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본여행1

후시미3 - 여관 데라다야에서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작성자은혜|작성시간21.10.15|조회수970 목록 댓글 2

 

후시미 3 - 겟케이칸을 보고 여관 데라다야에서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를 떠올리다!

 

 

2019년 4월 9일 교토 키요미즈고조역에서 전철을 타고 주소지마역에 내려 우지센으로

우지(宇治) 에 도착해서는 10엔 짜리 동전에 나오는 뵤도인 平等院(평등원) 절을

보고 강변에 "윤동주 시비" 에 참배한후 우지가미진자 宇治上神社(우지상신사) 

기차역 근처에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 源氏物語 博物館 (원씨물어박물관) 을 구경 합니다.

 

 

 우지역 에서 케이한 전철을 타고 주소지마 中書島 역에 내려 걸어서 마을을 통과해 벚꽃이

만발한 강변 에서 사케 를 실어나르던 옛스런 나룻배 를 구경하고는 걸어서 사케의

명가 겟게이칸 (月桂冠 월계관) 을 찾아 구경한 후에 사케 석잔 을 받아 마시고는

나와 옆 골목에 쓰키노쿠라 (月の藏) 에 가니 오후 3시 점심시간이 지나 문을 닫았습니다.

 

 

저녁이 되면 다시 문을 열리라 보지만 지금은 별수 없는지라 쓰키노쿠라 (月の藏) 를

나와 골목길을 걸어서 산짓코쿠부네 선착장 三十石舟 船着場 옆에 오늘날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1위 인물인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판본용마) 가

1867년에 자객에게 칼을 맞았다는 데라다야 寺田屋(사전옥) 라는 여관 을 찾아갑니다.

  

 

400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200년 된 오래전 옛건물 이라 낡고 비좁은데 좁고 가파른

계단 을 올라 2층에 가니 방이 여러개인데, 사진이며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주로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관련 자료들로 료마는 일본의 국민 작가로 국민훈장 을 받은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郞) 가 1962년에 쓴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 로 유명해 졌습니다.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郞)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다룬 20권짜리 대하 역사소설 "대망"

작가이자 러일전쟁을 다룬 "언덕위의 구름" 으로도 유명하지만 우리 한국인에게는

그가 1963년에 사쓰마야끼의 조선 도공 14대 심수관 (沈壽官) 과 조상의 일대기를 다룬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故鄕忘じがたく候)" 라는 소설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가 입니다!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 는 피랍 조선인의 망향이 장소 기억 으로 나타나는데.... 일본속

조선인으로 고난과 극복의 무대 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단순한 혈연적 기원지 또는

망향과 향수의 대상을 넘어, 도예가 정체성이 발원 및 형성된 장소와 경관 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한국에 대한 망향 과 사쓰마 도예가로서의 정체성의 재현 이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데라다야 사건 (寺田屋事件) 이라고 하면 도쿠가와 에도막부 시대 말기에

야마시로국 기이군 후시미(교토 후시미구) 의 데라다야 여관 에서 발생한

사건을 말하니 하나가 아닌 모두 두 가지 사건 을  ‘데라다야 사건’  으로 부릅니다.

 

 

첫번째는 1862년에 발생한 사쓰마번의 존왕양이파 지사의 진압 사건이니 5월 21일

사쓰마 존왕양이파 들이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이자 사실상 지도자

였던 시마즈 히사미쓰 에 의해 진압된 사건으로  ‘데라다야 소동’  이라고도 합니다.

  

 

1600년 동서 20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전투 에서 승리해 일본의 주인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에도 막부 를 세우고 일본을 260개 번 으로 나누어 통치하는데

"각 번은 사실상 자치 독립국" 이니 백성들에게 세금 을 거두어 가신과 무사들에게

녹봉 을 지급하고 법정을 설치해 재판 하며 군대를 기르고 국경을 설치해 관세 를 거둡니다.

 

 

그런데 1854년에 미국 페리 제독이 증기선 군함 7척 을 이끌고 일본 도쿄만에 나타나

도쿄를 불바다 로 만들겠다며 개항하라고 위협하니 작은 범선 밖에 없던 막부는

굴복해 요코하마와 하코다테를 개항 하자 전국의 무사들은 서양 오랑캐에게

굴복해 일본의 혼 을 더렵혔다며, 이 치욕을 씾자면서 막부 타도 운동 에 나섭니다.

 

 

 이른바 '천황(일왕)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 를 물치치자' 는  “ 尊王攘夷(존왕양이)”

론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자 에도 막부는 전국에서 15만 대군을

출해 그 중심지인 조슈번(야마구치현)을 토벌 하는등 진압에 안간힘 을 씁니다.

 

 

조슈번(야마구치현) 과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은 260개 번 중에 하나 이지만 사실상

자치 독립국 이니 서양 함선에 포격 을 하는데.... 사쓰마번은 영국 함대 와

그리고 조슈번은 영국, 미국, 프랑스 및 네델란드 4개국 함대와 전쟁 을

치르기도 했으며, 조슈번 지사들은 교토로 진출해 조정을 장악 하려고 시도 합니다. 

 

 

사쓰마의 전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 는 온건파 로 교토에서 조슈번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1,000명이 넘는 번병 을 이끌고 상경하는데 물정 모르는 존왕파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히사미쓰는 당시 막부를 타도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조정과

에도 막부 그리고 몇몇 제번 이 함께 일본을 다스린다는 공무합체 가 그 노선이었습니다.

 

 

 히사미쓰 는 교토에서 사쓰마번의 존왕양이 과격파 인 사이고 다카모리등을 체포 해서

오사카를 통해 사쓰마번으로 귀국 시키자 사쓰마번 지사들은 다른 번 지사들 

연합해 여기 데라다야 여관 에 모여 조정의 간파쿠(관백) 구로 히사타다 

막부에서 교토에 파견한 교토소시대 사카이 다다아키를 습격해 죽일 모의 를 합니다.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이를 기정사실화 해서는 번주 시미즈 히사미쓰에게 청원 

에도 막부 타도운동 을 일으키려고 한 것인데, 이를 접한 히사미쓰는 측근을 보내

설득했으나 실패하자 23일 밤에 측근으로 무술 실력이 뛰어난 오쿠보 이치로 등

9명을 파견하니 이 여관에서 설득에 실패하고 서로 칼싸움을 벌여서 진압된 사건 입니다.

 

 

에도 막부 는 15만대군을 동원해 존왕양이파의 중심 조슈번을 공격해 장악 하자 다카스키

신사쿠 와 이토 히로부미 등은 80명으로 거병해 시모노세키 장악후 200명으로 불어난

반란군은 4천명 조슈번병을 격파 하니, 막부는 다시 10만 대군을 동원해 5방면 으로

공격하자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화해 시키고 영국제 신무기 를 구입하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료마의 분전으로 막부군을 물리치고 다음해 메이지유신 이 성공합니다. 

 

 

두 번째는 1866년(게이오 2년) 발생한 에도 막부의 후시미 봉행 에 의한 사카모토 료마

습격 사건 이니 료마는 교토에 오면 항상 여기 데라다야에 묵었으니 자기 집 이라

생각했다는데 여주인 오토세는 어머니 같고 여종업원 오료 와는 한때 사랑 하기도 합니다.

 

 

에도 막부에 대항 하기 위해서는 교토에서 서로 세력을 넓하려고 군사 충돌까지 해서

원수지간이 된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화해 시키야 했으니 이 견원지간인 두 번에

대해 사카모토 료마 는 조슈번에 기도 다카요시와 가쓰라 고고로 그리고 사쓰마번에

사이고 다카모리 를 설득해 삿초동맹을 성사 시키고는 마음이 풀려 기분좋게 한잔 합니다.

 

 

그러고는 호위 무사인 미요시 신조와 얘기를 나누다가 여기 데라다야(寺田屋) 2층에서

늦게 잠들었는데.... 새벽 3시경에 여종업원 오료가 1층에서 목욕 을 하다가

막부측 후시미 봉행이 동원한 백여명의 무사 들이 여관을 둘러싸는 낌새를 눈치 챕니다.

 

오료는 처녀의 몸 임에도 불구하고 옷도 입지 못한채 알몸 으로 2층에 누워 자는

사카모토 료마 에게 알리는데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워낙 좁은지라

무사들이 한명씩 밖에 올라오지 못하니..... 료마는 권총 으로 쏘고

미요시 신조는 위에서 긴 창으로 찌르니 막부측은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전투가 계속되는 중에 료마는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흘러 미끄러우니 권총 재장전이 어렵게

되자 뒤쪽 목욕탕쪽으로 내려와 뒷문으로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구했는데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 “ 이 여자(오료)가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해인 1867년 12월 10일 오미야 사건(近江屋事件)이 일어나니.... 사카모토

료마 는 시코쿠섬의 도사 번주에게 청원 해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막부가 통치권을

조정(천황, 일왕)에 되돌려 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을 1867년 10월 14일에 성사시킵니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막부파 가 12월 10일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 가 교토시

가와라 마을(河原町) 오미야(近江屋) 이구치 신스케(井口新助) 저택 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습격해서 암살 당하니... 교토 미마와리구미의 소행 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료마는 여태까지 숙소로 하던 교토 후시미의 데라다야(寺田屋) 가 막부에 찍혔기 때문에,

11월 3일에 오미야로 옮겼는데 11월 13일, 이토 가시타로 가 찾아와 신센구미 가

노리고 있으니 도사번 저택에 옮기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료마는 오미야에 머무릅니다.

  

 

11월 15일, 저녁 무렵에 나가오카가 오미야를 방문해 산조 제찰 사건에 대해 이야기

를 나누는데 밤이 되어 손님이 오미야를 방문  토쓰카와 고시 (十津川鄕士)

라고 신분을 말하고 료마를 만나고 싶다고 하니 씨름꾼이었던 야마다 도키치

(山田藤吉) 는 손님을 료마에게 만나게 하려고 하였지만..... 뒤에서 베이고 맙니다.

  

  

이 때 “으악!! (ぎゃあ!!)”하고 큰소리를 낸 야마다 에게 료마는 “ほたえな!

도사 사투리로 ‘떠들지 말라’ 라는 의미)”라고 말해 결과적으로

자객에게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게 되니 자객은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장지문을 열고 방에 침입하여 료마의 이마를 벱니다.

  

 

 료마는 몽롱한 의식 중에도 나카오카의 정체가 들킬 것을 염려 하여 나카오카를 “이시카와,

 칼은 없는가.” 라고 가명 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후 료마는 흉부등 여러군데를 베여

사망 했고 나카오카는 살아남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2일후 구토가 일어난 뒤 사망 했습니다.

 

 

자객이 "이런 니미(こなくそ)!" 라고 에히메현 이요 사투리 로 이야기한 점에서 신센구미

의 하라다 사노스케나 오이시 구와지로 의 짓이라고 알려지는 바람에 오이시는

료마 암살죄로 살해 당했으며 이후 1868년의 보신전쟁(무진전쟁) 내란 이 일어나자

조슈번과 사쓰마번 이 주축인 신정부군 은 신센구미에 대한 철저한 숙청 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암살자 측에 대해 다른 설 도 있으니 신센구미 말고도 이마이 노부오 설 

그리고 같은 편인 사쓰마번 무사들이 암살 했다는 설과 또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 미부기시덴(壬生義士傳)" 같은 여러 다양한 해석도 있다고 합니다.

 

 

이후 다이쇼 시대에 전 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 는 와타나베 아쓰시에게 한

구술로 사사키 다다사부로등이 실행범 이라고 증언하고 있으며 또한 해군 사령관 가쓰

가이슈는 막부 상층부 지시 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현대에는 미마와리구미설 이 통설입니다.

 

 

미마와리구미 (見廻組 견회조)는 에도 말기에 교토 치안유지 조직 이니 1864년 아이즈번

마츠다이라 야스마사 가 에도 막부에 의해 교토 수호직 에 임명된 후 부하들을

사가미슈구미(相模守組) 와 이즈모슈구미(出雲守組) 라고 각 200여명씩의 병사를

편제해 지휘했는데 대장(隊長)인 여두는 하타모토 였고 대원들은 고케닌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이나 와타나베의 구술 에 자객의 인원구성과 현장에 두고 간 칼집의 소유자 등

어긋나는 부분 이 있어 작가를 중심으로 여러가지 이설이 나오는데 현장에 달려가서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병한 다니 다테키 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마와리구미의 이마이 노부오 는 증언 당시는 자신이 망보기 역할이었을 뿐이라 했으나,

장년~노년에 이르러서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료마를 죽였다고 말하며 그때

썼다는 무기(칼, 창) 를 보여주며 당시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료마 암살 당시 현장에 남아있던 칼집 등 물증 이나 3일후에 암살된 이토 가시타로의

동지등의 증언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 라고 믿어졌지만 베인 상처로

보면 왼손잡이의 특징 이니 왼손잡이에다가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달인인

검객 료마 를 살해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사이토 하지메 라는 설도 있습니다.

 

 

사건후 막부에서 조사를 받은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 는 '우리는 프로다. 만약

우리가 했다면 나카오카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 나카오카 신타로는

이틀간 생존해 사건을 증언함)' 라며 부정하였으며 오이시 쿠와지로 도

이 사건만큼은 부정했으니.... 그는 신센구미 내부에서도 손꼽는 검객이었습니다.

 

 

료마가 속한 도사번 지사들이 신센구미 설 을 믿고 있었던 당시에는 오이시에게 무수한

고문 을 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오이시가 억지로 인정을 한 적이 있지만... 이내

부정하면서 '사건 이후 곤도 국장이 미마와리구미의 이마이, 와타나베 가 료마씨를

해치운 것은 회자될 만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을 들었을 뿐' 이라며 일축했습니다.

 

 

신센구미의 곤도와 오이시 둘 다 료마 암살 혐의 때문에 참수 되었지만 이는 도사번

지사들의 복수심에 가까운 맹렬한 주장 에 의한 것으로 실질적인 증거 없이

억지로 몰아 붙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는데.... 료마는 이름난 지사(무사) 였으니 막부

순찰대가 그를 해치운 것은 큰 공로이므로 자랑을 하면했지 숨길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대정봉환 (大政奉還) 이후 료마는 에도 막부에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포함한 제후 회의에 의한 신정부 설립 에 기울어지니

무력 도막 을 지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료마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 없었고... 고의로 막부 측에 료마의 소재지를 누설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쇼군 요시노부의 처우 를 둘러싸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료마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는 것은

확실한데 무력 도막파에 의한 대정봉환파의 암살설 은, 사사키 다몬의 서한이나

오미야 종업원들의 증언등의 자료를 근거로 두고 있지만.... 이 설은 대정봉환

노선과 무력 도막노선의 대립 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강조하고 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나라 | 작성시간 21.10.19 데라다야여관에서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1위 인물인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에 대하여 잘 알앗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은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22 그렇지요? 풍운아..... 사카모토 료미!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