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세공사로 출발했던 라파엘로의 부친 조반니 산티는 페데리코 가문을 위해서 일하던 궁중 예술가였다. 페데리코 공작 부부의 초상화(우피치 미술관 소장)를 그렸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작품을 제작할 당시 조반니 산티의 집에서 기거했다.
1483년에 태어난 라파엘로는 부친의 화실에서 미술에 입문했을 것이다. 티모테오 비티라는 무명의 화가에게서 도제 생활을 잠시 했지만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움브리아 화단을 지배하던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4)였다. 베로키오의 화실 출신으로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어깨를 겨누던 탁월한 화가였다. 라파엘로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우르비노의 은행 길드의 주문을 받고 피렌체에서 이주해온 페루지노를 처음 만나게 된다.
스승을 아예 무시했던 미켈란젤로와 달리 라파엘로는 착하고 충실한 페루지노의 제자였다. 단박에 스승을 능가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언제나 스승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볼로냐 국립 박물관에 스승 페루지노와 제자 라파엘로가 그린 비슷한 주제의 그림이 한 장소에 비교 전시되어 있는데, 페루지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기분 나쁠 정도로 제자의 그림이 스승의 실력을 능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파엘로는 페루자와 아시시에서 몇몇 작품 주문을 받고 활동하다가 우르비노로 돌아왔다. 1504년의 일인데, 이때 갑자기 라파엘로는 피렌체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본인이 스스로 원한 것인지, 아니면 티모테오 비티나 페루지노가 추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시민 폭동이 일어나 피렌체에서 망명한 후 우르비노까지 흘러들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조언 때문일 수도 있다.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떠나기 직전에 완성한 〈성모의 결혼식〉은 제자가 스승 페루지노의 예술 세계를 얼마나 능숙하게 넘어섰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움브리아의 소도시 시타 디 카스텔로에 있는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교회의 알비치 예배당에 그려진 이 작품은 현재 밀라노의 브레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로 유학 길에 오르는 궁중 신하를 추천해주려고 구이도발도 공작의 누이이자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딸인 ‘로마 총독 부인’과 그의 남편이 함께 펜을 들었다. 이 로마 총독 부인의 남편은 장차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될 인물의 친동생 조반니 델라 로베레였다.
이 편지를 지닌 사람은 우르비노의 화가 라파엘로입니다. 그는 자기 직분에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며, 연구를 위해 피렌체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했습니다. 탁월한 분이신 그의 부친은 제 친구였고, 그 아들은 훌륭하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기도 해서, 저는 이 아이를 매우 아끼고, 완벽한 화가가 되기를 바란답니다. 저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각하께 추천합니다. 바라건대 저에 대한 사랑으로, 어떤 상황에서나 도움과 보호를 베푸시길 간청합니다.
- 조반니 델라 로베레와 로마 총독 부인, 우르비노에서 1504년 10월 1일 씀
피렌체에서 명성을 날렸던 페루지노의 제자이자, 우르비노와 로마 실력자들의 추천서를 지닌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큰 성공을 기대했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예술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에서 대가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거의 참패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그가 머물렀던 1504년부터 1508년까지의 피렌체는 그야말로 천재들의 각축장이었고, 미켈란젤로의 표현대로 우르비노에서 온 촌사람 라파엘로는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베키오 궁의 대회의실 양쪽 벽을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경쟁으로 장안의 화제가 넘쳐날 때였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전통에 완전히 압도된 듯하다. 무명의 젊은 화가였던 라파엘로로서는 감히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불꽃 튀는 경쟁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 대신 라파엘로가 마사초의 브랑카치 채플에서 르네상스 예술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었다고 조르조 바사리는 전한다. 라파엘로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함께 위대한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이라고 칭송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피렌체에서 마사초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파엘로의 데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등의 작품도 연구하고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그림은 화려한 금장 액자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접을 수는 경첩을 달아놓았다. 뒷면에도 그림을 그려 놓았다. ㅅ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 부부의 초상화〉
우피치 미술관 소장
르네상스인들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492)가 1472년경에 그린 부부 초상화<사진>의 남자 주인공,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를 '이탈리아의 빛'이라고 불렀다.
우르비노의 공작이기도 했던 그는 평생을 '콘도티에로(condottiero)', 즉 고용인을 위해 전쟁을 대신 해주는 용병대장으로 살았다.
강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푹 꺼진 콧대다. 결투에서 한쪽 눈을 잃은 페데리코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제거 수술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사지(死地)에서 벌어들인 돈은 학문과 예술을 살리는 데 썼다. 그 스스로도 인문학 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로마 교황의 도서관에 버금가는 방대한 도서관을 만들었고, 예술가와 철학자를 위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는 지위에 관계없이 엄격하게 법을 적용했고, 장병들이 희생될 경우 그 가족을 부양하는 복지 제도를 마련했다. 충성심 강한 그의 군대가 전쟁에서 패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상화 속에서 페데리코는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자와 마주 보고 있다. 그녀는 출정한 남편을 대신해 국정을 다스렸던 명민한 여인이었지만, 딸 일곱에 이어 마침내 남편의 후계자가 될 아들 하나를 낳고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 그림은 그녀가 세상을 뜬 직후에 페데리코가 주문한 것이다.
잘 정돈된 영지를 뒤로하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강렬한 시선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지 못할 단단한 유대감이 느껴진다. 실제로 페데리코는 바티스타를 잃은 이후 두 번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문무를 겸비한 순정남이라니, 그야말로 진정한 '르네상스맨'이 아닐까.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1473-1475년 경, 47 x 33cm, 우피지 미술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20?-1492)
현대인들에게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은 낮설게 느껴지는 이 중 초화상(doppio ritratto)입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우르비노 궁정화가는 아니었지만 페데리코의 공작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궁정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는 1465년 경 공작의 의뢰를 받아 독특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같은 배경이지만 왼쪽 여성과 오른쪽 남성이 따로 떼어져 있는데, 이렇게 두 판넬로 이루어진 미술 작품을 '딥티크(dypique)'라 부릅니다.
앞면의 그림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은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1422-1482)와 그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1446-1472)입니다. 남편은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자주색을 입고 있으며 아내는 아주 화려한 옷에 머리띠와 머리 옆 장식, 목걸이, 옷의 무늬까지 그녀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속 배경은 공작이 지배했던 곳의 풍경으로 지나칠 정도로 작게 그려진 반면 공작 부부는 화면을 가득 채워 존재감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옆모습을 그린 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동전에서 그려진 인물들이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인 페데리코가 오른쪽을 바라보도록 그려야 했는데, 반대로 왼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페데리코가 왼쪽을 바라보게 그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페데리코는 우르비노의 백작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였습니다. 전쟁에서 우르비노가 패하자 11세의 페데리코는 인질로 끌려갔으며 16세부터는 전쟁터에서 용병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용감한 장수였지만 안타깝게도 오른쪽 눈이 창에 찔려 실명했습니다. 한 눈으로 더 잘 볼 수 있도록 직접 칼로 콧등을 깎아 내렸다고 합니다.
22세의 페데리코는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거의 파산 직전에 놓여 있던 우르비노 공국을 물려 받아 국력을 회복하였지만 잔혹한 전쟁의 흔적들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화가는 페데리코의 얼굴에 난 사마귀나 점까지 그려 넣어 사실감을 더했습니다.
페데리코는 첫번째 아내가 사망하자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의 바티스타와 결혼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13세였습니다. 둘 사이에 딸만 내리 여섯 명이 태어난 후 마침태 아들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26세에 출산 중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페데리코가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의뢰한 작품입니다. 바티스타의 피부가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이유는 당시 바깥일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귀부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존재라는 걸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여인의 이마가 상당히 넓은 편인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이마를 깨끗하게 드러내는 것이 유행이라 잔머리를 밀거나 불로 지질 정도였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모두 이마를 드러내고 머리카락은 눈이 찢어질 정 도로 위로 높이 당겨 묶여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마차를 타고 승전의 기쁨으로 만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기독교적인 상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위치는 앞면과 반대입니다. 그렇다면 페데리코의 상처 난 얼굴이 보일까요? 아주 작게 그려졌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네요.
각각의 마차는 남편과 아내가 지녀야 할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요소들과 함께 꾸며졌다. 왼쪽의 공작은 갑 옷을 입고 백마를 몰고 있는데, 승리의 여신이 그에게 관을 씌워 주고 있고, 그의 앞에 있는 네 인물은 네 가지의 미덕을 상징합니다. 칼을 들고 있는 여인은 정의를, 부러진 기둥을 붙잡고 있는 여인은 꿋꿋함을, 다른 두 여인은 각각 신중함과 절제를 상징합니다.
오른편에서 부인은 순결을 나타내는 적갈색 유니콘이 모는 마차를 타고 기도서를 읽고 있습니다. 부인의 뒤에 있는 두 여인은 각각 순결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정면을 바라보고 십자가와 성체를 들고 앉아 있는 여인은 믿음을 상징하며 그 옆에 있는 다른 여인이 들고 있는 새는 펠리컨이다. 펠리컨은 조류 중 가장 모성애가 뛰어난 새로 커다란 부리에 먹을 것을 가져다 날라 주고, 먹을 것이 없으면 자신의 가슴을 쪼아 살을 뜯어 자식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준다고 하는데, 희생을 상징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보완합니다. 사실 남편은 아내와 정치와 행정 문제를 상의하였고, 남편이 전쟁에 나갔을 때에는 대신 통치를 했다고 합니다. 바티스타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에게도 교육을 시키는 스포르차 가문의 방침 덕분이었습니다.
그림 아래에 새겨진 라틴어 비문은 공작 부부에 대한 찬사를 새겨놓았습니다. 페데리코가 얼마나 존경받는 덕이 있는 장군이라는 것과 그의 아내가 얼마나 존경받는 부인이라는 것을 소개하는 문구입니다.
공작은 아내가 죽은 이듬해인 1473년 개인 도서관, 즉 '스튜디올로 Studiolo'를 세우고 인문학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말이 개인 서재이지 사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으로 그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집한 그리스 로마의 고대 필사본들로 가득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회화의 원근법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여 공작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리하여 페데리코의 치세 동안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시기 최고의 인문학 성지가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