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오늘의 말씀 ★

마태 25,1-13 †아뿔싸, 준비한 기름이 없네

작성자카타리나 S.|작성시간21.10.17|조회수28 목록 댓글 0

열 처녀의 비유
1“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 아뿔싸, 준비한 기름이 없네

마태오복음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설교(24-25장)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따른 준비와 최종적인 심판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광경이 많은 은유(隱喩)를 통한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일들이 비유 속에 묘사되는 것처럼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은유를 이용한 비유의 맛은 그 속에서 영적인 교훈과 도덕적 지침을 얻어내는 데 있다.

마태오가 수고를 들여 편집한 네 편의 비유를 연이어 수록한 이유도 바로 그런데 있는 것이다. 네 편의 비유를 다시 한번 언급하면,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를, 내일 복음에서 세 번째 비유를 듣게 된다. 참고로 네 번째 비유는 <가해>의 그리스도왕 대축일과 부활시기를 제외한 다른 시기의 장례미사 복음으로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열 처녀 비유는 마태오복음만이 전하는 독자적인 고유전승이다. 비유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뜻하며, 열 처녀는 신랑을 맞을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열 처녀의 손에 쥐어진 등잔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선사받은 신앙을 의미한다. 그 신앙의 강도와 열매는 준비된 기름에 비유된다. 따라서 열명의 처녀 중에 슬기로운 다섯은 복음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지키며 사는 신자들이요, 어리석은 다섯은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이다.

무릇 ‘선인과 악인’이 함께 하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문제는 신랑인 그리스도의 오심이 늦추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처녀들이 등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랑이 이내 왔다면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신랑의 오심이 늦어지면서 등불을 위한 기름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신랑이 당도하는 시간이 지체되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신랑이 온다는 사실이다.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애절함과 나누고 나면 양쪽 다 모자라니 가게에 가서 사다 쓰라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야속함이 상충된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 버렸다. 이것 또한 야속하기 이를 데 없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오실 것은 무엇인가? 허나 인생은 그런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때와 기회를 놓치고 나면 다시 얻기란 힘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야 같이 도와가며 사는 듯하지만 마지막에 가면 철저히 홀로 서야 함을 보여주는 비유가 아닌가.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태오복음 공동체에도 그렇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척에 있는 사건으로 믿었고, 개중에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재림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림이 지체되면서 기다림의 열망은 식어가기 시작하였다. 기다리다 지치면 기다림에 대한 열망은 식어가기 마련이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지치고 짜증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며, 때로는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한 생을 살다가 죽는 순간이 바로 신랑이 오신 시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미지근한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다림의 의미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은 오늘 복음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슬기로운 다섯이나 미련한 다섯이나 모두가 지쳐서 졸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는 사실이다.(5절) 얼마나 솔직한 표현인가? 그러나 기름준비의 여부에 따라 그 잠이 평화의 잠이 될 수도 있고 공포와 두려움의 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13절)이 쉼도 지침도 없이 뜬 눈으로 밤낮 긴장하여 살라는 말은 아니다. 주어진 하루에 예수님의 복음을 따라 최선을 다하여 살고,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평온한 휴식의 잠을 청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박상대 마르코 신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