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 | 길주공(박동망)- 박유- 박세헌(1남1녀)로 등재되어 내려오다가 임진보(2012) 2남1녀로 등재되는 오류 (수정)-복이
작성자박창서[昌緖]작성시간26.06.22조회수6 목록 댓글 2의견 | 길주공(박동망)- 박유- 박세헌(1남1녀)로 등재되어 내려오다가 임진보(2012) 2남1녀로 등재되는 오류 (수정)-복이
의견 | 길주공(박동망)- 박유- 박세헌(1남1녀)로 등재되어 내려오다가 임진보(2012) 2남1녀로 등재되는 오류 (수정)
복이 26-06-21 21:15 조회19회 댓글1건
※ 박태성의 후손이 가지고(보관) 하고 있다는 15세손은 박세식(朴世植)이 아니라 박세정(朴世楨)으로 정정을 합니다
반남박씨 세보 발행
1. 반남박씨 족보
(1차)임오보(1642년), (2차)계해보(1683년), (3차)병술보(1766년), (4차)을유보(1825년),(5차)갑자보(1924년), (6차) 무술보(1958년), (7차) 경신보(1980년),(8차) 임진보(2012년)로 총 8차에 걸쳐 발간 하였습니다.
(2차)계해보(1683년)족보 발행은 박세당(서계)1),박세채(현석)이 직접 참여하여 편찬한 족보입니다.
2. 원 인
(2차)계해보(1683년), (3차)병술보(1766년), (4차)을유보(1825년), (5차)갑자보(1924년), (6차)무술보(1958년), (7차)경신보(1980년)까지박세헌의 자식은 1남1녀로 등재되어 있으나, 무슨 근거로? 임진보(2012년)족보에 박세헌의 자식을 2남1녀로 등재를 하였는지 임진보 족보에 등재된 박태성의 등재는 오류입니다
3.박태성 반남박씨 족보 등재
| 족보 발간년도 | 이 름 | 생몰년도 | 족보등재 | 페이지 |
| (1차) 임오보(1642년) | ||||
| (2차) 계해보(1683년) | 박세헌(1남1녀) 子: 박태창 | 1633~1660 | 1권 117 | |
| (3차) 병술보(1766년) | 박세헌(1남1녀) 子: 박태창 | 1633~1660 | 3권 92 | |
| (4차) 을유보(1825년) | 박세헌(1남1녀) 子: 박태창 | 1633~1660 | 3.4권 210 | |
| (5차) 갑자보(1924년) | 박세헌(1남1녀) 子: 박태창 | 1633~1660 | 갑자보 2지 3권 (230) | |
| (6차) 무술보(1958년) | 박세헌(1남1녀) 子: 박태창 | 1633~1660 | 1,2권 424 | |
| (7차) 경신보(1980년) | 박세헌(1남1녀) 子: 박태창 | 1633~1660 | 1권 284 | |
| (8차) 임진보(2012년) | 박세헌(2남1녀) | 1633~1660 | 4권 1411 | |
| 子: 박태창 | 1653~1704 | 4권 1411 | ||
| 子:박태성 | 1655~1683 | 등재 | 4권 1421 |
위 도표를 보면 (2차)계해보(1683년), (3차)병술보(1766년), (4차)을유보(1825년), (5차)갑자보(1924년), (6차) 무술보(1958년), (7차) 경신보(1980년) 족보에는 박세헌(朴世櫶)은 1남1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329년이 지난후에 발행한8차 임진보(2012년)에서는 박세헌(朴世櫶)의 자식이 2남1녀의 박태창(朴泰昌)의 동생으로 박태성이 새로이 등재가 됩니다.
서계집 14권(저자: 박세당) 갈명 학생 박군 묘갈명은 박태창(朴泰昌)이 가장을 갖추고 와 족부 박세당에게 갈명을지어 주길
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료에서도 박태창의 자녀는1남 1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 서계집 14권
나. 사료와의 모순 (서계집 묘갈명)
《서계집(西溪集)》 권14 〈학생 박군 묘갈명(學生朴君墓碣銘)〉〈운계고: (雲溪稿)〉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해당 사료에는 박세헌의 아들 박태창(朴泰昌)이 직접 가상(家狀, 고인의일대기를 적은 글)을갖추어 당숙인 서계 박세당에게
아버지(박세헌)의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청한 사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묘갈명 본문에서도 박세헌의 자녀는 명백히 '1남 1녀'로 기록되어 있어, 박태성이라는 또 다른 아들의 존재는
당대 최고 친족의 증언 및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명백한 오류 혹은 가탁(假託)의 의혹이 있습니다.
다. 반남박씨 박유(朴楡, 처사부군)의 행적을 기록한 가장(家狀)
박유(朴瀏)의 손자인 박태창(朴泰昌)이 1698년(숙종 24, 무인년)에 가상(家狀)을 갖추어기록한 일차 사료입니다.
이 문헌은 박유의 생애와 성품뿐만 아니라, 당대 친족들의 자녀 관계(특히 박세헌의 자녀 수)를명확히 기록하고 있어
족보의 오류를 증명하는 결정적 근거가 됩니다.
3.“가장”사료의 기본 정보
제목: 선조(先祖) 처사부군(處士府君) 가장(家狀)/ 유사(遺事)
대상 인물: 박유(朴瀏)(자: 중위, 1605년 6월 15일 출생 ~ 1644년 12월 18일 사망, 향년 40세)
기록자: 손자박태창(朴泰昌)(1653~1704)
기록 시기: 1698년(무인년) 중하(仲夏, 한여름)
참고 및 찬수자: 현석(玄石) 박세채 선생의 제문 및 기록을 바탕으로 채록함.
가. 핵심 내용 및 논거
출생: 1605년(선조 38) 6월 15일 출생. 목사공(아버지 박동망)이 늦게 얻은 자식으로 매우 총애함.
성품: 천품이 단아하고 지기가 높았으며, 병자호란(1636년) 이후 명리를 멀리하고 위기지학(위선이 아닌 자신을 위한 학문)
에 힘씀.
사망 및 이장: 1644년(인조 22) 12월 18일 향년 40세로 사망. 철원 골파리에 장사 지냈으나, 43년 뒤(1687년경) 재해가
있어 그 산의 북쪽 기슭 건향(乾向)의 언덕으로 이장함.
박유(朴瀏)의 자녀: 3남 2녀를 둠.
① 장남 박세추(朴世樞): 사인(士人) 심모(沈某)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음
(이위에게 출가). -> (즉, 박세추는 아들이 없음.),
② 차남 박세장(朴世樟): 김모(金某)의 딸에게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음 (아들은 박태하(朴泰夏)).
③ 삼남 박세헌(朴世櫶): "세헌(世櫶)은 1녀를 낳았으니 지금 현직에 있는 승문원 정자 홍극제를맞았고,
1남은 태창(泰昌)이니 오늘날 병조정랑이다.
의의: 박유의 손자이며 박태창이 1698년에 직접 기록한 가장(家狀)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박세헌의 자녀는 명백히
'1남(박태창) 1녀(홍극제의 처)'뿐임을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2012년 임진보에 등재된 '박태성'이라는 인물은 이 당대 기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점의 모순: 새로 등재된 박태성의 생몰년은 1655~1683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698년에 박태창이 작성한 본 사료에서 박세헌의 아들은 오직 '태창(泰昌)' 1남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박태성이 실존한 친동생이었다면, 비록 1683년에 먼저 사망했더라도 '작고한 차남' 등으로 반드시 기록되었어야 합니다.
사료의 최우선성: 이 가장은 당대 인물인 박태창이 가문의 어른들과 현석 박세채 선생의문집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정직하게 작성한 '일차 사료'입니다.
후대(329년 뒤)에 아무런 근거 사료 없이 족보에 끼워 넣은 기록은 이 당대 기록을 이길 수없습니다.
결론: 박세헌의 계보에 박태성을 추가한 것은 일차 사료인 《선조 처사부군 가장》 및 《서계집》과 운계고: (雲溪稿)〉
정면으로 배치되므로, 박태성의 등재를 삭제하고 원래의 '1남 1녀'로 환원해야 마땅합니다.
나. 선조(先組) 처사부군(處士府君) 가장(家狀)
선조 처사부군(박유) 가장(家狀)
사료 정보: 박유(朴瀏, 14세 처사부군, 1605~1644)의
손자인 박태창이 1698년(숙종 24) 현석 박세채 선생의
제문 등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작성한 일차 사료입니다.
인터넷(네이버) 국역 국조인물고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핵심 내용: 사료에 기록된 박유의 삼남 박세헌의 자녀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헌(世櫶)은 1녀를 낳았으니 지금 현직에 있는 승문원 정자 홍극제를 맞았고, 1남은태창(泰昌)이니 오늘날 병조정랑이다."
시점의 모순: 임진보에 새로 등재된 박태성의 생몰년은 1655~1683년입니다. 만약 박태성이 박세헌의 실존한 친아들이자
박태창의 동생이었다면, 1698년에 박태창이 이 가장을 작성할 때비록 먼저 사망했더라도 '작고한 차남' 등으로
반드시 기록했어야 합니다.
요약내용:
고조부, 고조모, 증조부, 증조모, 조부, 출생, 유년시절,학업과성품, 어머니에 대한 효성, 시대적배경 세속에 대한 태도, 장지와 이장기록, 인품에 대한 총평,당대의 평가와 처사칭호, 안동권씨의 가계도와 몰년, 자녀와 후손기록, 기록의 출저에 대한 주석(박유, 박세장, 박세헌), 제례에 임하는 정성과 엄격함,기록의 출저와 작성배경, 사실확인의 어려움과 채록의과정, 기록의 목적과 공의 비범함, 아버지의(박세헌) 학업과 혼인, 병환과 별세, 성품에 대한평가, 본인의 인품과 평가, 자기수양, 평소생활태도, 대인관계와 효행, 학문과 재능(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바로 태창입니다) 거주지: 파주부곡리, 용인포곡리, 한양
자손기록, 어머니정씨부인기록, 외가, 출생, 출생과 혼인 정성어린간병, 사별의 아픔, 홀로되신 후의 삶, 노년과 별세, 장례와장지, 어머니의 인품, 자비와구제,덕성과 인품, 재능과 솜씨, 엄격한 교육, 어머니의 헌신적인 모성애, 가난속의 뒷바라지, 현석 박세체의 문화에 들어간은 어머니의 명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과거에 대한 태도, 정치적상황, 자애로운위로, 어머니와의마지막이별, 급작스런은 상사, 못다한 효도에 대한회한,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책, 어머니의 진실된 덕성,아버지의 절개, 연이은 부모상의 아픔, 늦깍이 급제, 반남박씨 가문의 기록, 저자의 생애 마무리, 임소에서의 최후, 가문의 자부심, 숙부의 성품(박세장),형제간의 지극한 우애, 기문의지조, 위민행정, 당파싸움에 대한 경계, 언관으로서의 공정함, 박세장의 아들 박태하의 행적, 사후양자, 장지이동, 박태장의 둘째아들을 박세장아들 박태하에게 양자를 보냈다는기록,“猶子(유자):형제의 아들, 즉 조카를 친아들처럼 여기며 부르는 말입니다. 앞서 보셨듯이 태창은 공(태하의 아버지)에 의해 아들처럼 길러졌기에 자신을유자라고 칭하며 행장을 기록, 박태하의 생몰연대, 가계,배경, 성품, 가족사, 백부(박린)에 대한 정치적 변화와은거, 경신환국이후 복직, 행정능력의 인정, 지방관이력, 민유중의신임 영천군수, 장지, 학문적 계보, 소박하고 호탕한 인품, 행정개혁가로서의 면모(박세량)행적 - 백부의 아들
라. 운계고: (雲溪稿) 편찬배경과 중요한 사료 자료
《운계고》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박태창(朴泰昌)의 문집으로, 그의 가계(반남 박씨)와 선조들의 행적, 그리고 본인의 생애와 사상을 담고 있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특히 이 문집에는 고조부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내력, 부모(박세헌: 정씨 부인)에 대한지극한 효성과 애도, 그리고 숙부 박세장(朴世長)과 사촌 형제들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조선 사회와 사대부 가문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사료로써 큰 가치를 지녔다 할것입니다.
1) 직계 선대 및 거주지
거주지 변천: 파주 부곡리, 용인 포곡리, 한양을 중심으로 세거(世居)하였습니다.
배경 가문: 안동 권씨 및 반남 박씨 가문의 기록이 교차하며 혼맥과 가계의 변천을 보여줍니다.
2) 고조부·증조부·조부 기록
학업과 성품: 대대로 유교적 가학(家學)을 계승하며 청빈함과 올곧은 성품을 유지했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처사(處士) 칭호: 당대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처사로서의절개를 지킨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3). 자녀 및 후손 기록
박유 부인 안동 권씨(현감 권흡의 딸이자 판서 권징의 손녀)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세추(世樞): 사인 심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고, 그 딸은 사인 이위 (李潿)에게 시집갔다 (아들이 없었음).
차남: 세장(世樟):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지냈다. 현감 김씨의 딸에게 장가들어아들 태하(泰夏)와 네 딸을 두었다. 사위로는 이언위, 이항(동평군), 이세즙, 이만직이 있다.
삼남: 세헌(世憲): 아들 태창(泰昌)을 두었고, 딸 하나는 승문원 정자 홍극제(洪克濟)에게 시집갔다.
장녀: 사인 김상견(金尙堅)에게 시집가서 아들 만갑(萬甲)을 두었다.
차녀: 학사 방세정(房世貞)에게 시집갔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을 모두 합치면 30여 명에 달한다.
4).아버지: 박세헌 (朴世獻)
학업과 혼인: 반남 박씨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정진하였으며, 초계정씨 가문과혼인하였습니다.
병환, 별세 및 사인(死因)
질병 치료 및 임종 기록: 박세헌은 겨울, 옆구리 아래에 맺힌 증상(종기나 통증)으로 인해 약물치료를받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졸(卒)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의술의 한계와 갑작스러운 임종 상황이 담담하면서도 비통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저자가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극진한 회한이 문집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성품 및 자기수양: 평소 엄격한 자기수양과 대인관계에서의 도덕성을 중시하였고, 자손들에게큰 모범이 되었습니다.
5). 어머니: 정씨 부인 (貞夫人 淸州 鄭氏)
출생과 혼인 및 사별: 가난 속에서도 정성을 다해 가정을 일구었으며, 남편과의 사별 후 겪은 아픔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인품과 헌신:
자애로운 위로와 가난 속 뒷바라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 교육에 헌신 했으며,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잇게 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명에 따른것 이었습니다.
노년, 별세 및 장례:
급작스러운 상사와 자책: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과 못다 한 효도에 대한 절절한 회한(諸生의 아픔)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졸지에 상을 당한 후의 장례 절차와 장지 이동 기록이 상세합니다.
6). 저자 본인: 박태창 (朴泰昌)
학문과 재능: 학문에 힘써 늦깎이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과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정치적 상황 및 처세: 당파 싸움에 대한 깊은 경계심을 가졌고, 언관(言官)으로서 공정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말년과 최후: 임소(任所)에서의 생을 맞이 하기까지 가문의 자부심과 선비의 지조를 잃지 않는삶을 살았습니다.
7). 숙부 박세장(朴世長) 및 가문의 후손 기록
박세장의 행적과 성품: 형제간의 우애: 형(박세헌)에 대한 지극한 우애와 의리가 돋보입니다.
위민행정 및 성향: 청렴결백한 기풍과 함께 백성을 위하는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복직하여
행정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인터넷(네이버)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 백과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8). 사촌 형제 및 양자 기록 (박태하·박태창)
박태하(朴泰河): 박세장의 아들로, 청렴한 관리로서의 행적과 생몰연대, 가족사가 전해집니다.
양자 관련 핵심 주석 (猶子에 대한 기록):
유자(猶子)의 의미: 본 문집에서 박태창은 자신을 '유자(형제의 아들, 즉 조카를 친아들처럼 여기는 호칭)'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태창이 백부(박린) 및 숙부(박세장)의 영향 아래 사실상 친아들처럼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양자 출계 기록: 박태장의 둘째 아들을 박세장의 아들인 박태하의 양자로 보냈다는 구체적인입후(立後) 기록이 남아 있어,
가계의 대를 잇고 가문을 보존하기 위한 당시의 가족사적 결정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9). 백부의 아들 박세량의 행적 및 가족관계
“태창이 임자년(1672년)에 공을 따라 신창 관아에 있었는데, 특별히 엿본 바가 있었다” 라고기록이 되어 있는 바에 따라
박태창의 왕래와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박세량의 가족관계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
■ 사료적 가치 및 주석 기록의 특징
기록의 출처 및 작성 배경: 박유(朴裕), 박세장(朴世長), 박세헌(朴世憲) 등 선대부터 내려온기록을 바탕으로 편찬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채록 과정의 엄밀성: 사실 확인의 어려움(세월의 경과로 인한 자료 소실 등)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담기 위해 채록
과정을거쳤음을 운계고 내용에 밝혀두고 있습니다.
제례와 효행: 조상을 모시는 제례에 임하는 정성과 엄격함이 가문의 규범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동보족보, 《선조처사부군 가장》및《서계집》,《운계고》기록에는 오직 '박태창의 자식은 “1남1녀”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도표# 1 반남박씨 족보 년도별 박세헌(朴世櫶(1남1녀)
라. 박태성 후손인 25세손 박태서 생전에 가지고 있던(소장한) 가첩
위 25세손 박태서집안에서 보관중인 가첩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세 박동망(2남1녀)(1566년~1616년) --14세 린(潾)(3남5녀)(1594~ 1665년), 세정, 세량, 세식
14세 유(瀏)(3남2녀)(1605년~1644년) 세추, 세장, 세헌
15세 세정(世楨)(1629~1699)(无后)-- 16세 ---- 박태성
15세 세헌(世櫶)(1남1녀)(1633~1660)-- 16세박태창(朴泰昌)(3남1녀)(1653년~1704)
박태창의 가계도의 근거 ((2차)계해보(1683년), (3차)병술보(1766년), (4차)을유보(1825년), (5차)갑자보(1924년),(6차) 무술보(1958년), (7차) 경신보(1980년))
13세 동망 – 14세 – 박유 - 15세 세헌 – 16세 박태창
반남박씨 족보 년도별 박세정(朴世楨)
그 자손이 대를 잇지 못하고 끊어졌음 (无 (무): 없을 무, 后 (후): 뒤 후)
박태성의 후손인 25세손 박태서가 가지고 있는 가첩에는 분명하게 15세 박세헌의
자식이 아니라 백부 큰집인 15세 박세정(朴世楨)의 자식이라고 가첩에 명시되어 있으나 반남박씨 족보인 계해보(1683)1권 114p에(无后)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현 임진보(2012년) 족보에 박세헌의 자녀(2남1녀)라고 명시되어 있고, 박태창의 동생으로 임진보(2012년)에 등재되어 있는
박태성은 잘못된 족보 오류 등재라 할 것입니다.
4. 현 임진보(2012년)의 핵심 오류
자손 수의 임의 조작: 역사적으로 1남1녀(외아들 박태창)였던 15세 박세헌의 자손을 임진보에서 '2남 1녀'로왜곡 했습니다.
계보의 귀속 오류: 15세 박세정의 아들인 16세 박태성을, 생면부지인 박세헌의 하위 계보(차남)로 잘못 이첩하여 등재했습니다.
가첩과의 불일치: 당사자 후손인 (25세 박태서) 소장 가첩에 '박세정의 자식'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음에도,이를 반영하지 않고 박세헌의 자식 1남1녀에서 2남1녀로 박태창의 동생으로 계보를 왜곡하였습니다.
5. 가첩(家牒)에 명시된 가계 (박태서 소장(보관))
박태서 양이 소장(보관)한 가첩에 따르면, 16세 박태성(朴泰星)은 15세 박세헌의 자식이 아니라 15세 박세정(朴世禎)의 자식으로 되어 있으나 계해보(1683)1권 114p에(无后)무후라고명시되어 있습니다.
13세: 박동망 (1566년 ~ 1616년)
14세: 박 린 (1594년 ~ 1665년)
15세: 박세정 (1612년 ~ 1637년) 계해보(1683)1권 114p에(无后)
16세: 태성(泰星) ?
직계 가계 (16세~25세):16세 박태성 — 17세 필신 — 18세 사인 — 19세 영원 —
20세 종근 — 21세 춘수 — 22세 제공 — 23세 전양 — 24세 승천 — 25세 태서—26세손 찬훈
가. 역대 주요 족보(세보)의 기록 (2차 ~ 7차)
1683년(계해보)부터 1980년(경신보)까지 오랜 기간 발간된 주요 족보들은 15세 박세헌의 자녀를 '1남 1녀'로, 그의 외아들은 16세 박태창으로 일관되게 기록해 왔습니다.
해당 족보:2차 계해보(1683), 3차 병술보(1766), 4차 을유보(1825), 5차 갑자보(1924), 6차 무술보(1958), 7차 경신보(1980)
기록된 가계:13세 동망 — 14세 박유 — 15세 세헌(世櫶, 1633~1660) — 16세 박태창(朴泰昌, 1653~1704) 약 300년
동안 발간된 6차례의 대동보(세보) 어디에도 박태성이 박세헌의 아들이나 박태창의 친동생으로 등재된 바가 없습니다.
나. 현 임진보(2012년)의 오류 및 문제점
2012년에 발간된 임진보에서는 기존의 역대 족보 기록과 당사자 박태서가 소장하고 있던 가첩의내용과 계해보(1683)1권 114p에(无后)무후 라고 명시한 상이한 차이가 있으며,박세헌의 자녀를 '2남 1녀'로 임의 변경하여 박태성을 박세헌의 차남(박태창의 동생)으로 이첩하여 등재 하였습니다.
6. 핵심 오류
자손 수의 임의 조작: 역사적으로 1남 1녀(외아들 박태창)였던 15세 박세헌의 자손을 임진보 에서 '2남 1녀'로 왜곡했습니다.
계보의 귀속 오류: 15세 박세정(朴世楨)의 아들인 16세 박태성을, 생면부지인 박세헌의 하위 계보로 잘못
이첩하여 등재했습니다.
가첩과의 불일치: 박태성의후손인25세 박태서 소장 가첩에 박세정(朴世楨)의 자식은 계해보(1683) 1권114p에(无后)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이를 반영 하지 않고 박태창의 동생으로 계보를 왜곡되어 있습니다
7. 결 론
"현 임진보(2012년)에 박태성이 박세헌의 아들이자 박태창의 동생으로 명시된 것은 명백한 오등재(잘못된 등재)입니다.
근거가 불분명한 자료로 등재 임진보(2012년)의 기록보다, 300년간 일괄되게 유지되어 온 문중의 역사적 대동보
(2차~7차보) 기록, 당대 일차 사료인《선조처사부군 가장》및《서계집》, 《운계고》- 저자: 박태창, 그리고 가첩에
15세 박세정(朴世楨)후손 이라고 보관온 가첩과 계해보에 무후라고 명시한 내용을 비교해 보면 어느 부분이
올바른 팩트임을 증명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박태성의 본래 아버지를 15세 박세정(朴世楨)으로 되어 있으나 계해보(1683)1권114p에(无后)로 되어 있으며
박세헌의 가계를 원래의 1남1녀로 환정(還定)해야 마당합니다.
댓글목록
| 작성일 26-06-22 09:02 |
위에 거론된 부분은 차치하고, 임진보 기록을 살펴보니....
16세 박태성(泰成) : 증통훈대부 공조참의 (배)증숙부인 해평윤씨
= 추증 공조참의는 통정대부 품계여야만 하고, 그래야 부인이 증숙부인이 된다.
또한 아들이 증가선대부라면, 그 아버지는 증통정대부라야 하는데, 증통훈대부는 엉터리.
17세 박필신(弼信) : 증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사
= 오위도총부에는 도총사라는 직책은 없다. 도총관 / 부총관 / 경력 / 도사 만이 있을 뿐이며,
지방 군직에 병마도총사라는 직책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것도 엉터리.
18세 박사인(師仁) : 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천마진 병마첨절제사 (배)숙부인 영암이씨
= 남편이 종2품이면 부인은 정부인이어야 하므로 이것도 엉터리.
관직을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받았으면 기록을 끝내야 하는데, 지방 목사 또는
도호부사가 겸직하는 병마첨절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는 것도 엉터리
전체적으로 박태성-박필신-박사인 세사람은 한국한중앙연구원 역대인물정보(사마방목/문과방목/무과방목)에
나타나지 않는 가공의 인물로 판단됩니다.
아울러 22세 박제경(齊敬)은 무과급제라고 임진보에 적혀있으나, 무과방목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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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창서[昌緖]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2 new
允中
작성일 26-06-22 09:02
위에 거론된 부분은 차치 하고, 임진보 기록을 살펴보니...(이하는 문장이 길어서 본문에 기록 합니다.) -
작성자razorsharp(勝) 작성시간 26.06.22 new
이런
의심스러운 연접(連接)이 아주 많이 발견됩니다.
어떤 특정 유명 인물 후손 계보에 많이 접합(接合)되어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어떤 계파는 의심스러운 연접이 특히 많고,
어떤 계파는 의심스러운 방주가 특히 많고 . . . . . . !!!
"명문(名門)/"국반(國班)"이라 자칭하면서
하는 행위는 전혀 그 반대인 듯합니다.
깨어 있는 종원 제현님들!!!
선조를 욕보이고
후손들을 기만하는
이 낯부끄러운 사기 행각을 즉시 차단하고
지금 당장 진실을 찾아 나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