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 우토3 - 석양을 구경하고는 돌어와 구마모토의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다!
2025년 12월 6일 구마모토역에서 미스미(三角 삼각) 행 기차를 타고 오다 (綱田 강전) 역에 내려
마을을 통과해 산을 올라가서는 미코라이 전망대에서 오코시키 시숀 (御與來海岸) 을 보며
석양을 기다리다가, 임용한 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이순신을 위한다는 착각”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임진왜란은 한국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남겼으니 영화나 드라마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임진왜란
과 관련된 인물과 전투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니.....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 는 풍속과 인심에 대해 소개하는데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를 채록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중환은 명나라의 도움을 과장하는 내용들을 보고 분노했으니 명나라 장수
의 공과 수고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은 우리
장수였고....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 사람은 단연 이순신 장군 이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명군이 세운 최고의 공적은 1593년 1월 이여송의 평양성 탈환이니 육지에서 공수의
주도권이 바뀌는 결정적 전기였는데.... 조선군도 참전했지만 당시는 전쟁 초기의 패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때라 명군이 주도 (명군 4만 3천 + 대포, 조선군 8천 + 승병 2천) 했다.
택리지는 평양성 탈환도 알고보면 이순신 장군의 공이었다고 했는데 이 대목은 맞는 말이니 이순신의
수군이 왜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한 덕분에..... 왜군의 진격이 공세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택리지에 실린 설명은 오류 투성이니 이순신이 명량해전으로 왜군을 격멸해서 왜군의 진격이
멈췄다고 했는데.... 명량해전은 평양성 전투 5년 후인 1597년의 일이며, 이런 오류가 여러 곳
에서 보인다. 뜻이 좋다고 사실 왜곡을 용납할 수는 없다. 이는 이순신 장군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은 국난을 당하면 인재를 낸다고 했으니 이순신은 그야 말로 '구국의 영웅' 이니
“성웅” 이라고 불러야 할 위대한 인물이신데.... 임진왜란 때 만약에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당시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모골이 다 송연해 집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당신이 하신 그대로만 기록해도 불세출의 영웅으로 민족 과
나라를 구할 은인인데 사람들이 자꾸 이것 저것을 더해 마치 신 (神) 처럼 만들어
버리니....... “과첨은 비례” 라고 했듯, 이것 역시 장군을 위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장군은 백전 백승의 명장이며 한번도 패하지 않았고 적에게 등을 보이고 물러난 적이 단 한번도
없으며, 평양까지 진군한 적이 물러간건 물론 1597년 천안을 지나 직산 까지
진격한 왜군이 후퇴한 것도.... 명량해전 때문에 바다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서 라고 말합니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해전 대승으로 일본군은 달아났으니 조선 수군은 전라도 바다를 지켜냈고
백성들은 안전해 졌으며, 해전 승리를 계가로 조선은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섰고 일본 수군은
다시는 전라도 바다를 넘보지 못했으며 장군은 고금도 까지 진격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정유재란 일본군은 14만이고 명군은 11만 7천에 비해 조선군은 겨우 3만 8천으로, 1597년
일본군 13만이 북상할 때 맞선 조선군은 황석 산성에 5백명과 남원성에 1천명
뿐이니... 권율등 경상도 조선군은 숨어버렸고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조선군은 달아났습니다.
명군은 남원성에서 3천명이 싸웠고 전주와 충주의 명군은 달아났으며 4만 일본군이 천안을 지나 북상하자
조선군이 모두 도주한 가운데..... 명군은 해생 2천과 파새 2천 기마부대를 보내 음력 9월 7일
직산에서 구로다군 1만과 싸우다가 후방에서 모리군 3만이 나타나 포위에 들어가자 수원으로 후퇴했습니다.
일본군은 정유재란때 하3도를 얻기위한 장기전으로 전략을 바꾸니, 울산 에서 순천 까지 29개
왜성을 쌓은후 초여름에 경상, 충청과 전라도를 약탈하고 유린한후 늦가을에 철수해
안전하고 따뜻하며 보급 걱정없는 남해안 왜성에서 겨울을 나고 다음해 늦봄에는 재출진 합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때는 90% 가 서울로 올라온데 비해 정유재란은 14만 중에 불과 4만명만 천안까지 올라
왔으니 애초에 서울로 진격할 생각은 없었으며, 히데요시는 음력 10월 2일까지 남해안 왜성으로 철수를
완료하라고 한지라, 9월 7일 직산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주변을 사나흘간 약탈한후 9월 11일 철수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선입견과 편견 탓인지.... 닷새 후인 9월 16일 벌어진 명량해전 패배로 바다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지니 9월 11일 철수했다고 모순되는 말을 하는데.... 9월 16일 전투가
직산에 전해지자면 9월 말은 되어야 하는데 일본군은 명량해전이 일어나기도 전인 9월 11일 철수 입니다?
그리고 명량해전 대 승리로 조선 수군이 전라도 바다를 장악하니 안전해져 공세로 돌아섰다고
말하는데..... 9월 16일 명량해전이 끝난 오후 4시경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은
배를 돌리니..... “영화 명량“ 에서 보듯 당연히 백성들이 기다리는 우수영에 돌아와야 합니다.
수군은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채 급히 출진했고 물살이 거세게 회오리치는 험한 바다 명량에서
적군과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점심까지 굶었고 저녁시간 이니 우수영에 돌아와
돼지라도 잡아 따뜻한 밥에 탁배기라도 한잔 돌리고 녹초가 돼 탈진한 병사들을 쉬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난중일기에서 보듯 장군은 하늘의 도움으로 천행이었다며 위태롭다고 하시면서 탈진한 병사들을 독려
해서 노를 젓게해 우수영에 들러지도 않고 멀리 당사도로 가니 캄캄한 밤중인데, 병사들을 뭍에 상륙하는
것 조차 금지하고는.... 다음날 아침이 밝자 다시 노를 저어 어의도에 도착해서야 육지에 상륙해 "밥" 을 짓습니다.
조선군은 13척인데 비해 일본군은 아직 300척 가까이 남았으니 다음날 일부는 진도를 돌아오고 일부는
명량으로 와서 포위되면 전멸이라 생각하고는 황급히 후퇴하신 것인데.... 일본측 기록에는
16일 당일 저녁에 탐망선을 보내서 조선 수군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9월 17일 다시 명량으로 들어옵니다.
왜군은 우수영을 짓밟아 쑥대밭으로 만들고 조선인들을 살육하고 약탈하며 불을 지르니 전라도 바다는
처참한 아수라 지옥으로 바뀌었고.... 왜 수군은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서 한 패는 영산강으로
올라가고, 다른 패는 그 많은 섬들을 이잡듯이 뒤지며 북상하면서.....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살육합니다.
형조 좌랑 강항은 전라도에 고니시등 5만 6천 왜군이 들어오자 식솔 60명이 2척 배에 타고 영광 바다로
나갔다가, 명량해전 대승리 7일후인 9월 23일 이순신을 추격해 올라온 일본군 배에 나포돼 무안항
으로 끌려가 왜선 300척을 보게 되고 일본에 잡혀가 주자학을 전했으며 간양록을 써서 선조에게 올립니다.
명량해전에서 적선 32척을 부수고 수천명을 죽인데 비해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2명이고
‘영화 명량’ 에서 보는 육박전은 없었으니 조선군 배는 모두 멀쩡했는데... 일본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지만 조선군 대포는 700미터니, 300 미터 거리에서 포격하면 아군 피해가
전혀 없지만, 아마도 화약과 포탄이 소진된지라 더 이상 전투를 할수 없으니 후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군이 물러간 닷새 후에 장군은 금강 하구 군산 선유도를 출발해 우수영에 돌아온건 24일후인 10월
9일 인데.... 판옥선 13척에 협선 32척등 50척 대함대가 이틀을 기다려도 조선인은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자 무서우리만큼 적막한 광경에 수천명 조선 수군들은 낙담했으며, 비통한 마음이 드신
장군은 철수해 안편도로 가시는데... 영화 명량에서 장군을 응원한 조선인들은 모두 학살당한 것입니다?
이런 저런 옛 생각을 하는 사이에 오코시키 시숀 (御與來海岸) 에 석양이 되니.... 썰물이라
바다가 얕은지 물이 빠지면서 갯벌이 길게 드러난 광경을 구경하고는, 차량도
없으니 밤에 산길이 무서운데다가 1시간에 1대씩 있는 기차를 놓칠수 없어 그만 내려옵니다.
여기 구마모토현의 오코시키 해안은 아리아케해에서 조수가 심한 곳이라 썰물이 되면 바람과 파도에
의해 그려진 초승달 무늬가 나타나니..... 일본의 100개 석양, 100개 해변에
으뜸으로 간조 시간(조위 50cm 이하)이 일몰 전후 1시간 동안 겹치는 날은 절경의 날로 간주됩니다.
산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 오타에키 (綱田駅 강전역) 에 도착하니 현지인 할머니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지라 강고쿠진 (한국인) 이라고 대답하고는 몇마디를 주고 받으니,
할머니가 기차역의 문을 가리키며 설명하는데.... 일본어가 짧아 다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문에 'レトロ' 라고 쓰여 있으니 "레토로" 라면 영어의 retrorocket 을 줄여 쓴 말로 복고
(復古) 풍이나 복고조 또는 회고적을 뜻하니.... 지금은 인구가 줄어 기차역도 무인역
으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번성했으니 그 당시의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토로 라는 글자에서 생각나는게..... 옛날에 북규슈 고쿠라 (小倉) 동쪽에 모지코
(門司港 문사항) 에 여행을 갔을 때 시내 건물들이 19세기 유럽풍인 바로크 내지
로코코 풍으로 되어 있으며 스스로 자기들은 "레토로 도시" 라고 말하던게 떠오릅니다.
모지항 은 모지코 레토로 門司港 レトロ 라고 해서 간몬해협에 면해 1889 년에 개항
했다는데 구 모지 세관" 에, 러시아가 요동반도 대련에 세운 동청철도 건물의
복제품인 국제우호 도서관과 구 모지 미쓰이 쿠라부 俱樂部 Club 둥이 유명합니다.
미쓰이그룹에서 숙박 시설로 세운이래 사교 클럽으로 애용되었다는데 2층은 예전에 아인슈타인
부부가 숙소로 이용한 메모리얼 룸이 있으니 아인슈타인이 모지코를 방문했을때, 일본
어린이들의 합창 환영에 즐거워져..... 흥이 난 아인슈타인은 바이얼린 연주로 화답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1922년 10월 8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수에즈 운하와 인도양 그리고
말래카 해협을 돌아 대만을 지나 북상해 세토나이카이를 지나 11월 17일
일본 고베에 도착해 전국을 다니며 강연하고는 43일 만인 12월 29일 일본을 떠납니다.
일본에 도착하기전 배에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지만 일본 전국 강연을
마치느라 노르웨이 오슬로 수상식에 참가하지는 못했다는데, 일본은 흥분의
도가니로 달아올랐으며.... 소년들은 꿈을 키웠으니 훗날 일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유가와 히데키 등으로 그는 프린스턴으로 찾아가 아인슈타인을 직접 만났다던가요?
아인슈타인이 일본국에 순회강연을 다닌 1922년에 조선까지 방문했더라면 조선 소년들에게도
꿈을 심어 줄수도 있었을 것인데... 일본의 어린이들은 미래에 대한 포부를 세웠습니다.
금년에는 노벨 과학상을 한해에 2명이 수상했고 이게 벌써 6번째로, 과학상 수상자는
30명에 육박하며.... 일본인으로 미국등 국적이 바뀐 경우를 합치면 3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노벨 과학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일본은 1870년대에 서무문명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시작했는데 반해, 한국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한후 일본에서 6억불을 받아와 60% 로 포항제철과
울산 공업단지에 경부 고속도로와 소양강댐에 부두 항만시설을 만들었으니, 저 6억불은 60년간 인플레에
국민소득이 100$ 에서 36,000 $ 로 늘어 감이 안잡히지만.... 당시 "일본 외환 보유고의 3분지 1" 이었습니다.
포항제철은 한일협정의 계획에는 없었으니 와세다대학 출신 박태준이 도쿄로 건너가 스승에게 읍소해 그
인맥으로 일본 정계와 관계를 움직여 농업분야에 투입하기로 협정한 돈 1억불을 포항제철을 짓는데
쓰기로 전용한후,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이 일본의 공장 설비를 분해해서 가져와 포항에서 조립한후
한국인 노동자를 기술자로 훈련시키면서 첫 쇳물까지 뽑아주었으니 일본인 기술자들이 지은 공장 입니다.
그러고는 일본에서 받아 온 돈의 나머지 40% 로 석유와 철광석에 고급 석탄 갈탄과 나프타
그리고 고무와 나무 등 수많은 원자재를 수입해 경제개발을 시작해서 수출에
나선 이래 1970년대에야 기술 투자를 시작했으니 일본 보다 정확하게 "100년" 이 늦습니다.
두번째로는 일본인들은 기초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30 여년년이 걸리는데다가 성공 확률이
10% 도 되지 않지만.... 어리숙한건지 오토쿠 정신으로 매달려 평생을 비친후 설사 성공하지 못해
이룬 업적이 없고 돈을 벌지 못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과학자들은 영리한지라 저런 불확실한 연구에 평생을 바치는 어리숙한 사람들은 없으니,
선진국 과학자들이 기초 원리를 밝히면 3~4년 안에 성공 확률 70% 가 넘는 상업화 응용연구에 매달려
명예도 얻고 돈도 버는 손쉬운 길을 택하는지라,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는 일은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오다에키 (綱田駅 강전역) 에서는 IC 커드를 터치하는 기계가 없는지라 17시 27분
기차를 타면서 번호표를 뽑으니..... 우토시를 지나 18시 04분
구마모토 (熊本) 역에 도착해 나오면서 미리 뽑은 번호표 대로 660엔씩 요금을 냅니다.
그러고는 이코카 카드를 충전하려고 역 안에 기차표 발급 기계들을 살펴보나
간사이 지방에서는 많이 보이던 기계가 보이지 않는지라.....
역무원에게 이코카 카드를 충전하고 싶다고 말하니 콘비니로 가라고 말합니다.
콘비니 라면..... 24시간 영업하는 세븐일레븐이나 패밀미마트며 로손등 편의점을
말하는지라 역 안에 자리한 가게로 들어가서 점원에게 말하니
우릴 데리고 한쪽 귀퉁이로 가서 기계를 가르키기에 1인당 5천엔씩 충전을 합니다.
이코카 카드 ICOCA CARD 는 이코카 마크가 있는 기계에 카드를 올리면 화면에 현재 금액이 표시되고,
화면에 2번째 그림 (일곱 종류 정도 카드 그림) 을 터치한후 계속을 터치하면 금액 화면이 나오는데
그때 5천엔을 선택한후 돈을 넣고는 영수증 발급 버튼을 터치하면 영수증이 나오면서 충전이 된 것입니다.
편의점인 콘비니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은 삼각 김밥인 오니기리와 다양한 벤토(도시락)
에 샌드우치와 단팥빵인 안판에다가 스시와 오뎅에 소고기 덮밥인
규동, 소바와 팬테이크인 도리야키와 멜론빵 등..... 부담없이 즐길수 있는 것 들입니다.
그러고는 구마모토역 광장으로 나오니 전등으로 불빛이 엄청 휘황찬란한데..... 바로 어젯밤에 전철
카라시마초에 내려 사쿠라마치 터미널이 있는 광장에서 보았던 바로 그 "크리스마스 마켓" 입니다.
여기사 잠깐 주변을 둘러보면서 구경하고는 다시 전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섰는데... 줄이 무려
70미터가 넘는지라 갈등을 합니다. 이거 한전거장 전으로 걸어 가서 타는게 좋을 까?
아니면 전철이 아니라 버스를 타면 어떨까? 하고 망설이니 울 마눌이 그냥
기다리자네요? 잠시후 1량 짜리 전차가 와서 사람들을 일부 실어가고
5분 쯤 더 기다리니 2량 짜리 전철이 온지라 사람들이 거진 다 타는가 봅니다?
전차는 동쪽으로 9정거장 달려서는 드디어 스이도쵸역 水道町駅 에 서는지라 내려서는 토요코인
구마모토조 도오리초스지 로 들어가 기계에서 회원증을 스캔한 다음 몇가지
인적사항을 넣고 여권 2개를 스캔을 하니.... 자동으로 호실이 배정되어 카드 열쇠 2개가 나옵니다.
인근 슈퍼에서 도시락과 오니기리에 맥주를 사와서 방에서 먹고는 잠자리에 드는데 내일은 우토시에 가서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에 마눌과 딸에 사위등 가족들이 모두 "독실한 크리스찬" 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거성인 우토성을 구경한 후에 멀리 "기독교도들의 섬" 이라는 아마쿠사로 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