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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영화에세이> 25시

작성자월산처사|작성시간25.12.25|조회수28 목록 댓글 0

25시(The 25th Hour)

 

최용현(수필가)

 

   루마니아의 시골 폰타나에 사는 농부 요한 모리츠(안소니 퀸 扮)는 같은 마을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 수잔나(비르나 리지 扮)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두 아이는 마을 정교회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치 독일의 눈치를 보느라 루마니아에도 유대인 색출 바람이 분다. 이때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은 폰타나의 경찰서장 두브레스코(그레구아르 아슬랑 扮)는 요한을 유대인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여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낸다. 요한은 유대인들과 함께 수로건설작업을 하는데,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탄원(歎願)을 했기 때문에 곧 풀려날 것으로 생각한다.

   독일군이 루마니아를 점령하자, 경찰서장이 수잔나를 찾아와 유대인의 땅은 모두 몰수될 것이라며 집과 토지를 뺏기지 않으려면 남편과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잔나는 어쩔 수 없이 남편과의 이혼 서류에 서명한다. 이때 이혼사유를 ‘인종문제’로 표시하는 바람에 요한은 유대인으로 낙인찍힌다.

   수용소장으로부터 이혼사실을 통보받은 요한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다. 이제 풀려날 가망이 없게 된 요한은 몇몇 유대인들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한다. 이들은 그곳 유대인 단체의 도움을 받아 중립국인 스위스로 가는 기차를 타지만, 요한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함께 가지 못한다. 검문에 걸린 요한은 독일로 끌려가 다시 강제노역을 하게 된다.

   요한은 골상학(骨相學)을 숭배하는 인류학자인 독일군 친위대 대령에게 불려가서 두개골과 흉부, 쇄골 검사를 한 결과 독일 게르만족의 기원인 아리안족의 우수한 골격과 혈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인증을 받는다. 요한은 나치의 친위대원이 되어 SS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 여러 잡지의 표지에 실리게 되고, 노역장의 감시요원으로 발탁된다.

   1944년 4월, 독일군이 쫓겨 가고 소련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온다. 폰타나의 두보레스코 경찰서장은 레지스탕스에게 끌려가고, 수잔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간다. 요한은 노동자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이동하다가 연합군 전폭기의 폭격을 받는데,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노동자들과 함께 독일군 감시요원들을 사살하고 연합군에 귀순한다.

   귀순 당시 독일군 군복을 입고 있던 요한은 연합군의 포로가 된다. 포로수용소에서 요한은 마을 신부의 아들인 지식인 트라얀을 만나는데, 그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의기소침해있었다. 요한은 그에게 ‘그동안 겪은 사실을 책으로 써보세요.’ 하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지금은 25시야, 25시는 마지막 시간이지.’ 하고 말하고는 혼자 산책하겠다며 밖으로 나가더니 출입금지구역을 벗어나 수용소의 울타리까지 걸어가다가 경비원에게 사살되고 만다.

   포로수용소에서 2년 가까이 생활한 요한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SS군복을 입고 찍은 여러 잡지의 표지 사진과 노역장의 감시요원으로 근무한 사실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처한다. 요한은 최후진술에서 ‘8년 동안 영문도 모르고 끌려 다녔습니다.’ 하고 말하는데, 이때 변호인은 수잔나가 요한에게 보낸 편지를 법정에서 낭독한다.

   “… 유대인의 집과 토지는 몰수한다는 경찰서장의 협박 때문에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지만, 이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 2년 전에 소련군이 찾아와 강제로 보드카를 마시게 하고 강간하여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지금 2살이 되었어요.….”

   변호인의 ‘이 가련한 부부를 다시 만나게 해줍시다.’고 하는 호소가 통했는지 요한은 무죄로 석방된다. 기차를 타고 폰타나에 도착한 요한은 아내와, 그리고 소련군의 능욕에 의해 태어난 아이를 포함한 세 아이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한다. 그리고 거기서 한 기자로부터 가족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받는다. 기자가 웃어달라고 하자, 미소를 짓던 요한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면서 영화가 끝난다.

   ‘25시(The 25th Hour, 1967년)’는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가 1949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몇 번 만들어졌으나, 프랑스 감독 앙리 베르누이가 연출한 안소니 퀸 주연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합작영화가 가장 유명하다. 유럽에서는 러닝 타임 3시간 16분 버전이 상영되었고, 1978년 우리나라 개봉 때는 2시간 10분 남짓으로 줄인 버전을 상영하였는데 관객 35만 명을 기록하여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이 영화는 루마니아 정교회 소속 사제였던 게오르규 신부가 자신의 수용소 체험과 주변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순박한 농부가 10년 동안 가족과 생이별한 채 이곳저곳 끌려 다니며 겪은 고난을 통해 절대 권력을 지닌 국가와 그 하수인들이 힘없는 개인의 인권을 얼마나 유린할 수 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농부는 애타게 구원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았고, 종전 후에도 그의 조국이나 패전국 독일, 승리한 연합국도 아무런 위로나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남의 아내를 넘보던 한 공직자 때문에 유대인으로 몰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독일로 쫓겨다녀야했던 요한,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끝까지 정조를 지키려했지만 소련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버린 여인 수잔나, 두 사람에게는 전쟁이 만들어준 새로운 가족까지 생겨났다. 아무 잘못도 없이 뒤틀어져버린 요한 모리츠 가족의 이야기를 어찌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겠는가.

   ‘25시’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바, 아무도 구원해줄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은유하는 말이다. 힘없는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전쟁이 터지면 이 농부처럼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쫓기며 살아야 하는 25시의 인간이 된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전쟁의 포성(砲聲)으로 신음하고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은 여전히 25시의 암흑 속에서 절망의 신음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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