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33 - 내란 시대를 종식시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아들 카라칼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 20대 황제로 193년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다섯 황제의 해에 율리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연 인물
이니, 북아프리카 출신으로는 두번째로 권좌에 오른 황제이자 푸닉 출신 중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로마 제국의 군제 개편과 복지 개혁을 추진하고 관료제 개혁에 진력했으며, 법률과 칙령을 통한 질서확립
으로 황권을 신장한 황제로, 세베루스는 오스로에네 왕국을 합병하고,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영역을 넓혔으며, 202년 아프리카와 마우레타니아를 위협한 가라만테스를 상대로 원정을 벌였습니다.
원로원 의원, 변호사, 치안판사 출신 법률가이나 스스로를 군인출신 황제로 자처한 사람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한 180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등극한 285년까지를
혼란스러운 시기인데.... 세베루스는 4세기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정) 체제의 시초로 명군으로 평가됩니다.
'아프리카' 출신인 까닭에 황제가 흑백혼혈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북아프리카 해안 일대에 흑인이나 흑백
혼혈인이 살고 있었지만 로마 제국에서 '아시아' 는 오늘날의 튀르키예인 소아시아를 일컫는
말이었고, '아프리카' 라는 말도 알제리와 튀니지를 일컫는 말이니 내륙과는 달리 대부분이 백인이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조상 중 페니키아계 카르타고인이 있었다고 한들, 본인과 일가는 전형적인
이탈리아계 이주민의 직계 후손이었으니 아프리카 속주의 주민들은 페니키아계
셈족의 피가 일부 흐르는 이탈리아와 페니키아 혼혈인들이거나 부모 모두 이탈리아계 혈통이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 속주 렙티스 마그나(리비아)에서, 146년 푸블리우스 게타와 풀비아 피아
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이탈리아계 로마인으로 기사계급이었으며, 외가인 풀비우스 가문은 기원전
2세기초 이탈리아에서 푸닉 지방의 트리폴리타니아로 건너온뒤 이탈리아 혈통을 보존한 집안이었습니다.
포에니 전쟁후 풍요로운 푸닉(북아프리카) 지방으로 건너간 셉티미우스 가문은 옛 카르타고에 정착해, 렙티스
마그나에서 가세를 넓혔으니 "엄격한 사람" 을 뜻하는 세베루스와 "야생 멧돼지" 라는 뜻을 가진
아페르, "트라키아의 게티족" 을 애칭으로 부른 게타를 번갈아 코그노멘으로 사용한 세베루스 가문입니다.
세베루스 집안은 푸닉에서만 활동해, 이탈리아로 이주한 숙부 셉티미우스 아페르 처럼 두 명의 집정관을
배출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숙부와 오촌 당숙, 육촌 형제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후 푸닉에서 쌓은 재력과
명성을 기반으로 원로원에 입성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형제가 원로원 의원이 된 배경이었습니다.
세베루스는 아프리카 속주에서의 경력을 배경 삼아 히스파니아로 건너가서 군경력을 쌓았고 호민관,
재무관, 법무관을 연달아 지냈으며,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을
지낸후 191년 제국 서방 방어와 도나우 방어선에서 중요한 속주인 상 판노니아의 총독을 맡았습니다.
186년 딸과 아내를 잃자 세베루스는 재혼하면서 신부는 운세를 보고 판단했으며 사촌형의 중매로 만난 여인이
세베루스 왕조시대에 가공할만한 시리아 출신 황후 율리아 돔나였는데, 에메사 신전에서 황제가 될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판노니아 속주 총독이 됐는데, 황제가 된다는 꿈을 꿨으며 마법, 주술, 신탁, 점성술을 믿었습니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의 수도 카르눈툼에 머물고 있던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됐으며
새 황제는 군단 병사들에게 전설의 용장으로 추앙받은 페르티낙스가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페르티낙스에게 충성서약을 하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기다립니다.
페르티낙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으며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라이투스가 황제 자리를 경매로 팔아, 율리아누스
가 그 자리를 사는 형태로 황제가 되었음을 전달받았는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군사적 역량과 명성
으로는 범접할수 없는 장군이었지만 돈으로 제위를 얻었고 민심도 최악이었으니 도전해볼만 하다고 판답합니다.
세베루스는 도나우 방어선에서 군단장, 총독으로 근무중인 형 셉티미우스 게타, 동서 가이우스 알렉시아누스를
비롯,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 달마티아와 일리리아에서 군단장과 총독으로 재임한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사위로 디오 카시우스 여동생의 남편인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과 손을 잡습니다.
때마침 로마에서 민중들이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에게 제위를 넘기고 퇴위하거나,
적합한 황제가 오르면 물러나라고 집회가 열려 구호를 외치며 야유를 퍼부었으니 세베루스
는 황제가 될 준비를 마무리 하고는 때를 노려 누군가 먼저 황제를 자처하면 올라설 준비를 합니다.
로마제국 서방과 동방의 중간인 판노니아의 총독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어떤 총독들 보다 빨리 시리아
코엘레 속주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황제를 선포함을 알게 되는데....
시리아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파발에게서 니게르의 황제 선포를 알고 수긍하는 영악함을 보여줍니다.
니게르가 로마에 이 소식을 무사히 전하게 하면서 자신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 것 처럼
행동했던 것인데..... 세베루스가 동시대의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에게
용의주도하고 난세에서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된 모습의 전형으로 평가받습니다.
세베루스는 니게르가 경쟁자가 없다며 안심하고 금방이라도 율리아누스가 무너질 것이라면서 느긋하게 병력을
준비하는 여유를 보였는데, 이때 브리타니아에서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또 황제를 선포하자 세베루스
는 도나우 전선 모든 군단을 소집해 연설하면서 자신을 황제로 추대해달라고 요청하니 병사들은 호응합니다.
세베루스 황제는 형과 동서, 마리우스 막시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등과 의기투합하는 맹세를
했고, 직후 16개 군단 전체를 이끌고 193년 4월 로마로 진군했으니 맨 앞에서
이탈리아 국경을 넘었고, 가장 빠르고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이런 방법은 공화정 후기 여러번의 로마 진군중 술라가 한 것과 판박이였는데..... 따라서 율리아누스,
원로원, 니게르, 알비누스 모두 예상도 못하다가 세베루스가 로마군 최정예로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한 판노니아 16개 군단 전체를 끌고 옴에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세베루스를 강하게 비난했다가, 세베루스의 군대가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빨리 로마 외곽에 도착해 로마시를 포위하자 체념했으며....
그들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를 죽였고 이어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는 것을 승인합니다.
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는 로마 진군을 하면서 혼란을 주고자, 사람을 보내 공동황제가 될
생각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등 현란한 수사를 섞어 속였는데, 알비누스는 신의를 중요하게 여겼던
전형적 군인이었기에 세베루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세베루스는 후방 걱정 없이 진군을 한 것입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휘하 제 10 게미나 군단과 제 14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에 3차례나 벌어졌던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승전을
거둔 최정예 군단이었고, 나머지 라인- 도나우 군단도 최전선에서 단련된 정예들 이었습니다.
대세는 무력을 앞세운 세베루스쪽으로 기울었고, 로마 민중들은 경기장에서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군대를 일으켜 권좌를 장악하라" 고 요구했는데,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가 가치를 다했다고 버렸고 193년
6월 1일, 원로원은 율리아누스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 처럼 젊은시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신임을 얻었고 게르만족과 전투를 치르며 공을
세운 장군이자 정치인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미워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율리아누스가 콤모두스 생전
황제의 폭주를 페르티낙스와 함께 원로원 내에서 견제하면서 얻은 공로를 옛 동료로서 인정하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로마 진군을 시작한지 9일후, 세베루스와 군대는 무장한 상태로 로마 시내에 들어왔고, 돈으로 제위를
팔아 국가의 위신을 떨어트린 근위대에 복수했으니 그는 근위병들을 소환해
기념식 관례대로 도시 밖으로 행군하게 한후, 페르티낙스 암살에 관여한 근위대원들을 처형합니다.
남은 근위대는 목숨을 살려주며 해산시키고, 로마 외곽 160km 내에 접근하면 죽게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근위대원들의 자리는 그에게 충실한 병사들로 채웠는데, 그동안 본국 이탈리아 출신으로만 충원되던
근위대가‘촌놈’이던 판노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속주 출신 군단병들로 채워진 첫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금 창고들을 신속히 장악한뒤, 콤모두스의 실정과 그가 암살된뒤 벌어진 혼란으로
고갈된 로마의 곡물 창고를 다시 채워나갔으며, 또한 경쟁자들과 실력으로
경쟁 중인 상황에서 언제라도 배신을 때릴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원로원을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원로원을 존중하며 본인도 원로원 의원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군복 대신 토가를 착용했으며 또
원로원 의원들에게“동료 의원들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되는 일이 단 한명도 없도록 하겠다”
고 맹세하면서, 과거 사례들과 달리 밀고자를 활용해 비열한 방법으로 숙청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시리아 총독으로 황제를 선포한 가이우스 니게르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기사계급 출신으로 본인대
에서야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 출신이니, 그는 189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191년
에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니게르는 문무 전반에 오랜 경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 황제령 이집트에서 오랜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콤모두스
치세 초기에는 다키아와 도나우 군단을 이끈 군경력도 가진 베테랑이었으니
페르티낙스가 살해되자 193년 4월 13일 시리아 군단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됐습니다.
로마에서 황제 지위를 굳힌 세베루스는 니게르를 처리하기로 했지만, 니게르는 비잔티움을 점령한 아시아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 동방의 총독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으며, 군대를 규합한후 동방의 군세와 인망을
바탕으로 본국 이탈리아를 장악한 세베루스를 단번에 무너뜨릴수 있는 곡물 공급 지역인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세베루스는 밀 공급선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 방어를 강화했으며 로마 최강의 16개 군단을 가지고
니게르를 압박했는데, 니게르는 시리아 주둔 3개 군단, 아라비아에 주둔중인
2개 군단, 말라티아- 아라비아 테트라에 있던 1개 군단 등 동방 6개 군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니게르는 시리아 북부를 막아주는 타우루스 산맥과 시리아 수도 안티오키아를 요새화했으며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보스포루스의 좁은 교차로를 통제하는 비잔티움을 포위하도록 했는데, 세베루스의 군대는 트라키아
에서 소아시아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193년말, 니게르의 군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첫번째는 마르마라해안 키지쿠스(Cyzicus)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였고, 두번째는 동쪽니케아에서 벌어진 전투
였으니, 세베루스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 고개를 돌파하여 시리아로 진군해 마지막 결정적 전투는 500년전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를 격퇴한 평원 이수스 (Issus) 에서 194년 3월 말에 벌어집니다.
니게르의 군사들은 북부 군단들과는 상대가 되지않아 패했는데, 니게르는 말을 타고 남쪽
으로 달아났지만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참수되었고 지지자들이 무자비하게
처벌되자.... 많은 이들이 처벌을 피해 로마 이웃이며 동방의 적인 파르티아로 피난합니다.
파르티아왕 볼로가세스 4세는 세베루스의 경쟁자 니게르를 지원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로마의
속국 오스로에네에 간섭해 왕과 로마를 이간질시켰으니, 세베루스는 195년 여름 니게르와
도망간 병사들을 지원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합니다.
하지만 파르티아를 박살내기 위해 진군한 세베루스 군사행동은 갑자기 중단됐으니,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브리타니아에서 힘을 키운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행동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군대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달라" 요구했는데, 알비누스
는 196년 브리타니아 속주 4만명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오니, 세베루스를 지지한
비리우스 루푸스는 패배했으며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스페인의 제7군단 '게미나' 의 지원도 받았습니다.
이후 루그두눔(프랑스 리옹) 에 기지를 두고 추가 병력을 모았으며, 요새와 주둔군을 중심으로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세베루스 입장에선 다행히도 레누스
(라인강) 전선 군대는 클로디우스 측의 합류 요청을 따르지 않아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세베루스는 새 법령들을 통과시키고 권력을 다지면서 원로원이 아닌 군을 이용해 알비누스를
‘로마의 공적’으로 선포했으며..... 197년 2월 19일 루그두눔(리옹)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양군은 총 15만명이었고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투였습니다.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베루스군이 우세해졌는데, 세베루스가 말에서 떨어
지는 일이 일어나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 그는 재빨리 황제의 의복을
찢어서 정체를 숨겼고 때맞춰 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알비누스는 패배하자 루그두눔으로 달아났지만 목숨을 끊었으니, 세베루스는 시신을 땅에 놓고 그 위로 말을 달려
훼손했으며 수습해 목을 자른후 머리를 로마로 보냈는데... 원로원을 조롱하고 협박하는 서한을 보내 원로원 내
배신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알비누스 아내와 아들들의 시신을 론강에 던지고 루그두눔(리옹) 을 무참히 약탈합니다.
197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이 동료 의원을 재판할수 있는 특권을 박탈했고 숙청 리스트에
오른 29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반역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다’면서 사형
시켰는데, 페르티낙스의 장인으로 제위를 돈으로 살뻔했던 티투스 술피키아누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오현제 시대 로마 관료 사회의 중추로 자리잡은 기사계급들을 중용했으며 군 출신 뿐만
아니라 세베루스 왕조의 특징이라 할수 있는 법학자들을 주요 관료로 발탁
했으니 세베루스 왕조를 군인 시대라고 알고있지만 로마법을 가장 꽃피운 법학자의 시대였습니다.
세베루스가 신에게 맹세하면서 정적 숙청과 재판없는 처벌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을 무시하고, 존경한다는 철인
황제의 사위까지 죽이는등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자, 로마인들은 공화정 후기 내란시기에 자행되었던
독재관(딕타토르) 술라의 악명높은 학살을 떠올려 '포에니 술라' 라 부르며 냉정함과 잔인함을 비난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원로원에 보복한후 자문회의를 만들어 무력화 시키고는 군대의 지원에 기대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는데, 자신이 군인 황제임을 강조하면서 영향력을 강조했고 또한 로마
시민의 환심을 사기위해 갖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전 세계에서 온 수백마리의 야수들을 도살합니다.
니게르, 알비누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숙청한 까닭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재산들을 몰수할 수 있었으니... 재산을 레스 프리바타
프린키피스 (황제의 개인 자산) 라는 이름으로 묶어 장악했고 군대에 시선을 돌립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막대한 레스 프리비타 프린키피스 내 자금을 기반으로 선군정치를 펼쳤으니
군인들의 힘은 커졌고, 황제 곁에서 무력을 사용할수 있는 근위대장의 권한 역시
막강해졌으니, 세베루스 치세 이후 근위대는 장교를 훈련시키는 새로운 사관학교 개념으로 변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때 로미군은 30개 군다에 군단병이 18만명 이상이고 보조병은 18만명 이하로
합계 36만명이었는데 세베리우스 황제는 3개 군단을 늘려 33개로 하니 군단병은 20만 이고
보조병은 196,000명 합계 396,000 명이고 급여는 300 데나리우스에서 375 데나리우스로 인상합니다.
이른바“선군정치”를 시작한 것으로 군단 자휘관들을 원로원 출신들에서 기사계급이나 전문 군인들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또한 병영 기지를 쾌적하게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으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동안 황제령으로 금지되었지만 사실상 행해지고 있는 몇가지를 허용해 줍니다.
먼저 병사들의 가장 큰 소원인 복무 기간내 결혼을 합법화시켜 줬으며, 퇴역후를 위해 돈을 모아
계를 드는 행동을 허락했고 초급장교들의 사교클럽 조직 창설을 허용해 군 내
사조직들을 활성화시켜 줬으며 군단병의 급여를 375 데나리우스에서 500 데나리우스로 인상합니다.
두번째 결혼인 시리아 출신 율리아 돔나에게서 얻은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부제에 앉혀 후계구도도 명확히
했으며, 그후 군사 원정을 떠났으니 동방 속국들을 위협하는 파르티아였는데, 195년에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들어간 세베루스는 병사들을 함선에 싣고 유프라테스강과 육로를 거쳐 파르티아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군합니다.
도시는 점령되어 로마 군인들에게 약탈당했으며 남자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10만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으며 파르티아의 황실 국고에 들어있던 보석과 귀중품들이 모조리 약탈
당했으니...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은 115년 트라야누스 재위때 이후 다시금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202년 여름에 로마로 돌아왔을때 56세 고령에 통풍으로 고통을 겪었는데,
198년 초에 친아들 카라칼라를 아우구스투스 직위로 올린바 있는데 이제 아들의 결혼
상대로 동향친구로 근위대장 가이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푸블리아 플라우틸라를 선택합니다.
헤로디아누스는 “플라우티아누스가 권력을 남용해 잔인한 행동과 폭력을 써서 가장 두려운 프라이펙투스
(최고 행정관이 임명하는 관리)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으니, 카라칼라는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아내와 식사도 하지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3년후 205년 1월 22일 극도로 악화되었으니, 카라칼라가 세명의 백인
대장을 설득해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으니, 세베루스 황제에게 플라우티아누스
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습니다.
플라우티아누스는 살해되었고 세베루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쿠리아 의회를 소집한뒤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자신이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했으며, 플라우티아누스
는 반역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인간적으로 냐약했기 때문이라고 죽음과 넋을 위로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말년은 우울했으니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게타 사이의 반목이 매우
심각했으니 동복 형제인 두 사람은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나빴으며 설상가상 두 후계자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적대감을 부추겨 싸우게 만듭니다.
208년에 세베루스 황제는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원정에 나섰는데 로마군이 습격을
받았고, 협상 끝에 포로들을 돌려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브리타니아 속주 군단을
믿을수 없다고 판단했으니 세베루스는 직접 칼레도니아인들을 응징하고자 나선 것입니다.
군대를 직접 이끌고 출전했는데 심각한 통풍으로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고 길게 휴식하는 것을 참지 못했지만
강인했던 의지는 꺾이지 않았으니, 세베루스는 브리타니아 섬 전체를 공략함으로써 끊임없는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으니 장남 카라칼라와 함께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지나 스코틀랜드로 들어갔습니다.
로마는 북쪽으로 국경선을 넓히며 칼레도니아인들과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중부
저지대의 권리를 넘겨받았는데... 그러나 세베루스는 나이가 들었고, 춥고
변덕스러운 날씨는 건강을 해쳤으니 직접 일을 지시하는 것에 힘들어 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된 두 아들이 화해하길 원했는데, 정치적인 관점에서 세베루스
왕조의 존속 및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화해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카라칼라와
게타는 아버지의 소망에도 강제로 추운 브리타니아 까지 온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습니다.
세베루스는 칼레도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면서 제압했다고 여겼지만 칼레도니아인들은
저항했고, 진압하기 위해 다시 원정을 실시했는데.... 재원정 수행 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가 중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니 로마의 칼레도니아 원정은 중지됩니다.
삼 부자가 참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으니, 본래 효자로 유명했던 게타는 런던에서 요크로
밤새 달려온 직후부터 아버지 세베루스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며칠 밤을 새며 부친
을 걱정했고, 직접 수발을 들었지만 카라칼라는 동생과 달리 그저 지켜볼 뿐 이었습니다.
세베루스는 병석에서 자신과 두 아들이 오붓이 밥을 먹고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고 잠이 들길
소망했으니, 그래서 두 형제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황제 막사에서 원정후
처음으로 함께 앉아 식사했고, 오랜만에 서로 가족간의 대화를 나눈후 2월 4일 세상을 떠납니다.
카라칼라는 황제의 명이라며 로마군은 칼레도니아에서 철수했고, 하드리아누스 방벽 남쪽으로 후퇴
했으며 그후 두번 다시 로마군이 칼레도니아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게 되는데 세베루스는
죽기전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다른 사람은 무시하라' 는 유언을 남깁니다.
- 세베루스왕조 2대 황제로 로마 시민권을 속주민에 준 카라칼라 황제 -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2권”에서 “융성의 시대는 어느 민족이나 비슷하지만 쇠퇴기에
접어들면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라면서 1부는 로마 21대 황제 카라칼라와 22대 마크리누스,
23대 엘라가발루스, 24대 알렉산드르 세베루스, 25대 막시무스 트라쿠스에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이어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데키우스에 갈리에누스 및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서술합니다.
카라칼라는 로마 21대 황제이자 세베루스 왕조 2대니 셉티미우스의 큰 아들로 동생인 게타와 공동 황제로 제위에
오른 인물로 콤모두스를 능가하는 로마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데, 콤모두스 처럼 암군은
아니고 군사적 역량은 있으며 내치도 업적이 크며 별칭은 갈리아 망토를 짧게 만들어 입고 다녀서 카라칼라 입니다.
카라칼라는 원수인 친동생 게타를 어머니 앞에서 칼로 죽이고 단독 황제가 되는데, 내치는 로마 시민권을 모든
속주민들에게도 준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했고, 테르메 디 카라칼라(카라칼라 목욕장) 공공 목욕탕을
건설했으며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재위기간을 전쟁으로 보내며 병사들과 함께 지내 군대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가 발표한 칙령을 “안토니누스 칙령”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공식 이름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이니 여기서 안토니누스
를 딴 것인데 마르쿠스나 안토니누스와 혈연관계는 없지만 그들처럼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친동생, 아내, 장인을 살해한 일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잔인하고 무자비한 진압방식에서 성품은 잔인하고
포악했으니 친동생을 제 손으로 죽인후, 동생의 친구들과 지지자들도 무자비하게 살해했으며 군대의
환심을 사기위해 연봉을 인상하고 죄없는 부자, 원로원 의원, 유명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강탈했습니다.
196년 카라칼라는 카이사르 칭호를 받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카이사르로 개명했으며 생일에
임페라토르 칭호를 부여받았고, 198년에는 아버지로 부터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아 1월 28일부터 공동
황제(Co-augustus) 가 됐는데 197년 10월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한걸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 《카이사리에스》와 4세기《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총명하고 유순했다고 하며, <카라칼라의 생애> 에 따르면 "어린 시절 바시아누스는 친구들에게
사랑받았고 원로원에 인기가 많았으며 애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베풀줄 알았다" 고 합니다.
바시아누스는 콜로세움에서 살인자, 강감범, 반역자등 사형수들이 들짐승과 혈투를 벌이는걸 보고 아연실색해
고개를 돌리고 울었으며,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안티오키아, 비잔티움 주민들에게 니게르편을
들었다며 보복하자,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면서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할 정도로 성품이 따뜻했다" 고 합니다.
이 외에도 카라칼라는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가 유대인이 만든 종교(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가 채찍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버지의 잔혹함을
경멸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증언합니다.
하지만 성년식 이후 바시아누스는 아버지 이상으로 냉혹했으며 무례하고 화를 내면 종잡을수 없는
성격으로 문제를 일으켰다는데, 성격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교활함과 냉혹함으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조언한 아버지와 가정교사들 이었다니 훗날의 마키아벨리 같았던 모양입니다?
세베루스는 효자인 게타를 더 예뻐했고 어머니 돔나도 비슷했는데, 재주와 재치 모두 형보다 뛰어나고
효심이 대단한 게타를 아꼈으니 태어날 때부터 점괘에 "게타가 사후 신격화된 황제가 되고
평가가 좋을테지만..... 가족중 살인마에게 당해 더 찬사를 받을 것" 이라는 것에 신경을 썼답니다.
198년 형 카라칼라에게 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209년 동생 게타에게도 준 세베루스의
결정은 원수지간에 가까울 정도로 사이가 나쁜 동복 형제를 정적으로 만들었으니,
게타는 형 카라칼라 와는 달리 잘생긴 외모를 가졌으며...... 목소리는 훌륭했다고 합니다.
또 부모에 대한 효심이 대단했으니 인망이 쌓이는지라 카라칼라는 자신보다 훌륭
하다고 평가받는 게타를 경계중이었고, 게타는 난폭해지고 반항적인
형에의 태도를 지적해 세베루스 부부에게 차기 황제감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카라칼라와 게타 두 황제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는 황궁을 반으로 나누어 주 출입구를 따로 하고, 서로
연결되는 문과 통로들을 막아서 두 개의 궁으로 만들어 함께 거처할 방법을 모색했는데 타협이
될수가 없었던 것이었고, 각자 원로원 의원들과 중요한 인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입니다.
몇달뒤 두 황제는 제국을 양분하는 것이 평화적 해결책임을 알고 게타는 아시아를 차지하며 카라칼라는 유럽
과 아프리카 북서 지역을 맡기로 했으니... 게타는 새 수도를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로 삼을
계획이었는데, 제국에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내란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두 형제에게 "제국을 서로 나눠 가질거라면
이 엄마는 어떻게 나눠 가질것이냐?" 라며 물었고..... 이 때문에 계획은 중단
되었으니 황태후 돔나가 이렇게 행동하는데 큰 힘이 된 것은 파피니아누스의 공입니다.
카라칼라는 게타가 지지자들의 밀착 경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12년 2월 저녁, 게타가 율리아
돔나와 함께 있는 때를 틈타 백인대장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살해했으며.... 이때 근위병들을 시켜 동생을 경호하는 지지자들 까지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카라칼라는 동생의 옛 지지자들을 학살했으니 맨 먼저 황궁에서 게타를 기다리던.... 게타를 둘러
싸고 지켜주던 유명 배우, 운동선수 무리를 살해했는데, 카라칼라는 어머니 돔나와 황궁에
살던 이모 율리아 마이사와 사촌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등도 경계하자 이들은 몸을 사렸다고 합니다.
게타 지지자로 몰려 원로원 의원, 근위대장, 식민지의 총독, 궁중의 시종, 군인, 전차 기수, 게타의
옛 친구들도 재판도 없이 또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니, 식사를 하던 도중에, 공공
목욕탕에서, 거리에서 살해되었는데 212년 초 몇달 동안 무려 “2만명”이 이렇게 죽어나갔습니다.
이탈리아 혈통의 원로원 의원으로 아버지 생전부터 세베루스 왕조에 헌신한 196년 집정관 프리스쿠스
는 어머니 돔나의 친구임에도, 엄청난 부자이고 게타의 오랜 측근인 까닭에 기소도, 재판도 없이
개처럼 끌려간 다음 카라칼라의 면전에서 참살된뒤 머리가 잘리고 남은 시체는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로마는 엄연히 모범적인 법치국가였고 로마 시민권자는 기소된 다음 조사를 거쳐 증거가 나오면
유죄 판결후 처벌되었던 관례가 무느진 것이니..... 프리스쿠스 등이 게타가 살해되자
마자 대역죄인처럼 끌려가 살해되고 머리가 효수된 것은 당시로서도 명백한 불법 행위였습니다.
게타 살해후 죽임을 당한 배우, 운동선수들의 팬들은 무리를 지어 카라칼라에게 거세게 항의했지만 이런
항의는 도리어 카라칼라가 더 가혹하고 잔혹하게 대응하는 원인이 됐으니.... 카라칼라는 일갈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는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이유가 됐으니 "유죄이든, 무죄이든 똑같다!"
프랑스 루이 8세는 1209년부터 가톨릭과 손잡고 남부에 기독교도로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며 부패한
가톨릭을 비판했던 카티리파와 알비파에 대해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으니 병사들이
주민들을 죽일때 누가 가타리파인지 누가 가톨릭교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하자 신부는
“그냥 다 죽이시오! 하느님은 자기 자식들을 알아본다오!”그러니까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말 입니다?
카라칼라가 군심을 잡기 위해 무리해서 군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
시킨 조치는 국고의 일시적인 고갈로 이어졌으니, 급히 세금을 인상해 징수하게 하고
부자들이 내는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를 무려 2배나 인상해 강제로 징수하고 통화 가치를 절하합니다.
세베루스 왕조 시기 데나리우스의 은 비율은 80% 에서 50% 로 하락했고, 240년대는 40%, 250년대에는 30% 를
거쳐 갈리에누스 시대에 이르면 안토니니아누스 은화의 은 함유량은 5% 미만에 은도금을 한 수준으로 폭락해
오히려 카라칼라때 발행한 화폐를 묻어둔 단지도 발견되기에 이르렀으니 훗날로 갈수록 엉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어 카라칼라가 취한 가장 역사적이고, 이후 로마 제국의 역사를 뒤집어 놓은 조치인“안토니누스
칙령 Constitutio Antoniniana”이 발표되었으니 제국 내 모든 자유인들에게 시민권을
확대 부여하고, 로마 시민들이 누렸던 권리를 가지도록 했으며 그에 걸맞은 의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이 법령은 오늘날에는 유네스코에서 평하듯 민주적이고, 공평한 칙령이라 평가받으니 시민(romanus)
- 속주민(provincialis) 구분 없이 적용되는 로마법 체계의 근간이 되어 공동체 의식이 생겼으며,
카라칼라의 의도가 불순했다고는 해도 변화를 모색해야 했던 로마 제국에 해가 되지는 않았다지만
속주민이 내던 10% 속주세가 폐지되면서 로마 제국은 만성적인 세수 부족으로 재정이 엄청 어려워 집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비판하기를.... 로마 군단은 정식 로마군인 레기온 6천명과 4천명 ~6천명의
보조병으로 구성됐으니, 속주민이나 게르만족들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보조병으로 지원해 근무후
제대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받게되는데 로마 시민권자가 됐으니 더는 보조병에 지원자가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모두 로마시민이 됐으니 이제 로마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책임 의식까지 사라진데 대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2권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을 빌려왔으니 “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그 일을 시작한 애초의
동기는 선의였다” 라고 말하는데 이제 로마인은 호네스타스(존귀한자) 와 후밀리우스(비천한자) 로 나뉘게 됩니다.
카라칼라는 병사들의 충성을 얻기위해 돈이 필요한지라 부자들은 재물을 상납하라 강요당했는데, 부를 축적하면
연례행사처럼 삥을 뜯었고 황제 측근들에게 내려진 선물은 강탈한 재물로 구했는데 신흥귀족으로 부를 쌓은
문예 후원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은퇴하며 “안토니니아스” 카라칼라 찬송 장편 서사시를 저술해 위기를 넘깁니다.
일반 병사들에게 기분에 따라 보너스를 즉석에서 내리거나 혹독한 처벌을 지시한 것도 이때부터니
카라칼라는 어느날 멧돼지 100마리를 활로 쏘고 칼, 창으로 사냥하는 묘기를
보여줬다고 하며, 전차 기수로 데뷔해 청색당을 상징하는 파란색 옷을 입고 전차를 몰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날에는 자신이 꿈속에서 태양신이 몰던 전차 운전 기술을 전수받았다면서 이를 시연하는 것을
공개했다고 하는데.... 이 모습은 말년의 콤모두스가 완전히 정신이 나간 나머지 스스로를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며 무적의 검투사이자 최고의 전차 기수로 생각했던 것과 묘하게 비슷합니다.
로마가 불편했던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를 향해 떠났는데 전쟁과 모험을 함께 한 이유는 자신의 우상
알렉산드로스 대왕 처럼 무용담을 직접 선보이기 위함이었으니 마차를 타고 가는 대신에
병사들과 나란히 행군하고, 로마에서 특별히 수송해온 고급 음식 대신 평범한 현지 음식을 먹었습니다.
213년 여름 로마군은 라인란트에서 게르만 부족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니, 원로원은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수여했으며, 예방 전쟁을 통해 원로원으로부터
파카토르 오르비스라는 존칭을 얻었지만 카라칼라는 금으로 만든 왕관을 바칠 것을 명령합니다.
당시 라인강에 게르마니아 방벽을 따라 건설된 군단 주둔지는 훗날 도시로 발전했으니 크산텐,
쾰른, 본, 코블렌츠, 비스바덴, 마인츠,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레겐수부르크로
이어지는데....... 강변에는 보조병기지가 세워지고 그 후방에는 로마군단 기지가 세워졌습니다.
카라칼라는 마케도니아의 트라키아로 내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었으니... 영웅의 동상과 그림을
모든 도시에 공개적으로 전시하도록 명령했으니 원로원 의사당, 신전, 로마시 전체를 자신이
두번째 알렉산드로스임을 암시하는 조각상과 그림으로 채웠으며 안티오키아에서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5세와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전쟁을 할 이유가 없어진지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갑니다.
피라미드를 구경한것 까지는 좋았는데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젊은이들이 비난하자 그는 젊은이들을 체육관
에 모은후 수천명을 살해한 탓에 이집트인 전체의 비난에 시달리던 중에 파르티아에서 정변이 일어나 동생
아르타바누스가 형을 살해하고 왕이 되자 반대세력은 볼로가세스 6세를 받드니 내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곤궁에 빠졌던 카라칼라가 이런 희소식을 기뻐하며 전쟁을 하기로 한후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군대를 편성
하고 전쟁을 시작했는데.... 216년 초여름에 시리아 국경에 집합한 군 병력은 대군인 8개 군단
이었으며 파르티아 정복 전쟁은 카라칼라 암살후 마크리누스로 이어져 니시비스 전투라고 불립니다.
파르티아의 두 경쟁자 중 하나인 볼로가세스 6세는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과 수도 크테시폰을 장악했고,
다른 경쟁자 아르타바노스 4세는 이란고원 너머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는데, 카라칼라는 분열된
상황을 이용해 아르타바노스 4세의 편을 들었고 동맹 강화를 위해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아르타바노스 4세는 제안을 거부했고 카라칼라는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하자 놀란 아르타바노스 4세가
동의해 결혼식을 주선했다가, 매복한 로마군의 습격으로 신부의 들러리를 섰던 파르티아 인사들이
죽어나가고 가까스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카라칼라를 폭군으로 단죄하면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216년 봄에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남하한 로마군과 시리아에서 동진한 로마군이 양쪽에서 공격하자
파르티아군은 후퇴했는데 여름이 되니 시리아에서 편성된 근대는 경험 부족으로 일진일퇴를
벌이는 중에 휴전을 위해 원로원이 반대하는 외국인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합니다.
이후 철수해 로마군과 황제는 에데사에서 겨울을 나고 다시 움직였는데, 비티니아와 갈라티아
주민 고문과 학살, 알렉산드리아 청년 학살사건 때문에 여론이 최악이었던
카라칼라는 행군중에 사소한 잘못을 범한 두명의 백인대장들에게 화를 내면서 심하게
질책했으니, 앙심을 품은 두 백인대장 중 한 명인 마르티알리스는 황제를 죽일 결심을 합니다.
황제는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볼일을 보기 위해 가는 길을 멈췄는데, 야사에 따르면 기도를 위해
멈췄다고 합니다만 노상방뇨 중에 황제가 암살된 것에 놀란 사람들이 후일 "설마 카라칼라가
길에서 소변을 누다가 부하에게 칼을 맞고 즉사 했겠어?" 라며 나온 의심에서 시작된 것 이랍니다.
황제가 소변을 누는지라 호위병들은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카라칼라가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백인대장 마르티알리스를 급히 부르니 절호의 기회라! 다가가서는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누던 카라칼라를 검으로 한번에 깊이 찔렀으니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합니다.
그러나 정작 29살 카라칼라를 죽인 백인대장 마르티알리스는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에게 황제 시해
범인으로 즉결 처분당했으니, 본디 ‘쓰고 버리는 카드’들의 용도가 다 이렇다는 것인데
달리 “토사구팽” 이라는 사자성어도 있으며 마크리누스는 죽은 카라칼라의 뒤이어 황제가 됩니다.
율리아 돔나는 특권과 영예가 박탈되고 안티오키아에 연금됐으며 몇주후, 아들 카라칼라를 따른 병사
들을 모아 반격을 도모했다가 사전모의가 들통났고, 재산이 압류되었음을 알고는 유방암을 앓아
건강이 나빠 곧 죽을수 있다는 두려움에 부귀영화가 끝났음을 깨닫고 굶어 죽는 방법으로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