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10 - 오사카성을 나와 지하철로 일본에서 최초의 절인 사천왕사를 구경하다!
2024년 11월 25일 오사카성(大阪城, 대판성) 에 도착해 해자와 성벽을 바라보는데 봄에는 분홍빛 벚꽃
이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가을에는 붉은빛 단풍이 그 역할을 하니.... 가을 풍경을 보고 천수각에
올라 오사카 시내를 조망하고는 성 뒤편의 선착장으로 가서 놀잇배를 타고 단풍놀이를 즐길수 있습니다.
넓고 깊은 해자를 지나 거대한 오사카성에 들어가니 다시 2차 해자가 나타나고 지그재그로 난
성문을 통과해 오사카성 혼마루에 들어가니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저만치 날렵하게 생긴 오사카성 텐슈가쿠(천수각) 가 보이기로 구경을 합니다.
그러고는 오사카성을 나와 다니마치 욘초메역 (谷町四丁目駅) 으로 가서 다니마치선(나무색)
아오 미나미(靑南) 행 지하철을 타고 3정거장 시텐노지마에유하기오카역
(四天王寺前夕陽ヶ丘 ) 역에서 내려 걸어서 시텐노지 四天王寺(사천왕사) 절을 찾아갑니다.
쇼토쿠태자 (聖徳太子) 가 백제에서 목수 3명을 초청해 593년 건립한 일본 최초 사찰로 구제관음 (救世観音) 이며
도리 (鳥居) 를 들어서면 로쿠지도며 이시부타이 (石舞台 석무대) 등이 있는데, 번번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재건돼 고대 건축양식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으며 상징물인 오층탑은 최상층까지 올라갈수 있습니다.
사천왕( 四天王) 은 본래 고대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方位神) 이지만
불교에서 사천왕의 개념을 가져와 불법 (佛法) 과 가람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변하였으니,
이 때문에 사천왕의 이름을 딴 절들은 불교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서기 578년에 쇼토쿠 (聖德) 태자가 백제로 부터 장인 세 사람을 초청해 시텐노지 ( 四天王寺) 공사를
시작해 593년에 완성했는데, 3명의 목수 중에 2명은 나라로 보내 호류지(법융사) 를 건축하게
하고 금광중광 한명은 남겨서 자손 대대로 사천왕사를 유지 보수하는 일에 종사하게 했다고 합니다.
금강중광 (金剛重光 : 곤고 시게미츠) 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시텐노지의 증축과 유지보수를 하면서 시텐노지로
부터 매년 정해진 돈을 받아 회사를 유지해 왔고 1576년 화재로 절이 불탔을때는 재건했는데.... 1868년
메이지유신후 신불 분리로 시텐노지가 소유한 논밭을 잃자 회사도 수입이 줄고 부도를 맞아 사장이 자결했으나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절 안에 무덤에서 생사를 결심한후 1934년 태풍으로 무느진 탑 재건공사를 맡아 재기합니다.
쇼토쿠 태자는 요메이왕(천황) 과 황후 아나호베노하시히토 (穴穗部間人) 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백제 승려
혜총과 고구려 승려 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유교와 불교를 배웠다는데 19세때 고모 스이코여왕의 섭정이
되었는데.... 당시 소가노 우마코가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둘렀으니 자신의 조카딸 스이코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계인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이며 아내도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기에 일본
황실의 일원인 동시에 소가씨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와 수나라
의 문물을 받아 들여서 왜의 문화와 정치를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아스카 시대를 열었습니다.
소가씨의 뜻대로 불교를 부흥시켜 시텐노지(사천왕사), 호류지(법륭사),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이 있는 고류지등 절을 창건했고 중앙집권을 하기 위해 17조 헌법과 관위 12계를 만들었으니
유교의 덕목인 덕(德)ㆍ인(仁)ㆍ예(禮)ㆍ신(信)ㆍ의(義)ㆍ지(智) 에 각각 대(大) 자와
소(小) 자를 붙여 12관위를 만들고, 보라ㆍ파랑ㆍ빨강ㆍ노랑ㆍ흰색ㆍ검정으로 위계를 표시했습니다.
귀족 "모노노베노 모리야" 가 일으킨 정미의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고 불교를 공인했으니 그의 정치시스템
은 다이카 개신을 거치며 약간 바뀌었지만 후대 정치 시스템의 토대를 놓은 것인데, 중국으로 치자면 구품
중정제와 같은 것으로 재무성의 전신인 대장성(大蔵省) 은 2001년 까지 1300년 동안 같은 이름을 유지했습니다.
말년에는 백제계 소가 가문의 권력이 강해지고 자신의 권한이 축소되자 속세에 허망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했으니..... 죽기 직전에 아내에게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난다.'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정말로 죽은 뒤였다고 하니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력한 차기 왕(천황)으로 꼽혔지만 고모 스이코여왕 (천황) 보다 먼저 죽었고 아들 야마시로
황손은 다무라 황자 지지파에게 밀려서 일왕(천황) 이 되지 못했으며....
이후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인 소가노 이루카의 음모로 일족이 자살하여 혈통이 단절됩니다.
정미의 난을 진압하러 갔을때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불공을 드리자고 제안하고 그렇게 하자 다음 전투
에서 승리했다는 일화가 있으니.... 정미의 난은 숭불파인 백제 도래인계 호족과 배불파인
토착민 모노노베등 호족들의 세력 싸움이었는데, 숭불파가 승리했다는 것을 반영한 일화인 것 같습니다.
607년에는 수나라 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곳의 천자 (日出處天子) 가 해 지는 곳의 천자
(日沒處天子) 에게 글을 보내노라." 란 구절을 넣은 일이 유명한데.... 수양제가 대노했지만
마침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던 때라 왜국을 적으로 돌릴수 없으니 다음해에 일본에 국서를 보냅니다!
대업 (大業) 3년(607) 에 그 왕 다리사비고 (多利思比孤) 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바다 서쪽의 보살천자 (菩薩天子) 가 불법을 중흥하였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조배 (朝拜) 하고 승려 수십명을 보내 중국에서 불법을 배우고자 한다." 고 하였다.
그 국서 (國書) 에서 이르기를,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 잘 지내는가
[ 無恙]?" 운운 이라고 하였다. 황제(수양제) 가 보고 기꺼워하지 않고, 홍려경
(鴻臚卿) 에게 이르기를 "오랑캐의 글이 무례한 바가 있으니 다시 보고하지 않도록 하라." 고 하였다.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其國書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云云. 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수서》
이는 마침 당시 수와 대치하던 고구려의 승려 혜자가 쇼토쿠 태자에게 국서 쓰는 방향을 지시해준
결과라고도 하고, 왜국이 평소 중국과 교류한 경험이 없다 보니 자기들이 주변국에 하던대로
자국 중심주의를 내비쳐 수양제는 "웃기는 놈들 다 보겠네" 정도로 넘어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수양제가 국서를 받은 이듬해에 왜국에 답사로 보낸 배세청 (배청) 의 관직이 문림랑 (文林郞) 이라는 하급 관리
였음이 그 근거로 거론되는데, 수양제가 왜국을 대단하게 봤다면 하급 관리를 답사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니
수양제가 대노했지만 답서를 보낸건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있어 왜국을 적으로 돌릴수 없었기 때문으로 봅니다?
사절인 오노노 이모코는 쇼토쿠 태자에게 양제가 허가하였다고 거짓말을 하니 쇼토쿠 태자는 다음 사절에도
이모코를 보내며 위 내용을 “천자만 천황” 이란 표현으로 바꿔 서신의 서문에 집어 넣는데....
그러자 이모코는 양제에게 죽을까 두려워 도망쳤으며 얼마 지나지않아 거짓말을 한 것이 발각되어 귀양갑니다.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 12년 동안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때마침 쇼토쿠 태자는 법을 제정하고, 조례 (朝禮) 를 개정하는 등의 정책을 폈으며
또한 607년 수에 전해진 일왕(천황) 의 국서에는 ‘日出處天子’ 라고 하며 독자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수서 (隋書) 에는 쇼토쿠가 왜의 사신을 보냄에 답하고자 이듬해 608년 수양제는 문림랑 배세청을 보냈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 무령왕 9년의 기록을 포함하여 고대 한ㆍ중ㆍ일 세 나라 사료에서 연도까지 교차 검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사로 삼국사기에는 수나라의 사신이 백제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흘 후에 다시 대례 (大禮) 가다비 (哥多毗) 를 보내어 200여 기병을 거느리고 교외에 나아가 위로
하였다. 드디어 그 도읍에 이르렀는데, 그 왕은 배청 [淸] 과 만나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바다 서쪽에 대수(大隋) 라는 예의를 갖춘 나라가 있다고 들은 까닭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나는 오랑캐
로서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살고 있어서 예의를 듣지 못했다. 이제 새로이 길을 청소하고 숙소를 꾸며 대사
(大使) 를 기다렸다. 바라건대 대국이 새롭게 된 [惟新 유신] 가르침을 듣고자 한다." 고 하였다. 청이 대답하기를....
"황제는 그 덕이 하늘과 땅 [二儀] 에 버금가며, 은택은 온 세상에 미친다. 왕이 교화를 사모하는 까닭에,
사신 [行人] 을 이곳에 오게 하여 가르침을 베풀도록 [宣諭] 한 것이다." 그 후 [배] 청은
왕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 (朝命) 이 이미 도달하였다. 청컨대 곧 길을 경계할 것을 부탁한다."
고 하였다. 그래서 연향을 베풀고 청을 보내었고, 또한 사자로 하여금 청을 따라 와서 방물을
바쳤다. 그 후 마침내 [관계가] 끊어졌다. 수서 권81 열전 제46 동이 왜국(倭國)
대업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다음 해에 황제가 문림랑 배청(裴淸) 을 사신으로 보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600년과 602년 신라를 치려고 했다는 기록이 나오니 600년에는 신라를 치려고
했다가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멈추었는데, 다시 602년에 신라를 치려고
쓰쿠시에서 병력 2만 5천을 모으고 이복형제인 구메 황자 (來目皇子) 를 대장군으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가 병이 들어 사망하여 다른 이복형제인 타기마 황자 (當摩皇子) 를 후임으로 임명
하였으나 그마저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도성으로 귀환하는 바람에 원정 자체가 백지화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762년에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 것 보다도 훨씬 과거에 있었던 일입니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인의 정신으로 유명한 이이토코토리 (良いとこ取り) 와 와 (和) 의 창시자
로도 유명하며, 소위 야마토 정신의 정신적 원류라고도 하며 또 신불습합으로도
유명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일어난 것은 9세기부터 이니 쇼토쿠 태자와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건축 연대로만 보자면 나라의 아스카데라가 일본 최초의 사찰이지만, 시텐노지는 최초의 관사
이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찰인데..... 그러나 1576년에 있었던 화재로
전체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어 재건된 때문에 현재 건물 자체는 호류지가 더 오래되었습니다.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시텐노지는 증축되었으며, 금당과 탑 등의 건축 양식도 바뀌었으니 공포의 형식이나 기둥
의 배치 조차 바뀌어 지붕이나 하앙 정도만 옛 흔적이 남아있지만 가람의 배치만큼은 창건 그대인데,
시텐노지식은 강당과 금당, 탑, 정문이 일직선으로 놓여져 있는 배치를 뜻하며 백제식 가람배치라고 부릅니다.
1934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하였지만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탑과 정문,
금당, 남측 회랑이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아스카 시대의 양식
으로 고증하여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을 하고 말았는데 땅을 파해치면서 주춧돌과 기단은 제거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건축 업체 곤고구미의 상징이 시텐노지이니 세 명의 목수 중 금강중광
(金剛重光 : 곤고 시게미츠) 이 남아 대대손손 시텐노지의 증축과 유지보수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곤고구미의 시작으로 시텐노지로 부터 매년 정해진 돈을 받아 회사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럼 시텐노지가 완성되어 절의 관리를 맡은게 593년이니 1,430여년이나 된 기업이라는 이야기 인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 두산으로 1896년 박승직 상점으로 출발했으니 129년 됐는데, 100년이 넘는 기업은 한국이
10개 정도인데 비해 일본은 5만개에 달하고 천년 넘는 기업도 많으니 한국과 일본은 기업의 역사가 차이가 납니다?
시텐노지의 완성 이후로도 계속 보수와 증축을 하였으며, 1576년에는 시텐노지 전체가 불에 탄 것을 재건한 기업도
곤고구미인데, 그러나 1868년에 메이지유신 직후에 내려진 "신불 분리령" 에 의해 시텐노지는 소유한 사원
의 토지를 잃고, 곤고구미도 고정수입을 잃게 되지만 1934년에는 태풍으로 무너진 시텐노지의 탑을 재건했습니다.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에도시대 양식이 아닌 창건 당시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복원을 했으며, 고증은 한국과
일본의 고건축을 연구했던 저명한 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했으니.... 호류지나 7세기경에 건물 모양
으로 만들어진 가구인 다마무시노즈시(옥충주자: 玉蟲廚子) 한국 삼국시대 건물의 흔적 등을 참고 하였다고 합니다.
복원된 시텐노지는 호류지와 비슷하게 하앙 구조, 배흘림기둥 등 백제의 영향을 받은 아스카 시대 요소로
추측되는 것들을 공유하고 있지만, 에도시대까지 이어진 고식(古式)으로 파악되는 독특한
지붕의 형식, 가람 배치와 서까래의 종류와 배열 방법, 人자형 대공 등에서 호류지 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가람 배치는 창건 당시부터 달랐고, 호류지는 人자형 대공이 없는데 반해 시텐노지에서는 가구에 쓰고 있으며
서까래가 평연이 아닌 선자연(부채꼴)으로 배치한 근거는 발굴 조사 때문이니, 1950년대에 발굴조사
를 진행하였고, 나라시대 즈음 서까래의 흔적이 나왔는데 그 모양이 둥근 긴 서까래와 선자연의 형태였답니다.
시텐노지의 중심 가람은 현대에 재건되었지만, 그 밖에 오래된 다른 건축물들은 남아있으니 주로 에도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아름다운 조경을 가진 혼보(本坊) 정원이나 유서깊은 춤 무대인 이시부타이
(石舞台, 돌무대) 와 뒷편 건물인 로쿠지도, 쇼토쿠 타이시덴 (쇼토쿠 태자전), 박물관인 보물전 등이 있습니다.
해마다 이시부타이(石舞台) 에서는 쇼토쿠 태자를 위령하는 행사를 여는데..... 4월 22일이 쇼토쿠 태자의
기일이며 이 때 대법회인 성령회(聖靈會) 와 이때 추는 춤에 쓰이는 음악인 무악 (舞樂) 을 연주한답니다.
성령회와 성령회 무악은 1400년이나 이어진 오래된 행사로 춤과 음악을 펼치니 무악은 좌무(左舞)와 우무
(右舞) 2가지니 음악과 옷 색깔이 다른데, 좌무는 중국에서 유래한 음악인 당악 (唐樂) 에 따라 추며,
우무는 고구려에서 전래한 음악인 고려악 (高麗樂) 에 따라 춤을 추며 한반도에서 전래된 춤 소리코
(蘇利古) 는 612년에 백제에서 건너온 무용가인 미마지 (未麻之) 에 의해 전수된 사자춤과 탈춤이랍니다.
시텐노지 왓소 마츠리(축제) 는 백제인들이 오사카에 도착할때 일본인들이 반가워 가마에 태우고 "왔소~, 왔소~" 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했다는 설이 꽤 널리 퍼져 있지만, 일본에서는 축제에서 왓쇼이(ワッショイ) 라고 구령을
부르는 것이 널리 퍼져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구령이 시텐노지의 왓소 축제에서 나왔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천왕사 축제는 1980년대 말, 재일교포들이 자신들의 축제를 가지고
싶어하여 만든 것으로 한국의 문화와 한일교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90년대말 후원하던 재일교포 기업이 파산하면서 중단되었다가 일본 기업의 후원을 얻어 재개했으니 백제와 연관
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고 재일교포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현대에 만든 축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