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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12 - 레닌의 볼세비키는 11월 혁명으로 정권을!

작성자은혜|작성시간26.04.05|조회수42 목록 댓글 0

 

러시아 12 - 레닌이 귀국한 후에 볼세비키는 11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다!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독일군에게 패배했으니 물가는 뛰고 식량난이

계속되던 중에, 191738(율리우스력 223) '세계 여성의 날' 을 맞아  비보르크

방직공업 여성 노동자등은 '전제타도',  '빵을 달라',  '전쟁 반대' 등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합니다.

 

 

39일 파업이 확대되어 21만명이 참가하니 카자크 기병이 출동했음에도 넵스키 대로

에서  시위는 계속되었으며 '' 이외에도 '전쟁 반대', '전제 타도' 까지 나타났고...

310파업이 전 도시로 확대되어 30만명이 참가하면서 군경과 시위대

충돌이 일어나니 볼린스키 연대등 진압을 명령받은 병사들이 혁명세력 편에 가담합니다.

 

 

311일 군경이 시위대에 사격해 다수 사상자가 나왔고 12일 볼린스키 연대 교도대는 하사관 지휘

하에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장교 살해후 반란 선언했으며..... 근위보병 2개 연대와 공병 6

예비대대도 반란에 가담해 감옥과 구치소를 해방시키고 정치범 3,358명을 석방했고 재판소는 불탑니다.

 

 

이후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소총을 탈취했고..... 모스크바 연대의 장갑차 부대에다가 남부

3연대등 총 66,700명 병사가 반란에 가담해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자 군관구사령관 하바로프는 진압부대를 편성해 출동했으나 도중에 해체 당합니다.

 

 

대중들의 열망으로 혁명을 완수할 기구가 시급히 조직되었으니 12(27) 저녁, 타브리다 궁전

에서 공장과 군대에서 선출된 대표가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를 결성했으니... 3월 초 구성이 완료된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았으니.... 1차 세계대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굶주림과

기아는 여전했으며 노동자는 착취당했고 토지는 지주들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도

여전했으니 이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였지만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이때 스위스 에서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러시아 후방전선의 교란을 목적으로 한 독일의

지원으로 416일 귀국했으니..... 레닌의 의중은 독일의 의도와는 정반대에 있었지만

독일이 제공한 열차에 탑승했기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레닌을 독일의 첩자라며 공격합니다.

 

 

이때 독일에서 레닌에게 봉인 열차를 타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 전세 열차를

타고 독일에서 스웨덴, 러시아령 핀란드를 거쳐서 평범하게 귀국했는데, 독일 측에서는

열차 배차에서 우선권을 주고는  독일 국내에서 감시 인원을 붙이는 정도의 조치만 취했습니다.

 

그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연설했으니.... “사랑하는 동지, 병사,

노동자 여러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입니다.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입니다. 머지않아 유럽의

자본주의는 깡그리 무너질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다음날 블라디미르 레닌은 볼셰비키 집회에서 그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하였으니...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즉각 평화를 실현한다.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넘긴 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하는

2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면 안 된다.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대해야 한다.

 

 

의회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국유화 한다. 모든 은행은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는 국립은행으로 통합한다. 생산과 분배는 소비에트가 통제한다. 당 대회를 소집

하여 강령을 바꾸고 당명은 공산당으로 바꿔야 한다. 새로운 국제혁명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해야 한다.

 

4월 테제는 러시아 전역을 뒤집어 놓았으니..... 부르주아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독일의 첩자

라고 주장했고  멘셰비키는 레닌이 '반동에 봉사하고 있다' 고 비난했으며 플레하노프

는  '대머리가 잠꼬대를 한다' 고 비꼬았는데, 같은 볼셰비키 내에서도 큰 반향이 일었습니다.

 

 

레프 카메네프 등 당의 많은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의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주장이 임시정부 타도로 해석되어

당국에 체포되는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말빨과 인맥으로 4월 말, 볼셰비키 협의회는 레닌의 4월 테제를 공식입장으로 채택합니다.

 

곪을 대로 곪은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간의 갈등은 전쟁 문제를 계기로 폭발했으니, 51일 노동자들은

즉시 강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벌였고 같은 날 임시정부의 외무장관 파벨 밀류코프는

협상국 측에게 제국 정부가 체결한 조약을 지킬 것이며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을 통보합니다.

 

 

53일 볼셰비키 세력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임시정부 타도', '밀류코프 타도' 를 외치며 위를 벌이자

이에 임시정부의 돌파구는 성공가능성이 낮은 하계공세를 취하는 것이었으니 협상국의 요청도 있었지만

공세를 성공시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이중권력을 소멸시켜 부르주아 권력을 수립한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전 분위기가 매우 심각해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71일이나 돼서야 서남 방면군에서

하계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719

독일군의 역공에 4만명의 사상자만 낸 채 임시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하계공세는 참패로 끝납니다.

 

 

결국 민심은 더더욱 이반하였고, 페트로그라드 (상트 페테르부르크)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발트 함대, 리가,

민스크, 톰스크 등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를 따르지 않은 세력들이 점점 늘어났으니....

우크라이나 의회 '라다' 와 핀란드의 의회 '세임' 이 자치 움직임을 보이는 등의 민족 문제도 첨예화됩니다.

 

결국 참다못한 민중은 716일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으니 연대의 일부를 전선으로 파견

하라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제1기관총 연대의

무장봉기가 그 시작이었으니 그들의 목표는 소비에트 중심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연대 총회에서는 이를 위해 볼셰비키 당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른

부대와 공장에 대표를 파견해 함께 행동할 것을 제안하자 많은 부대와

공장이 적극 지지를 보냈지만, 그러나 정작 볼셰비키는 이러한 무장봉기에 회의적 이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분명히 노동자와 병사들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할 힘을 갖고 있었으나,

전국의 민중 대다수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따르고 있어 권력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니 당 중앙위는 시위 자제를 결정했으나 민중들은 이미 볼셰비키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16일 저녁 7시 기관총 연대를 선두로 대규모 무장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수도의 각 부대와 노동자도 시위에

가담했으며 시위대가 볼셰비키 본부인 크세신스카야 저택에 도착했고 스베르들로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자제를 호소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시위대 대답은 그야말로 부정적이었습니다.

 

시위대의 완강한 입장에 볼셰비키는 굴복하여 부득이 방침을 변경했으니 '타브리다 궁까지 행진하여

대표를 통해 우리의 요구를 전달하자' 는 볼셰비키의 제안이 시위대에게 전달되었고 시위대는

동의했으니,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 를 부르며 밤 10시경 소비에트 본부인 타브리다 궁에

도착했고 12시경에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와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의 합동회의가 열립니다.

 

 

5시간 이상 계속된 회의에서 시위대에 대한 압력행사에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소비에트 권력

반대' 결의가  채택되었고 한편, 다른 방에서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등의 혁명파 합동회의 에서는 17일에 다시 시위 전개를 결의합니다.

 

717일 아침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은 무장시위를 금지하라고 경고하며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휘하의 모든 부대에 질서회복에 착수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러나 정부를 지지하는 군대는 카자크

병연대와 사관학교 생도등 극소수에 불과했고,  결국 정부는 전선 사령부에 파병을 요청하기 까지 이릅니다.

 

 

반면 시위대는 오히려 세력이 크게 늘고 있었으니 크론슈타트에서 1만여명이 배를 타고 도착하는등 수도

근교로 부터 병사와 노동자가 밀어닥쳐 시위대는 50만을 넘자, 더 이상 판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던 볼셰비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시위대를 설득하는 바람에 7월 시위는 허무하게 종결됩니다.

 

한편수도의 시위에 자극받아 지방에서도 봉기가 발생했으니.... 발트함대핀란드리가이바노보 등지의

많은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를 외쳤고 많은 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는데그러나

지방은  아직까지 전체적으로 혁명파 보다 타협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봉기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봉기를 중단하고 혁명의 열기가 전국으로 퍼지는 시기를 기다린 것인데, 1948년 한국

에서도 제주도 사태 진압을 위해 여순의 국군 14연대가 파견될때 지창수 상사등 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을 살해하니.... 지리산에 있던 이현상이 기겁해서 달려왔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남로당 지도부는 국군 내에 공산당 세포를 한창 심는 중이라 아직 완료하지 못했고,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 준비를 마치지 못했으니 제주도로 출동하면서 참고 조금 더 기다려 1950년 남침과 동시에

궐기해 국군 부대들을 장악했으면 적화통일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지창수가 성급하게 봉기해

공산당 세포들이 노출되면서 국군내 좌익분자들을 모두 소탕된후 6.25가 터지니 불행중 다행이었습니다. 

 

지창수를  만나 물으니 장교들을 살해했다는 말에 이현상은 통곡했으니 저 20여명 장교 중에 무려

15명이 남로당 세포들이었기 때문인데.... 장교는 서울 남로당 본부가 관리하고 하사관과

병사는 전북도당이 분리 관리했으니 지창수가 모르고 우군을 죽인 것인데, 이때 마산의 15

연대장 최남근이 지리산으로 찾아와 궐기할까 물으니 이현상은 정체를 숨긴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힘을 얻은 임시정부와 타협파가 반격을 개시했으니,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 주장했고 중립적이었던 몇몇 부대가 임시정부에 붙었으며 전선

에서도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도착했으니 7월 시위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임시정부의 탄압이 시작됩니다.

 

7월 시위에서 볼셰비키의 세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음을 보았기 때문인데.... 볼셰비키

본부가 점령되었고 당 기관지 <프라우다> 의 발행이 금지되었으며

시위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의 집이 수색당했고, 반란에 가담한 부대가 해체 되었습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져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지하로 피신했고,

레프 카메네프, 레프 트로츠키가 체포되었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볼셰비키의 세력은  줄지

않았으니, 오히려 4월에 8만이었던 당원이 8월엔 24만이 되는등 탄압과 비례하여 세력이 더욱 늘어납니다.

 

7월 시위와 이후의 탄압은 러시아의 세력관계를 크게 변화시켰으니.... 대부분의 러시아 평민들은 이제

임시정부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뒤이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로 임시정부는 완전히 민심을 잃었습니다.

 

 

7월 시위 이후 농업문제에 관한 노선 차이로 제1차 연립정부는 붕괴했고 86일 제2

연립정부가 설립되었으니 트루도비키(Labour Group) 의 당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새 수상이 되었고 사회주의자 7, 자유주의자 8명이 각료로 취임 합니다.

 

수상 케렌스키에게 비상대권이 주어졌고, 입헌민주당의 요청으로 내각은 소비에트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혁명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케렌스키는 이제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으니 서유럽의 민주정치에 심취한

각료들은 몸짓과 스타일까지 서유럽을 모방했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며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묵살합니다.

 

 

민중의 요구는 제헌의회 구성 뒤로 미루어졌고, 구성 시기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니 민중들의

마음이 임시정부를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88일부터 열린 6

당대회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슬로건을 철회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기로 결정합니다.

 

소비에트가 우경화된 지금, 무장봉기만을 통해 권력을 쟁취할수 있다는 판단이었지만 그러나 즉각

행동하지는 말고 민중들이 좀 더 임시정부에게서 멀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혁명파

와 부르주아,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크게 부상합니다.

 

 

그는 731일 최고 사령관에 오른후 군사독재를 향한 발걸음을 본격화했으니 군사령관과

보수주의자들 대다수가 그를 지지했으며 8월 들어 코르닐로프는 군사

동원을 개시하며 군대 일부를 수도 주변에 집결시키고 자파에 있던 주력부대를 훈련시킵니다.

 

824일의 각료회의에서는 '후방에서의 사형 부활', '지휘관 권한 회복', '병사위원회 권한

제한' 등을 포함하는 코르닐로프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 내각을 끌어내리고 과거로 회귀하기 위한 독자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97일 코르닐로프는 기병 제3군단을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으며 군단장은 다음날

수도와 인근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니,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자리에서 물러나고

권력을 최고 사령관에게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띄우니 쿠데타임을 직시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군을 반란군으로 선언하고 소비에트와 심지어 볼셰비키에게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코르닐로프의 부대는 즉각 수도를 향해 진격했으니.... 소비에트 지도부와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들은 민중에

임시정부의 방위를 호소했고, 볼셰비키도 민중에게 반혁명 분쇄투쟁에 일어서자고 호소했지만  그러나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게 아니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위한 것도 아님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민중들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으니, 그 결과 코르닐로프가 보낸 전신이 그의 부대에

전달되지도 못했고 반란군이 탄 기차는 철도 노동자들의 방해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결국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민중들에게 진압되고 말았으며 912일에는 코르닐로프와 공범들이 체포되면서 반란은 종결됩니다.

 

코르닐로프의 반란 이후, 민중들은 부르주아와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무능함과 혁명을 타도

하려는 세력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한 정부가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으니 그 결과 민중들 사이에 전쟁 반대와 혁명적 투쟁을 계속해 온 볼셰비키의 인기가

급상승했으니 민중은 소비에트의 타협파 대의원들을 소환하고 그 자리를 볼셰비키로 대체합니다.

 

 

911일 창설 이래 처음으로 볼셰비키가 다수를 이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즉시 강화, 지주토지의 몰수

,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등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의 결의를 채택했으며 916

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같은 결의를 채택하였고  많은 도시에서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가 급속히 진행됩니다.

 

그 무렵 러시아 경제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지고 있었으니 연료난과 원료 부족으로 공장의 가동이 멈추고

식량난도 극심해졌으니 이 모든 것이 부르주아와 지주로 이루어진 임시정부 때문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을 공장을 장악하여 직접 관리를 하고 농민들은 전투적으로 변해

지주를 추방하고 스스로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유럽쪽 러시아의 절반 이상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납니다.

 

 

군대도 동요해 지휘관을 추방하고 직접 지휘관을 선출했으며, 전쟁을 계속 거부했는데, 한편, 민중의

혁명화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더욱 극심해졌으니 마르토프 등 멘셰비키 국제

주의자들은 볼셰비키에 점점 가까워졌고, 사회혁명당 좌파세력은 독자행동을 선언하며

기존의 사회혁명당에서 완전독립을 선언했으니 정세는 볼셰비키에게 전적으로 유리해집니다.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반란 와중에 제2차 연립정부는 와해되었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9

14일  5명의 각료로 총재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총재정부는 정식으로 러시아 공화국

선언하고 두마를 공식 해산하는등 형식적으로 양보하는 한편 '반혁명 분쇄

투쟁위원회'의 해산, 군대내 정치투쟁 중지등을 명령하며 고양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민중은 통제되지 않았고 민중의 혁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을 느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민중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카데츠가 참가하는 새정부에 입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합니다.

 

볼셰비키는 두 정당에게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끊고 좌파끼리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거부하고 '모든 세력의 통일' 주장했으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난 소비에트를 공격하고 '전 러시아 민주세력 협의회' 를 소집합니다.

 

 

108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다시 카데츠와 멘셰비키 우파, 사회혁명당의 지지를 얻어 제3

연립 정부를 수립했는데 정부는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가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 를 선출하였으니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졌고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단결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10월 초,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지금이 무장봉기를 할 적기라고 판단했으니

1023일과 1029일에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권력장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레닌이 국외망명을 갔을 때 볼셰비키를 임시적으로 이끌던 스탈린은 당초 봉기반대파의 입장에 서 있었으나,

레닌의 입장이 신속한 봉기라는 것이 확인되자 입장을 급격하게 바꿔 무장봉기를 지지했으니

레닌은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 이라며 반대파를 억누릅니다.

 

1025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 하에 독일의 위협으로 부터 수도와 혁명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어 봉기 지도부인 군사혁명

중앙이 구성되어 당 군사조직과 함께 군사혁명위원회와 힘을 합쳤으니 이제 봉기는 초읽기에 들어갑니다.

 

 

반혁명파의 거점은 페트로그라드 중심부에 있었으니 임시정부는 겨울궁전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페트로

그라드 군관구 총사령부와 해군성이 있었으며 혁명파의 사령부는 시의 동쪽 변두리의 귀족 여학교인

'스몰니 학원' 이었는데 군사혁명위원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볼셰비키 당중앙이 있었습니다.

 

혁명파의 주력 부대는 셋이었으니 적위대는 북쪽과 동쪽과 남쪽에서 시의 중심부를 포위했으며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혁명파 부대는 그 안쪽에서 제2의 반원을 형성했고 서쪽에서는 군사

혁명위원회의 요청으로 발트해 함대가 네바강 하구를 장악했으니, 혁명파의 노동자와

육군과 해군은 합동으로 페트로그라드를 포위 차단했다가 일시에 공력,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혁명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으니..... “우리 앞에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역사가 빗자루로 쓸어내 주기를 바라는 무력하고 가엾은 정부가 있다.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조직하여 전국에서 행해진 작업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등 뒤에 칼을 꽂으려 한다면, 우리는 반격으로 대응할 것이다. 타격에는 타격으로, 철에는 강철로!”

 

116일 밤,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시로 즉각 행동이 개시되었으니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7일 저녁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되었으며 마침내 8일 새벽 2,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으며 스몰니 학원에서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했음을 선포합니다.

 

 

118일에는 <평화에 대한 포고> <토지에 관한 포고> 가 발표되어 즉시 강화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약속했으며, 대회는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선출하고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라 할수 있는 인민위원회를 창설했으며 레닌이 인민위원장이 되었고

트로츠키는 외무,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직을 맡았으며 중앙 집행위장에는 스베르들로프가 임명됩니다.

 

 

바야흐로 세계 최초의 공인된 노동자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니 레닌은 연설을 통해 혁명의 성공을

기념했으니소비에트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수 없는

이 새로운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점점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있는 이 권력의 본질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이 독점하던 국가 경영이 이제는 처음으로 억압받고 박해당하던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1(10) 혁명 자체로 모스크바를 제외하고 혁명은 희생자를 거의 내지않고 막을 내렸는데,

실제로 당시의 페트로그라드는 조용했으며, 겨울 궁전 등의 정부 시설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극소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 혁명 자체는 비교적 평화롭게 끝났습니다.

 

소련을 시작으로 이후 전세계에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모두가 실패" 로 끝났고

현재 몇몇 나라도 무늬만 공산주의니 사실상 사라졌는데.... 성선설이 맞아서  착하고

선량하며 남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게 인간의 성정이라면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인간을 움직이는게 돈이다 보니 탐욕스러우며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지라.....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도 왕과 귀족에서 사람만 바꾸었을뿐 전의 지배자들

처럼 권력괃 노을 밝히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니 달라질게 없고 결국 독재정권이 되어 망하게 됩니다.

 

베트남의 호 아저씨라고 불렸던 호치민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정글에서도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그가 죽었을 때 남은 재산이라고는 속옷을 제외하면 셔츠 3벌과 바지

2벌에 모자 하나가 전부였다고 하는데.... 소련 공산당의 지도층 수백명도 저 호치민 같았다면 혹시 모를 일입니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권력을 막 잡은 소비에트 정부의 기반은 취약했으니 농촌에서는 농민 대다수가 아직도

사회혁명당을 따르고 있었고 도시에서는 적지 않은 민중들이 소비에트가 정부의 역할까지

맡는다는 것에 생소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도망친 케렌스키와 타협파 정당들은 즉각 반격을 개시합니다.

 

 

케렌스키는 반혁명파 카자크 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으니.....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는 사관생도들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러나 혁명의

성공으로 사기가 충만한 볼셰비키에게 이들은 12월 초(11월 말)에 모두 분쇄되었습니다.

 

노동자와 빈농, 병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의 공산주의적 개조에 착수했으니

공산주의적 생산과 인민경제 관리를 위해 인민위원회 산하에 '최고인민경제회의' 가 창설

되었고, 지방에서도 각급 국민경제회의가 만들어졌으며 남아있던 봉건제의 유물도 일소되었습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 이 되었으며 학교는

교회에서, 교회는 국가에서 분리되었고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으며 1115

공포된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은 러시아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평등권을 법령으로 확립합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인민의 경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도 힘을 쏟았으니 노동자

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지하실과 가건물에서 나와 부르주아와 지주

소유였던 좋은 집으로 몇 가족씩 합쳐 이주했으며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고 노동조건도 개선됩니다.

 

 

산업재해와 실업에 대한 보험법도 발표되었고 학교교육과 의료서비스도 무료로 제공

되었으며 황제의 궁전과 부호의 대저택은 인민의 집회장, 요양소, 박물관이 됩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는 임시정부가 약속한 제헌의회 설립을 예정대로 이행하기로 결정했으니

11월 혁명 이후에도 제헌의회 설립은 여전히 민중, 특히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지지도를 확보려고 노력합니다.

 

 

민중들에게 의회제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직접 체험하게 하려는 것도 이들의 의도였르으니 112520세 이상

모든 남녀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보통, 평등, 비밀, 직접의 원칙에 따라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했으니 그 결과

사회혁명당이 40% 득표로 제1, 볼셰비키가 24% 로 제2당이 되었고 나머지 표는 기타 정당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볼셰비키는 대도시, 공업 중심지, 군주둔지에서 지지를 얻었고 사회혁명당은 농촌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니 선거과정에서 큰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정상적으로 의회가 구성되었다면 사회혁명당

좌파와 친볼셰비키 세력이 과반수를 얻을수 있던 상황에서 반볼셰비키 정당 중 가장 큰 세력이었던

사회혁명당 우파가 좌파에 대한 공천 학살과 사실상의 선거 조작을 행하게 되자 큰 논란이 일어납니다.

 

 

과정이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반소비에트 세력은 제헌의회를 통해 다시한번

설욕전을 준비하려 했으니 사회혁명당 우파의 체르노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헌의회 지도자

들은 제헌의회를 소비에트 권력과 대치시켜 '모든 권력을 제헌의회로!'라는 슬로건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는 의원의 소환권을 도입하고, 제헌의회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니

제헌의회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이견이 표출되었는데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소비에트를 혁명의 기둥으로 제헌의회를 견인하여 혁명과업을 이루어가자고 주장했지만 레닌은

'소비에트가 제헌의회보다 백배 천배 민주적인 제도' 라며 제헌의회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1918117일 소비에트 중앙집행위는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했는데,

1. 러시아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소비에트공화국 이다.

2.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민족의 자유로운 연합의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다.

3.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과제는 인간에 의한 착취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이다.

4. 평화와 토지와 민족해방에 관한 대중들의 열망을 즉시 실현할 것이다.

 

 

118일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중앙집행위 위원장 스베르들로프가 위의 선언을 인준할 것을 제안

했지만  제헌의회의 다수파인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볼셰비키들의 최후통첩으로

간주했으니  제헌의회는 제안을 거부하고 사회혁명당 우파가 마련한 별도 법안의 심의에 들어갑니다.

 

17시간의 토론후 의회는 휴회했지만 소비에트 중앙집행위가 제헌의회의 해산을 명령함으로서 단 하루만에 사라지게

되었으며, 대중들과 의회의 활동을 기대했던 시민과 지식인들은 볼셰비키의 조치에 수긍하지 못했으니 사회혁명당

좌파를 제외한 사회주의 정당들은 볼셰비키에 등을 돌렸으며 일부는 러시아 내전때 볼셰비키에게 총부리를 겨눕니다.

 

 

제헌의회 해산 직후 열린 제3차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농민 소비에트 통합대회는 제헌의회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승인하여 마침내 볼셰비키가 권력을 확고하게 잡게 됩니다.

 

이후 레닌은 독일에 유리한 협정을 맺으며 사실상 항복을 하고 러시아 영토였던 동유럽 지역을 몽땅 내주는

대참사를 일으켰으니 핀란드,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의 지역들 또한 모두 포함된 상태였으며 이후

독일제국은 레닌을 지원하며 노린 것을 이뤘지만 독일은 전세를 호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독일은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부족이 심각한 지경이었고, 잠재 적국인 미국을 배제하고자 보냈던 치머만

전보가 발각되면서 미국이 참전하는 역효과가 나는 바람에 더더욱 끝자락으로 밀려났으니, 결국

1918년에 독일군의 방어선이 돌파당했고 이어 벌어진 킬 군항의 반란과 11월 혁명의 여파로 독일은 항복합니다.

 

1차 세계대전 뒤 러시아 내부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이 규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고 연합군도 반

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했지만..... 볼셰비키가 승리하여 소련을 건국했으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소수민족들도 봉기하였으니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가

독립했으며 볼셰비키는 내전기 중에 백군의 구출 계획을 듣자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을 총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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