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걸 1 - 카르타고를 세운 디도 여왕과 영국에 점령된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
동서고금 5천년사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은 남자들에게 있었으니 그 왕위는 부계세습 으로
내려왔는데.... 드물게 부인이나 딸이 왕위를 계승해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경우가 있고
반면에 황후나 왕비등 여자 때문에 나라가 기운 경우도 있으니 모두 다섯편에 걸쳐 적을까 합니다.
1)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
고대에 지중해를 지배한 나라는 카르타고와 로마로, 두 나라는 3차례에 걸쳐 포에니 전쟁을 벌이는데,
그 전에 해외로 이민을 내보낸 민족이 두곳이 있으니...... 하나는 그리스이고 또 하나는
오늘날 레바논인 티레였는데 티레인들이 지중해에 세운 수많은 식민 도시 중에 하나가 카르타고 입니다.
고대 왕국인 "카르타고" 는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에서 20km 떨어져 있는데 인구는
2만여명으로 튀니지에서도 이름난 관광지이니... 철도역 이름은
카르타고- 한니발 역이고 또 튀니지 제1공항 이름도 튀니스 - 카르타고 국제공항 입니다.
"옛 도시가 있었다. 튀리아 이주민들이 정착한 카르타고, 이탈랴와 티베리스 하구를 맞선 땅,
물산이 넘치고 전쟁엔 굳센 도시, 유노는 어느 땅보다 아껴 사모스를 떠났다 한다."
"여신은 무기를, 여기 전차를 두었다. 이 땅이 만방의 맹주이길, 운명이 승낙한다면 그리 꾀하려
공들였건만, 여신은 트로야 혈통의 후손이 생겨나와 튀리아 성벽을 장차 파괴 한다고
들었으니, 광활한 지배자 전쟁에 억척스런 백성이 리뷔아를 없이한다, 그리 운명 은 짜놓았더라 "
카르타고는 기원전 750년 무렵 건국했다고 추정되는데 카르타고 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 '카르트 하다쉬트' 를
고대 그리스어로 음역한 단어를 라틴어로 옮긴 것이니.... 카르트 하다쉬트란 '새로운 도시' 라는 뜻인데,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들이 팔레스타인의 도시인 티레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듯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814년 디도 여왕이 카르타고를 세웠으니..... 동쪽 페니키아
(레바논) 티레의 공주 디도는 부왕이 죽고 왕이 된 형제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자, 위협을 느껴 티레를 떠나 서쪽 땅에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바다 통상에 의존했는데 장기간 원양항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안 곳곳에 1천명 남짓 사람들을 남겨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으니 그리스인
들과 경쟁하며 지중해에 두 민족이 건설한 소규모 해안 정착지들이 많이 자리
잡았는데..... 몇 정착지들은번영을 누리며 인구가 증가해 도시국가로 발전했습니다.
페니키아 도시들은 모두 어머니 도시 티레(레반트의 레바논) 에 속하였고, 상납금을 티레에 지불해야 했는데
티레 본국은 페르시아와 같은 중동의 제국들과 싸우면서 쇠퇴했고, 기원전 332년 "7개월" 간에 걸친
치열했던 티레 공방전에서 800미터의 제방과 탑을 쌓아 공격해 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결국 멸망합니다.
티레가 멸망하자 그 역할을 시돈에 이어 카르타고가 뒤를 이었으니 지중해 중간 지점에 위치했므로.... 지중해
서부에 집중된 광산의 원자재와 지중해 동부의 질 좋은 문화생산물을 교환하기에 적합하였으니 카르타고는
번영을 누렸고,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 역할을 하면서 이들로 부터 받는 상납금으로 부유한 도시로 성장합니다.
기원전 10세기경 레바논의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와 페니키아를 오가는 무역선이 들릴
중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 연안에 우티카 같은 조그만 항구도시를 세우기 시작했고
항구적인 정착지로 진화해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고대 “카르타고” 가 지중해의 드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강대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제1차 포에니전쟁전까지 카르타고는 서쪽으로 마우레타니아에서 동쪽으로 리비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해안과 이베리아 남부,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섬을 지배하며 번영했습니다.
이베리아의 금, 은, 구리, 제해권을 통해 독점한 브리튼섬의 주석은 중요한 수출품이었으니
카르타고 해상무역은 지중해와 브리튼섬 및 모로코, 카나리아 제도에 이르렀습니다.
북아프리카의 페니키아계 도시는 지중해의 무역 주도권과 제해권을 놓고 고대 그리스인들과 불가피
하게 경쟁했으니 기원전 480년에는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칠리아 및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인과 세 차례의 시칠리아 전쟁, 에페이로스 왕국과의 전쟁을 비롯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니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되었고 3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지중해의 패자가 됩니다.
2) 프랑스의 잔다르크
프랑스 앙주백작 헨리 2세는, 이혼한 프랑스 왕비 엘레노어와 결혼해 보르도와
가스코뉴에 아키텐과 키엔느등 처가의 재산을 얻어 그 재력으로
외가인 영국으로 진격해서 승리해 왕에 올라 플랜타지넷 왕조를 열게 됩니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에다가 프랑스 내에 노르망디, 앙주 및 가스코뉴와 아키텐등
3차례에 걸쳐 획득한 엄청난 땅을 소유해 왕권 신장을 노리는 프랑스왕과
끊임없는 분쟁 겪던중에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가 없이 사망하고 4촌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르니 발루아 왕가 입니다.
헨리 2세의 후손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모친이 카페왕가출신(샤를 4세의 누이) 라는 이유로 잉글랜드 왕인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 해야 한다고 주장해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되니..... 영국은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프랑스가 지배하던 플랑드르(벨기에 북부) 에 수출하던 양모 공급을 중단합니다.
보복으로 프랑스 필리프 6세는 프랑스내 영국 영토로 와인 산지인 부유한 키엔느와 가스코뉴의 몰수를 선언
하자,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침공하니 100년 전쟁으로 프랑스가 여러차례 패배한데다가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공국이 영국과 손을 잡는 바람에 프랑스는 궁지에 몰리고 왕은 즉위식 조차 못합니다.
잔다르크는 농민의 딸로 1429년 “프랑스를 구하라” 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 (城) 에 있는 샤를 황태자 (뒷날의 샤를 7세) 를 방문하는데, 이때 프랑스는 서부 및
북부 대부분을 영국군 및 부르고뉴파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 왕위도 1420년 트루아
조약에 따라.... 프랑스왕 샤를 6세 사후에는 인척인 영국왕 헨리 5세가 계승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프랑스왕만 죽으면 프랑스 왕위는 자신이 아닌 영국왕이 차지 하는지라
의기소침한 샤를 황태자를 격려한 잔다르크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 시킨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찌릅니다.
흰 갑주를 입고 프랑스군의 선두에 선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쳤다고 하는데,
내친김에 프랑스 동북 지방인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그녀가 수복한 랭스 대성당
에서 프랑스의 오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토록 주선을 하였습니다.
이후 잔 다르크는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하다가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대에 사로잡혀 영국군에 넘겨자는데,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는 원래 부르군드족 나라에서 유래하지만..... 오래전에 프랑스에 병합
되어 프랑스의 왕자 (차남) 가 다스렸는데, 프랑스왕과 불화로 영국과 손을 잡았던 것 입니다!
1431년 가톨릭 성당의 종교 재판에서 잔다르크는 사악한 마녀임이 들통나서 이단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
을 당하였는데...... 프랑스 왕실과 가톨릭 교회는 참으로 후안무치하니, 야비하게도 이에 동조합니다.
하기사 옛날부터 말이 있으니.... 전장에 나간 장수의 공이 너무 높으면 "하늘도 시기하고 임금도 질투"
한다고 했던가요? 하여 이순신 장군도 노량 해전에서 스스로 죽어서 자식 과 조카 나마
구했던 것이지요! 아마 전쟁 이후 까지도 살아 있었으면 역적으로 몰려 험한 꼴을 당했을 것입니다?
후일 25년이 지난 1456년에야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마녀!) 판결을 파기하여 그녀의 명예를 회복
시켰지만, 가톨릭 교회는 잔다르크의 마녀 판결이 정당하다며..... 아집과 고집으로
버티다가 5백년이나 지난 1920년에야 그녀를 성녀로 시성 하였습니다? “ 마녀! 드디어 성녀가 되다?”
3) 베트남을 점령한 한나라에 대항한 쭝짝 자매등 여인들!
한 (漢) 나라가 베트남을 점령했을 때 쭝짝은 하노이 서북쪽 과거 반랑국의 수도였던 메링현
락장의 딸인데 여동생 쭝니와 함께 백성들의 기대를 받았으니.... 탐욕스럽고 포악했던
자오찌군 태수 소정은 무자비한 수탈로 민란이 일어날까 걱정하던 중에 그녀가 이웃마을
락장의 아들 티싸익과 결혼하자 화근을 미리 제거한다는 생각으로 티싸익을 붙잡아 죽입니다.
분노한 쭝짝은 쭝니와 함께 33년(40년?) 에 반란을 일으키니 10여년간 계속 되는데.... 소정 태수는
한 (漢) 나라로 도망쳤고 반란군은 농민들과 토착 지배계급 모두로 부터 지지를 받으며 65개
성을 장악했고.... 왕으로 추대된 쭝짝은 자신의 고향 메링을 수도로 삼은후 2년간 세금을 면제합니다.
하지만 당시 정세가 베트남 반란군에게는 불리했으니... 중국은 오랜 내전을 수습하고 왕조인 유수의 후한
(동한) 이 들어서 국력이 극성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후한의 광무제는 전한을 이은
왕망의 신(新) 나라를 무느뜨리고 반란군들이 벌인 내란에서 승리한 유능한 군사 천재였기 때문 입니다.
이에 후한의 광무제는 43년에 마윈 장군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진압을 명했으며 아울러 남부 각지의 관아에
마차와 배를 만들고 다리를 고치고 산길을 내며 군량을 준비했으니, 한나라군은 합포로 이동한후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진입하는데, 마윈은 내란에서 외효르 토벌하고 강족을 쳐부수는등 탁월한 장군이었습니다.
오랜 전란에서 다져진 정예 중에 정예인 한나라 군대의 진격에 외곽의 성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으며 수도 꼬롸 (하노이)에 까지 수월하게 들어온 한군의 적은 오히려 낯설고
거친 자연환경이었는데, 길은 정글로 이어지니 한발자국을 내딛기 힘들 정도로 험하고 질었습니다.
한군은 꼬롸 외곽에 반란군(독립군?) 과 일전을 치른후 동쪽 랑박으로 후퇴해 진을 차렸는데 반란군의
규모가 예상외로 크고 사기도 높았던데다가 계절은 우기로 접어들었으니......
폭우와 이슬비에 축축한데다가 기온도 30도를 넘으니 전염병의 위험등으로 불편하기 그지 없엇습니다.
훗날 남한이나 송나라 그리고 원나라의 침략시 베트남의 장군들은 이런 악천후와 진흙뻘에 고립된
침략군을 게릴라 전술로 물리치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전쟁 경험이라고는 없는
여자들인 쭝짝 자매는 이걸 활용할줄 몰랐으니.... 쭝짝은 매일 망루에 올라 적의 동태를
살피고 부하들을 격려하며 참모들과 숙의했지만 한나라군의 방어망을 뚫을 묘안을 찾지 못합니다.
개전초 국경에서 부터 한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해 보급로를 끊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불의의 장소에서
기습하며 그래도 패하면 물러나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우기가 되면 분산된 적을 공격하고
이동을 강요하며 낯선 지형에 고립시켜 섬멸하는 전술을 창안히지는 못합니다. 전문적인 군인이 아닌터라?
결국 우기가 지나 쭝짝 군대와 마윈 군대가 평야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병력은 반란군이 8만으로 거진 3배
가까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훈련 조차 받지 못한 농민들 이었으니 오랜 내전에서 숙달된 정예병을
거느린 전쟁 천재인 장군의 한군은 또 제철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 무기의 성능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한군은 원거리에서 노(弩) 로 화살을 날려 적을 살상하고 접전이 벌어지면 끝이 창과 낫을 합친 것 같은
2미터에서 3미터의 극 (戟) 으로 공격했으며 혼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했는데 특히 노(弩)
는 앞 부분을 밟고 양손으로 시위를 당겨 발사장치에 걸기 때문에 활에 비해 사정거리와
파괴력이 압도적이었으니 최대 800미터에 유효 사정거리는 400미터에 달하는 가공할 무기였습니다.
또한 흉노와 싸우면서 단련된 기병들은 창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중기병이었으니 임진왜란 때 충주
에서 신립의 기병은 "경기병" 으로 갑옷도 없이 그냥 적진 근처까지 가서 활을 쏘고는 적진에
뛰어드는게 아니라....... 반원을 그리면서 되돌아 오는 그런 경기병들과는 달랐으며 궁술도 뛰어났습니다.
소규모 충돌에서 전력 차이가 여실히 들어나자 락장들은 공포에 질려 병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
하니.... 한나라군은 진영에서 나와 쭝짝의 본진으로 돌격했고 수천명이 죽자 결국 크게 패한 자매는
메링으로 물러나 1년간 사투를 벌였지만 더 이상 버틸수 없게 되자 자매는 손을 잡고 홍강 강물에 투신합니다.
이후에도 여자 장수 도즈엉은 은예안으로 후퇴해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니 마윈은 추격해
수천명을 참살했는데 도즈엉 욍에도 많은 여자들이 전투에 나섰으니 퐁티찡은
임신한 몸으로 랑박전투를 지휘했으며 출산후 한팔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손에
칼을 들고 한나라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아기를 먼저 죽인후 자신은 강물에 투신합니다.
밧난 공주는 프엉러우 촌장의 딸로 미모가 뛰어났으니 소정태수가 39년에 쭝짝의 남편을 죽일 때 그녀의 남편
역시 반역의 기질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는데, 남편의 복수를 위해 참전했으니 큰 공을 세운후 장군
에 봉해지는 것을 사양하고 적의 수급을 받아 남편 묘소앞에 놓고 제사를 지낸후 전투에서 패하자 자결합니다.
레전은 전투마다 선봉을 자임했으니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군사 양성의 책임을 맡아 무과시험을
치르고 무술대회를 주관했으며 한나라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 끝에 마이동 마을에서 전사했는데,
베트남 여자들은 모계사회의 전통에다가 또 적에게 잡히면 성적으로 심한 수모를 받으니 저항한 것입니다.
4) 손주를 로마 황제로 만든 율리아 마이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은후 로마 황제가 된 카라칼라는 216년 메소포타미아에서 파르티아
군과 싸우던 중에 에데사에서 겨울을 난후 217년 4월에 다시 파르티아를 향해 행군
하던 도중에 백인대장인 마르티알리스에게 암살당하니 근위대장인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오릅니다.
시리아 출신 대비로 카라칼라 모후인 율리아 돔나는 특권과 영예가 박탈되고 안티오키아에 연금됐으며
몇주후, 병사들을 모아 반격을 도모했다가 실패하고 재산이 압류되었음을 알고는
건강이 나쁘니 곧 죽을수 있다는 두려움에 부귀영화가 끝났음을 깨닫고 굶어 죽는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시리아 에메사 출신 대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와 두딸 일가는 로마귀향이 저지되고 재산은 동결
됐으며 황족 지위까지 무효화되자 가만히 앉아서 죽을수는 없다며 기회를 노리던 중에 마크리누스 황제
가 파르티아군과 싸움이 유리했음에도 빨리 로마로 가서 황제노릇을 하고 싶어 돈을 주고 강화를 맺게 됩니다.
군인들은 겁쟁이 마크리누스 황제를 혐오했고 카라칼라가 군에 부여한 특권들을 일부 없애자 반발을
더 샀으니 병사들은 죽은 카라칼라 황제를 그리워하게 되니 전 대비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는
외손주 14살 엘라가발루스를 카라칼라 황제의 숨겨둔 자식인 안토니누스라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율리아 마이사는 20년 세월 쌓은 인맥을 동원해 연락을 취했고 친정인 에메사 왕가의 남은 재산을 팔아 재기의
도박을 벌이니 연인 간니스의 잔꾀에 따라, 동방에 있던 원로원 의원, 총독, 군사령관들과 접촉해 218년
5월 15일밤, 외손주 섹스투스 아비투스를 에메사 근처 라파나이아의 제3군단 갈리카 병영으로 데리고 갑니다.
다음날 아침 군인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아비투스가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열광했으니, 왜냐하면 폭군 카라칼라는
이전의 폭군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는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 이었습니다.
218년 6월 8일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반란군에게 패한후 로마에서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며 달아
났는데,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밀었지만 정체가 탄로났고 보스포루스를 건너려던 중에
칼케돈에서 체포되었는데 글래디에이터II 에서는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이 마크리누스 황제역을 맡았습니다.
율리아의 외손주로 시리아의 제사장이었던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제국 제23대 황제이자 세베루스 왕조의
3대 황제로 1세기 네로 이후 로마인에게 최악의 불명예 3종 세트를 받고 몰락했는데.... 네로 이후
최악의 폭군인 콤모두스 조차 못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공인된 사람입니다.
219년 여름 로마에 입성한 새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로마를 충격에 빠뜨렸으니 보라색 비단
겉옷을 입었지만, 볼에 연지 화장을 하고 머리에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면류관을
쓰고 있었으며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찼고 손목에도 각종 장신구를 착용했으며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상징하는 거대한 원뿔형 검은 돌덩어리를 가져와 로마에 안치합니다.
엘라가발루스가 온갖 기행으로 로마인들의 지탄을 받고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자 위기를 느낀
마이사는 가족들이 살기 위해...... 군위대를 동원해 첫 손주를 죽이고는, 둘째 딸
마마이아의 아들인 또 다른 외손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황제로 올린후 가문을 유지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