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56이동
토마스 만 저 / 홍성광 역 | 민음사 |
2001년 11월 30일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에 의해 노벨상을 받았다.
곡물도매상 뤼베크시의 고향집의 백년간 4대에 걸친 몰락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스트.
시민적 삶과 예술가적 삶의 이원성.
이 두 문장이 이 책을 설명하는 가장 적당한 말이 될 것이다. 토마스 만의 대하소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이 백년만에 한국에 왔다.
토마스 만은 스물다섯살 때 이 소설을 발표하고 쉰셋이 되어서야 역시 이 것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작가에게 세월이라는 건 때로는 성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영원한 가치인가 보다.
윤상섭의 '삼대'와 비교분석되는 이 책은 19세기 독일 시민 사회의 전형적인 연대기를 그리고 있다. 한 도시 귀족적인 상인가문의 몰락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좀 슬프지만 그것이 바로 앞서말한 비판적 리얼리즘이며 저번에 흐르는 데카당스한 분위기 묘사가 토마스 만의 특징이다.
시대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물흐르듯하면서도 극적이다. 이 책에서도 역시 그러한 흐르는 강물의 드라마틱함을 만끽할 수 있다.
명예와 부를 모두 얻고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1대가 2대 3대를 거치면서 혼란스러운 사회 변화 속에 4대에서는 부덴브로크가에 아들이 모두 사라지고 쇠퇴하는 과정을 장대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인간 저 내면의 욕망과 사랑,의무와 책임에 대한 테피스트리를 짜나간다. 촘촘한 테피스트리의 짜임새만큼이나 정밀하게 인간의 내면과 사회환경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 토마스 만의 필력은 책2권이 이르는 분량을 읽어나가는 동안 지루함을 느낄 수 없게한다.
독일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사회와 가문에 대한 의무와 권위의식에 대한,한편으로는 타인을 사랑하고자하는 혹은 인정받고자하는 욕구와 예술에 대한 정열을 대치시켜가면 한 혈통의 4대에 이르는 파멸과정을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의 우리는 정서적인 아이큐를 높여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다른 한편으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는 사회 지도층에 대한 비판을 하고있는게 현실이다. 그런 시점에 토마스 만의 소설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야지만 격변의 시대에 온전히 살아남을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출판사 리뷰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싹튼 원초적 갈등을 형상화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
시민적 삶과 예술가적 삶의 이원성은 만이 주로 다루는 주제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도 시민성과 예술성은 첨예하게 대립을 이루고 있다. 작가에게 예술가적 의식은 <상인 세계의 미덕들, 성실성이나 정직성, 시민적 계급의식, 정치적 보수주의 등의 특징들>과 대립되는 것이다. 건강한 시민 의식을 소유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요한 부덴브로크(1대), 그를 잇는 인물 장 부덴브로크(2대)가 시민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이들을 통해 성숙한 시민의식은 토마스(3대)에 이르면 혼란을 맞이하게 되고 하노(4대)에 이르면 파멸을 맞게 된다. 토마스와 하노를 통해 누대에 축적된 시민적 질서는 마감되고 가문이 몰락해 가는 것이다.
토마스는 심미적이고 데카당스한 충동을 지닌 반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시민 생활에 대한 동경 또한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예술 의지에서 나오는 데카당스한 측면을 시민적 삶이 지닌 미덕들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 이 극복 의지는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발현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에게 긴장과 압박감을 더해 준다. 결국 그의 내면에 들끓는 데카당스한 욕망과 시민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점점 더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그의 모습은 점차 시민이 아닌 시민의 역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으로 전락해 간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과된 시민적 생활 방식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토마스는 죽음을 예감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통해 건강한 시민 의식은 막을 내리고 쇼펜하우어에서 니체까지 이어지는 능동적 니힐리즘의 정신적 지류가 소설의 후반부를 지배한다.
아버지 토마스가 자신의 예술가성을 억압해 시민적 이상에 도달하려는 삶을 살았던 반면, 아들 하노는 자신의 예술가적 기질과 동경을 억제하지 않는다. 하노의 예술가 기질은 일상 생활에서도 그대로 표출된다. 그는 학교에서도 시민적 사업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나 성향을 키우지 못한다. 특히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비극적 음악, 화음을 벗어나는 모순 기법 등에 열광한다.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성질상 <도취, 망아, 몰락으로의 욕구, 에로틱 및 방종>과 연관되어 있다. 그를 통해 몰락에 대한 예감이 분명해진다. 그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예술가로서의 삶이며 그곳을 향한 출구가 요원함을 깨달았을 때 하노는 쉽게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럼으로써 부덴브로크 가의 남자는 모두 사라지고 도시 귀족적 시민 계급의 몰락이 예견되고 있다.
가족사 소설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사회 소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인물, 토니--토마스의 여동생--를 통해 가족의 출생, 세례, 결혼, 이혼, 죽음, 상업적 성공 및 실패 등의 요소를 완벽에 가까운 묘사로 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가족 소설의 모델에서 보자면 여타의 소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가족 소설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데에는 1848년 3월 혁명과 자본주의의 확장과 더불어 위협받는 시민성의 문제를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그려낸 데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이 처음으로 출간되었을 때 뤼벡 시민의 커다란 반발을 샀는데 그 까닭은 혁명을 일으킨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 대해 부덴브로크 영사(2대)가 취한 보수반동적 입장이 뤼벡의 유산자 계급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또한 하노를 통해 묘사되는 학교 장면은 프로이센적인 교육방식의 문제점을 독일 소설 가운데 최초로 신랄하게 꼬집음으로써 이후 학교 교육이 개선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Thomas Mann
1875년 북독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은 곡물상이자 시의회 의원이고, 어머니 율리아는 반은 포르투갈계이고 반은 크레올계인 남부 출신으로, 그는 아버지에게는 북독일적인 이성과 엄격한 도덕관을,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남국인의 정열과 예술적인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순]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토마스 만의 유년 시절은 부유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회사가 정리되면서 가족들은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된다.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토마스 만은 일찍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1893년에는 산문 습작을 했으며, 자신이 발간하는 『봄의 폭풍우』지에 글을 기고했다. 토마스 만은 다니던 김나지움을 그만두고 가족이 이미 1년 전에 이주한 뮌헨으로 가서 화재 보험 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하지만, 곧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1895년에서 1896년까지 뮌헨 공과대학에서 미학, 예술 문학, 경제 및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시절, 김나지움 시절부터 이미 그를 사로잡았던 슈토름, 헤르만 바르, 폴 부르제, 헨리크 입센 등을 탐독하였고, 직접 『짐플리치시무스』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1년 첫 장편소설 『부르덴브르크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무렵 단편소설들을 모아 단편집『토니오 크뢰거』(1903)도 발표하였다.
1905년 뮌헨 대학교 수학 교수의 딸인 카타리나(카챠라는 애칭으로 불림) 프링스하임과 결혼하여 3남 3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토마스 만의 두 여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듯이, 아들 클라우스 만이 자살했고, 막내 미하엘 만도 신경안정제 과용으로 의문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다가 남편을 잃은 모니카 만은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12녀 폐병 증세가 있어 부인이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문병을 간 토마스 만은 그곳의 분위기와 그곳에 체류하는 손님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느낀 인상에도 매료되었는데, 이런 체험을 글로 쓰기 시작, 점점 방대해져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마(魔)의 산』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창작을 중단하고, 평론집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1918)과 같은 정치 평론을 발표했다. 전쟁 초기 독일 문화와 독일 시민 계층의 와해를 걱정하며 국수주의적 입장을 보이며 형 하인리히 만과 불화를 겪게 되지만, 평론「독일 공화국」(1922)을 통해 민주주의와 시민 계급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던 중 1929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1931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이후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작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33년 바그너 서거 50주년이 되던 날, 토마스 만은 뮌헨 대학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성]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끝으로 그는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35년에는 나치 정권에 대해 공개 반박을 하기에 이르렀고,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어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기념 강연 청탁으로 16년 만에 독일 땅을 밟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토마스 만은 현실의 공산주의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인 사회적 평등을 존중했다. 그래서 구동독 정권에 대해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매카시 위원회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이에 환멸을 느낀 토마스 만은 1952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다. 1955년 동독 및 서독에서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강연을 하고, 고향 도시 뤼베크의 명예시민이 되어 스위스로 돌아왔지만, 혈전증 진단을 받아 8월 12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취리히 근교 킬히베르크 교회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키 작은 프리데만 씨Der kleine Herr』(1897),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Buddenbrooks』(1901), 「트리스탄Tristan」(1903), 「굶주린 사람들Die Hungernden」(1903), 「글라디우스 다이Gladius Dei」(1903), 「토니오 크뢰거」(1903), 「신동Das Wunderkind」(1903), 「벨중족의 혈통」(1905), 「피오렌차Fiorenza」(1906), 「대공 전하」(1909),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1912), 「주인과 개Herr und Hund」(1919), 『마의 산Der Zauberberg』(1924), 「무질서와 젊은 날의 고뇌」(1926)등이 있으며, 『요셉과 그의 형제들』(1943)는 1926년에 쓰기 시작해서 1943년에야 비로소 완간되었다.
또한 『바이마르의 로테Lotte in Weimar』(1939), 『파우스트 박사Doktor Faustus』(1947), 『선택받은 사람』(1951), 「속은 여자Die Betrogene」(1953)가 있으며, 1910년부터 쓰기 시작한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Die Bekenntnisse des Hochstaplers Felix Krull』은 1954년 [회상록 제1부]라는 제목이 덧붙여져 출간되었으나, 결국 이 소설은 그의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역 : 홍성광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마의 산> 의 형이상학적 성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중단편 소설집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카프카의 『성』, 『소송』, 중단편 소설집 『변신』,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하이네의 『독일·겨울동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