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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학]]불교적 선악(善惡)의 정의 - 신경스님 -

작성자마하무드라|작성시간09.03.31|조회수1,151 목록 댓글 0

1. 머리말

 

   선(善)과 악(惡)은 윤리와 도덕의 근간을 이루는 두 가지 축이다. 선악의 관념에 따라 인간이 규정한 윤리와 도덕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이기에 선악의 정의는 참으로 예민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어떤 것은 잘못된 행위이고 어떤 것은 잘한 행위라는 선악의 관념을 학습해 왔으며 그것이 현재 삶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가.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인간 이전에 어떤 절대적 존재에 의해 창조된 절대적인 것이라고도 말하고, 어떤 이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하기에 상대적인 것이라고도 말한다.

 

   또 어떤 상황이나 사실의 선악을 논할 때 동기를 중시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 결과를 중시하는 입장도 있다. 이와같이 다양한 선악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과연 어떤 것이 선악의 진정한 정의이며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불교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본 논지의 목적이다.

 

2. 몸말

 

   불교의 교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부처님이 발견하신 궁극적 진리는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기에 진리의 경지나 그것에 이르는 해탈이나 열반은 궁극적 선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 성도에 이르신 후에 갈등하셨다는 내용이 경전상에 보인다. 이른바 범천권청이라는 것인데 아마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를 중생에게 어떻게 전할까 그리고 어떤 내용을 전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설법을 하시게 되고 그 내용에는 바로 선악에 관한 윤리적인 내용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1) 선악은 행위에서 비롯된다

 

   선악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 빠져서는 안될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제외한 선악에 대한 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선악 또한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선(kusala)이란 안온한 과보를 초래하여 유정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불선(akusala)이란 이와 반대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란 의식된 목적(의지)에서 일어나는 동작, 즉 이른바 유의적(有意的)인 동작을 말한다. 인간은 일체만물과 연기적으로 얽혀서 생멸하는 유위적 존재이다. 따라서 어떠한 행위를 하든 그것은 일체 만물들과 닿아있다. 따라서 이미 행위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은 행위주체와 객체라는 연기적 관계로서 맺어져 있는 것이다. 인과율을 완전히 벗어난 열반을 얻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천신에서부터 지옥중생에 이르기까지 이런 관계성과 인과성을 벗어난 존재는 없다.

 

 

2) 행위(업)의 분석

 

   행위란 의도(의지)와 행위방법, 그리고 결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불교적 입장에서 선업이나 악업이라는 것을 행위와 그 과보의 관점을 포함하는 것으로 볼 때, 불교는 동기론적 선악설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행위란 그 의도부터 결과까지를 포섭하는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행위(업)를 신업, 구업, 의업의 세가지로 분류하면서 그 중에서도 의업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마음에 의한 행위를 중시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선과 악을 논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의도와 방법 그리고 그 결과를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TV에서는 갓난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훔친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러면 이 어머니의 행동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앞에서 말한 행위의 의도와 수행방법, 그리고 결과라는 세 가지 측면에 대입해 본다면 그 의도는 '1.아기에게 분유를 먹여야한다, 와 2.분유를 살 돈이 없으므로 훔쳐야 한다.'의 두 가지로 볼 수 있으며 방법은 '도둑질'이다. 그리고 그 결과 또한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아기에게는 분유를 배불리 먹는다는 긍정적 결과이며, 가게 주인에게는 물건을 도둑질 당했다는 부정적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아기와 어머니의 관점으로 볼 때 선-악-선의 관계가 성립되며 어머니와 가게주인의 관점으로 볼 때, '악-악-악' 관계가 성립한다. 비록 그 동기가 선하고 그 결과가 좋은결과였다고 하지만 결국 그 방법이 사회윤리에 비추어 악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가게주인에게 피해를 준 것이므로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동정을 유발한다고 하더라도 '선'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3) 선악 행위의 판단 기준

 

   불교에 있어서의 선악 판단 기준에 대해서는 결국 부처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다. ⌜Ambalatthika-rahulovada sutta⌟라는 경전에는 선행과 악행의 개념에 대해 '몸과 말과 뜻을 비추어 보되 깊이 숙고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행한 것이 나와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나와 남에게도 적극적으로 이로운 것이라 느낀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선(kusala)로 간주해도 될 것이며, 이와 반대인 것은 악(akusala)으로 간주하고 단념해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추어 본다.'는 것과 '숙고한다.' 그리고 '간주해도 된다.'라는 표현이다.

 

   불교는 '인간고의 해결'이라는 가장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목적을 가진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통해 이 세상의 궁극적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은 지혜로서 일체 만물의 연기관계를 조망하여 가장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시는 분이다. 따라서 어떤 판단이 내려지는 상황과 관계성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을 내리셨다. 이것은 계율의 제정에 있어서 수범수제의 원리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행과 악행을 구분함에 있어 '비추어 본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부처님의 교설, 즉 진리에 비추어 본다는 것이고, 그 행위가 탐진치 삼독에 물든 것이 아닌지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또한 '숙고한다.'는 것은 그 상황의 연기적 관계를 가장 지혜로운 안목으로 깊이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 '비추어 보고 숙고하여' 나온 결론이 좋은 것이라면 선으로 간주하고 받들어 행하고 만약에 나쁜 것이라면 악으로 간주하고 단념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간주한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선(행)이나 악(행)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기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4) 불교 선악윤리의 절대성과 상대성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 그 자체는 이미 세속적 선악의 개념을 초월해 있다. 다만 중생은 연기적 존재들이기에 필연적으로 영향과 결과를 주고 받으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와 율은 불교윤리라는 이름으로 선악판단의 기준이 되어왔다.

 

   하지만 여기서 불교의 선과 악에 대한 입장이 극단적으로 상대주의적이라는 편견에 빠지면 안된다. 물론 불교교설에서 열반과 같이 절대적인 선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며 만약 극단적 상대주의에 빠져 선과 악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당시부처님께서 부정하셨던 육사외도들의 도덕부정론에 빠져버리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선과 악을 인간 이전에 이미 어떤 절대적 존재가 창조해낸 것이라거나 선악을 신이 주재한다는 선악윤리의 절대적 입장에 빠져버리면 브라흐마니즘적인 절대론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5) 중도 = 절대적 객관성 = 지혜

 

   불교가 행위의 동기론적 선악설의 입장을 중시한다고 하여 그 결과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던 바와 같이 행위의 선악은 의도와 그 방법, 그리고 결과를 모두 고려하여 판단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것에도 치우침없이(중도) 그 상황의 연기적 관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절대적 객관성)이며, 이것은 곧 지혜라고 말하고 싶다.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통해 이른 경지가 바로 선악마저도 초월한 적정안온한 경지인 해탈이자 열반인 것이다.

 

   그리고 행위의 선악에 대한 판단은 불교에서 가장 근본번뇌인 탐진치 삼독심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3. 꼬리말

 

   불교의 지혜는 곧 중도의 지혜이다. 이것은 곧 절대적 객관성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진리에 부합하는 가장 바른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중생은 연기적으로 가합하여 생멸하는 유위적 존재이면서 근본적으로 무명에 싸여있는 존재이기에 탐진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상계의 선악을 판단해보기 위해서는 불교가 동기주의적 선악설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먼저 그 행위에 탐진치 삼독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판단해보아야 한다.

 

   여기서 선악이라는 개념은 두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주체와 객체라는 연기의 관점에서는 어떻게든지 선악의 관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경험주의의 일종인 공리주의 철학에서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경제원칙을 선이라 정의하였지만 이러한 선은 누군가가 이득을 본다면 다른 한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유위적 선이다. 중생계는 이러한 상대적이고 유위적인 선악개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곳이기에 부처님께서는 방편설로서 계율을 제정하시어 중생을 이끌어 주셨다.

 

   하지만 여기서의 선은 진정한 선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진정한 선은 바로 열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열반에 이르렀을 때만이 현상적 선악의 개념을 떠난 진정한 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불교에서 정의하는 진정한 선의 개념일 것이다.

 

<참고문헌>

 

⌜삶과 윤리⌟ (이근원 外, 학문사, 1998)

 

⌜아비달마불교⌟ (권오민 역, 민족사, 2003)

 

⌜善의 연구⌟ (니시다 기타로 著, 범우사, 1990)

 

⌜아비달마의 철학⌟ (정호영 옮김, 민족사, 1989)

 

⌜불교윤리학⌟ (김동화 著, 보련각, 1989)

 

⌜불교윤리의 현대적이해⌟ (안옥선 지음, 불교시대사, 2002)

 

⌜불교윤리학개설⌟(목정배, 경서원, 1986)

 

⌜선과 악⌟(안네마리피퍼, 2002 이끌리오)

 

⌜현대윤리사상⌟ (제임스 外, 서광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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