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시내에 있는 로마제국 시대의 원형 극장
Ancient Roman Theatre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원형 극장은 1960 년에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이 1960 년에 정부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정리하기 위해 먼지와 모래 더미를 제거하러 갔을 때, 그들은 밑에 무언가가 묻혀있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단단한 철 기둥을 발견했습니다. 그 직후, 발굴 작업은 Kom El Dekka의 위치에서 시작되었고, 바르샤바 대학이 후원하는 이집트의 Greco Roman Museum과 폴란드 발굴 임무에서 수행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굴은 20 세기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를 밝혀 냈습니다. 다른 시대의 로마 원형 극장의 사용.
Roman Amphitheatre는 서비스를 유지했으며 7 세기까지 음악 콘서트 및 다양한 종류의 이벤트와 같은 다양한 예술 행사를 개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극장에 존재하는 건축 적 요소로 인해 입증되었습니다. 로마, 비잔틴, 초기 이슬람 시대. 원형 극장은 오랜 역사와 다른 기간 동안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뮤지컬 쇼가 공연되는 오 디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극장은 한때 무대 위에 서 있던 돔과 오케스트라 부분과 같이 완벽한 공연을 개최 할 수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있었습니다.
반면 비잔틴 시대에는 한때 공공 집회 및 정부 정상 회담과 같은 중요한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원형 극장은 초기 이슬람 시대와 그 이후로 20 세기 중반에 발견되어 알렉산드리아시의 놀라운 유적지 중 하나가 될 때까지 무시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원형 극장에 대한 설명
오늘날 알렉산드리아에서 볼 수있는 로마 원형 극장은 서기 4 세기에 지어졌으며 그레코 로마 시대의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원형 극장은 이집트에서 로마인의 통치 기간 동안 음악 행사와 시인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지어진 특별한 지붕이있는 극장이었습니다.
원형 극장에는 확장 된 날개와 대칭 인 대리석 관객 섹션이 있으며 600 명의 관중을 수용 할 수 있습니다.
관객석은 지름이 약 33m, 유럽산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13 줄로 구성되어 있으며, 맨 윗부분은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 기둥으로 만든 현관으로,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원형 극장의 열세 줄에는 로마 숫자와 문자로 번호가 매겨져 다른 경우에 청중의 좌석을 규제했습니다.
또한 공연 중 중요한 인물과 부유 한 상인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는 청중 섹션 상단에는 5 개의 구획이있었습니다.
이 구획은 한때는 태양과 비로부터 청중을 보호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만든 큰 기둥을 기반으로 한 돔이있는 천장이있었습니다. 또한이 돔은 다른 공연에서 음악과 성가의 소리를 확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불행히도,이 모든 구조물은 서기 6 세기 알렉산드리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파괴되어 오늘날 카이트 비 요새의 위치에 있던 유명한 파라오 등대와 같은 당시 많은 중요한 구조물이 손상되었습니다.
Roman Amphitheatre의 계단과 줄은 두꺼운 흰색 석회암 벽을 기반으로하고 있으며 다른 벽도이를 둘러 쌉니다. 이 두 벽은 2 ~ 4 세기 로마 건축의 공통된 특징 인 외벽이 내벽을지지하는 기능을하는 여러 아치를 통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구조 중간에는 음악 공연이 열렸던 오케스트라 섹션이 있습니다. 이 섹션은 두 개의 큰 대리석 기둥으로 지원되며 바닥에 최고의 로마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로마 원형 극장을 다른 유사한 구조와 비교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원형 극장과 이탈리아, 그리스, 튀니지의 가라 쉬 극장에서 발견 된 유사한 구조물을 비교 한 현대 연구자들은 많은 흥미로운 사실을 결론지었습니다. 이 연구자들로부터 입증 된 첫 번째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원형 극장이 원래 공연과 예술 행사를 주최하는 극장으로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극장은 일반적으로 "C"자 모양으로 설계되어 모든 관중이 청중 구역에 앉아 어떤 각도에서든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로마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시의 많은 주민과 비교할 때 최대 600 명까지 수용 할 수 있었던 작은 크기의 구조물은이 구조물이 극장으로 건설되지 않았 음을 증명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인물과 공무원의 회의 또는 제한된 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개인 공연에 사용되었습니다.
새들의 별장과 로마 목욕탕
로마 극장의 북쪽에 위치한 대형 진흙 벽돌 구조물이 있으며, 이들은 AD 2 ~ 4 세기에 원형 극장 근처에 지어진 로마 목욕탕의 유적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원형 극장 동쪽에 위치한 최근 발굴 임무는 AD 2 세기에 이집트와 대제국을 통치 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 별장을 발굴했습니다. 이 별장을 발견 한 고고학자들은 그것을 불렀습니다. "새의 별장"은 구조의 메인 룸에있는 놀라운 모자이크 바닥으로 인해 많은 새를 다양한 모양으로 표시합니다. 새들의 별장에있는 다른 모자이크 장식은 다른 기하학적 모티프를 가지고있어 별장을 이집트에서 방문하거나 탐험 할 수있는 독특한 기념물로 만듭니다. 새들의 빌라는 로마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 지어진 개인 주택의 가장 멋진 예입니다.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게스트는이 주택이 처음 지어 졌을 때 수세기 전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최고 유물위원회와 이집트의 미국 연구 센터의 보호를받는 새의 별장은 최근 이집트에서 발견 된 가장 중요한 기념물 중 하나입니다.
알렉산드리아가 어떤 도시인가. 역사는 이 도시가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 만든 도시로 기록한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손에 넣은 그는 그 이듬해에 이집트로 들어와 페르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트식 파라오가 된다. 나일강변의 여러 신전을 돌아다니며 파라오의 권위를 보여준 그는 마침내 나일강 하구의 지중해변에 도착한다.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만들 것을 명령한다. 그것이 알렉산드리아의 시작이다.
이곳은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곳이고 이집트의 물산이 유럽의 곳곳으로 퍼지는 지리적 요충이다. 알렉산더가 요절하자 이곳은 그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며 그 수도가 된다. 본격적인 헬레니즘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절에는 이 도시는 세계 최고의 도시로 성장한다. 도서관이 만들어지고, 학교가 설립된다. 특히 자연과학과 의학은 최고 수준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주변국에서도, 저 멀리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젊은이들이 지중해를 건너와 이곳으로 유학을 왔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면서 이집트의 운명도, 알렉산드리아의 운명도 달라진다.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곳까지 왔다가 클레오파트라를 만난다. 그는 이곳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는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갑자기 암살되자 클레오파트라의 운명도 달라진다. 이제는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동반자가 된다. 하지만 그도 끝내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제거된다.
이제 운명의 신은 그녀를 떠났다. 마침내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그녀의 궁성에서 스스로 자결을 선택한다. 이것이 간단한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제국 간의 관계다. 그러니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을 만든 영웅들이 모두 한 번쯤은 왔던 곳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에 비하여 결코 뒤지는 곳이 아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카이사르도,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도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이집트에 들어올 때 이 나라의 위용에 자못 놀랐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파로스 등대가 불을 밝히고 있고, 세계 최대의 도서관에서는 수많은 학자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 이들 모두가 한 번쯤은 여행했을 나일 크루즈에서 보았던 그 경이로운 신전들…. 아마도 이집트가 자기들 조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동경의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로마제국 치하에서도 단순한 로마의 속주가 아니라 황제의 직속령이었다. 그만큼 이집트가 특별한 나라였다는 반증이다.
이런 알렉산드리아이기 때문에 그 없는 시간, 그 무리한 일정 속에서도 이곳은 올 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오는 순간 실망스럽다. 과거의 영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도 이집트 제2의 도시라고 하지만 위엄도 없고 화려함도 없다. 그저 평범한 중동의 도시에 불과하다. 지하의 클레오파트라가 슬퍼할 도시가 되어 버렸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하더니 조상만한 후손이 없다.
우선 우리가 가본 곳은 최근에 발굴된 콤엘디크 원형극장이다. 폴란드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1990년대에 발굴되었는데, 기원후 3세기경 로마제국 치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담한 사이즈의 원형극장이다. 지금도 극장의 중앙 표시 돌에 서서 말을 하면 공명이 다르다. 마이크가 없이도 수백 명의 사람에게 배우들의 음성이 전달되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