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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율시인

모던 포엠 詩作과 시인

작성자나타샤|작성시간26.06.13|조회수59 목록 댓글 0

모던 포엠 詩作과 시인

 

 

 

이채율

 

부산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

 

2016년 울산문학 신인상 당선

2019년 울산 詩 문학상 작품상

2024년 투데이 신문 신춘 당선

2024년 울주 이바구상, 이은방 문학상

2025년 독도문예대전 대상

2025년 한용운 문학상 대상

 

 

 

 

 

 

1. 채유리 달력/이채율

 

 

해오름달 감포 신라의 달밤 해안에서 해돋이 하는 달

 

시샘달 마를렌 디트리히처럼 댄디하게 칼스버그 한잔하며 무성영화 보고픈달

 

물오름달 영국 저 한적한 운하 마을 펍에서 지미 페이지 연주 듣고픈달

 

잎새달 옛날 통닭에서 먹은 통닭에 허릿살 도독 매일 훌라후프 50분 하는 달

 

푸른달 땅끝마을에서 초의선사와 약용과 참새 혓바닥 녹차 마시고픈달

 

누리달 등줄기 가난한 사람과 박물관 가서 청동빛 향완 반가사유상 보고픈달

 

견우직녀달 덜 멀쩡한 사내 어설픈 팔베개 하고 도스토옙스키나 읽고픈달

 

타오름달 야말반도에서 순록 유목민과 자라투스트라와 팥빙수 먹고픈달

 

열매달 영화 여로 데버러 커 제치고 수로프 소령 율 브리너에게로 유배되고픈달

 

하늘연달 소캐 뭉티 같은 남자랑 명촌 억새밭까지 걸어가며 쇠물닭 꽁지 개수 알아 마치기는 하는 달

 

미틈달 한물간 지하 회관에서 오브리 후레디 머큐리와 우중의 여인 부르는 달

 

매듭달 신유복김홍도와 내년 달력 만들며 고흐도 넣어볼까 의논하는 달

 

 

 

 

시작 노트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하나의 다짐을 하였다. 잊혀 가는 우리 말을 찾아서 시어로 쓰거나, 아름다운 고유어를 작품에 쓸 것을 다짐했다. 의외로 너무도 아름다운 우리말이 많은데 내 창작 실력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는 중이다. 인디언 달력이 있다길래 우리 고유어로 나의 열두 달 달력을 만들었다. 누구의 시간이 아닌 나의 달력이다. 세상이 지배해 놓은 규율에 따르지 않는 나만의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아직도 이런 꿈 같은 생각을 엉뚱하게 하는 난 영락없이 허튼소리만 늘어놓는 괘변론자이다. 그 괘변에 걸맞게 영화와 팝을 광적으로 좋아해서 그것에 살짝 빗대어 보았다, 모든 정서를 우리나라에 맞추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내게 맞는 시간과 경험하지 못한 걸 하고 싶어서 쓴 작품이다. 

 

 

 

 

2. 소드래/이채율

 

 

하늘이 사통해 낳았단다

 

상대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고 뭇 이야기만 나돈다

그물엔 걸리지 않지만 입에선

악의 꽃으로 핀다

 

저쪽 동네 어디에선 그걸 헛소문이라 부른단다

 

남 뒤꿈치 등짝 아무렇게 긁어대는 뒤바람

혼자 불어대기엔 허전해 자꾸 옆 사람 

끌어들인다

 

무좀같이 가려운 뒷담화 쫄깃쫄깃 바삭 맛있는 공갈 빵이다

 

찬 바람 부는 날 겨우 석 달이지만 

한뎃잠 입 돌아가듯

 

눈으로 보고 쪽박귀로 들은 것도 

광대 옷 빌려 입듯 너나없이

풍선을 좋아한다

 

옆 사람도 세상도 못 믿는 우린 

 

그간 세상에 의해 너무 많이 작업 당해온

입 삐뚤어진 영장류다

 

그건 아마 타인의 꽃에 현혹당해서 일 게다

 

군말 없는 햇봄에 뒷말 없이 동백 쪼아대는 

동박새 울음 허공에서 흩어진다

 

내일모레면 꽃망울 터질듯한데 입에서도 봄꽃이 피었으면

 

시작 노트

 

 

 서부 경남에서는 헛소문을 소드래라고 한다. 사투리지만 뜻보다 아름다운 시어이다. 제주도에는 소드래는 식당 이름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뜻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그냥 듣기에는 생소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어이다. 10년 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단어인데 예쁜 말이라 시로 써 보고 싶었다. 헛소문이란 그저 떠도는 말이지만 당사자는 상처받게 된다. 근거 없는 말은 되도록 자제했으면 하는데 잘 안되는 게 세상사다. 남의 말하는 것과 돈 쓰는 재미가 더없는 재미라지만 글 쓰는 바닥에서도 별의별 말 다 난무하니 글 조심 입 조심 해야겠다.  

 

 

 

 

3. 파릉/이채율

 

 

봄비 내리자

냉이는 빗방울 투레질이고

곤줄박이는 포릉 포르릉 이야

 

겨우내 살 오른 칡넝쿨

밭두둑에 슬그머니 제 거웃을 걸치다

고랑 긋는 괭이 소리에 화들짝 넘어지네

 

은죽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갓 움튼 들녘을 쏴쏴 마름질하는데

 

겨우내 된바람에 얼다 녹다 웃자란

내 다리는 밑동이 짧아도 튼실하고 달착지근해

 

시어머니 마무리 손놀림에

배부른 밭둑이 술렁이고

 

손끝 야물게 묶은 잎자루 붉은 시금치

다리통 굵은 경운기 속으로

납작 엎드리기 바쁘네

 

베트남에서 온 아오자이 새댁

파릇파릇 앳된 종아리 흙 묻은 반장화로

여린 이랑 속살 푸욱 푹 밟으면

 

저만치 어룽진 먼 산도  

파릉파릉 까치발 돋우네

 

 

 

 *시금치

 

 

 

 

시작 노트

 

 

 파릉은 菠薐菜파릉채로 쓰는 명아줏과의 속하는 시금치의 한자어다. 국내 시금치의 주 생산지는 포항, 제주, 고성으로 포항초, 공룡초라 부르기도 한다. 국제 결혼을 한 베트남 새댁이 포항 형산강 들녘에서 시금치 농사를 짓는 그 모습에 마냥 흐뭇했다. 그렇지만 젊은 이가 떠나고 없는 농촌에 외국 여인이 힘겹게 시어른과 시금치를 수확하는 모습에서 자국인인 난 편한 일만 찾아다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그녀가 친정에 생활비로 보낸 돈으로 집도 짓고 냉장고며 오토바이도 샀다고 한다. 딸이란 이역만리 있어도 살림 밑천인가 싶어 짠했다. 그래도 그녀의 웃음에서 하롱베이 같은 때 묻지 않은 순수가 느껴졌다. 그녀의 한국 정착과 K-며느리를 응원한다. 

 

 

 

 

 

 

4. 세이킬로스 비문/이채율

 

ὍΣΟΝ ΖΗ͂ΙΣ ΦΑΊΝΟΥ

호손 제스 파이누

 

ΜΗΔῈΝ ὍΛΩΣΣ ῪΛ ΥΠΟΥ͂

메덴 홀로프 쉬 뤼푸

 

ΠΡῸΣ ΛΊΓΟΝ ἘΣΤῚ ΤῸ ΖΗ͂Ν

프로스 올리곤 에스티 또 젠

 

ΤῸ ΤΈΛΟΣ Ὁ XΡΌΝΟΣ ΠΑΙΤΕΙ͂*

또 텔로스 호 크로노스 아파이테이

 

삶은 잠시니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길

 

삶에 고통받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길

 

인간은 젊은 시기 찰나와도 같기에

 

시간은 곧 덧없이 가버릴 테니

 

*

 

우린 생명 탄생부터 

인류 시초 직립보행 선사까지

 

머나먼 여정 거쳐왔어

 

헌터릭스 골든* 처럼 

우린 2000년 전에도 빛났어

 

가장 빛나는 시간은 언제나 지금이야

 

문명 요람부터 은하 탐험까지 

오늘도 가장 위대한 시작점이 당신이길

 

*그리스어: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악보와 노래

 Ὅσον ζῇς φαίνου μηδὲν ὅλως σὺ λυποῦ πρὸς ὀλίγον ἐστὶ τὸ ζῆν τὸ τέλος ὁ χρόνος ἀπαιτεῖ

**빌보드 1위 K-pop

 

 

 

 

시작 노트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악보 중에서 곡 전체가 온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것으로, 1883년 튀르키예의 아이든 부근에 있는 에페소스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악보와 노래를 재현했단다. 들어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리말로 유튜브 따라 하며 노래를 불러 봤다. 중간에 한 줄은 우리말로 된 게 없어 혼자 몇 시간을 희랍어 공부도 했다. 다하고 나니 어느 네이버 구석에 있기는 했지만 혼자 외국어 공부하는 맛도 있었다. 2000년 전 노래라 하니 더 예사롭지 않다. 인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죽고 나면 허망하니 현재를 즐겨야 한다. 모두는 자신을 사랑하며 빛나게 살길 바란다. 20대 때 난 뭐든 허무했다. 그래서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산으로 들어가고자 한 뜻이 있었다. 어떤 것에도 매이고 싶지 않았다. 살아보니 의미 없는 게 없고 아름답지 않는 게 없다. 살아 있는 모든 생은 아름다우니 현재를 사랑하길.

 

 

 

5. 삼짇날/이채율

 

 

진달래꽃 전 같은 날

 

언선스리 울어대던 뒤울이 물러가고

직박구리 버드나무 가지로 피리분다

 

관절 찾던 바람 횟수 잦고

먹빛이던 하늘 바다가 그리웠는지 파랗다

 

시룻번으로 봉한 봄볕

오도독오도독 씹던 떡시루 훈김 같다

 

3579 중양절

 

55 단오 옆지기와 물 창포를 보았고

77 칠석 띠동갑과 은하수 다리 걸을 건데

99 중일엔 함께 국화주 마실 수 있을까

 

뒤란 아지랑이 따라 꽃뱀 낮잠을 청한다

 

흰나빌 보면 상 당하고 노랑나빈 길하다는데 

낮에 텃밭에서 다 보았다

 

싱숭생숭하다

 

오늘 고추장 된장이나 삼삼하게 담궈야겠다

 

 

 

시작 노트

 

 

 삼월 삼짇날 화전놀이 하던 기억이 난다. 중양절이라 좋은 양기를 받자는 풍습이다. 요즘 기본이 80세라는데 무탈하게 지금 내 사람과 99는 갈 수 있을까? 요즘은 자꾸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55는 잘 넘어왔는데 77은 잘 넘길 수 있으려나. 기우다. 어느 날은 잠자고 있는 사람 속눈썹을 세어 본 적이 있었다. 서른세 개였다. 어느 구석 안 이쁜 게 없는 내 반쪽을 만나게 해 준 인연에 무한 감사한다. 하지만 이젠 노후를 준비할 나이에 들고 보니 얼굴 보고 대화하며 함께 숨 술 때 마냥 사랑하리라 한다. 다시 올 수 없는 생이며 다시 만날 수 없는 현재 인연에 대해 함께하는 모든 이들 행복하길.

 

 

 

6. 고슬*/이채율

 

 

파리한 한낮 눈꼬리 

찹찹한 볕살 따라다닌다

 

생채기 입은 저 무리 눈앞

풀빛 귀뚜라미 울음도 스친다

 

이 계절 여읨이란 낯 푸른 종족과 헤어짐이다

 

시간에 삭은 시간

갈바람 맥박을 찾아 기화하면서

나무 허릴 잘근잘근 밟고 여름을 건너왔다

 

서서히 무너지는 잎파랑이 몰락

혼잣말 하기 좋은 시간이다

 

혼잣말한다는 건 

외로움이 갈빛으로 물들었다는 말

 

그럴 땐 우린 

가슴 한편 자신만의 가을을 건국하고 

떠난 이들이 남겨둔 숨 한 움큼씩 마신다

 

허공을 흔드는 가지에서 나부끼는

음악방송 두 시의 데이트 노래

 

<슬픈 계절에 우리 만나요 해 맑은 모습으로>

 

떠나온 왕국으로 되돌아가는

하늘 종족 나그네새 돌단풍 목소리

몸까지 내준 처절한 이별 노래다

 

 

 

*가을:제주도 사투리

 

시작 노트

 

 

 우린 고독하지 않고 고립되고 있다. 고독은 철학적이라 그 지적인 단어에 우린 여태까지 가스 라이팅 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함에 젖어 온 건 고독이 아니라 고립이다. 옆에 가족 친구가 있어도 세상으로부터 고립 되어가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요즘 들어 혼잣말이 잦다. 늙는 가 보다. 가을은 고독을 상기한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1인 시대라 시도 때도 없이 혼자여야 한다. 그렇게 변해가고 있어 고독이라는 외로운 단어는 이제 외롭지 않다.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더니만 우리는 이제 외롭지 않게 익어가는 세대가 돼 고립되고 있다. 외로운 계절 가을엔 더 고립되고 싶지 않다.

 

 

 

 

 

7. 보리쌀 눈/이채율

 

 

초여름

속눈썹 다래끼는

널 오랫동안 못 봤다는 증거야

 

그리움이 숨을 쉰 풋 알갱이야

보고 싶음의 발자국이 굳은 밥물 덩이지

 

낟알이 날아와 함께 산 거라는데

너와 살지 않는 내게 널 보낸 거지

잃어버린 오톨도톨 눈물화석도 함께

 

눈물을 한 국자씩 자작자작 안친 햇 보리밥을

너와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고

우묵배미 보리쌀 눈인 널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하지만

 

가슴이 꺼끌꺼끌 보리모개 일 땐

여물지 않은 보리밥 알을 찾을 거야

 

속눈썹 사이에서 숨바꼭질인

말랑말랑한 널 만질 수 있을 거야

우린 간혹 숨은 이를 찾아 헤매지만

 

숙명적 만남이란

끌어다 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이즈막까지 살아 보니 알겠어

 

발 빠짐 주의를 해도 어쩌다 그 연에 빠지면 

아메리카에서도 아프리카를 만나고

몽골에서도 알래스카를 만나기도 하잖아

 

오늘은 어떤 맥립종麥粒種*을 만나게 될지

점심 보리밥이 궁금한 날 이야

 

 

*다래끼

시작 노트

 

 

 난 어찌 보면 운명론자에 가깝다. 달리 말하자면 인연설을 많이 믿는다는 뜻이다. 프랑스 학자 라플라스는 모든 건 태초부터 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고 했는데, 난 어느 정도 인연설도 여기에 해당한다는 주의자다. 아마도 내 정신 세계 일부분을 차지 하는 불교의 영향도 있다. 10대 후반부터 성직자의 길로 진로를 결정했을 때 부모님 반대가 있었고 20대는 그로 인해 많이 방황 했었다. 선방에 들어앉아 하나의 화두를 잡고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불제자가 되고자 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하는 말도 있듯, 이제 나는 시가 인연이 되어 지금 이 작품을 논하는 가 보다. 시도 내 인연의 한 부분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고 있으니, 이 보다 더 큰 인연의 바다가 또 있을까? 시인이 내 숙명이 된 지금 나는 쓰고 또 쓴다. 

 

 

 

 

8. 눈물을 볶아 먹기로 해요/이채율 

 

 

혼자가 된 한 점의 슬픔에

추억 몇 방울 두르고

울음 두 술 넣어 가만히 볶아요

 

그때, 

반짝이는 건 내 눈물의 뒷면이에요

수분을 건조 시킨 맑은 아픔

가슴에 털어 넣으며 젖은 우기를 걸어가요 

 

달빛은 실연한 달이 흘리는 눈물이에요 

세렝게티에 비를 내려보내죠

눈물 부스러기를 먹은 얼룩말은 

악어 목덜미를 물어뜯기도 한답니다

 

나는 3초에 한 번씩 눈을 깜빡여

온종일 1ml 비를 내리고 안구를 닦아요

액자 속에서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여인처럼

생이 사과라면 

막 지구로 출발하려고 하는

시간은 결코 먹고 싶지 않아요

 

디딜 곳 없는 가슴에 

연년이 눈물 나무를 심어 나 대신 울게 했어요

흐르는 건 괴롭지만 

흐르지 않는 빈 하루는 더 괴로워요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죽지요

나는 자정에서 새벽까지 

어두운 수정체 위를 걷습니다

 

 

 

시작노트

 

 

 팝 아트 화가 리히텐슈타인 작품 <눈물>에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 미술작품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눈물은 어떤 맛일까 싶은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무서움도 잘 없고 냉정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 말에는 감정과 감성이 메말랐다는 뜻을 포함한다. 혼자 걷고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약함을 보이기 싫어 태풍이 몰아치던 포항 해변을 10시간 걸었던 적도 있다. 나를 단련하기보다 던져버리고 싶었던 그날 내 눈물은 단맛이었다. 사과를 먹지 못하는 내 체질이 초가을 청 사과 같은 방황을 마무리하면서 바다로 뛰어들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헤매고 다니는 이 감정이 쏟아질 때 내 눈물이 입에 닿았다. 달디달았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후 쓴 작품이다.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9. 속눈썹을 붙이며/이채율

 

 

잠들지 못한 새벽의 흰자위를 비스듬히 들추고

나는 속눈썹을 붙이며

엄마에게로 망명하고 싶어 잠을 잡니다

 

핏기 없는 잠의 포대기 속으로 스며들어요

맨몸으로 골목을 훑으며

버려진 유년을 찾아 나선 나에게 

재가한 엄마란 자라지 않는 속눈썹과 같아요

 

뜬눈으로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마냥

네 살 적 젖비린내를 뻐끔거리면

속눈썹은 자라지 못한 지느러미가 되지요

난 간수에 폭 절어진 손두부 같습니다

 

시계를 찾지 못한 그날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엄마는 인조 속눈썹을 길게 더 길게 붙였고

밤이 자라지 않듯

난 보육원에서 가축화된 물고기처럼 놀았죠

 

속눈썹을 붙이면

엄마는 마다하지 못하고 온다고 했던가요

엄마는 바람 앞에서 

무수히 걷어 채인 멍든 밤의 가로등이었어요

 

몽고점 검푸른 빛이 더 짙어지는 오늘은 

엄마가 달개비꽃으로 아롱거리고

모두 잠들고 나만 깨 

윗목 깨금발은 더 높아지네요.

 

수년째 숨겨둔 속눈썹을 붙입니다

보육사가 건네준 요구르트를 마시며

솜털 같은 숨소리가 발효하는 창가에서

몽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시작 노트

 

 

 사 년 전에 일 년간 조카를 키웠다. 이혼한 고종사촌의 아이다. 외벌이로 남자가 혼자 초등 3학년을 뒷바라지할 수 없을 듯 해서 경기도 고양에서 데려와 함께 생활했다. 딱히 말하자면 입양한 사촌이니 혈연은 아니라도 인척 관계이다. 세상을 위해 내가 할 게 없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타인을 위해 한 게 없는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행한 일이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한 해 정도는 괜찮았다. 고아인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언제나 외로울 고孤, 나홀로 독獨이 얼굴에 새겨진 사람이었다. 그 둘을 생각해 쓴 작품이다. 아이는 훌쩍 커 중 1학년이 되었고, 그 남자는 정신 병과 치매로 요양원에 수년째 입원 상태다. 그리고 아이 아빠 사촌은 자살했다. 어찌 보면 셋 다 고아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린 정신적으로 모두 고아인 샘이다. 어찌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이 글을 쓰는 나도 외롭다. 우린 모두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간다.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는가? 스스로 달래는 것에 익숙해지길 바란다.

 

 

 

 

10. 허그 베어를 만나다/이채율

 

 

걸을 때 보도블록 경계선은 밟지 않아요.

미끄러지지 않게 발끝으로 걷고

건너뛸 땐 돌멩이가 발부리에 채이기도 하죠.

 

길가에 주저앉기도 하고

차도와 인도가 나뉘지 않은 도로에선

왼발 오른발 가는 방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평면 줄을 밟지 않는 건

매번 같은 식당 같은 자리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고

이웃과 눈인사를 섞지 않는 건

강아지는 강아지일 뿐이니까요.

 

그리움처럼 말랑한 시간이 따뜻해지면

우린 점점 굳어지는 간격을 따라 

까맣게 잊힌 계절을 가슴에 새겨넣습니다.

 

담장에 오도카니 걸려있는 빨간 우편함

누군가 잘못 보낸 수십 통의 우편물을

읽을 사람이 없다면 

 

발가락으로 지구본을 돌리며 순간 밟히는 대로

세계여행을 떠날 거예요.

 

태평양 어디에 사는 원주민의 안부를 물으며

분홍 장미를 안고 부유하는 우리에게 

허그 베어를 만나는 소원을 들어줄 거예요.

 

국경 없는 바다 유목민 바자우족처럼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서 걸으면 수십 미터 물속도 환해집니다.

 

발볼이 헐렁해진 경사 탓에

내 곁을 지켜보는 비스듬한 오늘이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유랑합니다.

시작 노트

 

 

  서울 어디 지하철 승강장에서 난동을 피운 사람을 제지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했지만, 소란은 여전하였다. 그때 젊은 청년이 다가와 가만히 안아 주었다. 경찰은 그 자리를 떠났다. 이내 조용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뒤로 많은 감정이 교차하였다. 용기 있는 그 청년과 누군가 따뜻한 가슴이 필요했던 한 사내는 우리의 모습이다. 한쪽 가슴을 내어줄 여유가 자꾸 없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린 너무 마음이 가난해지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분명 공감하지만 스스로 행할 용기는 없다. 언젠가 서울 한복판에 허그 베어가 등장한 적 있다, 허전한 우린 그 곰 인형에 위로받는 신세가 되었다. 사람은 사람의 숨결로 따뜻해지길 바라는데 그건 단지 머리에서 그려지는 단어일 뿐 행위는 멀어지고 있다. 손 편지가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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