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로서 가치 있는 삶(6월 5일 금요기도회 설교)
본문 : 에베소서 5:8–21(신약 315)
현대인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는 ’바쁘다.‘ 는 말입니다. 직장인도 가정주부도 심지어 초등학생도 바쁘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쁜 것보다 ‘어떤 일에 집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인해서 바쁘냐 하는 것보다 어떤 일에 집중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교회 사역, 회사 업무, 공부, 비즈니스, 운동, 만남, 취미 등 집중하는 것이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다면 집중하는 그 일이 바로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하는 그 일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 생활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또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당신은 인생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인생이라는 것은 바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사계절을 정하시고 아침과 저녁을 만드시고 시간과 때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을 열심히 사는 것과 분주하게 사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주하게 산다는 것은 목적을 잃고 시간을 허비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40-42절에서 마르다가 분주하게 시간을 사용하다가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10: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은 마르다 처럼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중요한 목적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마리아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의 가치는 영적인 일과 믿음의 일과 예배의 일이 얼마나 연결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바쁘다.’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 또 나는 성도로서 ‘바쁘다.’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해야만 할까요?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바쁜 일, 즉 그 사람이 집중하는 일이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 에베소는 로마 제국에서 손꼽히는 상업 도시이자 아데미 신전으로 유명한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쾌락과 향락이 넘쳤고, 도덕적 타락이 일상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본 에베소는 어둠의 영역한 속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된 상황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어둠의 영역에서 분주하게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하는 예배자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오늘은 에베소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로 가치 있는 삶”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도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1.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것
성도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는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른 정체성을 확실히 한다는 것은
주 안에서 나는 빛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8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둠에 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고, ‘전에는 어둠 자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빛(φῶς, 포스)’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헬라어 ‘포스’는 스스로 발광하는 근원적인 빛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도에게 적용될 때는 ‘참된 빛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영광스러운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냄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5:14절 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빛입니다.
요한복음 8:12절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의 근원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받아 세상에 비추는 존재입니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 성도는 주님의 빛을 삶으로 반사합니다.
우리는 매일 ‘나는 주 안에서 빛이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어둠이 아닌 빛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고 나는 주 안에서 빛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에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빛이란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빛의 열매입니다. 바울은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착함(ἀγαθωσύνη, 아가도쉬네) 이란 선함이란 의미로 베푸는 삶입니다.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의로움(δικαιοσύνη, 디카이오쉬네) 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정직하고 공의로운 삶입니다.
셋째, 진실함(ἀλήθεια, 알레데이아) 이란 거짓 없는 투명한 삶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삶입니다.
갈 5:22-23을 보면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열매는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면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히듯, 우리가 주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면 빛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내 삶에 착함, 의로움, 진실함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이 되고,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될 때 우리는 빛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10절을 보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서 시험은 헬라어로 δοκιμάζω (도키마조) 인데 시험하다, 검증하다, 분별하다. 금을 불로 검증하듯 삶의 매 순간 주님이 기뻐하시는지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기준은 ‘사람들이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가’ 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시험하여 보라’고 합니다. 매 선택의 순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은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람을 감사과 기쁨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지혜 있는 삶을 사는 것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혜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고 주의해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자세히 주의하여’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크리보스(ἀκριβῶς)’로, ‘정확하게, 엄밀하게, 조심스럽게 살피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군인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곳을 신중하게 살피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영적 지뢰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 이단들의 미혹, 세속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긴장하며 우리의 행실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자세히 주의하여”라는 말은 무심코, 습관적으로 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바람에 나부끼는 것처럼 세상의 흐름에 그냥 쓸려갑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걸어갑니다.
잠 4:26을 보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고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내가 하는 말 한마디, 보는 것, 쓰는 시간,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15절을 다시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지혜로운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입니까? 성경은 지혜의 근본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은 정보와 지식은 넘치지만 지혜가 없어 방황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경외를 삶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진정한 지혜를 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처세술이나 얄팍한 요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 즉 ‘소피아(σοφία)’입니다. 야고보서 1:5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밤 기도할 때, 세상을 이길 하늘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후히 주십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자기 생각과 경험에만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중요한 결정이나 관계의 문제 앞에서 먼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는 단순한 기도가 지혜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합니다. 16절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사용된 아끼라는 헬라어는 ἐξαγοράζω (엑사고라조)인데 이 단어는 ‘사다, 되사다, 속량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시장에서 좋은 물건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회가 왔을 때 즉시 구매하는 것처럼, 기회(καιρός)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세월"로 번역된 헬라어는 크로노스(χρόνος, 흘러가는 시간)가 아니라 카이로스(καιρός, 기회와 의미의 때를 의미 합니다. 즉, ‘흘러가는 시간을 아끼라’가 아니라 ‘의미 있는 기회를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이 세상이 기회를 빼앗아가는 세력들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악한 세상에 빼앗겨 버린 너희의 소중한 영적 기회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사들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웃을 섬기기 위해, 말씀과 기도를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3.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지혜롭게 세월을 아끼며 살기 위해 내 결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는데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무언가에 ‘지배를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코올이나 쾌락에 지배를 받아 방탕함(낭비하고 무절제한 삶)으로 나아가지만, 성도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원어로 볼 때 “충만함을 받으라(πληροῦσθε, 플레루스데)”는 세 가지 중요한 문법적 특징을 가집니다.
명령법 : 선택 사항이 아니라, 성도라면 반드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엄위하신 명령입니다.
수동태 : 내가 내 힘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온전히 내어드려 그분이 나를 채우심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현재시제 : 과거의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매일, 지속적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했던 그 성령의 불이 오늘 우리 심령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어제 성령 충만했다고 오늘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금요 기도회에 나온 여러분, 오늘 이 밤에 다시 한번 부르짖어 새로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주께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19절을 보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즉각적인 반응은 입술의 변화, 곧 ‘찬양’ 입니다.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면 입술을 통해 신령한 노래로 흘러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깊은 흑암 속에 갇혀서도 찬송했을 때 옥문이 열리고 결박이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때로는 메마르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억지로 짜내듯 기도하기 보다 찬양을 부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이며,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우리 개인 삶의 자리에 이 뜨거운 찬양의 제사가 드려기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한 삶의 결론은 ‘감사’로 맺어집니다. 조건부 감사가 아니라 ‘범사에’ 하는 감사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절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도 합니다. 하지만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 응답이 더딜 때, 질병으로 육신이 고통받을 때(우리의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드리는 감사는 마귀를 굴복시키는 기적의 씨앗이 됩니다.
한 주를 보내면서 힘들었고 불평할 일도 있었고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마음에 근심과 걱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밤 기도할 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기도합시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모두 내려놓고 기도함으로 성령님께 사로잡혀서 내 입술의 언어가 불평에서 감사로, 탄식에서 찬양으로 변화되는 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