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저우15 - 임칙서 기념관에서 아편전쟁을 보며 중국의 쇠락을 생각하다!
2025년 3월 12일 푸저우(福州) 에서 서호와 우산( 烏山) 에 위산(于山 ) 을 본후 "상샤항" 에 가니, 운하변에
상항루 (上杭路) 와 샤항루 (下杭路) 골목인데, 푸저우의 무역 중심지로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구경합니다.
다다오 지하철역에서 1호선을 타고 3정거장 동지에커우역에 내려 옛날 골목길을 지나 산팡치시앙
(三坊七巷) 넓은 거리를 걸어서 남문으로 나가 임칙서 기념관에 입장마감 시간 직전에 들어갑니다.
린쩌쉬츠땅 林则徐 祠堂 (임칙서 사당) 은 입장료가 10元인데 65세 이상은 무료이니
여권을 보여주고 들어가는데 아편전쟁때 인물인 임칙서는 푸저우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편전쟁때 흠차대신으로 민족 영웅으로 존경을 받으니 임칙서를 기리기 위해
1905년에 세워진 사당으로 출발하며 1982년에 임칙서 기념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푸저우에 서양인들의 조계지가 건설된 것은 아편전쟁 이후 1843년의 난징조약으로.... 중국은
영국에 홍콩을 할양하고 광저우, 샤먼(하문), 푸저우(복주), 닝보(영파), 상하이를 개항합니다.
영국은 청나라에 비단과 차(茶) 에 도자기를 수입하며 대신에 면직물을 판매했지만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한 중국 면직물이 영국산 기계 면직물 보다 저렴하니 적자로 은의 유출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밀무역으로 청나라에 유통시켰는데 사회 최하층까지 아편에 손을
대게 되면서1838년 말에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 (欽差大臣) 으로 광저우에 파견합니다.
임칙서가 영국 아편 21,306 상자를 압수해 폐기하고 마약상인을 체포하고 마카오에서 영국인들을 추방하자
1839년 11월 3일 광동성 주강하구 호문 (虎門) 해협에서 해전이 발생하니 "1차 천비해전" 입니다.
영국은 군함도 아닌 동인도 회사 소속 무장 상선 2척과 청나라 정크선 29척이 싸웠는데, 청나라
정크선 26척이 일방저긍로 파괴되자 흠차대신 임칙서는 서양 화포 300문을 사서 강안
포대에 배치하지만 1840년 11월 청나라가 대패하자 청은 기선(琦善) 에게 강화교섭을 맡깁니다.
영국은 함선 48척으로 베이징의 통로 다구(大沽) 와 천진(天津) 을 위협하는중에 1841년 1월 7일 주강
하구에서 "제2차 천비해전" 이 발생해 청나라의 정크선 함대가 패퇴하고 포대 11개가 무력화 됩니다.
기선 (琦善) 은 아편 배상금 600만냥, 항구 5곳 개항, 홍콩 할양 등을 포함 '천비가조약 (川鼻假條約)' 을
체결하기로 했지만 도광제는 ‘은(銀) 을 하사할 수는 있으나 서양 오랑캐에게 영토를 줄수
없다’ 며 진노한 도광제는 기선을 귀양보내니 청의 입장을 확인한 영국은 병력을 증파하고 전선을 넓힙니다.
1841년 3월 15일 광저우에 구원투수로 긴급 호출된 참찬대신 (參贊大臣) 양방은 청나라를 대표하는 백전노장
으로 전투가 재개됐지만...... 청나라는 전함 수십척이 침몰당하고 대포 400문을 빼앗기는 참패를 당합니다.
양방은 사흘간 군선 수 십척이 침몰당하고 400여문의 대포를 빼앗기는 것을 목격한 뒤엔 멘탈이
완전히 붕괴됐으니 그간 믿고 있던 '육도삼략' 의 병법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는...... "영국의 승리는 사교의 술법자가 있기 때문" 이라 믿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후 황제는 위내대신 겸 어전대신 혁산을 정역장군에 임명해 "오랑캐들이 행여나 도망칠수 있으니
완벽하게 섬멸하라" 는 명령도 내렸지만 혁산도 결과는 찬가지였으니 연전연패를 거듭 합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현지 사정을 모른다지만 청나라 조정은 세상의 변화에 무지했던 것입니다?
결국 햑산은 5월 26일 광저우성에서 백기를 내걸고 영국에 항복하였고, 엉뚱하게도 자비까지 털어 배상금
600만냥을 빨리 바치고는..... 도광제 에게는 청군이 승리해서 성을 되찾았다고 거짓 보고를 올립니다.
임진왜란때 선조도 장수들이 전공을 과장하니, 그럼 왜 아직도 남해안에 왜적이 남아있는가 힐문했다지요?
이후 1841년 8월에 아편전쟁이 재개되어 영국군 1만명은 광둥성을 초토화시키고 양쯔강으로
북상하니 1842년 3월 혁산의 45,000명은 영국군 1,000명에게 대패했으며,
1842년 6월에 상하이 그리고 1842년 7월에 난징의 진강까지 함락되니 난징조약을 맺습니다.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다섯개 항구를 개항하며 개항장에 영국인
거주를 위한 조계를 허락하고, 영사관을 설치하며 전비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를 지불한다.
그리고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2,1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하며 공행(公行) 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
하고 공행이 영국 상인들에게 진 빚 300만 달러를 지불하며 수출입 상품 관세율은 협의하여 결정한다.
우리 부부는 몇 년전에 광주에서 " 海戰博物館(해전박물관) " 을 본 적이 있는데, 옛 포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2층에는 원통 입체형의 거대한 그림이
있으니.... 당시 아편전쟁 이라 불리는 후먼해전 虎门海战 (호문해전) 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1840년에 영국이 일으킨 1차 아편 전쟁은 청나라 관리 임칙서가 아편 2만상자를 압수해
불지르고 마약상들을 똧아냈기 때문인데.... 영국은 “청나라가 무역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했다” 는게 이유이니, 그래 "아편도 사유재산" 은 맞지요?
영국 함대는 우수한 무기와 화력으로 1840년 11월 청나라 함대를 격파하고
천진 까지 북상했으며, 홍콩을 점령해 영국 영토로 선포하며
1841년 1월 7일 후먼 虎門(호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후 제해권을 장악합니다.
영국 함대가 청나라 함대에 일방적인 전투로 대승을 거둔 이유는 여러 가지 이겠지만 가장
큰 전력 차이는 대포의 사정거리이니...... 영국 배는 사정거리가 중국 대포의
2배가 넘는지라 중국함대 대포 사정거리 밖에서 포를 쏘아 청나라 함선을 모두 침몰시킵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빛나는 해전 승리는 물론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휘력이 수훈갑
이긴 하지만..... 그때도 대포의 사정거리가 빛을 발했으니, 한산도 해전의 조선군
사망자는 2명에 부상자는 8명이며..... 명량 해전에 사망자는 2명에 부상자도 2명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 조총은 사정거리가 100미터에 불과하지만 조선 대포는 600미터에서 1000 미터에
달하니.... 20문의 대포를 실은 군함인 조선의 판옥선은 일본 세키부네와 300미터 정도
거리에서 대포를 쏘면 조선 수군은 배나 인명 피해없이 적선을 격침시킬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해 5월에 광저우(광주) 에 상륙한 영국군은 약탈과 폭행 사건을 일으키자 민중이 봉기
하지만 1842년 8월 영국군은 광저우를 포위해 조약을 강요하고는 배상금 600만
달러를 받은 후에도.... 양쯔강 요충지를 차례로 함락시켜 난징 조약을 체결했던 것입니다.
1842년 영국이 승리하면서 배상금과 홍콩의 할양 및 광둥, 샤먼(하문), 푸조우, 영파, 상해 등을 개항
하였으며..... 그외에도 치외법권, 관세 자주권 포기, 최혜국 대우 등의 강요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광대한 영토를 가진 청나라는 자급자족 성격이 강하여 생각만큼 영국과 무역이 확대 되지
않았으니 영국의 주력 상품은 면이었는데, 중국에서 생산되는 면포는 질이 더 좋았습니다.
게다가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광둥(廣東) 을 중심으로 대영 항쟁이 전개되었으며, 영국의 대
중국 무역은 여전히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중국이 아편을 자체 생산을
시작하고 자유무역 덕분에 중국의 차 (茶) 수출양은 증가되자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커집니다.
2차 아편전쟁 은 1차 아편전쟁 이후에 개방수준이 기대에 못 미치자 애로우호 사건을 구실로 1856년에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한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광저우를 침략해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로 진격하니 이후 연합군은 텐진을 점령해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됩니다.
텐진조약은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개항항구를 확대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때 청나라는 기독교 공인도 약속했는데,
하지만 청나라의 후속조치가 미진하자 영국과 프랑스군은 북경으로 진격하여
1860년에는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는등 베이징 함락후 베이징 조약을 맺게됩니다.
서양의 침략 앞에 속절없이 무느져 갔던 아시아의 맹주 청국의 몰락을 돌아보면서 영국은 미국에 밀려
쇠락했고 반면에 중국은 이제 G2 로 굴기하니.... "세상에 영원한 강국은 없다" 는 생각을 해 봅니다.
푸저우 임칙서 박물관에서 아편전쟁 옛일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성균관대 교수 이준식
씨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한수 에 쓴 "황혼의 악수"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여러 해 못 만났다, 만나고 나니 외려 마음이 아리네.
싸락눈처럼 쏟아지는 내 눈물. 아, 자네 머리는 명주실처럼 하얘졌구나.
비탄에 잠긴 채 서로 손을 맞잡은 지금, 하필이면 꽃이 지는 시절이라니.
오늘 밤은 여한 없이 한껏 취해보세. 어차피 인생이란 허둥지둥 흘러가는 것을.
(年年不相見, 相見卻成悲. 敎我淚如霰, 嗟君髮似絲. 正傷携手處, 况値落花時. 莫惜今宵醉,
人間忽忽期.) ― ‘옛 친구를 만나 (봉고인· 逢古人)’ 제1수·두목 (杜牧· 803∼ 852)
시는 친구와의 재회를 빌려 늙음과 세월의 속절없음을 조곤조곤 짚어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시인은 뜨거운 포옹 대신 묵직한 한숨부터 터져 나온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친구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늙어감을 슬쩍 들여다보게 됐기 때문일 터.
‘비탄에 잠긴 채 손을 맞잡은 지금’이라는 대목은 인생의 해 질 녘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놓은 듯하다. 꽃이
지고, 해가 기울고, 사람도 어느덧 황혼 무렵…. 시인은 말한다. ‘오늘 밤은 여한 없이 한껏 취해보세.’ 돈독한
우정이기도 하면서, 그것은 덧없는 삶을 위로하려는 안간힘이자, 무심한 세월을 향한 조용한 반격인 듯도 하다.
시는 2수로 된 연작시니 제2수에서 시인은 조용히 고백한다. ‘남의 비위 맞추느라 포부는 사라지고,
세상 풍속 좇느라 진심 또한 변질되었노라.’ 통 음의 밤을 지나며 두 친구는 인생무상의
허무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애써 지켜오려 했던 가치마저 흐릿해져 버린 회한을 나누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