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3 - 볼세비키의 적군과 왕당파등 백군이 처절한 내전에 들어가다!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독일군에 대패한후 물가
인상과 식량난에 허덕이던 러시아인들은 1917년 3월 혁명을
일으켜 짜르 체제를 타도하니 멘세비키와 부르주아 세력의 정권이 들어섭니다.
하지만 저 정권은 귀족과 지주에 부유한 상공업자등 부르주아 세력이 집권한지라 1차 세게대전을
계속했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식량난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노동자와 시민들이 궐하니 레닌의 볼세비키는 이를 이용해 1917년 11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습니다.
부르주아 정부를 이끌다가 축출된 케렌스키는 반혁명파 카자크 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으며,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도 사관생도들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러나 혁명의 성공으로 사기가 충만한 볼셰비키에게 이들은 12월 초에 모두 분쇄되었습니다.
볼셰비키와 협력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좌파)은 상반된 결말을 맞으니 멘셰비키는 볼셰비키를 부정했으나
백군은 더 싫어했고 소비에트에 협력했지만, 볼셰비키는 1918년 7월 17일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좌파)
을 모두 소비에트에서 축출했고, 사회혁명당(좌파) 측에서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니 제3혁명 이라고도 합니다.
사회혁명당(좌파) 의 봉기가 실패하는 동안 멘셰비키는 볼셰비키와 협조했고, 1918년 11월 6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멘셰비키측은 복권되었으며, 사회혁명당(좌파) 마저도 1919년 1월 봉기의 실패후
1919년 2월에는 복권되었으니 사회혁명당(좌파) 은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에서 볼셰비키를 적극 지원합니다.
볼셰비키의 애증의 상대였던 멘셰비키는 직접적으로 금지조치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1919년부터
탄압받기 시작했으니 1919년 멘셰비키가 건국했던 조지아 민주공화국을 소비에트
러시아가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비공식적인 탄압이 지속되었고, 1921년의 크론슈타트
선원 반란 사건후 멘셰비키도 완전히 와해되고 수장인 줄리어스 마르토프 마저 독일로 망명합니다.
제 3세계 국가에 반제국주의· 반침략 운동을 전폭적 지지하겠다는 명목으로 공산주의를 알려,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퍼져나갔으니 지원했는데 민족주의 운동에도 지원을 뒷받침했고 한반도에서도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실체가 3.1 운동의 실패로 드러난 뒤라 열강에게 실망감이 늘었습니다.
소련이 직접적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지할 뿐더러 직접 지원까지 하니, 당연히 지지하는 사람이
나왔는데,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때는 조선인 대표들이 참가하여 사진을 보면 태극기가
떡하니 등장하는데.... 쑨원만 해도 국공합작을 지지했으니 이런 분위기는 해방 직후까지 이어집니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 포도주 시장에 악영향을 끼쳤으니,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귀족 사회는 큰 수요처였는데,
혁명으로 왕실 및 귀족 사회가 무너지면서 포도주 수요가 급감하게 된 것이며 게다가 혁명이
일어난후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고, 여기에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포도주 업계는 오랫동안 침체에 빠집니다.
나는 화물차에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는데 지평선에 걸쳐서 낮 보다는 밤에 훨씬 더 멋진 수도의
번쩍이는 불빛이 메마른 벌판의 보석의 담장처럼 펼쳐져 있었다. 늙은 노동자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다른 손으로 환희에 찬 몸짓으로 수도를 가리켰다. "내 것이야!" 그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이제는 모두 내 것이야! 나의 페트로그라드야!" -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러시아 혁명은 현재 러시아 정부에서 더 외면받고 있으니, 소련 해체를 주도한 옐친 시절인 1995년 정부 차원의
기념식과 군사 퍼레이드를 재개했으나 소련 시절에 비해 축소되었으며, 2004년부터는 '독소전쟁 모스크바
방어전 소련군 장병을 격려하고자 스탈린이 혁명기념일에 맞춰 행사를 치른 것' 을 기념하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독소전 전승기념일에 러시아 대통령이 기념사를 낭독하는 것과 달리 11월 7일 볼세비키 혁명일은 모스크바
시장이 낭독하는데, 독소전 전승기념일 보다 한단계 낮은 행사니 러시아 정부 자체도 혁명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정부 차원에서 100주년을 기념하는 정부 주최 특별 기념식은 없었습니다.
현재 러시아 우익은 볼셰비키와 레닌에 대해 부정적이며, 블라디미르 푸틴 부터 레닌에 비판적인 인물이니 2016년
에도 크게 비판했었고.... 2004년에는 러시아 혁명 기념일(11월 7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해버렸고 러시아
혁명으로 폐지되었던 러시아 제국의 국경일(11월 4일)을 국민화합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일로 부활시켰습니다.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레닌이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제정 러시아가 획득한 영토
대부분을 내줬기 때문이며, 러시아 정교회가 니콜라이 2세를 1998년에 성인으로 추대했는데 러시아 정교회
를 국교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푸틴 정권에서는 황제를 처형한 볼셰비키와 러시아 혁명을 긍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006년 선배님 부부등 4명이 스무날 가까이 러시아 전국일주 여행을 했었는데 항공으로 블라디보스톡에 내려
이틀간 도시를 구경한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나흘째에 이르쿠츠크에 내려 바이칼 호수 까지 보고는
항공으로 모스크바에 가서 근교 황금의 고리라는 옛 도시까지 보고 밤 열차로 상트 산트페테르부르크로 갔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크렘린 궁전을 구경하고는 무명용사 묘를 지나 바실리 사원을 보기 위해 붉은 광장을
지나다가 엄청난 스피커 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니 공산당 소속 200명 남짓 노인들이 데모를
하는데..... 옆을 지나가는 수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누구 하나 쳐다 보는 사람이 없어 더 놀랐습니다.
바실리 성당을 구경하고 다시 되돌아 오면서 보니 70여명이 남아 피를 토하는 절규를 하는데 대부분이
70대 노인들로 역시나 젊은이들은 눈길하나 주지 않고 지나가는데... 저들은 공산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니 학교와 병원이 공짜였으며 국가에서 무료로 집을 주고 졸업하면 취직도 보장합니다.
모두에게 일자리를 주니 100명이면 될 공장에 300명이나 배정된지라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 공장에서
카드나 체스놀이를 하며 또는 보드카를 마시다가 퇴근하며 월급은 적지만 교외에 다차라고 농장을 분배해
주니 주말 농장으로 잘살았는데 민주화, 자유화가 되니 이제 연금으로 사는데 물가가 뛰어 빈곤해졌나 봅니다?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러시아 공화국 대신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일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겨우 빠져나왔으나, 왕당파를 비롯 여러 파벌들로 구성된 백군은 이에 반대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일어납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 전역이 피해를 입었으니 러시아 총인구
9천만명 중에 전사자만 수백만명이고, 볼셰비키 정권의 대도시 식량위기 해소를
위한 공출로 인한 아사자는 소련 정부가 인정한 것만 500만명에서 최대 1,000만명에 달합니다.
볼셰비키가 러시아 정권을 탈취한 1917년 11월 7일을 내전의 시작으로 보지만, 끝은 콜차크의
러시아국이 붕괴한 1920년 2월로 보지만 백군 일파인 표트르 브란겔의 남러시아 정부는
1921년까지 버텼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가 망한 1922년
10월 25일으로 보기도 하며 일본이 북사할린에서 철수한 것을 기준으로 따지면 1925년 입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틈을 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시도하며, 적군 및 백군 세력 모두와 싸웠으며, 공산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의 협상국인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이탈리아, 중화민국,
프랑스는 물론 독일도 백군과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의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합니다.
러시아 내전을 단순히 적군과 백군의 대결로 볼수는 없으니, 볼셰비키도 처음에는 여러 좌파 정당이나
전선을 회유했으나 백색 테러나 내전 상황을 명분으로 일당 독재를 확립했고, 이를 혁명의
배반으로 간주한 사회혁명당 좌파였던 파니 카플란은 레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습니다.
1917년 11월 혁명후 군대의 상당수는 볼셰비키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군대에 남아 있는 병사
보다는 집에 간 병사가 훨씬 많았으니, 볼셰비키 정권이 지주의 토지를 분배하고
있었으니 농민 병사들은 집에 가야만 자기 몫의 토지를 받을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농촌을 장악하러 간 공산당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혁명 시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엔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들이 상당했으니
위협을 느낀 볼셰비키 정권이 제헌의회를 해산하자 반볼셰비키 진영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을 기점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반란이 터지니, 각 세력은 지역정권을 수립해 군웅
할거에 들어갔는데 폴란드, 카자크, 부농들의 사병이나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등 종교적
봉기와 발트, 캅카스 지역의 민족주의 봉기 세력까지 겹치면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적군에 대항합니다.
내전 초기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고 돈-쿠반의 카자크도 반기를 들었으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웠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이 무장해제시키려 들었다가 자극해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시베리아 철도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장악해버림으로써 시베리아가 백군에 넘어갑니다.
협상국은 러시아에 지원했던 장비와 물자를 백군에게 넘겼는데 이를 통해 백군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또 콜차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서쪽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었는데, 하지만 백군은 단 한번도 적군 보다 장비 면에서 우세한 적은 없었습니다.
적군은 페트로그라드, 툴라 조병창, 이브제스크 조병창등 제국의 총기, 야포, 탄약 생산시설을 점유했기 때문에
백군은 장비 면에서 불리했으며, 경제가 붕괴한 상황이었기에 적군이라고 장비가 풍요로운 것은
아니고 적군은 백군이 차르를 되찾을까 우려해 1918년 7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처형합니다.
적군이 가장 몰렸을 때도 모스크바등 주요 도시와 거점은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도 연결되어 있었으니
이 점은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지만 분산돼 통일된 명령체제가 없는 백군 보다는 유리했는데, 1919년
모스크바 남쪽으로 60km 앞까지 백군이 진격해 모스크바 함락이 눈앞이었지만 얼마 안가 적군이 반격합니다.
레프 트로츠키가 대대적으로 적군조직을 전선군과 사단 단위로 개편하고 1918년 6월 징병제를 실시했는
데, 적군의 주축은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였으나 이후에는 농민에 대해서도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니 근대국가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의 징병제에 대한 반대는 무력으로 억눌렀습니다.
탈주자는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며 탈주가 발생한 부대는 고대 로마에서도 제대로 집행한 적이 없었던
10분의 1 형을 실시하여 병사 10명 중 1명을 무작위로 총살하는등 폭력과 권위주의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를 만들었으니 최종적으로 5백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편성해 물량공세를 펼칠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상급 대장이니 붉은 군대에 가담했던 외아들이 반혁명군에
처형당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인 것은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이었으니 브루실로프는 트로츠키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년대에 은퇴한후 죽었습니다.
알렉세이 쿠로팟킨 대장도 적군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백군의 참가 권유를 거부하게 만드는 활동
을 벌였으며, 내전에서 승리한 레닌 정권은 공산당이 육성한 정권에 충성심이 두터운 새
간부들을 길러 이들을 교체했고 잔존 인원들은 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했으니 1930년대
대숙청의 일환으로 잔존한 극소수의 기존 전문가들도 혐의점이 의심되는 장교들이 숙청 됩니다.
이렇게 적군의 전투력이 한층 개선되자 전황은 적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적군은
통일된 군사력에다가 철도도 장악했으니 부대를 이곳 저곳으로 재배치하는데 확실히 유리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백군을 반동주의와 왕당파로 여겼지만 백군의 장군들은 이념 전파와 사상적 통일 활동에
관심이 없었고 데니킨과 같은 소수는 의회선거를 약속하기는 했지만, 백군 일부의
의회 개최 약속에 대해 반볼셰비키 사회주의자들은 의심했으며 실제 보통선거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백군을 구성하는 대다수 제국 출신 장교들은 신앙, 차르 그리고 조국을 외치는 보수주의자, 그중에서
보수적 포퓰리스트에 가까웠고.... 그외의 주된 이념은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
였으며, 내셔널리즘은 러시아 정교회와 근왕주의를 비롯한 보수주의와 결합해서 서로를 보완했습니다.
백군을 구성하는 지도자들은 시베리아 정부(러시아국) 의 콜차크와, 남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에 분포했던
지원군을 이끌던 데니킨과 브란겔 등이었는데.... 지원군은 백군 중에서 가장 잘 조직된 축에 속했습니다.
데니킨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자유주의) 이나 마흐노의 군대와 협력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모두 거부
했으며, 그나마 데니킨은 백군 중에서는 온건했고 구 입헌민주당에서 온 조언가들도 두고
있었으며 아스트로프 같은 온건 입헌파가 있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반동주의 장교들에 의해서 무시됩니다.
그 상황에서 농민들은 신분제를 재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데니킨을 믿지 않았으며, 실제로
남러시아에서는 제정과 같은 방식이 운용되었으며, 또한 발표에서 데니킨은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주인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스스로 차르가 되려는 의도를 보인 것으로 비춰집니다.
데니킨의 후임 브란겔 역시 보수적인 인물이었는데, 비록 브란겔은 토지 개혁의 의지를 보였으며 공화정을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근본적으로 군주주의자로 차르 치세로 돌아가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습니다.
백군은 적군에 대항한다는 점만 빼면 이념이나 지도자가 다른 집단이었으니 왕당파도 입헌군주파와 전제정
옹호파가 섞여 있었고 공화제 지지자들도 있었으며, 반볼셰비키의 한 축이었던 사회혁명당 우파가
주축이 된 코무치(제헌의회 의원 위원회)와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우랄- 시베리아 지역 통제권을
두고 싸우는 바람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중재안으로 우랄 임시정부를 세우는등 주도권 투쟁을 벌였습니다.
볼셰비키는 백군의 구심점이 될수 있었던 니콜라이 2세 일가를 학살하여 후환을 제거했으며 백군은 단일 지휘체계
를 이루지 못했는데, 콜차크가 명목상 최고지도자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으니
적군에게도 큰 문제긴 했지만 체카라는 무자비한 정보기관의 존재와 공산주의자들을 모은 위원회를 통해 해결합니다.
백군은 러시아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인구가 적었으므로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본 일이 없으니 장비가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었으니 안그래도 강한 적군이 더 강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백군 지도층 상당수는 황족,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목적도 혁명전
체제 복구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으며 사병들은 카자크·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의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겨냥한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 및 투항, 탈영 등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적군은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캅카스 3국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한 국가들을 재흡수
하고 공산화를 시도했으니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지만, 러시아로 부터 독립을 쟁취
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뀐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비춰집니다.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로 알려진 적군의 동유럽 침공은 1918년 말에 개시되어 구 러시아 제국령 위에 세워진
모든 신생국가가 대소전쟁에 휘말렸는데, 볼셰비키의 시도는 발트해 국가들이 영국과 프링스 미군과 함께
적군을 몰아내고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등 도처에서 대패해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멸망시켜 벨라루스의 절반,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점령해 괴뢰국을 수립하는 성과는 얻었으며, 적군은 1920년 말 캅카스 방면
침공을 개시했으니 캅카스 점령은 1921년 초면 끝나 동유럽에 비하면 수월하고 단기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지아 만이 적군과 1달간 격렬하게 싸워 수천의 사상자를 강요했을 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무혈입성에 가깝게 점령했는데, 현지 민심이 볼셰비키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라서, 점령된
국가들 반소 봉기를 일으켜 볼셰비키에게 떼죽음을 당하는 등 1920년대 중반까지 처절하게 저항합니다.
미국과 영국이 원정군을 파견하고 일본이 7만명을 동원해 시베리아를 공격하는등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기나긴 전쟁을
치른 터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엔 어려운 처지였던데다가..... 간섭군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나옵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요량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으며, 1920년 러시아국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합니다.
일본은 계속 버티다가 적군의 트랴피친 부대와 충돌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 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으니 이것을 니콜라옙스크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제헌의회 해산 직후 중도좌파 성향의입헌민주당은 트루도비키, 멘셰비키 우파와 함께 돈 지역에서 돈카자크
의 수장인 알렉세이 칼레딘이 일으킨 최초의 반볼셰비키 봉기를 지지했고, 이에 소비에트는
입헌민주당을 인민의 적으로 금지했으며, 한편 트루도비키와 멘셰비키 우파에 대해서는 회유를 시도합니다.
1918년 3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자 사회혁명당 좌파가 반발하고 나섰으니 이들은 전황에
대해 낙관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 조약의 체결 결과로 독일이 동부전선에 있던
병력을 대거 서부로 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독일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는 틀린 판단이었지만 러시아에서 독일이 전쟁에서 질것이라 확신한 사람은 레닌밖에
없었으니, 사회혁명당 좌파는 연정을 파기했고, 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자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와 브레스트- 리프토크스 조약에 대해 항의했으나 묵살됩니다.
1918년 4월 재생연합이 조직되었으니,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사회혁명당 민중사회주의파, 사회혁명당 우파,
멘셰비키로 구성되었으며 볼셰비키가 맺은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비난하며 독일- 볼셰비키의 멍에로
부터 러시아를 구한다는 목적하에 자유, 애국, 민족의식에 기초한 러시아 국가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체카를 움직여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 빌헬름 폰 미르바흐를 암살하고는 분견대를
이끌고 기습을 가해 크렘린을 장악해 사회혁명당 좌파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전보를 전국에
뿌려 독일과의 조약 체결에 반감을 가진 대중들의 반볼셰비키 봉기를 유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또 페트로그라드, 볼로그다, 아르자마스, 무롬, 야로슬라블, 벨리키우스튜크, 리빈스크등 도시에서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으니, SR 당원이었던 동부전선 사령관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SR 좌파가 모스크바를 장악했다는 전보
를 받고 독일군을 공격하겠다며 심비르스크를 점령해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병력을 진군시킵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봉기는 실패했고 크론시타트 반란등 사회혁명당 당원들이 일으킨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했고 불법 정당으로 규정되었으며, 1920년 8월 소비에트가 독일과 평화협상을 체결하며 독립하게
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백군에 가담하는 자원병들이 구성되어 페트로그라드로 곧장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레닌은 소비에트 혁명군사위원회 부의장 에프라임 스클랸스키에게 적군을 녹군, 즉 사회혁명당의 병력인
것 처럼 위장해 접근한뒤 일망타진하고 그들에게 가담했던 쿨라크(부농), 지주, 성직자를 모조리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으며 한사람을 교수형시킬 때 마다 10만 루블의 상금 까지 내걸기도 했습니다.
11월 16일 옴스크로 돌아온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백군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는데.... 결국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적군이 승리했고 백군과 간섭군은 패배했으며, 민족주의 세력중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훗날 국민
투표를 걸쳐 루마니아 왕국에 합쳐지기는 했지만 베사라비아 (몰도바) 까지 총 6개국은 분리독립에 성공합니다.
한편 볼셰비키가 세운 각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1922년 세계 최초 공산주의 국가 소련을 결성했으며,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까지 적군에게 패배했고
이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 독립하면서 두번째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최후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 아야노마이스키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펠랴예프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패배했고, 러시아 조계지였던 중동철도의 드미트리 호르바트 장군이 하얼빈과 중동철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외부 지원도 끊긴 상황에서 중화민국이 소련을 승인하면서 가차없이 중국군에게 축출 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