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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2 - 강건성세의 마지막 황제 건륭제의 청나라!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6.06.06|조회수84 목록 댓글 0

 

중국 52 - 강건성세의 마지막 황제인 건륭제의 청나라가 사방에 위세를 떨치다!

 

 

건륭제는 173524살 나이로 황위에 올랐는데 즉위 기반이 불안정해 황제가 되자 피의 숙청을 거듭해야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건륭제는 장정옥과 오르타이 등 쟁쟁한 대신들이 직접 보좌했으며 아버지 대

에서 계승권을 가질만한 황족도 대부분 숙청되었기에 시작 부터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건륭제 치세는 조부 강희제의 자비로움을 앞세운 치세와 친부 옹정제의 엄격하고 냉정한 통치의 중간으로 청나라

인구는 3억에 달해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관리하던 초대규모 인구 대국이었고 명군들이 발전시켜온

국력은 건륭제 시기에 그 정점을 찍었으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프랑스, 영국, 스페인을 넘을 정도 였습니다.

 

 

건륭제의 치세는 청나라가 대외적으로 그 절정을 맞이하던 때로 즉위 20여년 뒤인 1757년 티베트,

신장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군을 이끌고 친정해 기존에 해당 토지에 자리잡은 준가르를

민족 멸절 수준으로 쓸어버리면서 톈산북로를 차지하고 서부 지역에서의 통치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1759년 대소화주의 난을 진압한 뒤 톈산남로까지 장악했으며, 1762년에는 일리장군을 세워 발하슈호

까지 이르는 신장 지방의 거대한 영토를 관할토록 했을뿐만 아니라 구이저우성에서 일어난

묘족의 난, 중국 남부 쓰촨성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깔끔하게 쓸어버리면서 내란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위험 세력을 철저히 찍어누르면서, 그렇지 않은 나라 또는 압도하지 못한 나라와 외교를 맺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며 당근과 채찍 전술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었으니, 동남아나 서남쪽 국가들과 이런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당시 4번이나 침공하다가 4번 모두 점령에 실패한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와는 외교관계를 맺습니다.

 

 

1784년에 태국의 짜끄리 왕조, 1788년에 꼰바웅 왕조, 그 이후 베트남의 후 레 왕조와 떠이선 왕조등과

사절과 조공을 받았으며 재위 말년인 1792년에는 네팔의 구르카 왕국이 티베트를 침략하자, 후한

답례품을 주고 침략을 막은뒤에 부탄 왕국, 시킴과 형식적인 군신 관계를 맺어 서남 국경을 안정시킵니다.

 

 

건륭제는 외치만이 아니라 내치에도 크게 신경을 썼으니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사고전서" 를 발행

하며 문학을 집대성하는등 정치와 문화등 다방면으로 신경을 썼는데,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던 건륭제는 '속삼통(續三通)', '황조삼통(皇朝三通)', '대청회전(大清會典)' 등의

사서를  편찬토록 했으며 홍루몽, 요재지이, 유림외사 같은 중국 최고의 소설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그외 고금도서집성 등 여러 기념비적인 저작을 남기는 한편 정권 유지도 중시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의

문자의 옥은 명나라 시절에 비해서 압도적일 정도로 심했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청나라가 지정한 금서

(禁書) 양이 명나라가 지정한 것에 비해 12.6배에 이르렀을 정도로 사상 통제를 강력하게 시행했다는 말입니다.

 

청나라는 이 때 중국 역사상 가장 긴 태평성대를 맞으며 경제적으로 전세계에서 독보적인

1등을 차지하여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변했고,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 무려 130여년에 달하는 이 청나라의 전성기를   '강건성세'   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현재의 중국 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워낙 풍요로운 문물 탓에 전세계

상인들이 청나라로 몰려 교역을 하는 통에 세계의 은이 청나라로 빨려들어왔으니, 청나라는

세계 GDP 32.9% 를 홀로 독차지했으며...... 은의 블랙홀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렇듯 건륭제의 치세는 청나라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개화한 시기로 평가되나,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몰락의 시초가 된 것 또한 건륭제 재위 기간이었으며, 건륭제 말년에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 경이 접견

청하며 찾아오면서 태국, 베트남등 아시아 지역만이 아닌 서방의 유럽과도 교류가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전성기를 이끈 자부심 때문인지 건륭제는 매카트니 경에게 매우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그를

국외 추방했고, 이는 매카트니가 앙심을 품고 본국에 청나라를 매우 강도깊게

비난하는 보고서를 쓰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편전쟁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라에 외환이 없이 치세가 길어지면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지기 마련

인데도 간신 니오후루 허션에게 빠져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하고 강남 지역에 6번이나

대규모 순행을 다니는등 청나라의 문제점을 바로잡긴 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허션은 황제의 총애를 업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고, 청나라는 겉으로는 세계 최강대국이지만 속으로는 깊숙히

썩어들어갔으며 입관한지 100년도 더 지나버리자 팔기군과 녹영은 방탕하고 썩어빠진 군대로 타락

했으며..... 건륭제는 청나라에 입맛에 맞지 않는 서적들과 학문을 탄압하는 문자의 옥을 대대적으로 펼쳤습니다.

 

 

강희제와 옹정제도 학문 탄압을 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의 실정을 지적하는 목소리나 개혁 요구

까지 모두 없애버리지는 않았지만, 건륭제는 청나라 중앙정부의 뜻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학자들을 탄압했고.....  이는 결국 중국 학문의 소실과 퇴색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후세 건륭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라는 평도 있는 반면에

부정 부패를 심화시키고 나라가 썩어들어가는 것을 보지못한 암군이라는 평도 있으니....

'황제 한 명의 재위기간' 에서 이정도로 극단적으로 치세와 망조가 든 적이 없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래도 본인의 젊은 시절까지 쌓아온 기반 덕택에 60년에 달하는 그의 치세동안 망조가

두드러지진 않았으나, 그의 후계자인 가경제가 재위에 오른 이후 곪아있던 병폐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하지만 건륭제 시기가 청나라의 최전성기였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건륭제는 재위에 오른지 60년이 지난 85세에 자신의 15남인 가경제에게 양위하였으나, 대신 본인은

상황 자리에 오르며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연이은 실책으로 망조가 들기

시작한 건륭제의 말기 이후 가경제의 재위 기간에서 내부의 병폐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지방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억제해야했던 조정마저 파벌을 이루며 싸우거나

매관매직으로 사익을 다투기 급급했으며, 군대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장비는 노후화되고 군법은

느슨해졌으며 병사들도 해이해져갔고 필연적으로 국고가 비어가기 시작하자 이를 메꾸겠다고

세금을 쥐어짜내니... 백련종, 천리종, 자한기르 호자의 난등 봉기가 들끓을 정도로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자연마저도 등을 돌린듯 1815년에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였고  북반구에 극심한 기상  이변을

초래하며 운남대기근이 발생했으며, 또한 건륭제 말기에 외교관으로 찾아온 매카트니 경이 홀대당해

앙심을 품은 영국은 청나라와 친교는 논외로, 아편을 밀수하며 돈을 훔치면서 마약굴로 만들어갔습니다.

 

쑤저우 苏州( 소주) 남부에 무두구전 (木渎古镇 목독고진) 에 있는 홍음산방 (虹饮山房) 입구에는 乾隆

6江南行程记事表(건륭6하강남행정기사표) 라는 게시물이 보이니.....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가

여섯차례 강남에 순행 했다는 말이니 여기 홍음산방(虹饮山房) 에 들러서 숙식 을 했다는 모양입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 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수’  칼럼에  황제의 시심”  이라는 시가

실렸으니..... 바로 건륭제가 쑤저우의 무두구전 홍음산방에서 자면서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밤비가 배의 창문을 두드려, 때마침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다.

귓가엔 감미로운 빗소리 맴돌고, 이불을 덮으니 냉기조차 사라진다.

이곳 남쪽 땅은 벌써 촉촉해졌는데, 북쪽 땅 생각하니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순식간에 빗소리는 점점 잦아드는데, 마음 뒤숭숭하여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네.

 

 

(夜雨打船窓, 恰値淸夢醒. 入耳適宜聽, 披衾不覽冷. 即南已增潤, 憶北牽懷永 須臾聲漸稀,

無眠以耿耿.) 밤비(야우·夜雨)’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17111799)

 

짧은 순간시인의 감정은 고요와 불안을 넘나든다꿈결 같은 평온함에 젖었나

싶더니  어느새 북쪽 땅을 떠올리며  심란해진다. 겨우 빗소리

하나에 일렁이는 이 섬세한 감정선, 이 정도면 시심 (詩心) 이 동하고도 남을 성싶다.

 

 

이 시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 (乾隆帝). 제왕이 순행 도중 이런 감성을

토해냈다면  북쪽 땅 생각’  이 향수병일 리는 없다. 혹 중원 지역의 가뭄을

염려한 때문이었을까. 그렇더라도 이 감성 폭발은 황제로서는 다소 과한 센티멘털리즘 같아 보인다.

 

건륭제가 남긴 시는 무려 42000여 수에 달한다.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당시 전체의 수가 총 4

8000여 수인 점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수치다. 황제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시상이 넘쳤을까.

이런 천진한(?) 작품까지 전해진다. ‘한 조각 한 조각 또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네다섯 조각. 여섯 조각 일곱 조각 여덟아홉 조각, 갈대꽃으로 날아드니 아예 보이질 않네’ (‘흩날리는 눈’)

 

 

고사성어에 "강건성세(康乾盛世)" 라고 있으니 청나라때 강희제- 옹정제 - 건륭제 로 이어지는

1661년  부터 1796년 까지 135년 동안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로..... () 나라

문제와 경제때의 문경지치 (文景之治)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서 이름난 태평성대 중 하나 입니다.

 

실제로는 이 두 황제 사이에 옹정제가 끼어있지만 60여년에 달하는 둘의 재위기간에 비해  10여년

으로 재위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민간에서는 폭군이라는 인상이 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생략하고 두 황제 만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강건 (剛健) 이 아니고 강건 (康乾) 입니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잦은 대외원정으로 군비 증가, 황실과 귀족들의 사치 등으로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으니.... 19세기 들어 청은 산업혁명 등으로 빠르게 발전하던

서구 문명에 기술·사상·군사적 으로 열세를 보이게 되었고, 그럼에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가경제 때 부터 유입된 아편으로 인해 발생한 아편전쟁 이 터지면서 몰락하게 됩니다.

 

전한의 무제나 명나라의 영락제, 프랑스 왕국의 루이 14,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는데, 건륭제가 청나라 황제중 유일하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는

존경하는 조부인 강희제의 61년 치세 라는 대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 (上皇) 이 되었고 가경제가 다음 황제로 즉위 합니다.

 

 

건륭제는 강희제 50년에 태어났는데 아들이 20명에 손자는 100명 에 달했으니 할아버지가

그를 알기도 어려웠지만.... 문재가 탁월했고 사서삼경 에 통달했으며 사냥에서도

용감하게 곰과 싸워 잡았으니 그 모습을 보고 강희제는 손자 건륭제를 칭찬하며

관심을 기울였고, 늙은 몸이었지만 손자에게 직접 학문과 무예 를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강희제 마음에 드는 것은 건륭제가 아버지 옹정제와 적모(嫡母) 효경헌황후, 친어머니 효성헌 황후 에게

꼬박꼬박 예를 다하며 문안 을 올리는 것이었으니, 유교 가르침 에 감화되고 가족간의 정을 소중하게

여긴 강희제에게는 좋게 보인지라..... 강희제는 죽기 직전에 황위를 물려준 옹정제에게 건륭제를

후임으로 삼으라고 했다는, 조선인들은 이러한 여진족을 미개한 야만인 이라고 욕했으니 모를 일입니다?

 

 

건륭제는 여러차례 원정에서 조부 강희제 처럼 최고 지휘관 이 되지는 않고 전쟁은 장군들 에게

맡겨놓았는데,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군 대신에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로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보르지기트 반디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우야 자오후이 아구이, 건륭제의 처남 푸차 푸헝, 그의 아들 푸차 푸캉안 등이 활약을 했습니다.

 

 

보갑제(保甲制) 100 가구를 모아 갑(), 10개 갑을 모아 보() 를 만들어 공동체 사람끼리 질서와 치안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 (里甲制) 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

하는 제도였는데,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 세금을 무겁게 매겨 사익을 취했습니다.

 

 

건륭제는 매 가구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 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

하였으니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

놓고 매년 인구 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 에 보고하도록 하였으니....

사익을 취하려는 것을 차단했고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강희제 처럼 건륭제도 남순을 6번이나 했으니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등

3,000여명이 움직였는데,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으니

특히 시와 그림 을 좋아하며 관심이 많았기에 시인과 화가들도 초청해서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시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백성들이 일부 부담을 지기도 했습니다.

 

 

건륭제는 60년 치세 동안 10회의 원정 을 수행했다 하여 자신의 별호를 십전노인 (十全老人)

으로 자칭했는데, 위구르나 진촨 (金川) 처럼 현재의 중국 영토인 곳도 있고 베트남이나

미얀마 처럼 외국에 감행한 것도 있으니 그 결과 원나라 다음으로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영토는 캐나다 보다 큰 1,470에 달하고 인구는 3억을 넘었습니다.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준가르의 복속 이라고 할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해 티베트 서부 국경 을 안정시킴

으로써, 청나라와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이며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신강 면적은 한반도 10배 로 만주와 맞먹으니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고 티베트를 보호국 으로 병합해

강희제 시절의 청나라의 영토에서 40% 가깝게 늘려놓았는데, 신강지역은 후에 이슬람교도의 난 이 벌어

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 청나라의 혼란을 증폭시켰지만 대부분의 영토는 고스란히 현재 중화 인민공화국 영토 로 이어집니다.

 

 

버마 원정 은 4번 침략이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베트남(여왕조) 정벌 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완혜에게 패하고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형식적 복속을 얻어내는데 그쳤으나 전쟁 결과 청나라는 버마와 베트남과 형식적인 조공관계 는 맺었습니다.

 

 

이런 조공관계는 국내적, 대외적으로도 의미가 있었으니.... 국내적으로는 건륭제의 정치적

성공으로 선전되면서 황제의 권위 를 높이는데 기여했고, 외교적으로 조공관계는

형식상의 명분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는 "황제의 배포" 라는 이름으로 더 큰

답례품을 줘서 조공국을 회유 하는 성격이 강했으니 공식적인 외교 채널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버마와 베트남은 조공무역이 짭잘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형식상의 "상국" 인 청나라 영토인 북쪽으로

의  확장은 단념 했고, 버마는 동서 (타이 및 아라칸) , 베트남은 남쪽 (참파) 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버마와 베트남 방면에서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별 충돌이 없었으므로

건륭제의 원정은 군사적 완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방을 안정시킨 업적 으로 칠 수 있습니다.

 

 

건륭제는 89세로 죽었으니 가장 장수했는데 중국의 황제들은 혹독한 업무로 인한 과로나 스트레스 혹은 궁중

생활에서 비롯된 비만과 질병등 문제 때문에 40~ 50세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건륭제는

"하루에 식사를 두 끼만" 먹었으며 콩과 나물류 등의 채식과 생선 을 위주로 한 소박한 음식과

제비집 요리를 즐기는등 극히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게 장수의 비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일 중독자 였던 조부와 아버지 에 비해 여유를 가지고 놀았던 것도 장수의 비결이지

않을까 싶은데, 왜냐하면 조부와 아버지, 특히 아버지 옹정제의 행적은 그야말로 과로사

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옹정제는 과로사했는데, 특히 명나라 주원장이 만든

권력 제도에서 황제의 일은 만기친람 이라...... 사실 제대로 한다면 쉴 시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는 황실의 사치로 멸망한 전대의 명나라 를 항상 타산지석으로 삼아 황제들은 근검 절약의 모범

보였으니,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개창하면 옛 왕조의 왕궁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 지었으나,

도르곤과 순치제는 명나라의 황궁인 자금성을 그대로 청나라 황궁 으로 사용했으며..... 뒤를

이은 강희제나 옹정제는 검소함 으로 유명했고,  예술을 즐길 시간도 없이 정사에만 몰두 했습니다.

 

 

건륭제는 청교도적인 선대 황제들 과는 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예술을 애호하여 예술품을 광적으로 수집

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서예나 서화에도 능했고 시도 즐겨 지었으니, 건륭제는 유명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황궁에 초청해 다회(茶會) 를 여는 것을 좋아 했는데.... 예술가들은 초청받은 댓가로

황제  앞에서 글씨나 그림을 기증해야 했지만 그림값 명목으로 두둑한 은자 나 값비싼 다기를 받았습니다.

 

 

무두구전(木渎古镇 목독고진) 에 홍음산방 (虹饮山房) 엣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엄가화원 (严家花园) 은 건륭제의 스승 이자 중국 최장수 시인

심덕잠 (沈德潜) 의 고거 인데..... 시인과 황제 건륭제에 관한 일화가 전해 옵니다.

 

 

건륭제의 글씨와 그림은 수준급이라 여러 작품이 남아 있으니 건륭제의 글씨는 송나라 시대의 왕희지,

미불, 명나라의 동기창체()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명필 이라고 불릴만 한데....

문제는 본인의 글씨에 자부심이 많아서, 자신이 수집한 여러 명화에다가 자신이

직접 감상평이나 시 를 남겼는데, 건륭제의 시재는 필체에 미치지 못한지라 그게 흠이 되었습니다.

 

 

내탕금 뿐만 아니라 심복 허션이 부정축재로 모은 비자금을 써서 저명한 고서화 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원나라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 는 건륭제가 망쳐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운치있는 절벽을 그린 작품에 눈에 확 띄는 최상단 중앙부에다가 떡하니 자기 인장을 찍어 놨습니다.

 

 

조맹부 걸작 "작화추색도 (鵲華秋色圖)" 도 건륭제 흔적이 많은데 도장을 찍고 시를 적는등 그림을 훼손하는

편이었고, 북송 휘종이 그린 "계산추색도" 라는 걸작을 수집하고는, 상술한 "고고정도" 에 찍힌 것과

동일한 큼지막한 인장을 찍어놓고, 여러 자잘한 인감을 찍은 뒤 좌측 상단부에 자신의 시까지 적어놓았습니다.

 

 

건륭제의 글씨나 그림은 우수하지만 시재는 평범한데도 시를 좋아해 평생 4만편이 넘는 시를 썼지만,

"조조의 시는 몇십편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 있을 뿐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어느해 겨울, 건륭제는 총애하던 시인 심덕잠 등 신하들과 함께 항주 서호로 갔는데

마침 눈이 내렸으니 눈꽃이 바람이 휘날려 춤을 추는 것 같은지라 이를 보자

시흥이 일은 "대시인(?)" 건륭제는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싯구를 읊었습니다.

"일편일편우일편 (一片一片又一片, 한송이 한송이 또 한송이)"

 

 

사람들은 싯구를 듣고는 모두  '좋다고 소리쳤고 역시 황상의 솜씨는 비범하다며 한마디

를  하는데.... 천하가 깜짝 놀랄 정도라고 아부를 하자 기분이 좋아진 건륭제는

계속하여 읊었으니....  "삼편사편오륙편 (三片四片五六片세송이 네송이 대여섯송이)"

 

 

이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이것이 '' 라면, 어린아이라도 하루에 몇편씩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도 솔직하게 말할수는 없는지라 계속하여

호평하는 소리 가 들려왔으니 건륭제는 기운이 나서 뒷구절을 또 읊었다고 합니다

"칠편팔편구십편 (七片八片九十片, 일곱송이 여덟송이 아홉 열송이)".

 

 

이 싯구까지 나오자 모두 멍해졌다. 설마 이 어르신이 숫자를 세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뒤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백편천편만만편 (百片千片萬萬片, 백송이 천송이 만만송이)"  는 아니겠지?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건륭제 역시 여기까지 읊은 후에 더 이상 싯구를 잇지 못했으니...

이런 난감한  순간에 엄가화원의 주인인 심덕잠이 일어나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황상의 시는 너무나 좋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이 개꼬리로 담비를 잇도록 (狗尾續貂) 해 주십시오."

 

 

마침 난감한 처지였던 건륭제로서야 윤허할 수밖에, 그리하여 심덕잠이 마지막 구절을 완성시킨다.

"비입매화도불견  ( 飛入梅花都不見매화꽃으로 날아 들어가니 모두 보이지 않네 )"

 

이 마지막 구절로 인하여 전체 시의 품격이 살아났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크게 칭찬

하면서 그에게 담비 가죽옷을 하사했다. 그리고 이 시는 건륭제의

소유로 되었다는데....  이 시는 청패류초 (淸稗類鈔) 순행(巡幸에 나오는 일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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