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고전4:19)
사람은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사귀지 않으며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눈은
말씀의 내용보다 전하는 자의
용모나 말투, 음성, 출신 등을
관심하게 되어 있으며
그것들 중에 자신보다
낮은 수준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자신을 더 낫게 여기고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곧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거나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지 않는 자는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반드시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추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낮아진 사람을 높이십니다.
사람은 더 나아지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를 낮추고 없는 자와 같이
여기는 겸손함이 없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으며
복음을 바르게 증거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겪어보지 못한
대개의 사람들은
여전히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들어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교만하며
남을 판단하고
자신을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추거나
낮아지려 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교만이어서
더욱 높아지려는 것이지
낮아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난 겸손은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장소가 바뀌면
언제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모든 비밀을 안다 해도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은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말만으로는
그를 알기 어렵고 그의 내면의
겸손함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누군가 말씀 증거에 능하다고 해서
그를 높이고 자랑하는 일은
세상에 속한 일이며
복음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없는 일입니다.
또한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줄 알고
자기를 높이는 자도 그러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듣는 자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서 같게 여기고
죄인의 삶을 하찮게 여기며
자기를 낮춰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하심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모든 사람보다 낮출 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신뢰하거나
자기 아는 것으로 자부심을 갖거나
남보다 아는 것이 있다하여
거만하게 군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자입니다.
지식이 많은 자는
사람들과 세상에서는 인정받을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복음의 모든 비밀을 알고
능력있게 전하며 모든 기적을 행하고
믿음의 큰 역사를 나타낸다 해도
자기를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낫게 여기거나 높이게 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못한 자입니다.
잘 되고 형통하기를 원하는 자는
복음 들을 준비가 안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도
그러합니다.
믿음의 역사를 구하는 자도 그러하며
하나님의 일을 크게 행하고자
하는 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일에도
의미를 가지며 그 안에서
보람을 찾는 자도 그러합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행위와
삶에서 그 의미를 찾기 때문에
아직 복음 들을 귀가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응하기만 하면
모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전도 집회나 행사를 열거나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고
찾아가게 됩니다.
그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음 들을 귀는
그런 시도를 거쳐 실패에 이르고
삶의 어려움과 자기 뜻이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마음이
가난해져서 의지할 데를 찾는 자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런 경험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닌
끊임없이 진리를 찾는 자에게
들을 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복음 들을 귀가 열릴 때는
자기 행위로써 뭔가 이룰 생각조차
갖지 못하여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에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들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믿기로 하고
예배하는 행위를 시작하여
그를 통해 어떤 지식을 알아간다면
그는 믿음을 시작한 것이 아닌
율법적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믿는 예수도
성경의 그 예수가 아니며
자기를 죽이는 예수가 아니라
살리는 예수로 여길 것입니다.
율법적 삶을 시작하는 것은
자기 행위로써 의미와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 안에서 탄생하여
본격적인 율법적 삶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고 감격적 삶을 시작했다 해도
그를 믿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높일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행위를 신뢰할 수 없고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다 구원을 원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들은 자기 존재로부터 구원이 아닌
오히려 형통과 은혜, 성공과 자기 만족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믿는 자로 아는 것은
자기 죽음이라는 자리로 인도하는
복음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죽음으로만이
죄인인 자기 존재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음은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해 갑니다.
그것도 자기 노력이나 의지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일하심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를 주로 삼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 죽음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얕은 사람들은
자기 믿는 바를 의미있게 여길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경험이나 지식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하찮게 여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의미를
아직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가벼운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 품은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이르지 못했다면
참 믿음을 가질 준비가 안된 것입니다.
그들은 더 높은 뜻과 가치를 구하고
큰 일을 행하기 위해
전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패기와 열정으로 나타나겠지만
그럴수록 정상적인 믿음에서는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지가 약해지고
삶의 실제를 통해
뭔가 잘못 되었음을 알아가는 때가
참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그리스도의 일하심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연속된 실패와 쓰라림을
당하게 되어 더 이상 어떻게 행할
의지조차 사라지는 어두움을
만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 신뢰를 잃어버리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 이른 자만이
그의 은혜를 받아들일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곧 사람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진정한 기적은
자기를 믿고 신뢰하는 자가
낮아져서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 의지가 약화되어
더 발휘할 생각조차
갖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적과 능력, 도우심을 구하는 자들은
매우 낮은 수준에 있는 자들로서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믿음에서 아주 멀리 있는
율법적 삶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곧 그런 자들을 낮추는 일로 시작됩니다.
누군가 그의 부르심을 입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갈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매우 약해져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 때 들리는 것입니다.
아무에게 아무 때나
복음 전할 생각을 갖는 것은
도무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는 다른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을 낮추게 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르심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를 신뢰하여 자기 의지가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낮아져서
장래가 어둡게 된 사람을
더욱 낮추게 만들어서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인도해 갈 것입니다.
갈 바를 몰라 그리스도를 불렀더니
그는 더욱 혹독하게도 십자가 죽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믿음으로
부르심을 입는 일입니다.
적어도 하늘에 소망을
두었다면 말입니다.
그런 후에 믿음의 실체를 알 때
비로소 낮아짐과 겸손이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