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삶

작성자오정원|작성시간01.01.03|조회수41 목록 댓글 0
주일말씀18 조화로운 삶(야고보서 2:1-13) 2000.12.31 주일낮예배

본문: 야고보서 2:1-13
제목: 조화로운 삶

여러분 지난 한해를 멋지게 살았습니까?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인사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멋진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화로운 삶이 아닐까요? 빠진 것도 없고 극에 치우치지도 않는 삶을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조화가 꽃피는 날

'전인적'이란 말이 있다.
이는 내 속의 착한 부분과 몹쓸 부분을 모두 용납한다는 뜻이다.

어쩌다 착한 일을 했으면
'그렇게 하길 참 잘했지'하고 긍지를 가져라
그리고 자성할 시간이 있을 때
'하지 않은 듯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깊이를 맛보라.
어쩌다 몹쓸 일을 저질렀으면
그 달콤한 맛을 보면서
'그래 어쨌단 말인가?'하고 뱃심을 부려라.
그리고 자성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때
'뒷맛이 쓴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하고 깊이를 맛보라.

이런 네 가지를 해 가노라면
어느 날 조화가 꽃핀다.
이것을 '전인적'이라 한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수용하는 자세이다.

참 화려하게 시작했던 2000년이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아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꿈도 불안도 우리 생각 속에서 있었고 그것들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한해가 어떠했습니까?

자랑하고 싶은 일도 있고 숨기고 싶은 일도 있을 것입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도 있고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착한 일도 했고 몹쓸 일도 했습니다. 그러한 일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곽노순 목사님의 글에 동감이 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다 내 일로 보고 수용하는 자세가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힘들게 사는 것은 수용하지 못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일인데 내가 겪은 일인데 그것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좋은 것은 받아 들이고 몹쓸 것은 거부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우리가 삶은 살면서 내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받아들일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인 사람하고는 문제가 없는데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왜 우리가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으로 내 생각으로 내 경험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사람을 갈라 놓게 되어 있습니다. 가르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면서 진정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겠습니다.

1.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목적도 태생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판단하지 않고 받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무엇을 해서도 아니고 내 부모가 예수를 믿어서도 아니고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도 아니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셔서 구원받게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버렸다는 말과도 같은 말입니다. 내 식대로 살지 않고 내 믿음대로 살지 않고 내 육체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2.무엇이 우리로 판단하게 하는가?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할때 진정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행동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가? 그 사람이 나에게 잘 해주는가? 그 사람이 나에게 유익한가를 따져서 행동합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예화를 하나 들어서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어떻게 너희들이 행동하느냐고 묻습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오면 환영하며 좋은 자리를 앉으라고 하지만 가난한자가 오면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똑 회당에 온 같은 사람인데 그렇게 행동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예화가 더 실제적일 것입니다. 어떤 신부가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오른 쪽에는 할머니가 탔고, 왼쪽에는 예쁜 아가씨가 탔습니다. 기차가 달립니다. 달리다보면 한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신부가 오른 쪽 할머니 있는 데로 쏠리면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왼쪽 아가씨 쪽으로 몸이 쏠리면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재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은 시험이고 어떤 것은 주님의 뜻입니까?

무엇이 똑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고 젊은이와 노인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는 부자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입니다. 노인은 노인이고 아가씨는 아가씨입니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다름을 넘어서 우리가 판단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 가난한 자는 나에게 불필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아가씨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사람, 노인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더 나가서 부자는 좋고 가난한 자는 싫습니다.

무엇이 그런 식으로 결정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판단하도록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익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판단한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이익에 따라서 판단되어 진 것입니다.

부자와 함께 있으면 내가 부자인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노인이 젊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젊어진 것 같습니다. 부자와 함께 있으면 무엇인가 나에게 얻어질 것 같지만 가난한 사람과 있으면 무엇인가 주어야 하고 빼앗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아서 누리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같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상은 유익을 주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고 우리를 괄시하고 압제하며 심한 경우에는 우리를 법정으로 끌고 갈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우리에게 하는 일은 우리의 아름다운 이름 곧 하나님의 자녀 됨을 훼방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마음의 평안함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만나면 여유가 있고 여러분을 위해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자들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누가 나에게 유익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익하냐 유익하지 아니하냐를 떠나서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한쪽은 좋아하고 한쪽은 싫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율법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고 차별했기에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사랑하는 곳과 사랑하지 않는 곳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다른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하여도 한사람을 차별해서 사랑하지 않으면 온 율법을 다 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동안을 살펴봅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이며 내가 미워하거나 무관심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나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였습니까? 그들이 나에게 행하는 어떤 행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이 유익하거나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되어서 그렇게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인데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렇게 판단하고 이렇게 행동한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행동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겉모양대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시면 나나 여러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장입니다.

아무도 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행하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니 구원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곧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3.심판을 이기는 방법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그렇습니다. 긍휼만이 우리로 하여금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긍휼없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하심을 입었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도 법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왕으로부터 만달란트를 빚진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고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에게 빚진 자의 작은 돈 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빚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긍휼하심을 입고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를 주로 받았다 그리스도로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 사랑과 긍휼을 받았는데도 우리의 삶이 사랑이 아니고 긍휼이 아니라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찌 그런 사람의 삶이 평안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없으니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심판을 이기는 법 그것은 예수를 주로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내 행동과 판단은 겉 모양에 있지 아니하고 내 유익의 유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면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보잘 것 없는 나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받아 주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긍휼을 베푸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심판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내가 자유를 얻었다면 나도 남에게 자유케 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은 자라면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면 나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길만이 우리가 심판을 이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남에게 뿐 아니라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남의 모습도 용납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어야 하지만 나의 모습도 용납하고 긍휼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