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4주일설교 요한복음14:15-24 (사랑한다는 것)
제목: 사랑한다는 것
본문: 요한복음14:15-24
오늘은 요한복음14:15-24의 말씀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는 것”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말이거나 같은 느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도 하고
사랑은 징그러운 것이라고도 하고
사랑은 설레는 말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은 무슨 느낌이며
사랑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여러분은 사랑을 받을 때 어떠합니까?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고
자녀 또한 부모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랑 표시를 하면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문자나 카톡을 받을 때도
하트 표시로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너무 가볍게 사용되며
그저 말로만 사용될 뿐 행동과는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신앙에서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며
손을 들고 찬양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후의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찬양 드린 다음에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명확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
주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1.나를 사랑한다면(15,21절)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분명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율법 곧 십계명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13장에서 다루었던 새 계명을 말합니다.
그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사랑하듯이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합니다.
사랑하면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사랑하면 감정만 생각합니다.
뭉클한 마음, 따뜻한 마음, 설레는 마음,
뜨거운 마음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랑할 때 그런 감정이 듭니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할 때 나오는 그런 감정은
그런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을 넘어서 반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반응하게 되는데
그 반응은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이 말씀은 ‘억지로 지켜라’하는 엄함 명령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의무감이나
누가 시켜서 나오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감정에서 나오는 행동은
힘들고 어려워도 기쁘게 하며
많은 시간 동안 수고해도 짧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말씀을 지키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이나 헌신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지겹고 하기 싫다면
그것은 사랑일 수 없게 됩니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기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이 무엇을 기뻐하는 지 알게 되고,
그것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해서 하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반응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자발성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키리라는 말은
지키게 될 것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말은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상 우리는 자발성이 좀 부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내주시는 다른 보혜사
곧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의무감을 넘어 자발적으로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순종하게 됩니다.
더 나가 순종은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2.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죄인입니다.
내 욕심만을 챙기는 그런 욕심쟁이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무거운 계명을 우리가 무엇으로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시작’이 아니라 ‘반응’입니다.
요한일서4:19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되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위해
죄인인 우리를 위해 원수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의 사건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압도적인 사랑 앞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저 지극히 작은 반응일 뿐입니다.
아이를 위해 밤낮으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오물 치워주는
헌신적인 사랑을 부모님들이 합니다.
그때 그 어린아이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저 그런 엄마에게 한번 웃어주는 반응
그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뜨거운 감정이나 완벽한 경건으로 오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이 무엇일까요?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하루 내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 오늘 제가 무엇을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요?라고
묻는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안 들어
미워 죽겠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나
직장 동료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생각하며
내가 무엇을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며
주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행하려는 반응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방향 전환입니다.
나에 욕심이나 내 원함에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방향 전환입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오신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주시고,
그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내 힘으로 쥐어짜는 사랑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주실 때
그 마음에 예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마음을 지키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3.성령님은 반응을 돕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16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합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곁에서 돕는 자를 말합니다.
상담자라고 할 수 있고 변호사나
대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제자들 곁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변호해 주시는
첫 번째 보혜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몸을 입고
제자들의 옆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제자들을 떠나십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입니다.
제자들에게 오순절 이후 보내주셨던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입니다.
그러므로 16절의 약속은
예수님이 떠나고 다른 사람이 온다는
이별의 통보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육체라는 제한을 벗어나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와 영원히
더 깊은 동행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른 보혜사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증거하고
증명하시는 영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우리 삶의 실제로 가져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글자만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진리의 영’께서
우리 안에 밝히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거짓된 가치관을 심어줍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삶의 목적은 출세하는 것이다.
돈이면 다 된다.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말하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따라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 눈앞에 씌운
세상의 콩깍지를 벗겨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거짓을 분별하게 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소중한지를 알려 주어
하나님의 사랑, 영원한 생명,
순종의 기쁨을 분별하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빠져 넘어질 때
주님의 길은 이것이 아니라고 우리 마음속에서
조용히 일깨워주시는
그 세미한 음성이 곧 진리의 영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십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진리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의 영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아프거나 슬프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나를 낮추게 하고 나를 부서지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형상을 닮을 수 있기에
그렇게 빚어나가도록 하시는 분이 진리의 성령님
주님이 보내주시는 다른 보혜사입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용서해야 하는데,
누군가를 도와야 하는데
누구를 찾아서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낙심되고 슬플 때
말씀을 생각나게 해서 위로해 줍니다.
갈 길을 밝혀 줍니다.
기쁨을 갖게 하고 힘이 나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반응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예수님께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인색함에서 풍성함으로
두려움에서 용기로
우리의 길을 돌아서도록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진리의 영의 소리를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 안에 있지 않기에
그런 음성이 들려도 무시합니다.
반응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영이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17절의 말씀처럼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는
사람들을 붙잡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나 손에 잡히는 것은
그것이 실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가장 소중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진리의 영의 소리에 민감하지 못하고
성령님의 소리를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을 것 같은
희생이나 사랑이나 헌신이나 섬김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대가가 있는 관계를 원하고 이해합니다.
주고 받는 것이 철저합니다.
네가 이만큼 하면 나도 이만큼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리의 영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 없는 은혜입니다.
성령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네 권리를 찾고 손해 본 것은 보복하라고 합니다.
세상의 계산 법으로는
예수님의 사랑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으니
그 사랑의 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온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구원받고
어떤 이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갈리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은
본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서
사랑으로 반응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서
그 사랑을 무시하고 반응하지 못하는 자는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셔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듣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주신 사랑에 대한 반응을 하지 않았기에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 계시기에
내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태아가 엄마의 탯줄에 연결되어 있을 때 살 듯이
우리가 살아 계신 예수님과 살아 있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지금도 내 안에 살아 계셔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음성에
반응하는 자가 살아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자가 살아 있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말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령님을 의지하며
계명에 반응하는 태도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이번 한 주간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세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방향 전환의 태도’로 정의하십시오.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하루 내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순간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라고 묻는
그 짧은 고백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내 유익을 구하던 삶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돌려야 합니다.
둘째, 내 힘을 빼고 ‘성령님의 음성’에
‘예’로 반응하십시오.
우리의 본성으로는 미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쥐어짜려 하지 말고,
내 안에서 “용서해라, 위로해라, 도와주어라”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그저 “예”하고 순종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그 마음을 지키려 할 때
성령님을 행할 힘을 주십니다.
셋째, 세상의 계산법을 버리고
‘무조건 사랑’을 유통하십시오.
세상은 준 만큼 받는 철저한 계산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은 아무 조건 없는 은혜였습니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성령의 능력으로 벗겨내고
주님께 받은 그 압도적인 사랑을 흘러보내며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