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인 6 - 고구려 멸망시에 연남생등 여러 박역자들!
1. 고구려의 첫 배신자 연정토
고구려는 한사군을 몰아내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나라를 세운 이래 6백년 세월이 흐르니... 연졍토는
고구려의 귀족으로 연개소문의 동생인데, 642년에 그의 형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독재자가 되었는데, 이 덕분인지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 전선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666년 형인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3형제 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적국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로
이어지니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인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합니다.
이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543명을 들어 신라에 바치고 투항하였는데
연정토 입장에서는 조카들끼리 싸움에서 연남생이 당으로 도망간 뒤에 항복한 걸로 보아 남생을 지지하는
파벌이었거나.... 아니면 남건, 남산이 차지한 고구려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신라에 투항했지 싶습니다.
연정토가 신라에 바친 황해도 12성 중에 8성은 성과 주민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기에
신라 조정은 군대를 보내 이를 지키게 하는 한편 연정토와 그의 막료
24명에게 각각 재물과 주택을 내려 신라 수도와 지방에서 편히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667년 신라 조정은 연정토와 원기 (元器) 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고구려 침공에 대해 당나라 조정
과 고구려 침략을 의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며.... 원기는 일을 마친 후에 귀국하였으나
연정토는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당나라에 남는 것을 선택해 다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신라 조정에 불만이 있어서 당나라에 남기로 한건지 아니면 당나라 조정이 억류한건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수
없으며 이후 연정토가 당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수 없는데 조카 연남생이나
연남산의 당나라 항복후 행적을 봐서는 모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천수를 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편 검모잠과 함께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이끌다가 674년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으로
봉해진 안승이 연정토의 아들이며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기록이 전해오는데,
그러나 안승이 보장왕의 서자라는 다른 기록도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기록상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인들이 안승이 보장왕
의 뒤를 이을만한 혈통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가 왕족
고씨가 아닌 연정토 아들 연씨 부계면, 고구려인들이 그렇게 했겠느냐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왕족 고씨가 안 남아 있어서 연씨를 쓰는 것도 아닌게 당장 안승 휘하에서 일한 고연무 부터가
고씨이기 때문이니..... 안승을 대략 고구려 왕족으로 파악하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편입니다.
연씨 (淵氏) 에 대해 18세기의 국학자인 안정복은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통고(通攷) 에 이르기를
정토는 소문(개소문) 의 아우다." 라며 연정토를 연개소문의 동생이라고
보았으며... 통고 보다 이전에 지어진 신당서에도 '정토는 소문의 아우이다.'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당시에는 연개소문의 성은 천 (泉) 씨로 알려져 있었는데 안정복은 '연정토가 개소문의 아우이므로
개소문의 성 역시 연 (淵) 씨 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본래 성씨는 연씨였으나 이름자가
당고조 이연 (李淵) 의 휘와 같았기에 중국인들이 피휘하여 그 성씨를 천씨라 기록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신라의 기록에는 연정토의 이름을 당나라식으로 피휘하지 않고 그대로 연씨로
표기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연개소문의 진짜 성씨가 연씨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한국 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김영기가 연졍토를 연기했는데,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선도해의 권유로 신라에 남쪽 12개 성을 들어 투항하는 것으로
등장하는데..... 기회주의자 이기 보다는 그냥 수더분하고 착실한 동생 정도의 포지션 입니다.
2. 고구려의 배신자 막리지 연남생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대막리지 연남생과 연남건 형제의 내란이 결정타가 되었고.....
또 고구려에 침입한 당군에 신라가 쌀을 군량으로 보급했으며 게다가 남쪽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가 협공한 것도 크지만 길게 보면 "국력이 고갈" 해 버린 것입니다.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를 침공한게 598년이고 수양제의 침공은 612년, 613년, 614년
이며 당태종의 침공은 645년이고, 당 고종시기는 661년, 667년에 668년
이니.... 그럼 무려 70년동안 인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점차 국력이 쇠약해져 갑니다.
고구려는 군대가 열세니 국경이나 들판에서 야전으로 중국군과 싸울 자신이 없는지라 들을 비우고 성안에서 농성
하는데.... 청야 전술은 들판과 부락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우물에 독을 푸는 것이니 중국 군대가 물러가도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먹을게 없고 또 마을 집들을 모두 불살랐으니 다시 재건할 여력도 없어져 피폐해간 것입니다.
연 남생은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2대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연남건, 연남산 두
동생과 불화가 생겼고 그리하여 권력 투쟁을 벌이던 끝에 궁지에 몰리자
당나라에 투항하여 앞잡이가 되어 길안내를 하면서 고구려의 멸망에 앞장섭니다.
28세인 661년에 막리지 (莫離支) 겸 삼군대장군 (三軍大將軍) 이 되고 666년에 대막리지
(大莫離支)에 올랐는데...... 동생인 연남산도 형과 같은 나이에 비슷한 관직에 올랐으니
왕이 아닌 신하로 실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친족들에게 막대한 권력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661년 9월 연개소문의 명으로 5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수 수비중 당나라 장수 계필하력에게 크게
패하여 3만 군사를 잃고 달아나니, 당나라군은 몇개월 동안 평양 근처에 주둔하였으나 662년
정월에 연개소문이 직접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무찌르자 당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납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게 되자 32세에 태막리지 (太莫離支) 가 되어 군사와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지방에 나가 여러 성을 순시하는 중에 남건과 남산의 측근들이
남생이 죽이려 할 것이므로 먼저 손을 써서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한편 연남생 역시 두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자 남생 역시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지속적인 이간질에 의심을 품게된 연남생은 사람을 밀정으로
보내 동생들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붙잡히고 말았으니... 이를 계기로 형을 의심하게 된
남건과 남산은 왕명을 칭해 연남생을 평양성으로 불렀으나 해치려한다고 생각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666년 연남건과 연남산은 정변을 일으켜 평양성을 장악해 남생의 아들인 연헌충마저 살해했고
태막리지가 된 남건은 군사를 보내 지방에 있던 연남생의 세력을 토벌하고자 하니
남생은 국내성에 피신해 방어하는 한편.....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나라는 1, 2차 고구려-당 전쟁의 연이은 실패 이후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연남생의
전갈을 받은 당고종은 연헌성에게 벼슬과 재물을 하사해 국내성으로 돌려
보냈으며 장군 계필하력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연남생을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666년 6월 연남생은 국내성을 비롯 6개 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 남소성(南蘇城)· 창암성(倉巖城) 등 3개
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니 당고종으로부터 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 (遼東都督 兼
平壤道安撫大使) 의 벼슬을 받고 현도군공 (玄莬郡公) 에 봉해지니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의 향도가 됩니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공을 해오니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고구려는 2년에 걸쳐 대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668년 말 수도 평양성의 성문이 당나라와 내통한 "승려 신성" 에 의해 활짝 열리게 됩니다.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고구려군을 이끌던 연남건은 보장왕과 당나라군에 잡히면서
평양성은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는데.... 연남생은 당나라군의 길을 터준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조정으로 부터 우위대장군 (右衛大將軍) 벼슬을 받았으며 3,000호에 달하는 식읍을 하사받았다.
당고종은 남건을 죽이려고 했는데 남생은 형제간의 정이 남아있었는지 죽이지 말라고 부탁해 유배형으로 끝나게
해 주었고 이후 연남생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머물던 중에 676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고구려 부흥 세력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평양에 거점을 뒀던 당나라 세력은 요동 까지 쫓겨나게 됩니다.
달리 보면 이때 서쪽 토번 (티베트) 이 당나라 국경을 침범했기 때문에 수도 장안이 위험하니 평양에 주둔하던
설인귀가 군대를 거느리고 급히 장안 서쪽 국경으로 달려간 바람에 당은 한반도에 많은 군대를
주둔할 수가 없었고 또 토번과 황해도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니 한반도에 철수한 것으로 봅니다?
이로 인하여 당나라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옛 북쪽
땅 요동에서도 다시 부흥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 유민
들을 달래기 위해 677년 연남생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 관리로 임명합니다.
연남생 묘지명에 의하면 요동에서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질병을 막고 구휼하며 농사에 필요한 전야 구획, 치수
를 개편하고 세금을 균등히 하고 역역 (力役) 을 폐지해 유망민을 불러들이는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연남생은 안동도호부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679년 46세 나이로 안동도호부 관사에서 병으로 죽습니다.
679년 12월 26일 당나라는 죽은 연남생의 유해를 중국 땅으로 옮겨와 낙양의 북망산에 매장하였
는 데.... 4일 동안 당나라 조회가 중지되었으며 장례식에 든 비용은 모두 조정이 냈고
비단 700필과 쌀 200석을 내려 주고 5품 관리를 시켜 부절 (符節)과 새서 (璽書) 를 보내 줍니다.
당 고종은 연남생에게 사지절대도독, 병, 분, 기, 남의 4개 군사, 그리고 병주자사를 추증하고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비문을 세워 그 공적을 드러냈습니다. 황실 악단을
시켜 노래를 연주하게 시켰고 황실 호위대가 관 운반을 호송했으며 3일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았고 발인날 5품 이상 관리는 그 집으로 가도록해 애송 (哀送) 의 성대함이 고금에 없었다고 합니다.
연남생 묘지명은 연남생의 일생, 관직, 가계도 등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을 남겼는데 1923년에 발굴
되었으니 묘지명에 기록된 당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양공 (襄公) 이며 증손자 연비
(당나라) 의 묘지명에는 '변국 양공 (卞國 襄公)' 으로 나오는데 생전의 봉국을 시호에 붙여 쓴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사론에서 연남생을 아버지인 연개소문이나, 아들인 연헌성과 더불어
반역자라고 신랄한 비난을 가하였으니, 연개소문은 왕을 죽인 죄가 큰 것이지만 당나라
에서도 그 능력과 군공을 인정했기에 약간이나마 긍정 평가 요소도 들어갔지만.....
'남생, 헌성은 당나라 입장에선 공신이어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 라고 딱 잘라 평가했습니다.
만약에 연남생과 연남건 형제들의 내란이 없이 고구려가 안정적으로 운영됐더라면.... 특히
이듬해 669년 부터 토번의 발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당나라 국경을 침범하니
당은 토번과 전쟁 때문에 고구려 전선에 집중할 수가 없는지라 더욱 남생의 반역이 뼈아픕니다!
668년 10월 80세의 노장 이적은 보장왕과 귀족에 수많은 고구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가 장안에서
당 고종에게 전승 보고를 했으며 669년 2월 설인귀를 안동도호로 삼아 2만 당군을 거느리고 평양
일대에 주둔케 하는데, 그후 토번이 국경을 침범하니 황급히 평양을 떠나 장안 서쪽 국경선으로 달려갑니다.
그 전인 669년 4월 당나라는 평양성등에서 잡은 부유한 고구려인 3만 8천 3백호 (23만명)를 강,회 남쪽과 산남등지
빈 땅에 농노로 몰아넣었으며 또 3만호(18만명) 는 실크로드로 가는 외진 곳인 오르도스에 추방했고,
그외 일부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와 병사에게 노비로 주고 또 용병으로 참전한 거란에게도 전리품으로도 줍니다.
30년후 698년에 거란이 당에서 독립을 하려고 하자 당군이 거란을 공격해 전쟁이 터지니 일부가 거란의 영주에서
도주해 발해를 세우는데, 수나라때 부터 고구려와 전쟁에서 엄청난 사람이 죽고 물자를 소진했으니, 고구려인
들이 훗날 반란 (독립) 을 일으킬 위험을 원천봉쇄해 후환을 없애려고 모두 중국땅으로 잡아간지라... 오늘날
한국인 중에서 고구려인을 조상으로 하는 성씨는 진주 강씨등 몇개 되지 않으니, 한국인의 3~4%에 불과 합니다.
남생에게는 같은 반역자인 아들 연헌성 에다가 손자는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 이 있고
증손자는 연현은의 아들인 연비가 있으니 당나라 고조의 이름과 겹치는 글자를 피하는 기휘로 성을
천(泉) 씨로 바꾸니 '천비 (泉毖) 묘지명' 이 전하는데, 보장왕의 외손자인 '왕위 (王暐)' 의 딸과 결혼 했습니다.
연남생은 낙양 북망산에 묻혔고 묘지명(墓誌名) 을 남겼는데.... 왕덕진(王德眞) 이 비문을 쓰고 명필
구양순의 아들인 구양통 (歐陽通) 이 글씨를 썼으며 묘지 뚜껑돌에 적힌 글은 '대당고특진
천군묘지 (大唐故特進泉君墓誌)'. 라! '당나라의 특진된 고 (故) 천 (泉) 군의 묘지' 란 뜻 입니다.
공(公)의 성(姓)은 천(泉)이고, 휘(諱)는 남생(男生)이며, 자(字)는 원덕(元德)이다. 요동군 (遼東郡)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다. 선조는 본래 샘에서 나왔으니, 애초에 영혼이 잉태됨으로써 복을 받은 것이다. 마침내 태어난 유래
로써 가계의 이름을 붙였다. 증조 (曾祖)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 를 역임했다.
부친은 개금 (蓋金) 으로 태대대로 (太大對盧) 를 역임하였으니, 조부나 부친이나 가업을 이어
모두병권(兵鈐)을 잡고 나라의 권력을 독점하였다. 9세(642)에 선인(先人)을 수여
받았고, 부친의 음덕으로 낭(郞)이 되었다. 진예(榛穢) 에 입문해 바른말을
하는 것에 조리가 있었으니 하늘의 일을 대신한 것이었고, 정치를 바로잡는 영예에 오를수 있었다.
32세(665)에 태막리지(太莫離支) 를 더해 군사와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였으니, 최고위 재상
이었다. 변경의 백성을 위무하고 순행하며 우이(嵎夷)의 옛 영토를 안무하는데
두 아우 남산 (男産) 과 남건 (男建) 은 흉학하고 패악해져 병력을 일으켜 항거하였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격문을 보냈다. 동맹 (同盟) 이 비처럼 모이니 분연히 창을 들었다. 평양을
무너뜨려 악의 근원을 사로잡고자 하였다. 먼저 오골 (烏骨) 의 교외에
이르렀고, 또한 크고 견고한 성루 (城壘) 를 격파하였으며, 그 적을 없애고 북을 치며 행진하였다.
건봉(乾封) 원년(666)에 공은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어 입조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기뻐하며 멀리서 공에게 특진
(特進), 예전과 같은 태대형(太大兄) 평양도행군대총관 (平壤道行軍大摠管) 겸 안무대사(按撫大使) 를
제수하여 고구려[本蕃]의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며, 대총관 계필하력(契苾何力) 등과 경략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조서를 받들어 사공(司空) 이적(李勣)과 경략을 책임지고 바람과 번개처럼 달려가 곧바로 평양성에
임하였으니, 앞뒤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높은 성채를 요동치도록 하였다. 공은 죄인을 벌하고
백성을 위문하고자 생각하여 그 참혹한 죽음을 불쌍히 여겼다. 은밀히 기회를 보아
백성과 땅을 구제하고자 하니, 신성 (信誠) 등이 내외에서 상응하였고, 성에 올라 기를 뽑았다.
남생의 죽음은 졸(卒)이나 사(死)가 아닌 '훙(薨)' 이라는 단어가 쓰였으니 이는 제후의 죽음을 표현할때나 쓰는
말인데, 외부의 오랑캐를 기준으로 할 때 왕에게나 쓸법한 단어니 한마디로 연남생을 오랑캐 왕,
혹은 본토 제후급으로 취급해줬다는 얘기인데, 전체 묘비명 내용을 4분지 1로 줄였는데도 이렇게나 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