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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관련자료

춘우재 고택 탐방

작성자碧草|작성시간13.12.14|조회수59 목록 댓글 0

 

춘우재 고택을 자세히 보면 뒤에 이 마을 진산인 작약산(芍藥山) 봉우리가 정확하게 배산이 됨을 보여준다.

 

 

 

  ㅁ 자 형태의 가옥이라 안 마당이 정사각형모양이었다. 바람은 막아 주나 얼음이 녹지 않아 미끄러웠다.

 주손인 권창룡씨 나를 보자 반갑게 맞이했다.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씀에도 바쁜 것 같아 잠시 머물다 돌아왔다.

 

 

 사당이다.

 이 건물은 대문에 들어설 때 바로 좌측에  새로 지은 건물인데 용도를 물으니 화장실이라고 했다.

 

 

 

건축 이야기
춘우재고택(春雨齋古宅)은 180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권진(權晉)의 가옥이다. 그는 저곡마을 입향조인 야옹(野翁) 권의(權檥)의 손자로 참봉을 지냈다.
건물은 이 마을 진산인 작약산(芍藥山) 기슭 평탄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내성천(乃城川) 건너 학가산(鶴駕山)을 안산(案山)으로 문전의 들판을 내려다보며 동남향으로 좌정하고 있다.
이 건물은 권의의 손자인 참봉 권진(權晉, 1568~1620)이 창건하였으며, 집의 당호(堂號)는 권진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건축 특징
중문간채 좌우의 마루방, 사랑방, 안방 등의 평면 구성, 특히 기둥을 다룬 고급 기법이 19세기까지 전해지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건축 구성
정침은 전면에 ‘ㅡ’자형의 중문간채를 두고 안쪽으로 ‘ㄷ’자형 안채를 두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채 뒤쪽 좌우로 안방과 상방을 반 칸씩 돌출시켜 변형을 연출하였다. 중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왼쪽에 마구간과 마루, 오른쪽에는 문간방과 마루를 각각 한 칸씩 두었다. 그런데 양쪽 마루는 뒤쪽으로 한 칸씩 연장하여 좌우 양 익사를 구성하고 있다. ‘ㄷ’자형 안채는 전면에 반 칸 크기의 툇마루를 둔 안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2칸 크기의 안방과 부엌에 이어 2칸 방을 일렬로 연결하였는데, 안방을 대청 쪽으로 1칸 반을 연장하여 뒤편 반 칸은 골방으로 꾸몄다. 대청 오른쪽에는 상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고방, 작은 부엌, 사랑방을 일렬로 이어 서로 맞닿게 하였다.

 


관련이야기
- 춘우재고택
춘우재고택(春雨齋古宅)은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에 있다. 용문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다. 저곡리는 용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대저리와 하학리, 서로는 능천리, 남으로는 상금곡리와 예천읍 생천리, 북으로는 하리면 율곡리와 접한다. 저곡리는 ‘맛질’이라고도 하는데, 저곡(渚谷)이라는 한자어를 훈자(訓借)한 것이다. 맛질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한천을 경계로 동쪽의 ‘큰 맛질’, 서쪽의 ‘작은 맛질’로 나뉘며,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큰 맛질은 대저리, 작은 맛질은 저곡리이다.

춘우재고택은 작은 맛질에 위치하며, 큰 맛질은 마을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문계천(文溪川)을 경계로 위쪽의 저상(渚上), 아래쪽의 저하(渚下) 마을로 나뉜다. 예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맛질’은 ‘금당실’과 함께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예천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오는 “금당•맛질은 반(半)서울이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반서울’이란 말 그대로 하면 ‘서울의 절반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이는 산골 마을인 금당실과 맛질에 대하여 ‘서울과 비교해도 크게 모자랄 것이 없다’는 예천 사람들의 자긍심을 내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두 마을이 예천의 대표적 명문가의 세거지(世居地)로 예천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두루 배출했기 때문이다.

관련인물
- 권의
권의(權檥, 1475~1558)는 용문면 저곡리 작은 맛질 사람으로,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안동이다. 권사빈(權士彬)의 맏아들로 권벌(權橃)의 형이며, 정암 조광조의 제자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의흥(義興) 등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업적을 남겼다. 스승 조광조와 더불어 향약 시행에 대하여 깊이 상의하였고, 의흥현감 때는 향약을 군민에게 권장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기도 하였다.

안동 도촌에서 작은 맛질로 옮겨 살면서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었다. 아들 권심언(權審言)은 아버지를 위하여 야옹정(野翁亭)을 작은 맛질에 세우고 후진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 권의의 무덤은 하리면 주초리 함포산에 있고, 시 등의 원고가 남아 있다.
- 권심언
권심언(權審言, 1502~1574)은 용문면 저곡리 작은 맛질 출신으로, 자는 중택(仲擇),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권의이다. 권심언은 풍채가 준엄하고 말과 행동이 매우 충성스럽고,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웠다. 음서로 처음에는 사용원 참봉을 하다 풍저창 부참봉, 돈령부직장, 주선공감, 사옹원주부 등의 벼슬을 거쳐 사헌부감찰에까지 이르렀다. 1549년(명종 4)에는 지방으로 나가 지례, 고령, 거창 등 세 고을의 현감으로 잘 다스려 업적을 많이 남겼다. 무덤은 하리면 부초리 함포(咸浦)에 있고, 문장을 잘 지어 유고가 남아 있다.

 

야옹 권의선생

성명 : 권의(權檥) , 1475년 ~ 1558년
본관 : 안동(安東)
: 백구(伯懼)
: 야옹(野翁)
출생지 : 예천군 용궁면 제곡리
출신지 : 예천군 용궁면 제곡리
분묘지 : 예천군 하리면 부초리 함포산
입사경로 : 1507년 진사에 합격.
내관직 :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
외관직 : 의흥현감(義興縣監)
권의
권의(權檥, 1475~1558)는 예천군 용궁면 제곡리 작은 맛질 사람이다.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 권사빈(權士彬)의 맏아들로,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형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의는 태어나자 영리하고 성숙하여 바탕이 다르더니, 점점 자람에 사부에 나아갔다.

글에서는 먼저 이취(理趣)를 알고, 글씨는 필세가 힘이 있고, 법도가 있어 재주와 이름이 권벌과 더불어 백중(伯仲)세라 일컫는다. 진사에 피선(被選)된 후로 응과에는 뜻을 끊고 향리에서 효제(孝弟)를 닦고 자제들을 교훈(敎訓)하는 데 힘썼다. 1519년(중종 14)에 조정암(趙靜庵)이 여러 도에 향약법을 시행하기를 건의하여 고을에서 행의(行誼)가 있는 이를 택하여 약정(約正)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권의를 천거하였다.

이때에 시속(時俗)이 사치에 편케 여기고 방조자편(放縱自便)하기를 기뻐하는 때라. 마침내 새로운 법령을 봉행(奉行)하는데 혹 마땅함을 잃는 것을 보고 드디어 법을 비방하는 자 있었다. 권의는 능히 조법(條法)을 어기지 않고, 시행하기에 체본(體本)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즐거이 따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명성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나타났다. 의흥을 다스릴 때에도 정사가 또한 이와 같았으니, 간리(奸吏)가 두려워 비행을 그치고 백성이 사모하여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권의가 안동 도촌에서 예천의 작은 맛질로 옮겨 살면서 후손이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아들 권심언(權審言)은 아버지를 위해 1566년 야옹정(野翁亭)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권의의 무덤은 예천군 하리면 부초리 함포산에 있다. 안동권씨 후손들이 만든 『화산세고(花山世稿)』에 「야옹선생유고(野翁先生遺稿)」가 실려 있다.

학문이야기

스승 : 조광조(趙光祖)
학파 : 퇴계 학파
조광조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의(權檥,1475~1558)는 예천군 용궁면 제곡리 작은 맛질 사람이다.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 권사빈(權士彬)의 맏아들로,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형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른 사림파의 영수다. 김굉필, 정여창, 이황과 함께 동방4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5년(중종 10) 학행으로 천거받아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초임되었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공조좌랑, 홍문관부수찬, 교리,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재직 중 박원종(朴元宗), 김안로(金安老) 등 반정(反正) 공신들이 주장한 왕비 신씨(愼氏) 폐출론에 반대하는 한편,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1517년 경연시족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면서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주창, 8도에 걸쳐 실시하게 하였다.

1518년 부제학으로 있을 당시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창(奏請)하여, 많은
이가 반대하는데도 이를 관철시켰다. 이해 11월 대사헌에 승진하고 현량과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 등 소장 학자들을 선발,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들 신진 사류들은 훈구 세력의 타도와 구제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1519년(중종 14) 정국공신(靖國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하게 청하다 훈구파인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에게서 강하게 반발을 사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었고,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도학정신(道學精神)을 계승하여 이황, 이이 등 많은 후학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며, 조선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집은 당초 이기주(李箕疇) 등이 유문(遺文)과 사적(事蹟)을 수집하여 그의 5세손 조위수(趙渭叟)에게 준 것을 선조의 어명으로 김굉필, 이언적(李彦迪), 정여창(鄭汝昌) 등의 문집과 함께 『유선록(儒先錄)』이라는 이름으로 찬록(贊錄)되었다.

저작이야기

『야옹선생유고(野翁先生遺稿)』
권의의 시문집으로는 『야옹선생유고(野翁先生遺稿)』가 안동권씨 후손이 만든 『화산세고(花山世稿)』에 실려 있다. 『화산세고』는 권의, 권장(權檣), 권욱(權旭), 권수원(權壽元) 등 안동권씨 후손의 시문집이다. 『야옹선생유고』는 권의의 시문집이다. 권의의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이다. 권사빈(權士彬)의 아들로 중종 때 진사에 합격하였다.

『제촌선생유고(霽村先生遺稿)』는 권장(權檣, 1489~1529)의 시문집이다. 권장의 자는 제포(濟浦), 호는 만암(萬菴)이다. 권사빈의 아들로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였다.

『매당선생유고(梅堂先生遺稿)』는 권욱의 시문집이다. 권욱의 자는 경초(景初), 호는 매당(梅堂)이다. 권심언(權審言)의 아들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섬계공유고(剡溪公遺稿)』는 권수원(權壽元, 1654~1729)의 시문집이다. 그 의 후손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야옹선생유고』는 시 19수(首)와 부록으로 되어 있는데, 부록에는 행략(行略), 비명, 묘갈명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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