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처절한 변화
루가복음 15장에는 세 편의 비유가 실려있다. 그것은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마태오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두 비유는 루가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께서 세 편의 비유를 연이어 들을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가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시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영적인 차원에로 청자(聽者)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큰아들의 정의(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① 타락의 단계: 타락의 과정은 작은아들의 자기고집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이탈은 방종(放縱)을 초래하고, 방종은 곧바로 육신의 욕심, 즉 방탕(放蕩)과 정욕(情慾)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는 비천함과 굶주림이다. 이는 곧 영적인 빈곤으로 표현된다.(11b-17절)
② 깨달음의 단계: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면 이제 회복과 복귀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회복과 복귀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심과 회개이다. 진정한 결심과 회개는 때때로 인간성 자체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각에 그 뿌리를 둔다.(18-19절)
③ 복귀와 화해의 단계: 이제 복귀가 진행된다. 진정한 복귀는 육(肉)과 영(靈)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 변화는 처음부터 이탈된 장본인(아버지)에 의한 수용을 필요로 한다. 수용은 변화를 전제로 하여 화해와 화목을 조장하지만,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보여준 인내의 기다림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인상적이다.(20-24절)
④ 제3자의 입장: 이제 큰아들의 입장이 표명된다. 큰아들이 전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제3자는 아니지만, 타락과 회복의 과정에서 용서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정의(正義)를 대변한다.(25-32절)
어제는 우리가 마태오복음의 '악독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소작인의 악행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 끝장을 내야하는 정의(正義)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가복음은 정의보다는 자비(慈悲)를 강조한다.
루가에게 있어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은 정의라기보다는 자비이다. 즉, 심판이기보다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인에 비유된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회개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버지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다. 오늘 비유에서 보듯이 탕자인 작은아들(죄인)과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한 큰아들(의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의 태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작은아들에게는 용서와 기쁨의 태도를 큰아들에게는 설득과 달램의 태도를 보인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잘못을 응징하려는 태도는 정의(正意)를 대변하는 것이며, 흔히 제3자인 우리들의 입장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무릇 죄인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응징하려든다는 말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21절)는 점이 변수(變數)이다. 사실 이 변수에 관계없이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는 데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생명에 대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불사(不辭)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인과응보도 정당한 심판도 정의도 불사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탓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탕자의 입장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줄 아는 탕자 또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기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박상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