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4 - 칭다오에 차 없는 중산로 거리를 걸어 구경하고 늦은 점심을!
2025년 9월 6일 산둥성의 칭다오 Qingdao 공항 (靑岛 胶东机场) 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타고
5.4 광장역 五四廣場站 에 도착해 칭다오 푸신 대하 (青岛 府新大厦) 호텔에 체크인
후에 택시를 불러 타고는 칭다오 맥주박물관 ( Qingdao bear museum) 에 도착해 입장합니다.
A 관에서 맥주와 칭다오 맥주의 역사를 본후 B 관에서 공장을 견학하고 맥주 2잔을 얻어 마신 후에는 나와
택시를 타고 하이디라오 중산로점: 海底捞火锅 (中山路天主教堂店) 에 가자고 말하며 인쇄해온
종이 쪽지를 보여주는데, 정작 내리고 보니 여긴 음식점이 아니고 독일인들이 만든 교회 미카엘 성당입니다.
독일인들이 만든 오래된 교회를 보면서 독일 맥주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는데..... 독일 맥주의 역사는
1,000년을 거슬러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시작되었으며 1516년 바이에른 공국에서
제정된 맥주 순수령 (Reinheitsgebot) 은 맥주를 물, 맥아, 홉, 효모만으로 제조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칭다오 맥주박물관 (青岛啤酒博物馆) 은 칭다오 맥주 최초 공장으로 칭다오시 시베이구에 칭다오 지하철
2호선 리진루역 인근에, 중국 최초의 맥주 공장인 칭다오 1공장 (青岛啤酒厂) 도 옆에 있는데....
100년전 주조 설비를 보존해 전시하며, 관람객에게 맥주 한 잔과 땅콩 같은 간단한 안주 거리를 제공합니다.
교회를 구경하고는 천천히 걸어 내려 와서는 차 없는 거리인 중산로를 구경하는데..... 중국의 도시에는 어느 도시
를 가던 중심부에는 반드시 중산로 (中山路) 가 있고 보통은 차 없는 거리로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 듭니다.
중산(中山) 은 국부 손문을 말하니 청나라 말기 정치 사상가이자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
중화민국의 국부(國父) 로 진나라의 시황제 이래 2,000년 이상 이어져 오던 중화제국과 전제
군주제를 무너뜨린 혁명가로 중화민국(대만) 과 중국(공산당) 양쪽에서 존경받고 있는 인물 입니다.
손문의 호가 중산 (中山) 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호(號) 는 일선 (逸仙) 이고 별명은
중산 (中山) 으로 일본에 있을 때 사용한 가명인 나카야마(中山) 에서 유래
했다는데.... 하지만 정확한 가명은 中山樵. 독음은 나카야마 키코리(なかやま きこり) 랍니다.
그런데 중국의 혁명가 손문이 왜 일본에 갔느냐......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밀리자
청나라 체제는 가망이 없다고 보고 혁명을 꿈꾸며 하와이로 건너가 홍중회를
설립한후 귀국해 광저우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해 일본으로 도주한 것입니다.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청나라 영사고나에 체포됐다가 풀려난후 1900년 2만명으로 후이저우 봉기를
일으켰으나 믿었던 일본 (대만 총독부) 의 무기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패한후 도쿄로
건너가 1905년 7월 흥중회와 다른 단체를 합친 중국동맹회를 창설 하면서 삼민주의를 역설합니다.
1907년 청나라 정부의 거센 압박에 굴복한 일본은 손문을 추방하면서 미안했던지 정부와 민간이 합쳐
1만 5천엔 이라는 거금을 주는데.... 당시 인도와 버마, 베트남과 필리핀에 말레이와 인도네시아
등의 독립운동가들은 식민지 경찰의 체포를 피해 일본에 망명해서 독립투쟁을 하는게 유행이었습니다.
중남미 20국과 아시아 40국에 아프리카 40국등 100개 국가는 대부분이 유럽의 식민지 였으니 중남미는 독립국이
없었고 남아프리카는 백인 네데란드인이 세웠고 라이베리아는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돌아온 땅이며
이집트는 영국의 반식민지였고 이디오피아 왕국만이 독립국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반신불수 상태였습니다.
아시아 40국 중에 대부분이 다 식민지이고 중국과 태국은 반(半) 식민지이며... 온전한 독립국은 일본 단 한 나라뿐
이었으니 100개 국가 중에 유일한 자주 독립국이라는 얘기인데, 거기다가 일본은 서구문명을 도입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로 변신해 유럽과 맞먹는 군사대국이었으니 중국과 동남아인들은 일본 처럼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여기 중산로 (中山路) 는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번화가로 독일식 건축물과 쇼핑에 맛집
탐방을 즐길수 있는 거리이니 특히 독일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들을
보노라면 풍취가 있어 보이며 또한 레트로 감성이 가득한 골목을 걷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이 거리에는 칭다오 대표 먹거리라는 해산물 요리와 길거리 음식에다가 기념품 쇼핑까지 즐길
수 있는데.... 칭다오 맥주에 건어물과 중국 전통차 등 다양한 특산품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칭다오 青岛 (청도) 는 19세기 말 현재 칭다오 스난구 서쪽 끄트머리 내주부 교주 즉묵현의 평범한
어촌 청도진으로, 만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청도(샤오칭다오)로 부터 이름을 따 왔습니다.
자오저우만 일대는 항구 만들기 딱 좋은 위치로, 춘추전국시대 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항구 도시가 번성하였으나,
대체로 만 안쪽인 교주(자오저우시), 즉묵(지모구) 등이 번성 했고 만 밖에 있는 청도진은 번성하지 못하였다.
전한시대 부터 남북조시대 칭다오 시가지(자오저우만 동안) 일대는 불기현(不其县) 으로
불렸으며, 고대 부터 영산으로 숭배대상이 된 라오산을 끼고 있어 이름은 있었으나
주변 대도시인 낭야(황다오구 랑야진 일대) 나 즉묵(即墨, 지모) 에 비해 지명도가 밀렸다.
수나라 때부터 핑두시 쪽에 있었던 즉묵현과 불기현이 합쳐지고 치소가 지모구청에 설치
되면서 칭다오만 일대도 즉묵에 속하게 되었다. 부산과 동래의 경우와
비슷하게 칭다오가 넘사벽으로 커졌고 즉묵은 칭다오의 현급 도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세기말 청도진이 위치한 자오저우만 (胶州湾, 교주만) 어귀가 독일 제국에게 할양되어
해군 기지 키아우초우가 되었는데......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100년간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조계지가 설치되었으니 칭다오는 키아우초우의 중심지였다.
유럽의 독일은 이탈리아 처럼 통일이 늦은 관계로 헤외에 진출할 수가 없었는데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프랑스와 보불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수십개로 갈라져 있던 여러 왕국과 공국을 흡수해 독일 제국으로 통일한게 19세기 말입니다.
눈을 뜨고 해외를 둘러 보니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네델란드와 영국 및 프랑스에 벨기에와
미국이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아시아를 모두 차지한 터라 남은 땅이
별로 없으니 독일은 아프리카 동부 탄자니아를 확보하고는 태평양에 몇 개 섬을 점거합니다.
그러고는 서양 열강이 찢어서 나누어 먹은 반 식민지 중국을 자세하 탐험해 보니
산둥 반도는 별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여긴 듯 서양 열강들이 관심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독일은 더욱 열심히 탐사해 이곳에 석탄이 풍부한걸 발견합니다.
독일 함대가 멀리 아시아로 오면 가장 필요한게 배에서 사용하는 석타ᅟᅵᆫ을 공급할 기지이니 산동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에 독일 선교사 2명이 강압적으로 전도하다가 반감을 사서 현지인
에게 피살되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으니 이것을 핑계 삼아 군대를 상륙시켜 칭다오 일대를 차지한 것입니다.
의화단 사건의 와중에 1897년 11월 조주부(曹州府) 거야현(鉅野縣) 에서 독일 선교사
2명이 살해되는 '거야교안' (鉅野敎案) 이 일어났다. 조언학(曹言學)의 대도회
무리들이 마반장 (磨盤張) 의 독일 천주교 성당으로 들어가 선교사를 살해한 것입니다.
이후 제녕(濟寧), 수장(壽張), 성무(成武), 단현(單縣) 등지에서도 대도회와 민중이 호응하여 반기독교의
공기가 흉흉하였는데 독일은 좋은 기회로 산둥성 교주만(膠州灣)을 세력 범위로 삼았고 독일
공사 헤이킹(Herr von Heyking) 은 산둥성 순무 이병형을 파직, '영구히 임용하지 못하도록' 요구합니다.
1차 세계대전중 독일이 신경쓰지 못하는 틈에 연합군에 군수물자를 팔며 이득을 보던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 가담, 제국군을 진군시켜 이곳을 점령했으며
1927년 1차 산동파병과 1928년 2차 산동파병 등 일제의 중국 침략 기지로 활용됩니다.
더 내려가면 잔차오 棧橋 (잔교) 인데 칭다오만에 돌출한 길이 440m 다리로 청나라 광서(1891년) 연간에
세운 것으로 발해만 건너 뤼순에서 군사 물자를 이 도시에 공급하기 위해 배를 대기 위해 세웠다고 합니다.
2층 전망대 후이란거 回瀾閣 (회란각) 에 올라 바라 보는 칭다오 시내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기차 칭다오짠 青岛站(청도역) 이나 지하철 1.3 호선 청도역에서 도보
10분거리로 중산로 에서 이어지는데 버스는 2번, 5번, 6번을 타고 잔교(栈桥) 정류소에 내립니다.
잔교(栈桥) 는 칭다오 맥주 병 라벨에 그려진 명소로 칭다오 랜드마크이니 잔교를 따라 걷다 보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해 질 무렵 방문하면
환상적인 노을과 함께 인생 샷을 남길 수 있으며 해안 갯벌에는 조개를 캐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중산로로 돌아오는데... 원래 계획으로는 훠거 맛집인 하이디라오 중산로점
海底捞火锅 (中山路天主教堂店) 에 들어가 식사를 하는 것이었으니 주문은
테이블에서 태블릿으로 하며 소스바도 하이디라오의 핵심으로 기름장과 마장이 유명합니다.
얼얼한 마라탕, 버섯탕, 토마토탕, 두부탕 네가지 맛을 즐길수 있는데... 홍탕은 마라 국물에 살짝 익힌 소고기를
백탕 버섯탕이나 두부탕에 익힌 야채에 돌돌말아서 같이 먹으면 마라의 얼얼함도 잡아주면서 감칠맛이 좋고
토핑은 새우완자가 새우살이 톡톡 터지는게 훌륭하며 소고기도 추가하면 1인당 140위안(28,000 원) 정도랍니다.
하지만 사위가 구글앱을 켜도 얼른 찾아지지 않고 행인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는지라.... 중국에서는 구글지도가 정확하지 않고 현지 지도 앱인
고덕지도를 휴대폰에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해서 눈에 보이는 음식점으로 들어가기로 하는데 처음엔 해물을 파는 노청도채관으로 들어
가려다가..... 좀 더 인테리어가 좋은 그 위쪽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 갑니다.
여긴 널찍한데다가 있어 보이는 고급 식당같은 분위기인데 우리는 전복이 들어간 해산물과 작은 새우에
족발을 시켰더니..... 냉장고서 꺼내 온 것인지 음식이 모두 찬 것이라 이건 실패입니다?
사위는 특히 생맥주를 좋아하는지라 칭다오 2병 중에 한병을 들고 가더니 생맥주 2잔으로 바꾸어 옵니다.
그러고는 식당을 나와 이제 명월산해간 불야성( 明月山海間 不夜城)을 보기 위해 지하철 칭다오역으로
가서는 1호선을 타고 칭다오북역에 내려 다시 8호선을 갈아타고는 홍도역 으로 가는
중에 미국과 조세 전쟁에서 일본과 한국은 타결했지만 아직 협상을 타결하지 못한 중국을 생각합니다.
옛날에 일본 여행을 다녀오던 부인들이 김포 공항에서 모두 꼬끼리 밥통 하나씩 들고 내리던 풍경이 격세지감
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제 한국의 1인당 GDP 는 일본을 거의 따라 잡았고... 반도체와 바테리에 조선업은
추월했으며 또 한류 까지 전세계를 휩쓸고 있으니 우린 "일본을 넘어선 것" 으로 생각되어 뿌듯한 마음 입니다?
일본은 미국에 5,500만$ 를 투자하기로 하고 25% 관세율을 15% 로 줄이는 관세협정을 종결지었는데
투자 내용은 미국이 정하며 이때 45일 내에 현금을 주어야 하고 투자금 회수 까지는 이익을 50%씩
나누고 원금 회수후 이익 90% 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타결을 못했으니 걱정이 큽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가 일본의 "40%" 이니 투자금은 2,200만$이 되어야 한다고 하자 미국은 한국은
미국에 대한 무역 흑자가 일본의 90% 에 달하니 5,000억$ 를 투자해야 한다며 맞서다가.... 결국
중국 해군에 맞설 미국 조선업 부활에 1,500억$ 를 포함해 중간인 3,500억$ 를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은 경제 규모가 한국의 2.5배 인데다가 외환 보유고는 한국의 3배에 달하니 5,500억$는 일본 외환보유고의
40% 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투자할 3,500억$ 는 우리 "외환보유고의 84%" 에 달하니, 저 돈을 달러로 미국에
주면 한국은 외환 보유고기 15% 로 떨어지니.... 제2 IMF 사태로 국가부도가 날 판이니 타결을 못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외환 보유고 40% 만 미국에 주면 되는데다가 일본돈 엔화는 “준기축통화” 이니, 달러가 소진되면 종이
와 잉크로 엔화를 찍어내서 주면 외환위기를 벗어날 수 있고.... 또 미국과 “통화 스와프” 가 무제한으로
체결돼 있으니 급하면 엔화를 찍어 미국에 주고 달러로 교환하면 간단히 수습이 되니 걱정할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 원화는 달러나 엔화와 달리 국제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국내 화폐에 불과하니 원화를 받을 국가가 없는
데다가 미국과 통화스와프도 없는데, 미국도 경제가 어려워 달러 가치가 폭락하면 스와프를 통해 일본돈을
가져오면 수습되지만 한국돈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지 않으니 가져와도 쓸모가 없어 미국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간 유럽 각국과 일본의 상품은 미국에 수출할 때 2.5% 관세를 물었지만 한국은 한미 FTA 덕분에
"관세 0%" 로 수출했으니 유리했었는데, 이제 일본은 12.5% 가 늘어난 15% 관세 물면 되지만
우리나라는 0% 에서 무려 25% 나 늘어난 관세를 물어야 하니 이제 미국에 수출은 중단될수 밖에....
노무현 대통령이 FTA 를 맺을려고 하자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이 반대했고 협정이 맺어지자 노대통령의 지지율은
"10%" 로 곤두박질 쳤으니 대통령은 쓸쓸하게 물러났으며....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산 쌀과
소고기에 과일이 들어와 농민과 축산가에 피해를 준다며 한미 FTA 에 대해 증오심을 갖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13년간 관세 0% 에 미국 수출로 엄청난 흑자를 보았음에도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운게 망국적 한미 FTA 라고
불평을 계속해 왔는데.... 이제 원한에 맺힌 FTA 가 없어졌으니 저들의 "소원" 이 이루어진지라 서울에서
거국적 환영대회를 열고 트럼프에 감사해야 할 것인데, 모두들 입도 뻥긋 안하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