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 선원 일요법회 일묵 스님 법문 (09.3.22)

작성자돌아오는 길|작성시간09.11.06|조회수429 목록 댓글 5

제따와나 선원 일요법회 일묵 스님 법문 (09.3.22)

 

일요 법회에서 매달 넷째 주는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거나 수행 중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질문함으로써 법회를 대신하겠습니다.

 

질문) 법회에 나와서 경 읽고 법문 듣고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그대로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되는지요?

 

답변) 일상 생활 속에서 그런 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불교 수행을 할 때는 수행 방편을 하나 들고 수행을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항상 지켜나가는 주제가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 주제를 통해서 자기 마음을 지키고 수행을 끊임없이 끌고 나갈 수 있는데 주제가 없거나 하루 일과가 없이 그냥 지나가면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삶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학교 다닐 때 옴 마니 반메 훔수행을 했었는데 처음에는 하루에 5천 번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하루에 3만 번을 꾸준히 매일 했었습니다. 3만 번을 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가면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을 할 때는 자기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백련암에서는 하루 일과를 108, 200, 300배로 시작하는데 이것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수행의 주제가 한 개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면 화두, 염불,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 sati, 들숨과 날숨에 마음 챙김)등 주제를 한 개 정해서 일상 삶 속에서 언제나 그 주제를 놓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마음이 결합되지 않고서는 한번 듣고 일상 생활에서 실천이 잘 안됩니다.

 

예전에 숫자 세는 기계가 있어 하루에 숨을 천 번 셀 수 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1부터 1000까지 숫자를 직접 세게 되면 숫자에 빠져서 수행이 잘 안되기 때문에 무리인데 들숨날숨 한번 누르고 들숨날숨 둘 누르면 틈날 때 마다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자투리 시간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좌선 시에만 수행하는 것과 같이 조건이 만들어진 다음에 하는 것은 그렇게 강한 수행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지하철 탈 때, 걸어갈   , 수업 끝나고 다른 강의실로 걸어갈 때, 중간중간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옴 마니 반메 훔을 계속 염송했습니다. 수행 자체가 일상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마음을 다 놓고 있다가 절에 오거나 수행할 때만 하면 수행의 힘이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원상으로 비유를 많이 하는데 원상을 알아차림(sati, 챙김)을 지키고 살아가는 시간으로 보면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에 세 번 정도 알아차림을 했다면, 그렇게 매일 해서 하루에 차지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날 수 있다면 예전에는 수행하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아라한이 되어 24시간 sati가 지켜진다고 하면 완성된 것으로써, 어느 시간에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sati가 항상 유지되는 것으로 수행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자기 목표를 정하는 게 좋습니다. 하루에 최소한 1시간이라도 수행을 하겠다 라고. 프랑스의 플럼 빌리지라는 틱낫한 스님이 운영하는 수행센터가 있는데 일상에서 틈만 나면 종을 하고 한 번씩 칩니다. 종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모든 행동을 멈춥니다. 걷든 무슨 행동을 하든 일단 그 자리에서 멈추고 숨을 세 번 보게 합니다. 들숨날숨 하나, 들숨날숨 둘, 들숨날숨 셋, 세 번까지 세고 나서 다시 하던 행동으로 돌아갑니다. 왁자지껄하다가 종을 한번 치면 조용해지고 그 자리에 멈추고 이런 식으로 일상에서 경각심을 놓치지 않도록 자극을 줍니다. 정해진 시간에 종을 치는 게 아니라 무분별하게 한 번씩 종을 칩니다. 또 틱낫한 스님이 제안 하는 방법으로 전화 벨이 울릴 때 전화를 바로 받지 말고 벨 소리를 들으면서 호흡을 세 번 세면서 관찰하고 나서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전화 벨 소리를 통해서 자기 수행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이런 식으로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권장합니다. 소리에 의지해서 수행으로 돌아오는 것이니까 처음에 수행을 항상 잡고 다니기가 힘든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항상 깨어있어서 수행 방편인 들숨날숨에 대한 호흡을 평소에 관찰하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아차, 내가 호흡을 놓쳤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서 호흡을 보다가 딴 일에 빠져 있다가 또 호흡을 보고. 삶 속에서 항상 수행 방편을 잡고 있는 노력을 계속 해나갔을 때 몸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이런 수행 주제가 없으면 수행이 중구난방이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수행 주제가 하나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저녁 9가 됐는데 만 5천 번 정도 밖에 세지 못하면 정말 암담했었습니다. 목표를 채우지 못하고 하루가 지나가면 다음 날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했었습니다. 지금 되돌아 보면 그 수행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훈련된 것이 절에 와서 수행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수행 주제를 하나 들고 마치 생명 줄이다.” 라고 생각하고 이걸 놓치면 내가 죽는다.” 암벽 등반 할 때 핀을 박아서 거기에 내 목숨을 의지하고 나아가듯이 수행하는 사람이 그 핀을 놓치게 되면 떨어져 죽는다는 심정으로 마치 수행 주제가 절벽에 박힌 핀과 같다는 생각으로 항상 붙들고 사는 것이 수행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쉽게 빨리 뭔가를 해달라고 하는데 쉽게 하는 것도 좋지만 이 세상에서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이 투자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세속에서 얻는 것 이상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투자도 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것은 공짜 심보로써 수행에서는 그렇게 안됩니다. 

 

호흡에 수행을 붙여놓는 게 가장 좋습니다. 숨을 쉴 때 sati가 항상 따라다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호흡에 마음 챙김이 가도록 하면 언제라도 숨을 쉬다가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숨인 숨은 절벽에 박은 핀과 같습니다. 숨이 몇 분만 멈추어지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숨을 모르고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문) 수행을 즐기면서 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게 되기 이전에 억지로 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절 수행인 경우 어떤 날은 의무적으로 억지로 하는데 그런 날도 빠지지 않고 그냥 하는 게 좋습니까?

 

답변) 그럴 때라도 하는 게 좋습니다. 수행이 탄력을 받기 전까지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갈 때 처음에는 자갈길 등 험난한 길들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조금씩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 길 자체가 아주 평평해지고 점점 가기 쉬운 길이 됩니다.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우리의 업력이 강하기 때문에 수행을 조금이라도 하려고 하면 업력이 덜미를 잡게 됩니다. 수행을 자꾸 하게 되면 업이 조금씩 녹아 내리게 되면서 나중에는 탐ㆍ진ㆍ치로 흘러가는 불선한 마음의 힘보다 선한 마음이 더 강해집니다. 그러면 불선한 마음을 제압하는 게 쉽게 됩니다. 선한 마음보다 불선한 마음이 강할 때는 선한 마음이 불선한 마음을 제압하기가 힘들어서 힘이 들게 됩니다.

 

즐겁다는 것은 신심하고 관련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면 아무리 날씨가 춥고 험악한 경우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가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충만하면 수행의 길 자체가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신심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신심이 부족한 경우에는 상기도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런 경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심을 올릴 수 있는 행위들을 해 주어야 합니다. 가령 부처님의 덕을 기린다거나 이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라고 다시 한 번 반조를 해본다거나 그렇게 해서 신심이 향상이 되면 노력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심보다 억지로 노력을 해야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중도에 입각해서 균형 맞추어서 수행 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면에서 수행의 초기에는 약간의 고행과 무리도 들어갑니다. 고행이라기보다는 잘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니까 조금 힘듭니다. 어떤 분야든 새롭게 뭘 배울 때는 거북하고 자기 뜻대로 잘 안되니까 힘들지만 어느 단계를 지나서 좀 알게 되고 재미가 붙으면 괜찮아지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힘들더라도 자기가 세운 목표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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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호흡관법 시 마음이 편안할 때는 잘 되는데 불편할 때는 30초를 못 버티고 망상에 쏠려 다닙니다.

 

답변) 번뇌가 일어나서 힘을 받기 시작하면, 마치 큰 적이 오면 큰 무기로 상대를 해야 하듯이 오는 것이 큰 데 약한 것으로 상대를 하면 제압하기 힘듭니다. 갑자기 번뇌가 많이 일어날 때는 호흡만으로 막아내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들숨날숨 하나, 들숨날숨 둘…숫자를 세거나 좀 더 강력한 것은 숨을 들이키면서 하나, 하나, 하나, 하나…숨을 내쉬면서 하나, 하나, 하나, 하나…합니다. 또 숨을 들이키면서 둘, , , 둘…숨을 내쉬면서 둘, , , …… 여덟까지 세면 웬만한 번뇌는 제압이 됩니다.  

 

질문) 15-20분 정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여전히 탐ㆍ진ㆍ치 속에 빠져 있습니다.

 

답변) 번뇌가 상당히 크게 일어나셨나 봅니다. 조금 더 강력한 방법으로 화가 났을 때는 《자애경》을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어 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예전에 옴 마니 반메 훔을 수행할 때 이런 짧은 문구로 잘 안될 때는 《신묘장구대다라니경》같이 긴 경을 외웠습니다. 그 동안에 딴 생각을 하면 끊어지니까 긴 경은 큰 번뇌를 제압하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10번 정도 아주 빠르게 외우고 나면 번뇌가 가라앉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활용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자애경》에 나오는 말들이 전부 화를 없애기 위한 말들이기 때문에 화가 많이 날 때에는 속도를 빠르게 아주 빨리 반복해서 읽다 보면 화가 가라앉습니다. 또 다른 방법이 왜 화가 일어나는 지 그 원인을 추적해서 파악해 보는 것도 있습니다.

 

주로 어떤 식의 번뇌에서 잘 제압되지 않습니까?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와 같게 만족을 시키려는 욕심이 생기거나 타인이 자기 식으로 주장을 하면 제가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황에서 사마타(samatha, 선정) 수행을 하면 별 생각 없이 억누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어나게 하지 않으려고 누르려고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행이 노련해지면 일어나자마자 버릴 수가 있어 일종의 놓는 연습입니다. 대게는 이렇게 잘 안되고 억지로 누르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억지로 누르려고 하니까 근본적으로 치유가 잘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은 식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가 많은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왜 불가능한 지는 잘 아실 겁니다. 부처님께서도 중생 한 명을 제도하는 게 삼천 대천 세계를 발 위에 놓고 공놀이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사람 마음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다 있습니다. 나의 세계와 똑같이 맞추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사실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선은 상대방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서로가 양보하고 맞추어 나갈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나가야지 상대방을 전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 자체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마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 계속 재생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림과 다른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상대방도 나를 맞출 수가 없고 나도 다른 사람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역으로 보살님이 자신을 다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맞추려고 했을 때 잘 안될 겁니다. 서로가 똑 같은 입장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존재를 이해해 주면서 서로가 같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나가는 게 현명합니다. 차라리 달을 따 오는 게 쉽지 타인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답변) 소위 말하면 비슷비슷한 동업중생끼리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끼리는 잘 만나지지 않습니다. 생각이 비슷하고 전생부터 살아온 업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서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렇다고 똑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다른 점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똑같이 맞추어나간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도 사리불 존자는 지혜제일이고 부루나 존자는 설법제일로서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단지 두 분들이 가지고 있는 탐심이나 진심이나 어리석음이 사라진 것이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질문) 타 종교에 대한 스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답변) 대부분의 종교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던가 능력이 출중한 존재를 설정해서 그에게 의지해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는 타인에게 의지하는 게 기본 바탕이 되기 때문에 불교적 관점으로 궁극적인 해탈을 이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결국은 타인을 의지하는 것도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의지하는 존재도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도 내 마음이 믿어야 하는 것으로 마음이 믿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얘기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이 자기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그냥 믿고 따르는 게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믿고 따르는 게 가장 쉽고 일단은 위안이 됩니다. 이 모든 고통을 누군가에게 맡겨 두면 된다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지점은 단순히 이생에서 행복하게 살고 마음 편안한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끊임없는 이 윤회가 ‘고’라는 것을 먼저 통찰합니다. 근원적으로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차원에서는 단순히 믿는 것 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은 믿는 것의 주체는 나고 내 마음에 불순한 것이 있으면 믿음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는 번뇌가 없어져야 합니다.

 

질문)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는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되고 정신적, 육체적인 기운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런 것이 부족한 사람은 진입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답변) 불교가 원래 종교적인 요소가 없었는데 세월이 흘러오면서 이런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불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불상을 조성했는데 이런 것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변화해서 지금은 절에 가면 부처님께 우리 아들 뭐 해주십시오.”라고 빌곤 합니다. 사실은 부처님께서 그런 것을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해주실 수 있는 분이면 예전에 다 해주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못해주신 겁니다. 지금 그런 식으로 변화한 것도 부처님을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로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현재 지구상에 불교 인구가 약 5억 정도이고 기독교는 약 20억 정도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다가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어라’, ‘믿으면 천국 간다’라는 쉬운 논리로 접근하는데 불교는 죽어라 수행해야 되고, 아무래도 접근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부터 사성제를 통한 깨달음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와 비슷하게 보시 열심히 해라”, “이러이러한 행동을 잘 지켜라.” “이렇게 하면 네가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라고 하셨습니다. 천상 세계를 묘사해 둔 것을 보면 천국의 묘사와 거의 비슷합니다. 천국에도 하느님을 믿는 정도에 따라 받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천상 세계도 자신의 복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좌우에 500명 정도의 시녀를 거느린 왕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시녀로 태어나면, 인간계는 시녀로 태어나는 게 괴롭지만 왕과 복력의 차이이지 천상계의 시녀는 마음의 괴로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천상에 대한 묘사와 천국은 대개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에서도 이런 게 없는 건 아니었는데 우리나라는 특히 화두 공부하면서 깨달음에 대해서만 강조를 합니다.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예 의미가 없다고까지 얘기를 하니까 이로 인해 불교가 풍부하지 않고 폭이 좁아진 것입니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시만 많이 해도 천상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예를 들면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 존자가 천상 세계에 잠시 가 있었는데 어떤 재가자가 스님들을 위한 수도원, 즉 수행하는 장소를 보시하고 있었습니다. 목련 존자는 보시한 재가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천상에 그 사람을 위한 궁전이 지어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구경》에 나온 이야기인데 좀 허황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목련 존자가 이걸 보고 와서 부처님께 그런 복을 지었는데 살아생전에 이미 천상에 궁전이 지어질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 눈으로 확인하고선 왜 그렇게 물어보느냐고 답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렇다.”고 그만큼 긍정을 하셨습니다. 스님이나 수행자를 위한 장소에 보시하는 공덕은 살아생전에 바로 천상세계에 자신의 궁전이 지어질 정도로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초기경전에 보면 이런 법문도 많이 하셨습니다.

 

계율을 지킨 공덕으로는, 넝쿨 중에서도 마른 것 말고 살아있는 넝쿨은 비구가 계율상으로 자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비구가 호랑이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잡히지 않으려면 넝쿨을 자르고 도망을 가야 하는 데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넝쿨을 자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습니다. 그 공덕으로 바로 천상에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 어린애의 경우 살아생전에 별로 선업을 지은 것도 없는데 죽기 전에 부처님이 걸어오는 걸 보고 큰 신심이 일어났습니다. 신심 한 번 일으킨 공덕으로 아이는 바로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천국에 태어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도 기독교의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믿는 다면 천상 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의 《깔라마 경전》에 보면,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불교라 이름 붙이든 기독교라 이름 붙이든 사실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고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탐ㆍ진ㆍ치를 소멸하는 쪽으로 가면 그 자체가 선행이고 그것을 불교에서 하든 기독교에서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사 불교신자로 하는 행위라도 만약 불선한 행위를 하면 이건 그 자체로서 불선한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실제로 껍데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살아가는 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한쪽에는 스님이 살고 다른 쪽에는 창녀가 나란히 살고 있었는데 스님은 창녀를 보고서 항상 오늘 얼마나 즐거울까?”라고 상상을 계속 했었고 반면 창녀는 몸을 팔면서도 스님처럼 숭고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창녀는 몸을 파는 행위를 했지만 실제로 선한 마음을 계속 일으키고 오히려 스님은 옷은 승복을 입고 있었지만 감각적 욕망을 추구했습니다. 결국에 스님은 죽어서 지옥에 갔고 창녀는 천당에 갔다고 합니다. 껍데기보다는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개념이라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실제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라 이름을 붙이든 다른 이름을 붙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념의 세계에 얽매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똑 같은 일을 하는데도 개념 지어지면 내편이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개념에서 벗어나 실제 내용을 보는 마음을 기르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불교는 부처님이라는 깨달은 분이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꼭 부처님만이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깨달은 사람은 똑같은 이런 법을 설했습니다. 누군가가 나와서 진리 그대로를 드러내 준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말을 붙이든 안 붙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이 아니고 단지 이름에 불과합니다. 소통을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사람들은 이름에 얽매어서 서로 적이 되기도 합니다. 단지 기독교인이 아니래서 선하게 살아도 지옥에 간다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논리대로 하면 부처님도 지옥 가셔야 합니다.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쪽으로 가게 하면 올바른 길이고 오히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탐ㆍ진ㆍ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름을 뭐라 붙이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안 계셨으면 이런 법을 듣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께 존경심과 고마운 감사의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분께 진정한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분께 의지해서 그분만 쫓아다니고 이런 건 아닙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이 곧 천인입니다. 신이 있고 인간이 있고 그 다음 수라, 아귀, 축생, 지옥 이렇게 육도로 나누는데 도 육도 중에 한 존재입니다. 인간으로 볼 때는 신은 굉장히 능력 있고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신이라는 존재도 만약에 탐심이 있으면 여전히 중생입니다. 예를 들어, 천상 세계나 색계 범천에는 몸도 빛 덩어리이고 능력도 어마어마하고 수명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깁니다. 우리에겐 그런 존재가 능력도 출중하니까 정말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분도 수명이 있고 또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왕이고 존재라고 해도 수명이 다하면 육도 중에 한 곳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것도 윤회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 종교에서는 이런 존재들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답변) 불교에서는 신통을 하나의 변화하는 것으로 봅니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하다 보면 색계 4선정이라는 선정을 닦으면 신통을 닦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소중하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통이 중요한 게 아니고 신통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전생을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아직 번뇌가 소멸된 상태가 아닌 경우 결국은 이런 능력으로 돈벌이를 하게 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욕심이 다한 분이시기에 이런 능력을 중생을 제도하거나 해탈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번뇌가 있는 사람에게 이런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신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통을 닦는 것은 가능합니다. 《청정도론》에도 신통 닦는 방법이 나옵니다.   

 

 

질문) 소승에서도 《법화경》을 봅니까?

 

답변) 남방에서는 대승경전은 보지 않습니다. 남방에서는 빨리 어로 된 경전만 인정합니다. 《법화경》은 원본이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삶에서 고통을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탐ㆍ진ㆍ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는 어떤 불교에서든 동일합니다. 여기다 초점을 맞추어 공부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대승경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아무래도 초기경전을 더 신뢰합니다. 대승경전에서 부처님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실제와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초기경전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고 대승경전은 후대에 공부하신 분들에 의해 재편집된 것입니다. 대승경전은 비록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은 아니지만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정리되고 있습니다.  

 

남방불교는 공식적으로 '테라와다(장로의 가르침)'라고 합니다. 장로들에 의해 전승된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성철 스님의 백일 법문에서도 가르침의 핵심 중에 하나가 연기, 중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 담겨 있으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정리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대승불교를 공부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불교 여건에서는 기초가 약하기 때문에 초기불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깨달음만 강조하고 공, 공성을 강조하니까 인과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면 좋지 않은 과보를 받는다.”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까 함부로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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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여의주 | 작성시간 09.11.07 좋은 법문 감사합니다. ()
  • 작성자두루거사 | 작성시간 09.11.08 감사합니다
  • 작성자keizo | 작성시간 09.11.08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_()_
  • 작성자별빛 | 작성시간 09.11.25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공성을 강조하니까 인과에 대한 이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초기 불교로 기초를 단단히 하자는 말씀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돌아오는 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7.14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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