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현 아마쿠사에서 사마바라 반도에 상륙해 운젠 온천을 거쳐 시마바라성!
구마모토시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서 우토에키 (宇土駅 우토역) 에 내려서는 택시를 타고
우토조아토 (宇土 古城 (宇土城跡) 에 도착해 계단을 올라 언덕 위에 자리한 우토조아토
(宇土 古城 (宇土城跡) 를 구경하는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고니시가 처형
되면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우토성을 함락하고 성을 무느뜨린후 재건하지 못했으니 빈 터 입니다.
텐슈가쿠 (천수각) 도 무너지고 없는데다가 그 흔한 야구라 (망루) 도 없는데..... 임진왜란 제1선봉
고니니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성은 구마모토성 보다야 작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혼마루와
천수각 터 뿐이며, 저 아래쪽에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며 해자등 더 많이 있었지만 다 없어졌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가 24만석의 다이묘로 들어와 우토성
을 축성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기리시탄(크리스쳔) 영주로 유명하며
아버지와 어머니에 처와 딸과 사위등 일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으니 믿음의 가족이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 小西行長 こにし ゆきなが ) 는 상인 (商人) 출신의 무장으로.... 세례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이고
임진왜란때 일본군 장수였으며.... 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쓰시마국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으로, 무역의 이익을 위해 국서 까지 위조해 가면서 임진왜란을 막으려고 했던 사람 입니다.
불교도인 가토 기요마사와는 앙숙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복잡한 관계였으니 상인 출신
으로서 외교나 강화능력은 출중했으며, 가톨릭(기리시탄) 신자로 사위인 소 요시토시를
비롯 책사를 포함한 병사들 역시 세례명의 기리시탄으로 구성되었습으니 임진왜란
조선 침공 제1군의 지휘관으로 기독교도인지라 "십자가 군기" 를 앞세우고 조선에 상륙했습니다.
아마쿠사등 7천명 직속 부대와 소 요시토시 5000명, 마쓰라 시게노부 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 2000명,
오오무라 요시아키 1000명, 고토 스미하루 700명 등 1만 8700명을 이끌고 부산진에 상륙했는데....
2시간만에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다음날 3시간만에 동래성을 함락했으며, 1시간만에 상주성을 점령하고
두세시간만에 신립의 조선군 1만 8천을 전멸시키고는 서울에 무혈 입성 후에 역시 평양에 무혈입성 했습니다.
진해 웅천왜성에 주둔할때 스페인 신부가 와서 일본군 모두 일요일 미사에 참석하는등 독실한 기독교도로
1598년 이순신 장군에 의해 순천왜성에 갇힌 유키나가는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도움으로
살아서 귀국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따라 종군했던 승려 덴케이 (天荊) 는 전란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서정일기》 (西征日記) 를 남겼고..... 이는 임진왜란 연구의 사료로 손꼽힙니다.
다시 우토역으로 돌아와 기독교도들의 섬이라는 아마쿠사섬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기로
하고는 역을 나와 버스 정류소를 찾아가서는 구마모토에서 아마쿠사로 가는 버스는
여기 우토역에 서는지라 13시 03분에 도착한 아마쿠사호 (あまくさ号) 버스에 오릅니다.
2시간 반을 달려 아마쿠사섬 혼도 터미널에 도착해 호텔 선로드 (ホテルサンロード ) 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는...... 바로 나와 택시를 타고 언덕 위에 자리한 아마쿠사
크리스천 박물관 (AmakusaChristian Museum. 天草 キリシタン 博物館 ) 을 찾아갑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나가사키에서 아마쿠에 건너와 교회를 세우고는 여기 아마쿠사섬이 기독교도들의
섬이 된 과정에다가, 훗날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시마바라 반란이 일어난 과정을
설명하는 자료들이 많은데, 사진 촬영 불가라 찍지 못하는게 아쉬우니 바깥 게시물을 대신 찍습니다
하룻밤을 자고는 다음날 아사쿠사섬 남쪽에 사키츠 崎津 (기진) 마을로 가서는
17세기에 아마쿠사섬 주민 70~80 % 가 기독교도가 되고 복음이 섬을
뒤덮은 흔적인 오에 천주당과 사키츠 성당 カトリック 﨑津聖堂 등을 구경합니다.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섬은 바다 건너 나가사키현의 미나미시마바라시 와는 서로 다른 현이지만
사실상 같은 권역이라고 봐도무방한데, 1637년 시마바라의 난 때 두 지역 사이 바다에 있는
섬인 유시마에서 회합을 가졌으며, 아마쿠사의 반란군이 미나미 시마바라로 옮겨 항전했습니다.
다시 아마쿠사섬의 오니이케항 (Onike Port 鬼池港) 에서 페리를 타고 바다 건너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 구치노쓰항 (口之津港) 에 상륙해 버스를 타고 오바마쵸 (小濱町) 마을에 도착해 일몰을 봅니다.
온천 마을을 구경하고는 버스를 타고 산을 올라가 운젠 온센 ( 雲仙 溫泉 ) 에 도착해 호텔 운젠
후쿠다야 雲仙福田屋 / 山照‐別邸‐ 에 체크인후 대중탕에서 온천욕을 하고는 잡니다.
다음날 노청탕까지 하고는 호텔에 체크아웃후 배낭을 맡기고는 오르막길 언덕을 부리나케
달려 올라 가서는 소지옥 산책로 입구에 이르러 가쁜 숨을 헐떡이는데.....
마침 아래쪽으로 바람이 부는지라 유황연기에 눈을 뜰수도 업고 또 숨을 쉬기도 힙듭니다.
운젠 지고쿠는 운젠산의 기슭에 있는데..... 지고쿠 (地獄) 는 "지옥" 이라는 뜻으로 황량한 바위와 유황이
함유된 증기가 솟아나는 모습과 거품이 끓어오르는 산성 분기공은 분명 지옥과 비슷한 형상을
떠오르게 하니 분기공 주변을 도는 산책로를 걸으며 지글지글 끓는 암석 지대를 가까이서 체험할수 있습니다.
운젠 온천의 소지옥 산책로에서 젠지고쿠 (地獄 巡禮) 를 걷고 돌아와 오바마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니
운젠 온천 정류소에 선후 산을 내려가 구마모토로 가는 시마바라항을 지나 시마바라역에 도착합니다.
구마모토에서 시마바라로 오자면 산코버스 (産交 バス : 2번이나 서 7번, 490엔 30분) 를 타고
구마모토항 (熊本港) 에 도착해 오션애로우 1,500엔(30분) 11시 10분(6회) 나
또는 규쇼페리 九商 プェリ- 1,180엔 10시, 11시(1시간, 10회) 를 타면 시마바라에 도착합니다.
그러고는 역을 등지고 도로를 걸어서 시마바라 성으로 가는데, 여긴 상상 이상으로 엄청 큰 성이라 쉽게
도착했지만 문제는 입구가 반대편이라 한참 걸어야 하는데.... 1학년으로 남녀 고교생들
수십명이 이 겨울철에 반바지와 러닝 차림으로 성 주변을 힘겹게 달리는데 아마도 체육시간인가 봅니다?
여기 시마바라 성이 어마어마하게 큰지라 이걸 한바퀴만 돌려고 해도 30분 이상은 달려야
하지 싶은데..... 일본은 우리 한국과는 달리 "생활 체육" 이라 모두들 체육
활동을 열심히 하고 또 엄마들은 한겨울에도 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히는등 강하게 키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중 농구부가 23개 학교에 선수는 184명인데 비해 일본은 여중 농구부가 5,649개
학교이고 등록 선수는 무려 7만 5,423명 이며, 고등학교 야구부는 한국이 100개가
안되는데 비해...... 일본은 4,030개 이고, 축구는 한국 145개에 비해 일본은 4,174개 에 달합니다.
한국은 소위 "엘리트 체육" 이니 한 학교에 운동부는 하나 아니면 2개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한 학교에 운동부가 서른개 가까이 되니.... 오후 3시 30분에
수업이 끝나면, 일부 학생들은 하교해서 영어등 여러 학원에 가거나 집으로 갑니다.
하지만 70% 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3시 반 부터 두세시간 정도 방과후 활동을 하니 음악
이나 미술에 다도와 꽃꽂이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전체의 60~ 70%
정도는 서른개 가까운 운동부에서 연습을 하니 그럼 전교생의 절반은 선수들인 것입니다.
한국에서 내가 다닌 고교는 축구부와 야구부 2개가 있었는데, 3월 달에는 1교시 까지 수업을
하고 교실을 나가버리더니..... 4월달 들어 시합이 있으면 담임 선생님과
아침 조례 정도만 하고 나가니 그럼 수업을 전폐하고 운동에만 올인하는 선수들 이었습니다.
그러니 고교 시절에 벌써 프로 선수나 다름없이 수업은 안듣고 운동에만 몰두한 한국 대표 고교팀이,
오후 3시 반 까지 수업을 하고 방과후 활동으로 2~3시간 정도 연습한 아마추어인 일본 고교
팀에 이기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일본을 꺾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그러니 한국 선수들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갈 때 입국신고서도 작성하지 못하니 기자들이 대신해줄
정도였는데.... 십수년 전 부터는 한국 학생들도 오전 수업 정도는 한다지만 수업을 100% 하는
일본 학생들과는 다르며, 일본 학생들이 체육시간에 땀을 흘릴 때 한국에서는 대학 입시준비에 바쁩니다?
그러고는 거대한 해자를 따라 반바퀴를 돌아서 드디어 1624년에 완공되었다는 눈 처럼 흰 시마바라조
島原城(도원성) 로 들어가서는..... 텐슈가쿠 (천수각) 로 입장하니 입장료는 700엔을 받습니다.
중국은 60세는 반액이고 65세 이상은 무료이며, 유럽도 시니어 할인이 있지만 일본은 그런게 없습니다.
시마바라조 島原城(도원성) 의 성주 아리마 나오즈미는 아버지인 아리마 하루노부가 키리시탄 및 서양
세력과 얽혀 처형된 이후 영지 대부분을 차지한 키리시탄 영민, 가신들에 대한 악감정이 컸습니다.
이후 1637년 말의 시마바라의 난에서 아리마 나오즈미는 토벌군으로 참전해 과거 자신의 영민과 가신
이었던 반군들을 마음껏(?) 처리하고 다니게 되는데..... 그 전에 아리마씨가 스스로
원해 전봉된후 새로 시마바라 영주로 들어온 마츠쿠라 가문의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축성을 지시합니다.
1618년에 짓기 시작하여 1624년에 완공되니 기존의 히노에성이 작다는 이유였지만 영지 규모와 생산력
수준에 맞지 않는 엄청난 거성을 지어 버렸는데..... 지역 장악과 과시욕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마바라의 번주 마츠쿠라씨는 시마바라 반도 남부에 있던 히노에성과 하라성을 버리고
북부로 옮겨가버린 결과, 1637년 시마바라의 난 당시 남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했고, 인접 아마쿠사섬의 반군까지 합세해 하라성에서 농성을 벌이게 됩니다.
2대 영주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영민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고문하니 기독교 탄압과 함께
시마바라의 난의 주 원인이 되었는데.... 무리한 축성으로 많은 돈이 소모되면서
수탈이 더욱 심해졌으며, 키리시탄 탄압 과정에서 "운젠지옥" 고문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카츠이에는 기존의 고문에다가 미노오도리 라는 도롱이 옷을 입게 한뒤 불을 지르는 고문을 추가했으니,
일본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이들의 행태를 두고 '일본사에서 마츠쿠라 카츠이에 만큼 꺼려야 할
사람은 적다.' 라고 평했습니다. (원문: 日本史の中で松倉重政という人物ほど忌むべき存在は少ない)
임진왜란 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니 3만 7000명 인데
부모 앞에서 자식이 온천 불구덩이에 던져지고, 사람의 몸에 불로 고문을 가해 타
죽이기도 했으니 당시의 극심한 박해로 현재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1%에 못미칩니다.
"절망하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두렵습니다. 당신 침묵의 무게가 두렵습니다. 기도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허공에 기도하는 것입니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을 원작
으로 한 마틴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 는 이처럼 끊임없는 천주교 탄압에 고통받는 포르투갈
인 신부의 모습을 통해서.... 종교 만큼이나 숭고한 인간적 고뇌의 과정을 유려하게 묘사합니다.
영화의 무대는 나가사키로 천주교 선교 성지(聖地) 라 역사적, 문화적 유산이 많이 남아있으니
1597년 2월 5일 히데요시의 '천주교도 추방령' 에 의해 간사이에서 전도하던 선교사 6인과
일본인 신도 20명이 처형된 곳이고 순교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화형과 물고문으로 처형 됩니다.
1956년 사적(史蹟) 으로 지정하고는 26명 성인의 등신대 동상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는 니시자카 공원이 완성됐으니 1950년에는 로마교황 피오 12세가 이곳을 천주교 교도의
공식 순례지로 공표했으며 개항 후인 1865년에 오우라 천주당 (大浦天主堂) 이 건축되었습니다.
천주교 금교(禁敎) 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온 천주교도들이 250년 세월을 뛰어넘어 프랑스인
신부와 만났던 '신도발견' 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한데,,,, 건물 안에는 100년 전에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고 마리아상은 1865년 프랑스에서 직접 가져와 경건함을 더합니다.
기리시탄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 이라고 불릴 정도였는
데....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도 탄압이 계속되니 1637년에는 시마바라반도에서 아마쿠사시로
주도로 4만명의 신도가 반란을 일으켜 4개월간 12만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마바라반도 운젠시의 온천은 뜨거운 온천수가 지표면을 뚫고 솟구쳐나오니 끓어오르는 땅, 산불
이라도 난 듯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수증기,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지옥'을 만드니
개종을 거부한 천주교 신자 수십명이 펄펄 끓는 늪지대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던져져서 죽었습니다.
인근인 아마쿠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로 가톨릭이 융성했지만 테라자와씨가
들어와 종교 박해를 자행하자 시마바라의 키리시탄 농민 2만여명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니, 아마쿠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합세했으며 지도자는 하느님의 대리인
이라고 불리던 세례명 '예로니모' 의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라는 16세 소년이었습니다.
또한 막부의 영지 재배치로 인해 주군을 잃고 낭인이 되어 떠돌던 기독교 신자 사무라이들도 대거
참가했으니 반군의 병력은 3만 7천의 키리시탄이었다는데, 시마바라 번에서 3천명의 군대를
보냈지만 참패당하고 혼도성이 포위되니 주민들이 궐기해 반란군에 합류하니 혼도성이 함락됩니다.
천주교도 반란군은 나가사키를 장악해 포르투칼군의 지원을 기다리며 막부군과 전투를 계획해
도미오카성을 공략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폐성 하라성을 보수해 농성전을 시작하는데
이후 3번의 공세 끝에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이끄는 진압군을 궤멸시키자..... 에도
막부는 병력을 12만으로 증강시켰고,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 합니다.
마츠다이라는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포위하여 하라성 자체를 봉쇄했으며 닌자들을 성내로
잠입하고 정찰시키니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해초로만 연명하게 될 지경이 되자
총공격을 감행하니... 4개월 만인 1638년 4월에 하라 성이 함락되는데 반군은 단 1명도
항복하지 않고 전부 전사했는데 막부군도 10,8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3만 7천명 중에 항복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일본에서는 항복하면 성주와 가족에 가신은 할복자결하지만
일반 병사들은 모두 목숨은 건지게 되며 일부는 승자의 군대에 편입되기도 하는데, 시마바라의 난에서
항복해 포로가 된 자가 없이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기독교도들의 성전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포로를 생각하다가 문득 역사학자 임용한씨가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 라는 칼럼에 쓴 “국민을
버리지 않는 나라”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제일 가치있는 노획물은
사람이었다. 젊고 건강한 남녀를 잡아가 노예로 팔았다. 강화가 성립되고 전쟁이 끝나도 잡혀간
사람들을 되찾아 오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팔려 간 사람을 찾아오려면 주인에게 값을 지불해야 했다.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잡혀갔던 사람들은 인구의 10% 에 육박하는 무려 50만명에 이르는
데....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 경기도와 서울에서 젊은 부녀자들이 무수히 납치
당해 끌려갔으니, 정부가 못 본 척하자 심양에 있던 소현 세자의 거처에 와서 시위를 했다.
소현 세자는 무역으로 모은 자금으로 풀어주고, 농장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했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사람들을 계속 구하자는 구상이었다. 세자의 노력은 포상을 받기는 커녕 사병을 키우고 왕위를
노리는게 아니냐는 인조의 의심만 샀으니...... 인조는 결국 소현세자와 며느리에 손주들을 죽입니다.
친정 오라비가 담배를 지게 가득 지고 힘들게 만주 땅에 가서 천신만고 끝에
누이를 구해 왔지만 시댁에서는 손주의 어머니인 며느리를.... 가문의
수치라며 받아 주지 않으니 어려운 가운데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저 여자들이 재혼을 할수만 있었다면 새 삶을 살수도 있었겠지만...... 조선은 사주단자를 받은후 결혼식을
하기도 전에 신랑이 죽어 그 얼굴 조차 모르는 경우라도, 여자는 평생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으니 이는 일부종사 (一夫從事) 곧 여자는 한 지아비만 섬겨야했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이 봉기하자 조선은 임진왜란때 명군이 와서 전쟁을 도맡은(정유재란 일본군 14만, 조선군 3만 8천,
명군 11만 7천) 것과 임오군란을 청군이 진압해 주고.... 갑신정변도 역시 청군이 진압해준 것 처럼
중국에 진압군을 요청하자, 일본군이 들어와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의 항복을 받습니다.
그러고는 김홍집 친일파 내각을 세우고는 이노우에 공사가 훈수해서 갑오경장을 하니, 반상의
차별 철폐, 천민제도의 폐지, 노비 제도 폐지와 해방과 더불어 저 500년 강고히 내려온 여자
재혼 금지제도 철폐가 이루어 지는데.... 일본의 강요가 아닌 조선 스스로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포로가 된 조선 병사 몇명이 있었다. 미군 군의관에게 절단 수술까지 받은 부상병
도 있었다. 미군 측이 조선 정부에 포로 석방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정부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1871년 6월 1일 미국의 로저스제독은 군함 5척에 1,230명 병력으로 강화도를 침공하는데....
광성진 600명 조선군 중에서 “전사자는 어재연등 350명” 에 부상자 20명을 포함해
다수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에 부상 12명” 이니 전력차가 엄청납니다.
조선의 법에 포로가 된 자는 항복한 것으로 간주한다. 항복한 자는 사형이다.(조선 조정의 국어 사전에는
포로는 개념 자체가 없다) 중국, 일본, 고대에 전쟁의 법칙이 이러했지만 이때는 19세기 말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미군은 조선인 포로들을 내려주고 떠났다.
징비록에 보면 왜군에 포로로 붙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서 돌아온 조선군 병사 문제로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신하들이 즉각 죽일것을 주장하자, 선조는 왜군에 대한 정보라도 얻은후 죽이자고 하는데도
신하들은 바로 죽일 것을 주장해 처형당하는데 조선군이 적에게 항복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인가 합니다?
1675년 숙종때 안단이라는 사람이 38년만에 청나라를 탈출해 압록강을 건너오자 의주부윤은 바로 묶어
강너머 봉황성의 청군에 인계했으며.... 6.25때 국군 포로가 8만 2천명에 달하지만 북한은
8,700여명만 돌려보냈는데도 한국 정부는 손을 쓰지 못했는데, 2000년 6월 한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만났을 때.... 당시까지도 생존해 있던 국군 포로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두려워 해서 나가사키 섬 데지마 에 선교에는 관심없이 무역을 원하는
"네델란드인의 상관" 만을 허락한채 "쇄국정책" 으로 들어가는데, 일본인은 외국에 출국과
입국을 일체 금지하니 동남아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삽니다.
일본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말레이시아 말라카의 일본인촌에서 만난 안지로의 안내로 1549년
8월에 일본에 온데 비해..... 조선은 1631년 정두원이 북경에서 천주실의 책을 가져온 이래
성호 이익등에 의해 학문적으로 연구되다가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
에게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부도 없이 교회를 세우니 "일본 보다 이백여년" 이상 늦어졌습니다.
시마바라의 난 당시에는 영주군의 주둔지였고 이후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잘못된 통치로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에도 막부에 의해 가이에키 당하고는..... 에도로
끌려가 참수당했으며 메이지 유신 전까지 도쿠가와의 방계인 마츠다이라 가문에 통치를 맡깁니다.
시마바라 철도선의 시마바라역을 통해 갈수 있는데 역 밖으로 나오면 성이 보이지만 입구는 반대편
에 있기 때문에 둘러 가야 하며..... 해자는 나무, 풀, 이끼 등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일부
구간에는 물이 고여 있는데, 성 주변에는 무가 저택 거리와 수로가 형성되어 있어 둘러보면 좋습니다.
현재는 성 1층에 기독교, 카쿠레키리시탄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국어가
안내판이나 전시물에 쓰여 있어 비교적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데.....
여기뿐만 아니라 시마바라 반도에 전반적으로 한국어 표기가 많이 쓰여 있는 편입니다.
일본의 100명성 중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곳과 시 사적인 곳은 각각 6곳에 불
과하였으니..... 때문에 성의 규모, 역사적 중요도, 인지도 등을
고려하면 다소 의문인 부분이었는데, 12월에서 1월 시미바라 환타지아 축제가 열립니다.
시 남부에 수무천 (水無川) 이라는 하천이 있으니 물이 흐르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1990년대
운젠 분화 이후 분화 재발시 화쇄류, 토석류 등에 대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며 산에서부터 아리아케해까지 이어지는 큰 규모를 자랑하며 마을을 갈라 놓았습니다.
시마바라성을 중심으로 무사 저택, 시마바라 용수관, 시메이소가 유명하고 물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는데....... 곳곳에 크고 작은 수로와 족욕탕이 형성되어
있으며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고 잉어를 풀어놓아 헤엄치는 모습을 쉽게 구경할수 있습니다.
건더기 (장어, 어묵, 연근 등) 가 풍성하게 들어간 일본식 찹쌀 떡국 '구조니' 가 있으니 기원은
시마바라의 난 당시 농성하던 반군 쪽이 만들어 먹은 것이라고 하며 일본식 전통 떡국
조니와 흡사하나 건더기 구성에 차이가 있는데, 그 밖에 유명한 건 시마바라 소면이 있습니다.
이 글을 올리기 며칠 전에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황인찬 기자는 동아일보에
“ ‘위안부 사죄 담화’ 日 고노 前광방장고한 별세 ” 라는 기사를 올렸습니다.
1993년 8월 일제강점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 를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 겸 전
중의원(하원) 의장이 8일 별세했다고 아사히신문 등이 10일 보도했다. 향년 89세.
*** 설명문에 다치바나 가문의 십자가 문양으로 나오는데, 고니시도 십자가를 변행해 비슷한 깃발을 만들었습니다 ***
고노 담화는 위안부 모집과 운용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인정한 일본 정부의 첫 담화다.
고노 전 장관은 당시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
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일본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인정했다. 특히 “종군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고 강조했다.
2년 후인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村山富市) 당시 일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와 주변국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
를 총리 명의로 발표했다. 고노 담화가 ‘무라야마 담화’ 의 발표에도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노 전 장관은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이 공식 기자회견에서 발언했다면 그것은 분명한 내각의
뜻” 이라고 강조했다. ‘미야자와 전 총리의 승낙이 있었느냐’ 는 질문에도 “그렇다” 고 답했다.
고노 전 장관은 2009년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도 “(과거 일본이) 큰 전쟁을 치르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식민지 지배로 굴욕을 안겼으니, 이 문제를 마무리 짓고
아시아의 신뢰를 얻는게 일본의 국익에 부합한다” 며 일본의 진정성 있는 과거사 사과를 촉구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高市早苗) 총리는 10일 X 에 “역사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하며 대화와 이해를
중시한 자세는, 우리나라 평화 외교의 초석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 이라며 고인을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