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행14 - 천불산에서 대명호 호수에 도착해 유람선을 타고 구경하다!
2025년 9월 9일 산동성의 성도 지난(제남) 에서 산동박물관 山東 博物館을 구경하고는 도로변에서 택시
를 세워서 타고는 20분 남짓 달려서 천불산에 내리는데.... 사람들은 계단길을 걸어 언덕을 올라갑니다.
천불산 (千佛山) 의 본래 명칭은 ‘리산(历山)’ 이라는데 이 산에 천불사라는 절이 있고, 불교 신자
들이 암벽에 수많은 석불을 새겼으니 물경 천개의 불상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단이 아닌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올라 7부 능선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제남시를 조명
하고는 내려와 택시 기사에게 “따밍후! ” 라고 외치고는 “大明湖” 라고 적힌 종이를 보여 줍니다.
그러자 기사는 대뜸 “난먼” 이라고 말하기에 “하오! 난먼” 이러고 대답하는데..... 대명호는
엄청 큰 호수로 북문과 남문이 있으니 여기는 호수에서 훨씬 남쪽이니
남문이 가까운 데다가 또 남문을 나오면 곡수정가 거리도 볼수 있는지라 그리 말한 것입니다.
택시는 30분 가까이 달려서 오래된 옛 주택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드디어 대명호 남문에
도착하기로 20위안을 주고 내려서 호수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로 인산인해 입니다!
호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 앉거나 또는 천천히 거닐면서
나들이라도 나온 듯 오후 한때를 증기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스럽습니다.
그러고는 호수를 일주하는 유라선을 타기로 하는데.... 선착장으로 가니 우리 앞에 부부가 아이와 함께 의자에
앉아 배를 기다리고 있으니 조그만 아이는 장난에 여념이 없고 누나는 곱게 옛 명나라풍 옷을 입었습니다.
1인당 50위안 (1만원) 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내고는 배에 오르는데.... 이 배는
스무명 정도가 정원으로 마지막에 탄 두 처녀는 서서 가려나
했더니 좌석이 하나 밖에 없는걸 보고는 미련없이 내리는데 다음 배를 타려나 봅니다.
그러고는 한 사람이 더 타기를 기다려서 결국 만석인 배는 드디어 출발하는데
처음에는 그냥 호수를 한바퀴 도는 밋밋한 일주를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중국인들은 호수 위에 정자를 지어면 육지에서 다리를 놓아도 절대로 일직선
으로 놓는 법은 없고..... 반드시 아홉 구비를 꺽어지는 구곡교를 놓습니다,
여기 호수에도 도중에 섬이 있고 그 위를 다리가 가로 지르며 또 호수가도 그냥 일직선이
아니라 이리 저리 구부러 지니...... 배가 다리 아래로 지난는게 변화가 많습니다.
더우기 호수 주변에도 정자라든지 벤치 같은게 많이 있는지라 수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서 우리 배를 바라보는데..... 서로 사진을 찍으니 누가 원숭이 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제남) 시내 북쪽에 자리한 다밍후 大明湖 (대명호) 는 주소가 역하구 대명호수로
271호 인데....... 일찌기 6세기경 부터 알려져 있던 오래된 관광지라고 합니다.
6세기 라면..... 그럼 당나라 시절인데, 제남시 중심부에서 약간 북동쪽에 위치하여 옛날부터 제남 마을에
정취를 더했으니, 천연 호수로 밑 바닥에 여러개의 샘이 합쳐져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다밍후 大明湖 (대명호) 는 어제 우리가 본 촉돌천에다가 조금 전에 다녀온
천불산과 함께 제남 3대 명승으로 알려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답니다.
다밍후 (대명호) 짙은 녹색의 호수변에는 '역하정' 을 비롯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물가의 풍경은 중국다운 우아함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호수 주변에는 유명한 시인의 명시구를 새긴 비석이 많이 있고 또 호수는 '천성' 이라고도
불리며....... 물 좋은 풍경이 오래토록 사랑 받았던 제남의 대명호는 제남 관광의 으뜸 이랍니다.
번화한 도심에서 보기드문 천연 호수로, 항저우의 시호 만큼 매력이 있으니 호수 삼면을 에워싼
버드나무들이 싹을 틔운 봄, 그리고 호수에 연꽃이 만발한 여름에 지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변신하며 총면적 860,000㎡ 중에 호수가 절반이 넘는 460,000㎡ 를 차지합니다
배에 앉아서 다밍후 (대명호) 호수를 구경하다가 문득 이준식 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수' 칼럼에 쓴 "행운을 안긴 시"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대갓집 자제들 앞다퉈 그대 뒤꽁무니 쫓았지만
미녀 녹주(綠珠)가 그랬듯 그댄 그저 비단 수건에 눈물만 떨구었지.
귀족 집안에 들어갔으니 거긴 바다처럼 깊은 곳.
그로부터 이 몸은 완전 남이 돼버렸지.
(公子王孫逐後塵, 綠珠垂淚滴羅巾. 侯門一入深如海, 從此蕭郞是路人.)
―‘떠나버린 여종에게 (증거비· 贈去婢)’ 최교 (崔郊· 당대 중엽)
미녀를 놓친 한 사내의 체념 어린 넋두리인 듯하지만 사연은 단순치 않다. 귀족 자제들이
반했다는 이 미녀는 원래 시인의 고모 집 여종이었고 둘은 한때 연인 사이기도 했다.
여종이 양주사마 (襄州司馬) 우적 (于頔) 의 집안 팔려가면서 둘은 서로 남남이 되고 말았다.
이게 시에 나타난 사연의 전모다. 한데 이 시에 뒷얘기가 따른다. 심해처럼 깊숙한 곳에서
눈물만 떨구던 미녀를 우연히 재회하게 되자... 시인은 그간의 응어리를 이렇게 시로 풀어냈다.
뜻밖의 반전. 시를 접한 우적이 둘의 사연을 듣고는 미녀를 방면했고 혼인까지 주선해 준다.
시 한 수로 사랑을 되찾았다는 이 일화는 범터 (范攄) 의 ‘운계우의 (雲溪友議)’
에 수록돼 있다. 소설집이라 호사가의 취향에 맞춰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노비가 해방되어 양민이 되고 사대부와 결혼했으니 천지개벽이라 할만한데 사실 중국에서는 송나라
시대 부터 인륜에 반하는 노비제도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유럽 로마에서도 주인이
온정을 베풀어 노예를 해방시켜 주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해방 노예의 자식으로 로마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통일한후.....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 지은 궁전은 유명 관광지 입니다.
튀르키예의 에페수스에는 트라야야누스 황제때 110년 로마 집정관 가이우스 아킬라가 전임 소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너무나도
예쁜 도서관을 지었는데, 여기에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Mazeus & Mitridates Gate)
이 있으니, 노예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친 것입니다.
19세기는 모든 나라가 노비제도를 폐지했는데 마지막까지 사노비를 붙들고 있는 나라가 있었으니 조선으로
퇴계 이황이 죽을때 자식들에게 물려준 노비가 백명, 이백명도 아니고 367구 였으니.... 노비는 사대부
양반들의 재산이라 스스로 풀어주지 못하니,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의
항복을 받은후에, 김홍집 친일파 내각을 세워 이노우에 공사가 훈수해 갑오경장에서 노비 제도를 폐지합니다.
1895년 김홍집 친일 내각이 일본 훈수를 받아 실시한 갑오경장(갑오개혁) 에서 사노비 제도 폐지 외에도
반상의 신분 차별 철폐와 천민제도 폐지에 조선 500년간 강고하게 내려온 과부재혼 금지제도를
폐지했는데, 사주단자만 받고 신랑이 갑자기 죽으니 결혼식은 커녕 신랑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처녀라도
다시 결혼은 하지 못하고, 시댁으로 들어가 어른들을 모셔야하며 평생 수절하면 열녀문을 세워주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온 명나라 장수 중에 낙상지는 조선군에 창술과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이니 당시까지 조선군은
창과 칼을 쓸줄 몰랐는데, 무과 시험에도 병법이론과 활쏘기 및 말타기 3종목 뿐이니 평생 칼 한번
잡아 보지 못한 무사도 무과에 장원급제 해서 장군이 되니 조선군의 무기는 오직 활 뿐이었지요?
저 낙상지가 유성룡등 조선 대신들에게 노비제도 폐지를 건의했지만 모두를 고개를 돌리며 시큰둥했다는....
녹주는 서진 (西晉) 의 부호 석숭 (石崇)의 애첩. 후일 왕공 (王公) 의 집안에 끌려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여인으로 한시에서는 비운의 미녀로 통용된다. 시 속의 ‘이 몸’ 은 원문이
‘소랑 (蕭郞)’ 이다. 양무제 (梁武帝) 소연 (蕭衍) 을 일컫는데 미남 혹은 총각의 대명사로 쓰인다.
대명호는 천연 샘이기도 하지만 또 지난의 72개 샘 중에서 진주천 (珍珠泉) 에 부용천
(芙蓉泉), 왕부지 (王府池) 가 지대가 낮은 이곳에 흘러들어서 호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평균 수심이 3m로 천연샘 덕분인지 장마철과 가뭄에도 수위가 변하지 않는게 특징 이라는데, 흥미로운
점은 숲이 울창함에도 불구하고..... 뱀이 전혀 없고, 개구리의 울음 소리를 들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명호가 품은 자연 생태의 신비로 꼽히는데, 개구리가 서식하지만 수온이 낮아 몹시 작게 울기
때문에 안 들린다고 하는데....... 대명호는 1958년에 공원으로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대명호 안에는 역하정(历下亭), 호심도(湖心岛) 등 6개의 섬과 고풍스러운 7개의 다리, 그리고
쑤저우의 창랑정을 본떠 지은 소창랑(小滄浪) 을 포함한 10개의 정자가 주요 볼거리 랍니다.
자연 호수와 인공 건축들이 조화롭게 배치된 풍경이 강남의 원림을 연상케 하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오밀조밀한 강남 원림과 달리, 시야가 훤히 트인게 매력입니다.
중간 중간 요기할 수 있는 매점과 찻집이 여럿 있어서 호슷가를 걸어서 산책하다가 쉬어가기
좋으며 남문에서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역하정을 다녀오는게 일품입니다.
배 안에서 가이드가 오아복 30분 동안에 대명호와 역하정의 유래를 중국어로 설명하는데,
으뜸인 역하정은 북위 시대 때 건축한 정자를 1716년 청나라 때 재건했다고 합니다.
이 정자에서 이백과 쌍백이라는 당나라 시인 두보 (杜甫) 가 서예가 이옹 (李邕) 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호수서쪽 역하정이 고풍스러워,
제남의 명사들이 많이 모였구나 (海右此亭古, 济南名士多).’ 라는 시구를 남겼습니다
이런 옛 일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이준식 성균관대 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수 ’ 칼럼에 쓴 “선비의 지조 ”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푸른 측백나무 열매 쓰긴 해도 먹을 만하고, 아침노을 높다래도 마실 수 있네.
세상 사람 모두가 분별없이 설쳐대고, 나의 길은 지금 힘들기만 하구나.
아침 지을 불도 못 지핀 데다 우물은 얼었고, 밤엔 변변한 옷이 없어 침상이 싸늘하다.
주머니 비면 남부끄럽고 난처할까 봐, 한 푼 남겨둔 채 그저 바라보기만.
(翠柏苦猶食, 晨霞高可餐. 世人共鹵奔, 吾道屬艱難. 不爨井晨凍, 無衣牀夜寒.
囊空恐羞澀, 留得一錢看.) ―‘빈 주머니(공낭·空囊)’ 두보(杜甫·712∼770)
지독한 가난, 음식이랄 수도 없는 측백나무 열매와 아침노을로 허기를 채운다. 쌀이 없으니 불을 지필 엄두도
못 내고 변변한 옷조차 없어 잠자리가 차디차다.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남들은 분별없이 되는대로
살아가지만 나는 단연코 그 길을 거부한다. 가난하고 힘든 삶일지언정 나의 철학, 견지하는 도리를 고수한다.
그 와중에도 주머니가 텅 빈다는 게 창피하고 난처하다? 주머니 속에 달랑 ‘한 푼
남겨둔 채 바라보는’ 심사는 어떤 것일까. 장난인 듯 우스개인 듯
내뱉는 시인의 냉소적 자조(自嘲) 한마디로 그 지독한 곤궁이 한층 더 도드라진다.
양식조차 없는 가난뱅이 시인이 허기를 달래는 ‘측백나무 열매’와 ‘아침노을’ 은 기실 상고시대 신선
들이 먹었다는 선식 (仙食). 지금은 궁핍한 처지가 적이 한탄스럽지만 그렇다고 부박한 세속의
흐름에 부화뇌동하지는 않으리라는 다짐, 고결한 선비의 지조를 지키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처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