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치도리가후치1 - 아사쿠사에서 지하철로 치도리가후치에 가니 도쿄대학 입학식?
2019년 4월 12일 우에노공원 에서 왕인박사 비 (博士王仁碑) 에 참배하고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과 시노바즈노이케 不忍の池(불인노지) 연못 거쳐 도쇼구 (東照宮 동조궁)를 보는데
오늘은 "벚꽃" 을 보려고 하니... 우에노 공원 외에 아사쿠사와 스미다가와 강변과 치도리
가후치 (千鳥ヶ淵公園) 에 후락원(고라쿠엔) 과 묘가다니역 茗荷谷駅 분쿄 文京(문경) 입니다.
지하철 도쿄 메트로 긴자센을 타고 아사쿠사 浅草(천초) 역에 내려 가미나리몬(雷門 뇌문)
으로 들어가 나카미세도리 (仲見世通り)를 걸어 센소지 (浅草寺, 천초사)에 가니 628년
어부 형제가 강에서 관음상 을 주워 안치한 것이 "센소지(浅草寺) 절의 시작" 이라고 합니다.
센소지를 나와 동쪽으로 걸어서 스미다강 에 이르러 에 634미터 스카이트리와 이미 져버린
벚꽃을 보고는.... 이제 오늘 보기로 한 5개 벚꽃 명소 중에 세번째인 궁내청
치도리가후치(千鳥ヶ淵公園) 로 가야 하는데... 그 전에 근처에 있는 긴자 에 가서
요나구니 스스무 씨가 말하는 “긴자에서 줄 서서 맛보는 고로케” 를 먹을까...... 망설입니다.
“아내가 가져다 준 봉투에는 '고로케’(크로켓) 가 들어 있으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국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엄마는 월급날이면 나를 시장 근처 고로케 가게 로
데려갔다. 기름에서 건진 고로케를 신문지 조각에 싸서 건네주었다. 돈가스 소스 를
듬뿍 찍어 먹으려 할 때 마다 엄마는 “조심해라, 입 덴다” 고 항상 같은 말을 했다.
간 고기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고로케 였지만... 빵가루의 바삭함과 고소함 이 가득했다"
"프랑스의 크로케트 (croquette) 또는 네덜란드 크로커트(kroket)로 부터 시작돼 고로케
가 일본식 서양요리 로 자리 잡게 되기 까지는 100년이 채 안된다. 1898년 요리의
황제라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1846∼1935) 는 프랑스 요리를 집대성한
요리책 을 통해 크로케트 를 전 세계에 알린다. 이 요리책은 요즘도 번역본이
나올 정도니 ‘요리사들의 교과서’ 라고 부를만하다. 나 역시도 이 책을 보고 공부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년) 부터 일본은 도시를 중심으로 서양 문물 을 받아
들이고 발전하게 된다. 고로케 와 돈가스, 카레라이스 등이 고급 음식
으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베샤멜 소스 를 곁들인 고로케 는 평민
들은 먹어 볼 수 없는 고가로, 돈가스나 스테이크 보다 더 비싼 가격 이었다."
"미국의 경제공항과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일본도 다른 국가들 처럼 최대의 공황기 를
맞이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 1927년 도쿄 긴자에 ‘조시야(Choushiya)’ 란 정육점 을
운영하던 아베 세이로쿠 는 팔고남은 고기나 변색된 자투리 고기 를 다져 감자와 섞고
정육점에 굴러다니던 기름덩이를 끓여 기름 대신 사용해 오늘날의 고로케를 만들었다.
고기, 감자, 기름의 환상 조합 이지만 가격은 프랑스 스타일 크로케트 10분의 1 정도였다"
"일본식과 서양식 크로켓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빵가루 다. 서양식 빵가루는 먹다 남은 빵
이나 딱딱한 겉 부분을 잘게 간 것으로 입자가 일정하다. 일본식 빵가루는 공기층이
보이듯 찢어져 있고 형태나 입자가 고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특히 러일전쟁)
당시 탱크 배터리를 연결하던 전선을 반죽에 끼워 넣고 구워 빵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고로케 는 슈퍼마켓과 정육점, 편의점, 고로케 전문점등 어디서나 볼수 있다. 한 슈퍼마켓
에서는 냉동 고로케가 매출 1위 라는데... 고베 비프 (일본 고베에서 자란 소) 를 넣어
만든 한 회사의 고로케는 한팩에 10개가 냉동 포장돼 3만 2000원 에 판매되고 있는데,
13년 동안 예약돼 있어 판매중단 상태고, 이후 다시 판매를 하겠다고 입장을 밝힐 정도다."
"긴자 에 갈 일이 있다면 처음 만든 그대로의 맛을 유지하고 있는 조시야 고로케 를 140엔,
샌드위치를 250엔에 판매하고 있으니 한번쯤 줄 서 먹어볼 것을 권한다. 긴자에서
포장 상태로만 운영되고 있으나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고 당일 준비량이 떨어지면 끝난다"
하지만 오늘 멀리 군마현 에 "쿠사츠 온천" 까지 가야 하니 시간에 여유가 없기로...
치도리가후치로 가서 벚꽃 이나 보기 위해 역으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가서
살펴보니 여긴 지하철이 아니고 사철 기차역 이라... 되돌아 올라와서는 왼쪽에
스미다 강을 끼고 150 미터를 내려가서는 도에이 지하철 아사쿠사역 으로 내려 갑니다.
공항에 가는 도에이 지하철 아사쿠사선 서마부행 지하철 을 타고는 3정거장을 가서는
히가시 니혼바시 (東日本橋 동일본교) 역에 내려 지하 통로 를 한참 걷습니다.
제법 지하 통로를 걸어서 바쿠로요코야마 馬喰橫山(마식횡산) 역에 도착해서는
도에이 지하철 신주쿠선 으로 갈아타고 4정거장 구단시타 九段下(구단하) 역에 내립니다.
구단시타 九段下(구단하)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거리에 식당 들이 보이는데...
가장 사람들이 많은건 햄버거 가게 로 줄을 서서 주문하고 기다렸다가
바로 받아서 들고 가니 식당으로 들어가지도 않는데.... 모두 테이크 아웃 인가 봅니다?
우리 부부는 그 옆에 식당으로 들어가 기계에서 돈을 넣고 주문 해서는 450엔 하는
덴뿌라 우동 을 선택하니 표가 나오길래 종업원에게 주고 안으로 들어가
5~ 6분을 기다리니 가져다 주는데.... 가만히 보니 다른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자기 음식을 받고서야 테이블로 들어오니 그럼 우린 새치기한 것 일까요?
식당을 나와 책을 파는 아저씨 가 있어 길을 물어 가르쳐 주는대로 조금 걸어서 횡단 보도
를 넘어가니 건너편에는 구름 같은 인파 가 몰렸는데, 보자니 오늘 도쿄대학 입학식 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나라는 9월이 신학기인 미국과 유학등으로 학기를 맞추기 위함
인지 추운 3월에 입학식 을 갖는데 일본은 삼짓날 무렵인 4월 초순에 새학기 를 시작합니다!
치도리가후치 (千鳥ヶ淵公園) 공원에서 나오는 학생들은 푸른 봉투 를 들었는데
지금 들어가는 학생들도 있어 보자니... 여기 치도리가후치 경내에 자리한
부도칸(武道館 무도관) 에서 거행되는 입학식 은 한꺼번에 다 하지
못하고 나누어서 하니..... 나오는 사람과 들어가는 사람들이 섞인 모양 입니다.
오늘 도쿄대학 입학식 에는 학생을 따라온 잘 차려 입은 부모들 이 많이 보이는데....
일본은 남한 면적의 4배 에 달하고 인구는 2배 반 이니 우리나라의
서울대학교 보다는 지방 학생 비율이 훨씬 높은지라 멀리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 입니다.
거리로 쳐도 일본은 남한면적의 4배 인데다가 사각형인 남한 에 비해 일본은 남북으로 길쭉 하니... 훨씬
더 멀리서 온 것 입니다? 도쿄대학 은 일찌기 1877년 에 법학· 이학(理學)· 문학· 의학의 4학부
와 예과 로 구성된 '도쿄대학’ 으로 설립되었으니..... 초대 총장은 가토 히로유키 (加藤弘之) 라고 합니다.
총장 가토 히로유키 (加藤弘之) 는 다지마(但馬)국 센고쿠(仙石)번 무사의 자식 으로
태어나서는 성인식 을 마친 16세에 에도로 나와 선각자로 불리던 사쿠마 쇼잔
과 오오키 나카마스 문하에서 공부를 한 후 막부가 세운 번서조소의 조교 가 됩니다.
번서조소 는 서양문명을 연구하는 곳 으로 프러시아 국왕이 증정한 전신기계 사용법을 전수
받을 사람 을 찾는데 지원하면서 독일어 공부 를 독학하였으니, 훗날 독일어로 자신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일본에서 독일학의 시조(始祖) 로 일컬어지는 학자 로 성장
했다는데..... 1860년에 “인초(隣草)” 를 저술해 서구의 정치 체제인 입헌정체 를 주장 합니다.
1869년에는 천민제의 폐지 를 주장한 ‘히닌· 에타를 폐지하자는 의견’ 과 다음해 집필한
“진정대의 (眞政大意)” 에서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상을 펼치고, 1874년에
“국체신론 (國體新論)” 에서는 천황(일왕) 이 천손의 후예라는걸 부정 하며....
유럽과 같은 입헌군주제로 가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 을 했으며 진화론 을 받아들입니다!
1868년 조슈번과 사쓰마번, 히젠번 및 도사번 존왕양이론자 들은 교토를 점령하고는
일왕(천황) 을 받들어 에도 막부 폐지를 주장하니 무진전쟁 인데, 신정부군은 5천
병력으로 교토 전투에서 1만 5천의 막부군을 격파 하고 이후 동북지방으로 진격해
수십차례의 추가 전투 끝에 홋카이도 하코다테를 함락 하면서 메이지 유신 을 이룹니다.
1871년 9월 이토 히로부미 가 주관해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메이지유신 주역 48명의 미국과 유럽 사절단 이 태평양을 건넜으니... 서양의
기술과 문명을 견학하며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2년후 귀국 하는데, 함께 간 60명의
학생들은 5년간 서양을 배워서 귀국하니 그들중에 일부는 도쿄대학 교수진 으로 들어갑니다.
1886년에는 ‘제국대학’ 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법· 의· 공· 문· 이(理) 의 5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을 갖추고 총장제도를 채택 하는등 근대 대학의 전형을 확립하였는데
1897년 교명을‘도쿄제국대학’으로 변경하였으며 1918년 단과대학 폐지, 학부제도
채택과 함께 종합대학으로 개편된후... 2차대전 후에 다시 이름을 도쿄대학 으로 바꿉니다.
도쿄대학 캠퍼스는 5개 로 나뉘는데...... 도쿄도에 고마바[駒場]· 혼고[本郷]· 시로가네
(白金)· 나카노[中野] 캠퍼스가 있고 지바현에 가시와[柏] 캠퍼스 가 있다는데
그럼...... 오늘 저 5개 캠퍼스에서 공부할 학생들이 여기 모여 서로 얼굴을
보는 모양인데 학생들은 한결 같이 검정색 양복에 연노랑색 외투 를 걸치고들 있습니다.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는 28명 인데, 도쿄대학 은 과학 부문에서는 8명을 수상한 교토대학 보다
못하지만 에사카 레오나(1973 물리학), 고시바 마사토시(2002, 물리학), 난부 요이치로
(2008, 물리학), 네가시 에이이치(2010 화학), 오스미 요시노리(2016 생리) 등 5명이 있으며
문학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 오에 겐자부로 (1994) 가 있고 평화상에 사토 에이사쿠(1974)
그리고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나카스네 야스히로, 하토야마 유키오등 이 있습니다.
소설가로는 야스나리와 겐자부로 외에도 나쓰메 소세키 등이 있고, 올해 일왕(천황) 이 된
나루히토의 비인 마사코 왕후 와 덕혜옹주의 남편 인 대마도주 소 타케유키 등이
있으며.... 한국인으로는 전 고려대 총장 김상협, 건축가 김수근, 철학자 김용옥,
미술가 백남준, 농학박사 우장춘, 유엔 한국대표 김준연과 국회의장 이효상 등이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도쿄대학에 이어 교토대학, 도호쿠대학, 규슈대학, 홋카이도 대학 을 설립한후
6번째로 설립한 제국대학은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이니 조선총독부 건축과
이와츠키(岩槻) 기사가 콘크리트 골조로 벽돌에 황갈색 타일, 로마네스크 양식 으로 지어
1926년에 완공하는데, 도쿄대 교수 핫토리 우노키치 (服部宇之吉) 가 초대 총장 으로 옵니다.
일본 고교생 중에서 0.2% 만이 합격한다는 도쿄대학 입시 에서 2015년 기준으로 카이세이
(開成高 개성고) 가 무려 34년 연속 최다 합격자 를 기록했으니 185명 이고, 츠쿠바대
부속고가 107명, 나다(灘)고 92명의 순인데... 개성고는 재학생중 46% 합격율 을
보이니, 중고교가 연결된 개성중학교 입시는 도쿄대 입시 이상으로 살벌 하다고 합니다?
카이세이학교 교수진 중에 으뜸은 나카하마 만지로 (中濱 万次郎) 니, 그는 시고쿠섬 도사번
어부로 14세 되던 1841년 고기잡이 배를 탔다 조난 을 당해 태평양의 무인도인 도리시마
에서 143일만에 미국 포경선 존 하울랜드호에 구조되어 미국으로 가는데 영어와 측량 및
조선술을 배우니 투표로 부선장에 오르고 이후 귀국자금 마련을 위해 금광사업에 뛰어듭니다.
돈을 벌어 어드밴처호라고 불린 배를 구입해서 하와이에 내렸던 옛 동료들과 함께 10년만인
1851년에 귀국하는데,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의 쿠로후네 가 일본에 오자 막부가 발탁해
하타모토 가 되었으며 영어회화집 일미대화첩경 과 보디치 항해술서 를 집필하고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전달하는 견미사절단으로 간린마루를 조종해 미국에 갔으며
귀국후 카이세이(開成)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1870년 보불전쟁 시찰단으로 유럽에 갑니다.
미국에서 10년을 생활해 영어와 측량, 항해술과 조선술에 뛰어난 교사 만지로 이래 현대에도
도쿄대 입시에서 34년간 압도적인 1위 를 지키는 도쿄 명문 카이세이(開成高 개성고) 는
1895년 조선에 수입 되어 개성학교 가 세워졌으니 훗날 부산상고 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교 인데, 이제 부산상고 는 인문계 가 되면서 학교 이름을 개성고(開成高) 로 바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