관이 떠난후 승전보가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급히 사람을 보내 사형

집행을  멈출 것을 명했지만도착했을 땐 이미 신각의 목이 떨어진 다음이었으니, 억울하게 죽은데다가

구순의 노모 까지 봉양하고 있어 신각의 죽음을 들은 사람치고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결과적

으로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든 꼴이 되어버렸고.... 이에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고 했을 때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이순신의 구명과 재 기용에 힘씁니다.

 

 

신각과 함께 참전한 우의정 이양원과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도 끝이 좋지 못했으니 이양원은 선조가 요동으로

파천했다는 오보를 접하고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다 자살로 마감했고이혼은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

를 공격할 때 왜군에 협력한 백성들에게 살해당했으니, 해유령 전투 승리 3인방이 모두 비참하게 죽은 것 입니다!

 

 

물론 최초 승전은 열흘 빠른 이순신의 옥포 해전이지만 남해안에서 전투라 수도권 전투 보다 승전보가 늦게 올라

갈 수밖에 없어 승전 소식은 해유령 전투가 더 먼저 조정에 도착했으며.... 또 왜군의 북상을 피해 도망치던

조정에서는 머나먼 변방의  승리는 가슴에 와닿지 않았으니,  당장 적군의 추격을 발꿈치에 달고 도주하던지라!

 

 

이순신 혼자 맹활약한 바다와 달리 육지에서 전황은 매우 처참한 수준이었으니 이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병 (神兵)' 이나 다름없는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조선군과 백성들은 혼비백산하기

일쑤였고 엄폐물의 도움을 받을수 있는 수성전이나 해전 외엔 사실상 제대로 된 교전이 불가능했습니다.

 

노략질에 정신이 팔려 방심한 소규모 왜군을 매복했다가 기습했지만일본군을 백병전에서

꺾었다는  소식은 조선인 들에게 정면승부도 해 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이치 전투나 우척현 전투등 성 밖에서도 분전한 사례들이 생겨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등 육지에서도 일본군을 저지할수 있게되는 발판이었습니다.

 

 

임진강에 조선군 1만 3천명이 총집결하니 가토 기요마사는 한강때 처럼 배가 없는지라.....

막사를 걷어 물러가는 시늉을  하니속은 한응인은 속임수로 의심된다는 장군의

목을 베고 도강을 강요했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살해당한후 적이 강으로 되돌아오니

조선군이 타고간 몇척의 배가 있으니 배를 띄우자 강 건너 조선군은 겁에 질려 모두 달아납니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의 군사 4만에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과 경상도 관찰사

김수까지 5만명의 군대가 북진하면서 지방군과 민간인의 참가로 세를 불려 8만에

이르러 한성 수복을 목표로 북상하자 평양의 선조는 남도근왕군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수군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초전에 경상도 좌우 수군 판옥선 100척이 전투없이 와해되어 버리자

수군으로는 더 할 일이 없으니.... 배를 버리고 육군이 되어 북진해 자신은 1천명으로

서울에 주둔하고 부장 와타나베 시치에몬등 6백명은 용인 산채에 배치했는데 광주유수

권율은 그냥 지나가자고 했으나 이광은 병사가 50배니 서전에 승리로 사기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이광이 6월 4일 백광언에게 공격을 명하자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서울에서 내려와서 보강된 문소산을

6월 5일 2천 조선군이 진격했으나 패했으며, 6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군 1천 6백명이 아침밥

을 짓던 조선군을 향해 돌격해 내려오자....... 급습당한 8만 조선군은 달아나느라  밟혀죽고  깔려

죽으니 후퇴해 집결한 부대는 권율의 1천에 별부장수 황진의 5백명 뿐으로 흔적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조선군 50명이 일본군 한명에게 패한 것이니 마지막 희망을 잃고 낙담한 선조는 평양에서 달아

나면서  좌의정 윤두수도원수 김명원이조판서 이원익등에게 수비를 지시했는

....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도착했으나 배가 없는지라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자

전공을 탐낸 윤두수는 고언백에게 밤중에 병사 400명을 거느리고 왜군 진영을 기습하게 했습니다.

 

 

기습을 하다가 여의치 않자 후퇴하면서 왕성탄(王城灘)을 걸어서 퇴각하니 수심이 얕은 곳을 알게된 왜군이

건너오자 동탄(東灘을 지키던 김억추허숙과 왕성탄을 지키던 박석명오응정이 싸우지 않고 도주하니,

평양성의 윤두수와 김명원은 무기를 풍월루 연못에 집어넣고 달아났으니 선조가 이런 조선군을 어찌 믿으리요?

 

구원군을 보대 달라는 조선에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로 일본군을 인도해 오고 있다고 의심했으니 첫째

일본 거주 중국인과 유구국 및 태국등을 통해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정작

조선 조정은 일본과 접촉한 문제로 긁어 부스럼이라며 알리지 않다가 유성룡 주장으로 알린게 가장 늦었습니다.

 

 

두 번째는 조선은 산이 많은데다가 포장 도로가 없으니 우마차가 없고 강에도 다리가 없는지라

장정이 부산에서 걸어서 서을까지 오면 스무날이 걸리는데조선의 수도 서울이 그

스무날 만에 함락됐으니 이는 도중에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세번째는 서울은 한강이라는 천헤 요새를 갖고 있고 서울도 성벽으로 둘러쌓였으니 일본군이 배를 머리에

이고 오는 것도 아닐테니 한강을 건널 방법이 없을텐데.... 그 한강과 서울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화살 한대도 날리지 않는등 전투 없이 수도를 내주었다는 것은 "서로 짜고 하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수 없었던 명나라는 관리를 보내 조선이 일본군의 앞잡이가 된게 맞는지 확인하는

평양성에서 유성룡이 강 건너 일본군과 대치중인걸 확인시켜주니..... 비로소 의심이 풀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군이 제대로 써우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패악질만 했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만력제는 먼저 은화 2만냥을 군자금으로 보낸후에 만주의 조승훈 부대 5천명을 보내 평양성을

공격하게 했고....  그후 발배의 난이 일어난 영하에서 몽골족 반란군과 싸우던 이여송의 군대가

마침내 힘겹게 승리하자 이 군사 4만 3천명을 전투 직후 쉬지도 않고 3천리를 달려서 조선에 보내줍니다.

 

 

조선 백성이 굶는다는 말을 듣고 명나라 최대 곡창 중 하나인 산둥성의 쌀 100만석을 은화 100만냥

을 주고 구입해 조선에 보냈는데 이는 조선 쌀 수확량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만력제는 이후 정유재란에도 연 인원 20만명의 군사를 조선에 파병했고그에 대한 비용으로

은화 500만냥을 마련해줬으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두 차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전후  복구를 위해 내탕금 (內帑金·임금의 개인재산에서 은화 200만냥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명나라가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조선 파병" 이니.... 7년간 연인원 25만을

보내 은화 700만냥을 썼는데나라를 세운지 224년이 지나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환관의

발호가 심해지고 농민이 토지를 잃는등 빈부격차가 심해져 쇠락해가던 중에 조선 파병을 하게 됩니다.

 

중국 역사에서 최대의 암군이라는 만력제는 태자 책봉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모후와 싸우고는

삐쳐서 정사를 팽개치고 궁녀들과 놀면서 술로 지새는 파업을 하면서 궁녀와 내시를

무려  "2천명"  이나 몽둥이와 가죽 채찍으로 때려죽이는 걸 즐기던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신하 만나기를 피하며 결제도 하지 않아 서류가 천장에 쌓였는데갑자기 180도 표변해

어전회의를 소집해서는 "각자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왜적을 평정할 계획을 글로 써서 바쳐라짐은 여러

의견의 장점을 모아서경들과 함께 '운주유악지중결승어천리지외 (運籌帷幄之中決勝於千里之外)' 하겠노라!"

 

 

북쪽 오이라트에 명나라 황제 영종이 포로가 되는 참변에다가 1550년에는 수도 베이징이 포위되는 경술

 변이 일어났고 남쪽에는 왜구가 분탕질을 쳤으며.... 당시에는 몽골족 발배가 영하에서  반란

을 일으키니 이여송등 명군 주력이 1년치 예산 절반을 쏟아부으며 진압하느라 사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선 사신이 달려와 바닥에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꿈에 자기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 임금은 장비의 환생인데 유비가 도우랬다며 파병을  결정하는데

신하들은 모두 파병을 반대했으나 오직 단 한사람 병부상서 석성만이 찬성하는데......

이 때문에 조선인 역관 홍순언과 석성의 첩으로 들어가는 기생 류씨 얘기가  떠돌게 됩니다.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 일컬어졌는데 곤란을 당했으니 좌시만 할 것인가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더구나 동방은

팔다리와 같은 번방 (藩邦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사람에게 달려 있다만력제의 조서선조실록 선조 32년 (1599) 5월 20

 

1592년 6월 24일 명나라 참장 곽몽징이 만력제가 하사한 은 2만냥을 가지고 왔는데선조

이것을 군자금으로 쓰지 않고 왕비와 후궁에 왕자와 대신 그리고 내시들에게 선심쓰듯

뿌리니.... 광해군과 유성룡은 당황해 황망해하면서 제발 거두어 달라고 비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영특한 선조가 저렇게 한 이유가 있으니...... 저 왜군은 조선군이 물리칠 수는 없으며 저들을 쫓아낼

군대는 상국인 명나라 군대인지라글을 써서 명나라에 원군을 비는 사신으로 갈 대신과  또

저들이 왔을때 지극정성으로 명나라 사신과 군사를 대접할 자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 것입니다.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을 때 부사진성과 동래성은 전투 두세시간만에 함락됐으며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함 단 한척도 띄우지 않고 겁에 질려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불지른후 수군을 해산하고 홀로

도주했고경상 좌병사 이각은 왜군이 오자 동래성을 빠져나와 울산의 병영에도 가지 않고 달아났습니다.

 

 

이일은 적과 10여분도 싸우지 않고 상투를 풀고 달아났고 신립의 8천은 서너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으며한강 방어군과 한양수비군은 화살 한대 날리지 않고 도주했고

임진강에서는 적이 배에 오르자 바로 달아났으며 평양에서는 강에 들어서자 도주

했고 남도 근왕군 8만명은 1천 6백명 왜군에 대패해 사라졌으니 이런 조선군을 믿을수 없다는?

 

 

성웅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하지 않았느냐고 생각할수도 있겠는데.... 5월 7일 옥포 해전,

5월 8일 적진포 해전, 5월 29일 사천 해전, 6월 2일 당포 해전과

6월 5일에는 용인 전투가 벌어진 같은 날에 당항포 해전에서 장군은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1592년 당시로 돌아가 생각하면 저 승리는 머나먼 평양에 있는 선조에게 장계를 가진 병사가

달려가 보고하기도 힘들었으며..... 옥포해전에서 왜선 26척과 적진포해전

에서 13척을 부순 승리가 보고됐다고 치더라도 육군이 연전연패해 당장 왜군이

발 뒤꿈치 까지 추격해오는걸 피해 황급히 도망치는 선조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라?

 

 

남도근왕군 8만이 패하자 평양에서 의주로 달아난 선조와 조정의 관심사는 1. 평양의 고니시군이 청천강에

도달했느냐? 2. 명군이 오고 있는냐? 3. 분조 광해군이 조선군과 의병을 모아 청천강을 방어할수

있느냐 4. 함경도에 임해군을 포로로 잡은 가토가 산을 넘거나 압록강을 따라 의주로 내려오느냐?

5. 한성 조선군과 의병의 활동은 이니, 한달 전에 머나먼 남쪽 바다 해전 승리는 귀애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황제가 하사한 은 2만냥이 헛되이 뿌려진후 1592년 10월 6일 조선에 파견된 장수 낙상지는 공조판서 한응인에게

"영하의 반란이 평정되었습니다명군이 보다 신속히 조선으로 올 것 입니다"​ 라고 말하는데그는 요동에 있던

군대라 선발대로저 온 것이며 인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여송 군대는 영하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누구는 명군이 파병하지 않았으면 조선을 점령한 왜군이 명나라로 진격했을거라고 하는데

명나라를 치겠다는 말은 허세가 심한 히데요시의 말에 불과하고 당시 일본의 국력은

중국을 침략할 힘이 전혀 없었으며..... 또 사위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에 세견선과

왜관무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취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기 위해 필사적 이었습니다.

 

 

선조는 명군이 올때까지 평양을 사수할 생각으로 쌀 10만석을 모아두었으니 고니시는 고스란히 챙겼는데

왜군이 북진하면 선조가 암록강을 건널 것이니 그럼 교섭 상대를 잃을까 염려해 진군을 멈춘 것으로...

왜군이 만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면 9개군 중에 6개군 정도는 평안도로 진군 시켜야 하지만, 9분지

1인 고니시군만 평안도에 진주시켰으니... 9명 장수가 각 1개 도와 한성을 점령해 다스릴 의도였다고 봅니다.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널까 두려워 더 이상 진군

하지않고 화의를 모색하는데... 조선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환관들의 발호에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하고토지가 세력가들 손에 들어가니

농민들의 봉기와 몰골족의 반란까지 겹쳐 제 코가 석자라 파병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만력제는 명나라 4대 암군 중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를 통틀어 최악의 형편없는 군주인데

후한 영제사마염수양제당의종송휘종금 해릉왕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황제로.....  청나라 정통사서 명사에서 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서술하니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 였다.' 라고 했을 정도 입니다?

 

 

왜수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부산으로 밀려나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23일자 명령을 통해 육군이

되었던 수군 부대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용인에서로 불러내리니..... 오다 노부나가 시절 부터 수군

대장인 구키 요시타카 및 가토 요시아키와 3인이 함께 잔존 수군을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합니다.

 

조선 수군은 7월 6일 전라 좌수영 판옥선 23거북선 2경상 우수영 3전라 우수영 이억기 27척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하는데왜군 70여척이 영등포에서 견내량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8일에 바다 가운데

이르니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는데와키자카는 용인전투에 대승해 기고만장

했으니 구키 요시타카 및 가토 요시아키와 출진하라는 히데요시의 명을 어기고 전공을 욕심내 혼자 출진한 것입니다.

 

 

7월 8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선 73(대선 36중선이 24소선 13척 으로 대선만 치면 조선군

55척 보다 전력이 훨씬 못함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지세(地勢

협착한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운지라 아군이 퇴각하면서 유인하니...

왜선들은 조선 수군이 도주한다고 착각하고는 추격해 오는지라 한산(閑山앞바다로 끌어냅니다.

 

아군이 학익진 (鶴翼陣을 쳐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 (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적선 3척을 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예기 (銳氣를 이용하여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는데..... 아군 피해는 전사 3명에 부상 10명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을 박살낸 이틀후 10일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도도 다카토라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의 왜선 42척이 바다에 정박하고 있었으니 안택선 셋에 나머지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협착한지라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나오지 않으니 우리 배들이 들락날락

하면서  적선을  다 불살라버렸으며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급이고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했습니다.

 

그 전인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용인 전투에서1,600

으로  8만 조선군을 쳐부수어 영웅이 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월 7구키와 도도 및 가토등의

함대는 필요없다면서 큰소리 치며 (전공을 왜 니네들과 나눠?)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해 조선 수군에게 와키자카 수군과 구키등의 수군이 이틀 사이에 각개 격파된 것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장에 나타난 이순신 함대 23척 중에 해협으로 들여보낸 10척이 전부인줄

알고  자신들이 작은 배도 섞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숫자에서 크게 앞선다고  여겨

달아나는 조선군을 추격해 한산 큰 바다로 나오니.... 달아나던 이순신의 함대가

돌아서고섬 좌우에 숨어있던 이억기와 원균의 함대 까지 포위에 나서니 전멸을 면치 못한 것 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전투에서 80,000명을 무찌른 대승을 한 탓에 조선수군을 얕잡아 봤으니 교만과

방심이 부른 화라고 할것인데무인도에 상륙해 열흘이나 솔잎과 미역을 씹으면서 살아 널판지를 타고

바다건너 가덕도로 귀환했으며 참담한 패전을 겪었음에도 정직하게 기록으로 후세에 전했으니허세에

무공은 부풀리고 패배는 애써 축소했던 당시의 무인 세계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입니다참 특이하다는?

 

KBS 역사스페셜에도 나왔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4대손인 와키자카 겐지 씨의 말로는 와키자카는

이 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본국에 돌아와서도 집안 사람들이 한산도 해전이 일어난

날이면 다른 것을 먹지 않고 오직 미역만 먹도록 했으며그 전통이 무려 500년이 지난

자신의 대까지 남아 자신도 한산도 대첩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 날로 뚜렷이 기억한다고 합니다.

 

드디어 1592년 7월 초순 조승훈의 명군 5천이 압록강을 건너와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7월 17(양력 8월 23평양성으로 진격했는데한성 처럼 성문이 열려있는지라 적이 달아난 것으로

잘못 알고 성으로 들어갔다가 매복에 걸려 전멸당했으며 조승훈은 부상당한채 수십기로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음력 8월 1일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李薲평안도 조방장 김응서김억추에 의병을 합쳐

1만 3천명 조선군은 다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성문을 나온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지만당해

내지 못하고 패배해 달아났으며 이여송의 명군이 도착하니 1593년 1월 6일 제 4차 평양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고니시가 아닌 가토가 평양으로 진격했다면 주저없이 청천강을 건넜을 것이고 선조는 요동으로 달아

났을 것인데.... 대마도는 매년 조선에 세견선을 보내 쌀과 콩을 얻어갔고 부산왜관의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었는데대마도주와 장인인 고니시는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니,

국서 위조까지 했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이시다의 지원으로 선봉이 되어 가토 보다 닷새 먼저 상륙합니다.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한후 포로로 잡은 울산 군수 이언함에게 평화회담을 하자는 편지를 주었으나

그가 처벌을 두려워 달아나자 이후 여러번 편지를 보내 마침내 대신인 이덕형이 내려왔으나....

충주성이 함락되니 발길을 돌려버려 무산됐고평양성 점령 후에 왜군은 한발짝도 북상하지 않고

이후 심유경과 회담했는데, 명나라는 영하의난 전쟁중이라 시간을 벌기 위해 고니시를 속인 것입니다?

 

 

명나라 병사 4만 3천에 김명원등 조선군 8천과 사명대사등 승려 2천명, 5만 3천은 1만 6천 고니시 유키나가

가 지키는 평양성을 공격했는데규슈의 일본군은 여름옷을 입고 나와 겨울이 되니 평안도 추위에

병사 절반이 동상에 걸린데다가 명나라 대포 포격으로 큰 손실을 보았지만왜군이  분전

하는지라 사상자가 많이나니 이여송은 협상을 통해 추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고니시군이 성을 나갑니다.

 

 

명군이 그 뒤를 쫓아 개성을 지나 1월 25일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왜군 60명의 목을 베니 이여송은 일본군을

얕잡아 보고는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파주 땅에 이르렀는데, 1월 27일 부총병 사대수와 조승훈의 3기병

선봉대가 여석령 (礪石嶺에서 소수로 위장한 왜군과 접전하다가 타치바나 무네시게등의 왜군에 포위당합니다.

 

곧이어 이여송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해 타치바나군과 맹렬하게 싸우니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깃카와

히로이에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명군을 둘러싸기 시작했고..... 이여송은 안도 츠네히사와

싸우다가 낙마해서 죽을 순간에 동생 이여매가 활을 쏘아 안도 츠네히사를 사살해 간신히 살았습니다.

 

 

이노우에 카게사다가 낙마한 이여송을 죽이려 했는데이여송의 측근 이유승이 온몸으로 막고는 대신 죽어서

목숨을 또 건지게 되며 중협도독 양원이 이끄는 명군이 도착하니 일본군은 추격을 단념해서 끝나게 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음에는 전투의지를 상실했고강화회담을 간절히 바라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심유경과 다시 회담하니...... 행주산성 전투에서 권율에 패한후 재차 공격하려고 하자 권율은

재빨리 북쪽 명군쪽으로 후퇴하니 보복도 못한데다가 보급이 안되는지라 서울에서 버틸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겨울철에 여름 옷인데다가 군량도 떨어졌는데더 이상 명군의 희생을 원치 않은 이여송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협상을 진척시키갰다는 심유경의 말을 믿고

서울에서 철수해 남해안 왜성으로 물러갔으며... 이후 3년여 회담을 진행하며 중국에서 사신옵니다.

 

1593년 2월 권율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니 관군 3천명에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의병 6000명등 병력은 총 9,000명에 이르는데,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 배수진의 형태로 경가수영에서 보급을 받았으며 성이 낮은지라 목책을 3중으로 두릅니다.

 

 

우키다 히데이에등 일본군 3만명을 맞아 비격진천뢰와 신기전 같은 최신 무기와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

에 바위화살불덩이끓는 물까지도 퍼부어 7차례에 걸친 적의 총공격을 모두 격퇴하는데 성공하니,

일본군은 500명의 사상자에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깃카와 히로이에 에게 부상을 입습니다.

 

조선군의 화차와 비격진천뢰에 대포도 맹활약했으니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되었으나한성부 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 (備邊司堂上을 겸직하고 1596년 도원수가 되는데

권율은 전투후 행주산성을 버리고 즉각 철수해 이여송을 찾아갔으니 며칠후 일본군 정찰병을 허탕치게 만듭니다.

 

 

명군과 일본군이 종전 회담을 개시하며 추격하지 않는 다는 보장을 받은 일본군은 겨울 추위에 병사들은 여름

옷이고 식량도 다 떨어진지라 한성에서 철수해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1592년 10월 5일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키다 히데이에와 호소카와 다다오키 3만은 김시민의 4천명 조선군이 지키는 진주성 공략에 실패했었습니다.

 

1593년 6월 1일 우키다와 가토고니시코바야카와모리시마즈다치바나조소카베나베시마구로다등

일본군 전군 9만명이 작심하고 공격하니 경상 우병사 최경희충청 병사 황진진주목사 서예원창의사

김천일의병장 고종후등 6천명은 성을 사수하고자 했으나 민간인 2만 4천명과 3만명이 모두 학살을 당합니다.

 

 

도원수 권율은 진주성을 지킬수 없다고 생각하였고전라병사 선거이와 영천군수 홍계남 이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물러나 안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라 주장했으며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곽재우도 중과부적

이라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자결을 하면 했지 저런데서 개죽음은 못하겠다면서 진주성 구원을 포기했습니다.

 

종전회담은 6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7개항 조건을 제시했으니.... 조선의 경기도와

경상· 전라· 충청 4도를 자신에게 할양하고 그 나머지를 조선이나 명이 통치해도

좋다는 뜻을 밝힌 것인데명나라 조정에서는 웨이쉐썽(魏學僧)을 중심으로 이

제의에 잠시 관심을 보였지만그러나 최종적으로 명나라는 이 요구를 거부한 것입니다.

 

 

낙상지는 이성량 집안을 섬겼고 젊은 시절에 일본 사람(왜구?)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으며이여송 휘하

참장이 되어 남병(강남)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에 참가해 함구문을 공격해 긴 창을 휘두르면서

적이 던진 큰 돌에 발이 다쳤음에도 평양성 성벽에 가장 먼저 오르는 용맹을 선보였다고 합니다.

 

1593년에는 오유충마우경과 함께 경주에서 왜군 수십명을 죽였지만 일본군이 칼을 휘둘러 돌진하자 후퇴

했으며 냇물을 건너다가 후방에서 공격을 받아 200여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고협상(휴전으로 1594년에

물러가면서 류성룡이덕형에게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군은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니 경계하라 말합니다.

 

 

낙상지는 "조선에서 법적으로 관노사노 신분으로 묶인 이들은벼슬길이 영원히 막히니이들에게

불평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 "적에게 간 자들은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노비 法 

폐단이 심하다!"  라며 노비 중에 유능한 자의 제약을 풀어줄 것을 주장하지만,  조선은 무시합니다.

 

낙상지는 이시발과는 병서에 대해 논하면서 고서 수백권을 주었으며 조선병사들에게 제독검법,

포술을 가르쳤는데조선에서 총검술염초 굽는법 등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부하를 남겨 가르치게 했고...... 그 중에 제독 검법은 훗날 조선 무예도보통지에 실리게 됩니다.

 

 

명나라에서 배운 십팔기(十八技)는 영조 25(1749때 사도세자가 정리해 무예신보(武藝新譜)에 수록한 18

가지 보병무예의 총칭이며 정조 14박제가이덕무백동수 등이 왕명에 의해 이를 계승하고 보완한 무예

도보통지(武藝圖普通志에 기록이 남아 있으니 총 18가지 보병무예를 그림과 함께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성룡이 항왜들로 하여금 조선군에게 창검술과 조총술을 가르치게 하면서 조선군과 일본군의 창칼

실력을 물으니 "어른과 어린애수준과 같다고 했으니조선군은 창이나 칼 사용법에

서툴렀는데 과거시험 무과 과목이 병법과 말타기 및 활쏘기 3종목 뿐이니 조선군의 주 무기는 활 입니다.

 

 

그러니 평생 창이나 칼을 한번 손에 잡아보지 못한자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대장군이 되는 나라가 조선이라

장교가 창칼을 쓸줄 모르니 병사들에게 창칼을 가르칠수 없는지라들판에서 접전은 못하고 숲속

산길이나 성벽에 숨어 활을 쏘는게 위주인지라 낙상지가 조선군에게 가르친 무술이 18(十八技입니다.

 

18(十八技는 장창죽장창 (길이 20척이 넘는 대나무 창), 기창당파(창 길이는 7세갈래로 날이 있어

기병 상대), 낭선(척계광이 만든 무기로 날카로운 날을 달아 독을 묻혀 쓴다), 쌍수도(척계광이 왜구 상대로

만든 무기로 장도 長刀예도(칼날 3자루 1척으로 단도 (短刀)), 왜검(일본도倭刀), 교전(약속교전....

 

 

제독검(낙상지가 전한 기예로 전진하여 전,,우를 상대하고 후퇴를 반복해 적진을 뚫는다), 본국검(조선검),

쌍검(짧은 칼 두자루 공격과 방어), 월도(송나라때 대도 大刀), 협도(곤봉의 기예), 등패(척계광이 등나무

로 만든 방패), 권법(조광윤에 만든 장권), 곤봉(길이 7무게는 4), 편곤(도리깨로 명군 타타르 기병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키는 평양성을 탈환한 전투에서 참전 병력은 명군이

4만 3천인데 비해 조선군은 8천이고 승병이 2천 합계 5만 3천인데.... 일등공신은

명나라의 화포였으며 그리고 보병은 강남에서 척계광이 기른 낭선 부대가 으뜸이었습니다.

 

 

인진왜란 초기인 1592년 가을에는 명군의 군량을 조선이 평안도에 비축된 식량을 모아 부담해

줬으나.... 1593년부터는 조선의 식량 사정이 악화되어 명이 머나먼 중국에서

쌀을 조선까지 가져와서 명군과 조선군의 군량에 쓰고 조선 백성들까지 구휼합니다.

 

조선에는 돌로 된 포장도로가 전혀 없고 강에 다리가 없으니 만력제가 하북에서 쌀 13만석을 징발해 조선에

보내줬는데도로 사정이 열악해 운반하기가 힘들었고 현지에서 군량 수송부대가 절반이나 먹어

치우는 형편이었지만조선왕조실록 1593년 8월 28일 장삼외의 충고에 따라 경략에게 군량을 청하는

자문을 보냈고...... 1594년 1월 9일 청량사 허욱이 곡식을 보내달라는 자문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1593년에는 4월 1일 산동(山東)의 군량 10만석을 징발해 해로로 통해 조선에 보내주었고 1593

11월까지 요동에서  추가로 군량 14만석산동에서 12만석이 조선에 보내졌는데

문제는 도로가 없으니 우마차도 없는지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짊어지고 운반하니

보부상” 으로 조선은 구한말 까지도 포장 도로나 강에 다리는 단 한개도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식량 보급을 위해 은을 가져와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매입하려고 했으나... 조선은 중국과는 달리

화폐가 유통되는 사회가 아니고 대다수 백성은 면포와 쌀을 화폐로 사용했던

물물교환 처지라명군 장졸들이 은을 내밀면서 거래를 요구하면 손사래를  쳤으니 월급을

은으로 받았던 명군 장졸들은 조선에서는 은이 있어도 술과 고기를 살 수 없다” 라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조선 백성들이 수확을 못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명나라의 재정을 털어 곡창 산둥성의 쌀을

매입해 조선 백성을 위해 원조했으니 지난해 왜적의 변란에 수확을 못하였고 지금 파종기에 모

한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분탕은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데다길가의 곡식은 왜적이 거두어 가니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다행히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입어 산동성 소미 백여만석을 우리나라에 운송하여

구제하게 되니전라의 고금도·전주·남원 같은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였다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 (換大米라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亂中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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