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21 - 정유재란때에 명량 해전과 울산 전투 및 4로 병진과 노량 해전!
일본군은 임진왜란에서 대포를 가진 명군이 참전한데다가 바다는 이순신 장군에 막히고 보급은 의병이
산길을 차단해 군량이 떨어진 가운데.... 여름옷을 입고 함경도와 평안도의 엄동설한 강추위에
동상이 걸린데서 교훈을 얻었으니 조선을 신속하게 점령해 통치한다는데서 장기전으로 전략을 바꿉니다.
먼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기 까지 29개 왜성을 쌓은 다음에 늦은 봄에 출격해 경상도와 전라도
및 충청도를 유린하면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불질러 초토화 시킨 다음에 늦가을이
되면 따뜻한 남쪽 왜성으로 돌아와 부상병을 치료하면서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 다시 출격합니다.
명나라는 쇠퇴기로 접어들어 내리막길인데다가 부정부패가 심해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민란이 일어나는 중에,
명군의 최대 약점은 조선이 멀리 떨어진 나라니 군량과 무기등의 보급이 너무나도 힘든지라 돈을 쏟아붓는
판이니 몇년만 계속하면 재정이 바닥나고 피로해진 명군은 철수할 것이고, 전란에 피폐해져 불과 3만 8천
밖에 동원하지 못하는 조선도 힘이 다하면 경상도와 전라도에 충청도 3개 도를 할양받을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충청 병사 이시언한테 사로잡힌 일본군 장교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 등 포로들은 “당초에 행장과 청정의
뜻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대로 무찔러 죽이고 음력 10월 2일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의 소굴로 돌아오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3일 길 밖에 안되는데도 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뜻대로 되지는 않았으니... 총사령관인 양호는 대군을 이끌고와 엄청난 전비를 썼는데 아무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면 대간들에게 탄핵당해 재산을 몰수 당하고 죽을 판이니 병사들을 얼마든지
희생시켜서라도 성과를 내야 하는지라 승리에 목이 마른 가운데 29개 왜성 중에 단 한곳에 병력을 집중시킵니다.
두번째는 120년간 200개 나라로 갈라진 일본을 전쟁과 외교로 간신히 통일한 히데요시가
1598년 봄에 병이 깊어져 여름에 죽으니,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왕조가 굳혀지지
않은지라 후계자 문제가 급하니..... 6살 어린 히데요리를 두고 서로 일본의 주인
이 되기 위한 내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니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지라 철수한 것입니다.
적군의 대장 중에 으뜸은 조선 왕자 2명을 포로로 잡은 가토 기요마사로 부산 북쪽 울산 남쪽인
서생성에 주둔한 가토는 부하를 시켜 울산에 도산성을 쌓는데, 저게 가장 오른쪽(북쪽)
에 외따로 자리한데다가..... 아직 성이 완공되지도 않았으니 쉽게 함락할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 12척을 수습했다는 정보를 들은 도도 다카토라는 330척 왜선을 끌어모아 서진
하니....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대첩 (鳴梁大捷) 에서 13척 판옥선을 지닌 이순신 장군에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한 130여척이 넘는 제1진 왜군은 참패하니 31척이 격침되고 후퇴 합니다.
이순신의 배 한척만 적선 전부를 죽자살자 2시간 가까이 혼자 막는 상황에서..... 12척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모두 뒤쪽에서 머뭇거리자 장군이 초요기를 올려 배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싶으냐?” 호통을
치니 혼이 반쯤이나 나간 거제 현령 안위 장군이 배를 저어 너무 멀리 앞으로 나갔다가 왜선 3척에 포위됩니다.
왜군은 낫을 걸고 도선하려던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바닷물에 빠지는등 판옥선에 단 한명도 오르지 못하는데
왜선은 작고 낮은 수송선인데 비해.....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크고 높은 군함으로 파도치는 바다에서 뛰어
오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니 이순신은 적선 3척에 포격해 안위의 배를 구하는데,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배에 왜군이 올아와 육박전을 벌이며 배가 파손돼서 어선들이 밧줄로 견인하는 장면은 모두 거짓입니다.
한산해전에서 조선군 사망자는 3명이고, 명량해전에서 사망자는 2명(순천의 김탁, 우수영의 계성) 이며
조선군의 배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해전은 멀리 떨어져 조선군 대포가 일본군
배를 격침시킨 것이니 일본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인데 비해 조선 대포는 500~1,000
미터 이니..... 300미터 거리에서 포격하면 조선 수군은 피해가 전혀 없이 적선을 부술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군은 도도 다카토라가 330척을 거느렸지만 실제로 명량에 출진한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133척으로 보는데, 명량이 워낙 좁은데다가 파도가 엄청 사나우니 이순신 장군의 큰 배인
판옥선이 13척으로 일렬로 늘어선데 비해..... 왜군 배는 세키부네를 앞세운지라 낮고 작으니
구루지마 마치후사가 지휘하는 38척이 2열로 늘어서서 장거리에서 포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드디어 오후 1시경에 명량의 물살이 반대로 바뀌어 전황이 조선 수군 측에 엄청 유리해졌고, 일본 배
들은 역류를 맞으며 게다가 조선군 대포 포격이 아니래도 근접한 수많은 배들 끼리 서로
엉키고 부딪치며 깨져서 침몰하기 시작했으니.... 패닉과 혼란 상태에 빠진 일본 함대는
후미에 자기측 배들이 늘어선지라 배를 뒤로 돌려서 빠저나가기도 매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음력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 명량해전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승리" 이니, 왜군은 31척을
잃고 더 많은 배가 부숴진 가운데 도주했으니.... 이순신은 아침 9시 부터 오후 5시
까지 그 험한 파도와 풍랑을 격으며 적군과 사투를 벌인 병사들이 점심도 거른채
저녁 때가 넘었으니 조선인들이 기다리는, 원래 출진한 우수영으로 돌아와 밥이라도 먹여야 합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장군은 "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아군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웠다“ 라 적었으니
급한 마음에 우수영에는 들르지도 못하고 기진맥진한 수군을 다그쳐서 노를 저어 멀리 신안군 당사도에
도착해서도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시 배를 저어 어의도에 가서 비로소 육지에 오릅니다.
어의도에서 밥을 지어 먹고 휴식한 다음에 다시 북상해 21일 멀리 금강 하구 선유도에 도착해 상륙해 장계를
올리는데.... 왜군은 300척의 배가 남았으니 일부 왜선이 진도를 우회해 조선 수군이 포위되면, 이미
대포알과 화약도 소진상태로 보이니 전멸을 면하기 어려운지라 승리한 당일 황급히 후퇴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명량해전 조선 수군의 대승으로 일본 수군은 도망쳤으며 다시는 전라도 바다를 넘보지 못했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한지라 바다는 안전해졌으며 백성들은 목숨을 구했고, 이 승리로 전세가 바뀌어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섰으며 또 충청도 직산까지 진출했던 왜군이 명량해전 패배로 후퇴했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명량에서 패해 달아났던 왜군은 당일인 16일 밤에 바로 첩보선을 내보냈으며 다음날인 17일 재진격
해 와서 우수영을 점령하고 목포를 거쳐 영광까지 진격하며 조선인을 죽이고 약탈하며.....
불지르니 전라도는 아비규환 생지옥을 만들었으며 살아남은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고니시등 육군 5만 6천이 전라도로 들어오니 간양록의 저자 전 형조 좌랑 "강항" 은 영광에서 일족을
배 2척에 나누어 태우고 바다로 피난했다가 "명량해전 대승리 7일" 후인 9월 23일 전남북
경계인 영광앞 바다에서"이순신을 추격해 북진한 왜군" 선박에 나포되는데, 명량해전에서 대패
했다는 도도 다카토라 휘하에 오즈 성주 사도 (佐渡) 의 부하인 노부시치로 (信七郞) 에게 잡힌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는 전혀 다르게 처음부터 살육과 초토화를 목표로 하고 보이는대로 다 죽여
병사당 코 한되를 바치라고 했으니.... 종군 승려 교넨 (慶念) 의 조선일일기 (朝鮮日日記)
에는.... “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전쟁은 없었다. 약탈과 살육 후 이들은 집에 불을 지르니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조선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
“산 사람, 죽은 사람, 어린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귀를 자르고 코를 베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 가 되었다. 귀와 코를 잘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 가 산천을
진동했다. 이들은 조선사람들의 머리, 코, 귀를 대바구니에 담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사냥했다.”
교토에는 도요쿠니 진자와 히데요시의 절인 호코지 앞에 귀무덤 耳塚(이총) 이 있으니 왜장 오오고우치
히데모토는 귀와 코가 잘린 자가 18만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한일 역사교사
공동 연구팀은 코 수령증 (鼻請取狀) 즉 군공증 (軍功証) 을 계산한 결과 약 12만명 으로 보고 있습니다.
간양록에 보면 강항은 높은 관리인지라 수백척이 정박중인 무안항에서 왜군의 심문을 받는데
명나라 두유격이 배 1만척으로 태안에 도착 (아직 중국에서 오지도 않았음!) 했으며
이순신은 군산으로 가서 명군과 만났다고 뻥을 치니..... 낙담한 왜군은 북상을 멈추는데
강항등 수천명의 조선인들은 무안에서 왜선에 올라 순천을 거쳐 일본 오즈성으로 끌려 가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우수영으로 돌아온 것은 9월 16일 명량해전 당일 바로 후퇴한지 23일이 지난 음력 10월
9일로 왜군이 철수한 이후이니.... 장군은 왜적들이 월동을 위해 남해안 29개 왜성으로 물러간
10월 3일 군산 선유도를 출발해 판옥선 13척에 초탐선 32척 그리고 많은 배를 얻어 우수영에
돌아와서 이틀을 머물렀는데도... 우수영 성 안팎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화 명량에서 조선 수군을 응원하던 조선 백성들은 전부 학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끌려간 것이라? 이때
전라도 육지는 고니시와 우키다등 5만 6천 왜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니 내륙으로 도망칠수도
없었으니.... 우수영에는 개짓는 소리 까지도 없는 적막강산인지라 수천 조선 병사들은 전율했으며
장군은 비통한 심정으로 안편도로 물러나서 왜군이 여수 서쪽에 없음을 보고는 목포 고하도로 가십니다!
그럼 역사에 남을 "명량해전 대승리" 이후 왜군은 두 번 다시 전라도 바다를 넘보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잡아 전라도 바다를 완전히 지배했고 백성들은 모두 안전해 졌다,
조선군은 이 승리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는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명량해전 패배로 바다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충청도 직산까지 진출한 왜군이 물러갔다는
말도 틀리니.... 왜군 4만이 직산에서 명군 4천 기병과 전투를 벌인 것은 9월 7일로, 그날 명군은
중과부적이니 수원으로 후퇴했고, 왜군은 천안으로 물러나서는 주변을 3~4일간 약탈한 후에
"9월 11일" 남쪽으로 물러갔으며 명량해전은 "9월 16일" 벌어지는데, 선후가 뒤바뀐 거짓 주장 입니다.
강항은 시코쿠섬 에히메현 오즈에 있는 도도 다카토라의 영지인 이요국의 오즈성으로 끌려간후
그후 교토로 이송되어 후시미성에서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의 스승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성리학(주자학) 을 가르치니 그 제자 하야시 라잔이 1607년 부터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유학 경전을 시강해서는 4대 쇼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니..... 주자학이 일본에 전해집니다.
1597년 12월 23일 명군 5만 8천을 동원해 그중에 2만은 양산에 보내 부산에서 올 왜군 원군
에 대비케 하고, 마귀의 명군 3만 8천과 권율등 조선군 1만 1천 5백등 합계 5만으로
포위하니 놀란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성에서 황급히 달려왔지만, 성에는 우물이 없었고
식량을 비축하지 못했으며 탄약도 부족한 가운데 명나라 대포가 성벽을 무느뜨리기 시작합니다.
일본군은 성 안에 우물이 없는데다가 성밖의 우물은 조명 연합군에 점거되니 일주일간이나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소변이나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초인적으로
버텼으니....... 세계 전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중에 하나로 아귀야차 처럼 싸웠습니다.
울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히젠(사가) 의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총대장으로 하는 모리, 호소카와 등 8만의
구원군이 양산에 주둔한 명군 2만을 격파하고 내륙에서 울산성으로 진격하고 바다에서도
구키등 왜수군이 보급을 대자 조명 연합군은 대패하여 무수히 죽고 멀리 경주까지 허겁지겁 달아납니다.
이때 우복 정경세 는 선조의 명 을 받아 양호에게 줄 격려문을 휴대하고 안동 까지
왔다가 "아군이 참패했다는 소식" 을 듣고 낙담하여 벽에 "시" 를 남겼으니....
차라리 잠 깨고 싶은 마음이 없나니
하늘은 과연 누굴 미워하는가
군사들이 이리 자주 후퇴만 하니
어느날에 우리나라 중흥되려나
온천하에 영웅다운 사람 적어서
산하에는 원통한 한 더 불어나니
난간에 기대 임금계신 북쪽을 보며
한밤 내내 주룩주룩 눈물 흘리네
이런 가운데 명나라군 50,000명이 단독으로 부산포왜성을 공격했으나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방어에 막혀 공성에 실패했으며, 1598년 9월 (음력 7월) 경략 (經略) 형개 (邢驚) 가
한성에 당도해 조명 연합군은 2차 공세를 계획했으니 4로 병진으로 총 10만이었는데...
이때 9월 18일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니 일본은 철수를 지시합니다.
그후 조명 연합군은 4로 병진 공격에 들어가니, 동로군 명군은 마귀의 2만 4천에 조선군은 김응서와 선거이
5천 5백 으로 1598년 10월 21일 (음력 9월 22일), 조명 연합군이 울산 왜성(가토 기요마사) 을
제2차로 공략했으나 선거이 장군이 전사하는등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중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에 후퇴합니다.
서로군은 고금도 이순신 조선 수군 7천 3백명에 명나라 진린의 수군 19,400명이 합세해 1598년
8월 20일 조명 연합함대가 절이도 해전에 승리했으며, 명 제독 유정의 2만 6천명이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병악 등 조선군 1만명과 합류해 3만 6천명이 순천왜성을 포위합니다.
1598년 10월 19일(음력 9월 20일), 조명연합군의 육군과 수군이 순천 왜성(고니시 유키나가) 을 함께
공략하기로 했으나 왜교성 전투인데, 수심이 얕은지라 조선수군의 대형 판옥선이 기동하는데
불리하고, 진린의 함대가 썰물때 좌초되어 왜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등 실패로 돌아가니 장도해전
으로 결국 철수했으며 서로군 유정은 순천 왜교성 공격에 소극적인 가운데 전투는 소강 상태가 됩니다.
중로군은 명군 동일원 3만 6천 8백명과 조선군 정기룡 2천2백명등 3만 9천 대군은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지나 사천성을 점령한후 8천명 시마즈 요시히로군이 수성하는 사천신성 (선진리왜성)을 공격하다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만여명이나 전사하는등 대참패를 당하고.... 혼비백산해서 경북 성주까지 달아납니다.
히데요시가 죽어 철수를 준비하던 차에 일어난 조명 연합군의 2차 공격 4로 병진은 중로군이 참패하면서 공격이
여의치 않았던 동로군과 서로군이 후퇴하는지라 29개 왜성은 조명 연합군의 방해 없이 평화롭게(?) 철수
하는데..... 순천 왜성의 고니시 만큼은 이순신 장군이 막아서자 시마즈씨 등이 구원군으로 오니 노량 해전 입니다.
그러면 뇌물을 받고 제대로 싸우지 않은 "유정은 처벌" 되었는가? 전혀 아니니,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 남쪽 귀주
에서 반란을 일으킨 양응룡을 토벌했고, 요동에서 후금(청) 군과 전투에서는 총 대장을 맡았는데... 한국과
중국의 입장 차이 때문이니, 우린 희생이 있더라도 왜군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명군은 왜군이
스스로 철수하겠다는데, 굳이 공격해 명나라 군사들을 대거 죽이기 보다는 살려서 고향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또 다르게는 임진왜란은 끝이 보이지만 중국 남부 귀주성에서는 양응룡의 반란군과 처절한 전투중이니 유정은
순천성을 포위한 명군을 데리고 가서 저 반란을 진압해야 하고.... 또 만주에서 여진족들이 궐기하고 있으니
남쪽 반란을 진압한 후에는 다시 북쪽 만주 요동땅으로 달려가 여진족 후금(청) 군과 싸워야 하니, 명군을
조선땅에서 다 죽이는건 어리석은 일인데, 우린 명군이 조선에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지극히 이기적이라!
일본군은 약탈한 전리품을 챙겨 배를 타고 물러가는데 29개 왜성 중에 28개 왜성은 명군이나 조선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평화스러운 철수를 했으나 오직 하나 가장 왼쪽에 외따로 떨어진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 장군이 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함께 여수 앞바다를 틀어막는 바람에 철수하지 못하니 도움을 요청합니다.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 소 요시토시 고성 다치바나 무네시게에 부산에서 온 2명 수군 함대등 2만명이
탄 300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가 한밤중에 노량 바다에 들어서자, 판옥선 50척에 협선을 포함한 이순신의
6천 조선 수군과 진린의 1만 6천 300척에 달하는 함대가 1598년 12월 16일 오전 0시 부터 전투를 벌입니다.
사쓰마번(가고시마) 시마즈 요시히로를 생각하건대, 히데요시가 죽었으니 왕위 쟁탈전 내란이 벌어질 것이니
패하면 목숨을 잃는 정도가 아니고 영지를 뺏기고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며, 부인과 자식들만 죽는게 아니라
백수십년 대를 이어 충성해 온 가신들과 사무라이들도 연봉을 잃고 낭인이 되면 가족들도 굶어 죽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온 이상 병사들을 온전히 데리고 귀국하는게 중요하니 고니시의 사위 소 요시토시군
을 주력으로 하고 사쓰마군은 배 20척에 1천 병사를 내주면 다치바나와 다른 수군을 합쳐 100척
정도로 구원을 보냈으면 족할 것을? 무슨 의리를 지킨답시고 병사들을 다 데리고 가서 죽였으니 2년후
20만이 대진한 세키가하라 전투에 시마즈씨는 고작 1천 5백명 군대만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바보 천치 인가?
정유재란에서 조선군 3만 8천에 명군 11만 7천이면 전쟁을 사실상 명나라가 조선 대신에 떠맡았다는
것 인데.... 하지만 큰 문제는 "보급" 이니, 산동성의 곡식을 수레에 실어 만리장성을 넘고
만주 벌판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와서도 한반도를 종단해 내려와 조령을 넘어 경상도 까지는 먼 길이라?
강남에서 쌀을 모아서 수레와 배에 실어 강과 운하로 영파 까지 와서는 다시 큰 배에 옮겨 실어 황해를
건너면서 풍랑으로 많은 배가 침몰하고.... 충남 당진에 도착하면 조선에는 포장 도로가 단
하나도 없으니 우마차가 없고 강에 단 한 개의 다리 조차 없으니 조선의 교통사정은 너무나도 후집니다.
그러니 보부상이라고 쌀과 무기들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짊어지고 충청도를 걸어서 저 험한 소백산맥을 넘어
이고 지고 경상도 울산까지 가자면 인부들도 먹어야 하니 강남에서 출발할때 분량의 3분지 1이나 도착
할까요? 전장에 도착해 명군과 조선군을 먹이고, 전란에 피폐해진 조선 백성들까지 명나라 쌀로 구휼했으니!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군대와 보급품을 보내느라 만주의 여진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데다가
또 저런 전쟁비용으로 명나라 재정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서 누르하치가 칠대한을 선포
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2년 후에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을 격파하며 엄청난 위기를 초래합니다.
양응룡의 난이 일어난 파주(播州) 는 사천, 귀주, 호북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지형이 험준하고 한족 대신 묘족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으니, 묘족
출신 양응룡 가문은 당나라 이래 대대로 관직을 받아 파주를 다스려왔습니다.
만력 초기에 양응룡은 파주선위사사에 오른후 사실상의 독립세력을 형성했으며, 마침내 정유재란 중인
1597년 반란을 일으켰는데.... 명 조정에서는 머나먼 조선의 임진왜란에 많은 병력과 군비를
죽도록 쏟아붓고 있던 중이라 여력이 없었으니 양응룡의 반란 초기에는 방침을 분명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양응룡은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자신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다른 묘족을 회유
하여 사천, 귀주, 호광 등의 요새 수십 곳을 공격하게 하니 만력 26년 사천순무 담희사가 양응룡
의 공격을 한차례 방어하였고, 만력 27년 귀주순무 강동지가 반란을 진압하고자 시도하나 실패합니다.
이에 명 조정은 강동지를 파면하고 이화룡을 병부시랑에 임명하여 반란의 진압을 총괄하게 하였으나
동서 2개의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어 늦추어지다가, 임진왜란이 끝나 한숨을 돌리게된
만력 28년(1600년) 2월에야 비로소 총독 이화룡의 지휘 아래 명나라의 대군이 진격을 시작합니다.
4월, 정류재란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을 공격한 유정이 이끄는 군대가 양응룡의
부대를 격파하고 양응룡의 본거지를 포위했으며 6월, 성이 함락되자 양응룡은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자살하였고 아들은 포로로 잡혔으니 이후 명은 파주토사를
폐지하고 준의부 (遵義府) 와 평월부 (平越府) 를 설치했으며 사천과 귀주에 귀속시킵니다.
구마모토성 안에 우물이 120개 인데는 처절한 사연이 있으니... 1597년 정유재란은 왜군 14만,
명군 11만 7천에 조선군 3만 8천 등 30만명이 싸운 전쟁인데... 일본군은 1592년
임진왜란때 해로가 이순신 장군에 막혀버리고, 육로는 포장 도로가 없는데다가 의병
에 의해 차단되고 겨울 강추위로 고생한데다가 명군의 참전으로 고전하니 교훈을 얻게 됩니다.
남부 4개도를 분할해 달라는 화평교섭이 결렬돼 1597년 재침한 정유재란은 장기전 이니.... 울산에서
순천까지 29 왜성을 쌓고 늦봄이면 출진해 경상, 충청, 전라도를 초토화한 다음 늦가을에 남해안
왜성으로 돌아와 추운 겨울을 안전하게 나며 휴식한 후, 다음해 늦봄에 다시 출진해 하삼도를
휩쓸면 멀리서 온 명군은 철수할 것이고 결국 조선의 경상, 충청, 전라도 를 얻을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후 1598년 9월 4로 병진 2차 전투 로 명나라 총병 마귀는 4만으로 재차 울산성 을 공격하는데 이번에는
준비가 된 가토군에게 조선군 대장 선거이가 전사 하는등 고전 합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
8천이 지키는 사천 선진리성을 공격한 명군 동일원 3만 7천과 조선군 정기룡 2천 2백등 4만 연합군이
대패 하고.... 시마즈씨가 명나라군과 조선인 코를 1만여개나 베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후퇴하는 것 이지요?
울산 전투에 참가한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귀국후 울산 전투 상황을 기술하여 오오키가 그린
병풍 그림이 사가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남해안 29개 왜성 중에 28개 왜성의 일본군은
조선군이나 명군의 방해나 공격 없이 수많은 약탈품에 조선인 포로들을 데리고 평화롭게(?) 철수합니다.
서쪽 끝인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카 단 한곳 만큼은 이순신과 진린이 바닷길을 막으니 1598년 11월
19일에 벌어진게 노량해전인데,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7천명과
남해의 소 요시토시 1천명,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5천명과 부산에서 테라자와 히로타카
1천명에 모리 히데카네등 20,000명과 배 300척을 동원했으며 배에는 조선인 노군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조선 수군은 병사 7천명에 판옥선 60척과 수십척의 협선을 동원했고 진린 명나라 수군은 병사 17,000명
에 판옥선 2척과 중국 배로 사선과 호선 300척을 동원했으니 조명 연합군의 인원과 전력이 더 강했는데
기습을 받고 관음포로 몰린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일부는 도주했으며 고니시군은 전투 없이 빠져나갔습니다.
전사자는 조선은 이순신, 방덕룡, 고득장, 이영남, 이언량, 정기수, 나치용, 오용운, 오극성, 나득룡, 김득룡 이응춘
, 신인수 등이고 명나라는 등자룡(부총병) 과 도명재(진잠의 부장) 이며, 일본은 오코히라 타카시게,
마치다 히사마사, 이케베 사다마사 이니 다이묘인 주요 무장들은 단 한명도 죽지 않고 다 살아서 달아났습니다.
철수명령이 내려와 귀국을 준비하던 중에 조명 연합군의 4로 병진 공격도 물리쳤으니, 이제 일본의
주인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날 것이니 패하면 가신과 사무라이들까지 죽거나 영지를
뺏기고 실업자 낭인이 될 판이니 자기 사병들을 살려서 데려가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데도 시마즈씨와 다치바나씨가 전군을 동원했으니 의리의 화신들인가? 아니면 천치바보들인가?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씨는 히데요시 사후 철수 명령에 따라 노량해전이 일어
나기 전에 귀국해 1600년에 동서 18만대군(전국 기준은 30만)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關ケ原)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가담해 승전 합니다.
7년간 연인원 25만이라는 대군을 조선에 보냈으니 전비가 무려 700만냥으로 엄청났는데 특히나
원거리에 보급이 심각한 문제니.... 옛날 수양제가 보급으로 고생했던 것처럼 명나라는
장거리 보급으로 길바닥에 은자를 까는 셈이라, 안그래도 어려웠던 국고가 바닥나 재정이
파탄에 이르자 농민들에게 세금을 폭징하니 도저히 살수 없게된 농민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없는 돈에 군대를 다시 조직해 농민 반란군을 토벌하다 보니 여진족들이 흥기해 후금을 세우는 것을 막지
못했고, 뒤늦게 보낸 대군은 분산 격파돼 요동을 잃으니 만리장성 산해관에 전 병력이라고 할수
있는 30만 대군을 배치하자 그 틈을 노려 농민반란군이 세력을 만회했으니 이자성은 서안
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한후 1644년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자살하니 나라가 망합니다.
중국인들은 비꼬는 의미에서 만력제를 “조선황제”라 부르는데, 명나라가 쇠락하던 자기 분수를 알고
조선에 파병하지 말고 대신에 압록강에 성채를 쌓고 대군을 주둔시키며 여진족들을 잘 통제
했더라면 세금을 폭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그럼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거나 여진족
이 후금을 세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명나라는 망하지 않고 좀 더 오래 지속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1582년 기리시탄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및 오토모는 4명 덴쇼 소년 사절단을 로마에 보냈는데 1590
년에 귀국해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랴노가 인도 부왕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알할
때 함께 갔는데 네명의 소년들은 서양 악기를 연주하자 히데요시는 감탄해서 몇곡을 더 연주하게 합니다.
이 소년들이 쓴 기록에 보면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 앞으로 지나가는 일본인 노예들,
소년 소녀들을 보았는데 싼 값에 가축처럼 팔려와서 짐승처럼 취급을 받는데도
우리나라(일본) 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니 그저 분노하는 마음이 인다” 라며 경악했는데,
일본인 노예는 흑인의 3분지 1 가격이었기로..... 소년 사절단이 싼 값에 팔렸다고 분노한 것입니다.
10년후 임진왜란때 수만명의 조선인이 잡혀가 일부는 나가사키에서 노예로 팔렸으니 메디치가의 집사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르레티가 한국 소년 다섯명을 마카오에서 흑인 노예의 7분지 1에
해당하는 헐값으로 사서는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 도시인 고아로 데리고 갔는데, 가격이
쌌던 것은... 한꺼번에 너무 많으 "조선인들이 노예시장" 에 풀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한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도 고아에서 함께 여행중이던 아버지가 죽자 프란체스코는 인생무상을 느껴 4명은
풀어주고 5명중에 한 명만을 피렌체로 데려왔으니 이 아이가 바로 안토니오 꼬레아로
서양 "꼬레아성 (姓)의 시조" 가 되었다는데..... 현재 이탈리아 남부 칼리브리아주
카탄자로 인근의 알비 Albi 시와 또 시칠리아섬의 콜레오네 시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1608년에 네델란드 화가 피터 루벤스 가 코레오네인을 그렸는데 제목이 A manin Corean Costume
으로 잡혀온지 10년이 흐른 이때 까지도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그렸으니... 그림은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 사상 최고가인 6억 5천만원에 미국 LA 폴 게티 미술관이 낙찰 받았습니다!
1992년 11월에 알비 Albi 시장 듀란테와 한국 - 이탈리아 협회장 안토니오 코레아 씨가 저 그림을 들고
서울에 와서는 할아버지를 찾겠다니 문화재청장 장경호 씨가 현지를 방문한 일이 있다고 하며 그외
시칠리아섬 팔레르모 남쪽에 콜레오네 Corlene 에도 안토니오 꼬레아의 후손들이 많이 산다고 합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며 30여년을 왜국에서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일본사(日本史) 에서 조선인 을 ‘이교도 (異敎徒)’
라고 기술했고... . 기리시단 장수와 지도자를 ’성모 (聖母) 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하느님이 쓰시는 칼’,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성전(聖戰)’ 이라고 적었습니다.
위의 표현은 성결대교수이자 전 중앙일보 기자로 이순신 인성 리더쉽 포럼 대표인 김동철씨의 글에 나오는데
그외 홍성옥 목사, 필립 천지인, 사랑해 알라스카, 바닷속, 감만 라디오, 초승달 및 대한민국 역사운동본부,
아천님의 블로그에도 보이지만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정성화역 임진난의 기록과 박수철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글역에는 잘 보이지는 않는데, 12권 짜리 일본어판 완역서에는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인들에게는 끔찍한 전란 이지만 예수교 신부들에게는 하느님의 성전 이라? 그는 또 일본사
(日本史) 에서 히데요시는 인물됨이 하찮았지만 우상을 믿는 불교도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칼과 채찍’ 이라 여겼으며, 왜란때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는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
였던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때 아고스티뉴(고니시) 를 제1군 선봉장으로 매우 신임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지은 일본사(日本史) 를 보면 하느님의 기독교군대가 이교도인 유교와 불교의
나라 조선을 침략한걸 정당화 하는 점에서, 예수회의 조선진출 야욕 과 맞물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기도 한데... 히데요시가 조선과 중국을 정복해 교회를
세우고 예수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 데에 조선인 선교의 기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가톨릭 예수회의 열렬한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쌍벽을 이루며 불구대천의 앙숙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일연종(日蓮宗) 즉 법화종(法華宗)의 신도 였으니... 제1 선봉대인 고니시의 군대가 십자가 를 내세
웠다면 제2군 가토의 군사들은 남묘호렝게교 (南無妙法蓮花經 남무묘법연화경) 라는 깃발을 앞세웠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믿는 종교가 다른 이교(異敎) 사상 으로 사사건건 배척하고 반목질시하면서 경쟁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견원지간인 두 장수의 경쟁을 이용해 한양 선점과 선조의 포획을 부채질 했습니다.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와 부산을 치라는 조정의 명을 거역해 통제사에서 파면되는데.... 고니시가 가토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는 정보를 도저히 믿을수 없었으니 함정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제3군 수장 구로다
나가마사도 천주교 신자지만 조선에서 5천500개의 코를 베어 일본에 보내니 12만이 묻혔다는 이총 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젊은 시절에 얻은 아들딸이 일찍 죽은지라 자식이 없어 양자를 여럿 들이는데,
누나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처남의 아들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외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들인 양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로 유키 가에 보낸 유키 히데야스,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있습니다.
50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딸인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낳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하니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거라 여긴 히데요시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
를 후계자로 선정하는데,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자 히데요시는 히데츠구 일가를 죽입니다.
후계자로 선정되지 않았던 양자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고 혈연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야스는 유키의 양자가 되었으며,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가 그냥 놔둬서
도요토미씨(氏) 를 계속 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기록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풍신수가" 라 나옵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안배를 하는데 그 핵심은 오대로(五大老) 와
오봉행 (五封行) 으로 지방의 유력 다이묘인 오대로와 도요토미 가(家) 가신인 오봉행의 합의로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한다는 구상이었으며 또한 각 다이묘에게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받고, 4살에 불과했던 히데요리를 원복(성인식)시키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유지를 꾀했습니다.
1598년에 히데요시는 건강이 악화되자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오대로의 앞에서 아들 히데요리
의 후견을 거듭 부탁하고 숨을 거두니 오대로와 오봉행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사세구가 유명한데 그 내용이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학자 강항은 히데요시를 기리는 탑에다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해 놓고
죽어 버렸으니 앞으로 내부 분열이 진탕 일어날 텐데 이런 화려한 건물이나 성채가 다 무슨 소용이냐?'
라는 낙서를 해서.... 강항과 학문적 교류를 했던 후지와라 세이카가 급히 그 낙서를 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