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Francis of Assisi
1) 개요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부유한 포목상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에게 요한(Giovanni)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했으나, 프랑스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의 프란치스코(Franciscus)로 개명하였다.
젊은 시절 그는 향락과 허영의 삶을 살며 기사로서의 명예를 꿈꾸었으나, 1202년 아시시-페루자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석방 후에도 잠시 옛생활을 이어갔으나 병을 앓은 뒤부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2) 회심의 과정 (1205–1206)
프란치스코는 기사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1205년 브리엔네 백작의 군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스폴레토(Spoleto)에서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 하느냐?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는 환시와 메시지를 듣고 돌아왔다.
성 베드로 대성당 순례 중 나병 환자에게 입맞춤하며 삶의 방향이 전환되었다.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프란치스코야,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쳐 세워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아버지와 결별한 그는 주교 앞에서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고, 알몸으로 가난의 삶을 선택하였다.
3) ‘가난 부인’을 모신 삶과 작은 형제회의 탄생 (1209–1210)
프란치스코는 허름한 옷을 입고 통회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삶에 감동한 친구들이 합류하여 기도·노동·극빈의 삶을 함께했다.
1209년 그는 교황에게 생활 양식 인준을 요청하였다.
처음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주저했으나, 꿈에서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받치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고 1210년 구두 인준을 내렸다.
이로써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탄생하였다.
본부는 아시시 교외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사제품을 받지 않고 부제로 남으며, 지식·재산·권위를 거부하는 청빈의 모범을 보였다.
4) 성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 (1212–)
1212년, 아시시 명문가 출신의 성녀 클라라(8월 11일)는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명받아 수도 생활을 결심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몇몇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현 클라라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가난·기도·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복음적 이상을 함께 살았다.
5) 선교의 열정과 제도 정비 (1216–1223)
1216년 이후 프란치스코회는 빠르게 성장하여 관구 조직이 형성되었다.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잉글랜드 등 해외 선교 파견을 결의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19년 십자군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술탄 알 카밀(Al-Kamil)을 만나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한 뒤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총장직을 사임했으나, 일부 형제들이 회칙을 완화하려 하자 우고리노 추기경의 도움으로 회칙을 수정했다.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인준을 받으며 수도회의 규범이 확정되었다.
6) 오상(五傷, Stigmata)과 ‘태양의 찬가’ (1224–)
1224년 라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중 오상(Stigmata)을 받았다.
이는 교회 역사상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오상이었다.
이후 그는 고통 중에도 움브리아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시력을 잃어가던 중에도 ‘태양의 찬가’를 지어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했다.
7) 선종과 시성, 유해 이장 (1226–1230)
1226년 9월, 병세가 악화된 그는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왔다.
미리 유서를 남기고 잿더미 위에 알몸으로 누워 완전한 가난 속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들으며 시편 142(141)장을 노래하다가 1226년 10월 3일 저녁, ‘자매인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날 그의 유해는 아시시의 성 조르조 성당에 안장되었고,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230년 5월 25일, 엘리아 형제가 세운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 성당으로 유해가 이장되었다.
8) 영향과 유산
프란치스코의 청빈·겸손·창조물 사랑은 오늘날까지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가 세운 재속 프란치스코회(제3회)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한 재속 수도 운동으로 발전했다.
1979년 11월 29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생태계와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했으며, 제목은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제2의 그리스도’로 불릴 만큼 가난과 평화의 복음을 온전히 산 인물이었다.
9) 전례와 기념
축일은 10월 4일, 선종 다음 날로 아시시 시내 행렬로 기념된다.
옛 전례에서는 9월 17일을 ‘오상 축일’로 지냈으나, 1969년 전례 개정 이후 폐지되었다.
로마 순교록(2001/2004 개정판)에도 10월 4일 항목에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