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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사]]조계종의 종통과 사법관계 - 신경스님 -

작성자마하무드라|작성시간09.04.22|조회수241 목록 댓글 0

Ⅰ. 서 론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은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이라는 종지를 바탕으로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렇게 조계종이 한국 불교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역할을 생각하여 볼 때, 그 종조와 법맥의 사법관계를 찾는 노력은 조계종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그 법등을 후대에도 이어나가는 초석을 다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아직까지 보조법통설과 태고법통설 등 조계종의 종조에 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조계종의 종헌에 나타난 종통과 사법에 대한 규정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모호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어쩌면 이러한 모호성은 고려시대 이후 법맥이 내려오면서 단순한 은사와 상수상좌의 관계를 법맥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법통의 사사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가 얽히면서 발생한 것이며 그 배경에는 각 문도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고수하기 위한 노력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계종의 입장에서 그 종통을 밝힌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조계종 종헌종법에 나타난 종조와 사법에 관한 규정을 기준으로 하여 기존의 논란등은 간단한 언급에 그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종법상에 나타난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국사와 중흥조인 보조지눌과 태고보우의 사상과 사법관계를 밝히고, 이후 청허와 부휴의 양대법맥으로 계승되어 내려온 종통과 사법의 사실을 밝히는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Ⅱ. 본 론

 

 

1. 종헌상에 나타난 종조 및 사법에 관한규정

 

  <제1장 1조> 본종은 대한불교 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도의국사가 창수한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 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법맥이 면면부절한 것이다.

 

<제2장 6조> 본종은 신라 헌덕왕 5년에 조계 혜능조사의 증법손 서당 지장선 사에게서 심인을 받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 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이하 청허와 부휴 양법맥을 계계승승한다.

 

<제2장 7조> 본종의 법맥상승은 사자간의 입실면수 또는 전법게의 수수로써 행한다.

 

   조계종의 종헌상에서 종조를 비롯한 그 사법관계를 기술한 내용은 제1장과 제2장의 몇몇 조항에서 발견된다. 조항의 내용에 따르면 도의국사는 신라 헌덕왕 5년에 6조혜능의 증법손인 서당 지장의 법맥을 이었으며 그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시대 보조의 중천과 태고 제종포섭과 중흥을 거쳐 조선의 청허와 부휴의 양대법맥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만 특이한 것은 <제1장 1조>에 ‘중천조’로 언급된 보조국사가 <제2장 6조>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제2장>에 보이는 태고국사의 ‘중흥’ 사실이 <제1장>에서는 ‘제종포섭’과 ‘조계종의 공칭’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한 규정은 오늘날까지 그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보조종조설’과 ‘태고종조설’ 및 ‘도의종조설’ 의 의견대립을 무마하기 위한 종헌상의 의도로 보인다. 다만 <제2장 7조>의 법맥상승 방식에 대한 사실을 염두해 볼 때 불교계 내에서는 1976년 성철 스님의 “이재열, 이종익 등이 창안한 보조 법통설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으며 오직 청허·부휴 양대 문하에서 서로 전해온 임제 태고 종통만이 정당함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불교조계종은 석존을 시조로 하고 조계 혜능을 원조로 한 임제선 계통을 이어 받은 태고의 법손임이 분명하다” 라는 입장과 지관스님의 “보조종조론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명확한 전거가 나오지 않는 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는 이미 400여 년 전에 환암, 구곡의 법손인 청허·부휴 양대 문하에서 모두 한결같이 태고→환암→구곡→벽계→부용→서산 등으로 확정했다.

 

따라서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를 태고로 보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주장에 좀 더 무게를 싣고 중흥조로서의 명칭을 태고에게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이미 태고 및 지눌 이전부터 6조 혜능의 법맥을 이었다는 측면에서 ‘조계’라는 명칭이 발견되고 있고, 오늘날 조계종 수행의 핵심인 임제의 간화선이 6조 혜능계통의 남종선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볼 때, 도의가 조계 혜능의 선법을 이었다는 측면과 함께 그의 가지산문이 가장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해온 사실을 감안하여 도의를 조계종의 종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조계종헌상의 규정은 도의를 종조로 삼음으로써 한국 대표 선종으로서의 역사적 유구성을 획득하고 <제2장 7조>에 나타난 법맥상승을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삼음으로써 만족시킴과 동시에 보조지눌의 수선결사가 한국불교사에서 가지는 커다란 의미 또한 포섭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논고에서는 종헌상의 이러한 의지를 반영하여 신라 하대 조계혜능의 남종선의 한국 전래를 시작으로 가지산문을 비롯한 9산선문의 성립, 도의의 업적 및 사상, 이후 고려시대 보조지눌의 수선결사, 태고보우의 제종포섭과 조선시대 청허와 부휴를 통한 법맥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조계종의 종통 및 사법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조계종의 종조 도의국사와 가지산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조계종의 종조는 종헌상 신라 말 가지산문을 창수한 도의국사로 규정하고 있다. 도의는 신라 37대 선덕왕 5년(784)에 당으로 가서 조계혜능의 법을 이은 마조도일의 제자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고 호를 고쳤다. 이후 신라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당시 신라에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이라 비방하며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여 그 법을 제자 염거에게 전하였고 염거는 다시 체징에게 법을 전하였다.

 

   사실 가지산(전남 장흥부 유치면)에서 보림사를 창건한 이는 도의의 법손 체징이지만 체징은 도의를 개산조로 삼고 그의 법을 이었기에 종헌상에는 도의국사가 가지산문을 창수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체징은 도의의 종풍을 크게 떨쳐 가지산의 선파를 이루었으며 체징의 문하에는 800여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어 실상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북종선계통), 사굴산문, 사자산문, 봉림산문의 일곱산문이 신라말에 성립되었으며, 고려초기에 이르러서는 수미산문과 희양산문이 성립됨으로써 9산선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중천조로서의 위상

 

   지눌의 사상은 12세기 고려불교의 상황을 떠나서는 생각해볼 수 없다. 밖으로 정치적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정법을 구현하고, 안으로 선교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일은 지눌이 살았던 고려불교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지눌을 종헌 <제1장 1조>에서 중천조로 명시하고 있는 것은 당시 선불교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수행적 위상과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눌의 중천조로서의 자격은 다음의 다섯가지를 통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회통정신이다.

  

   당시 대각국사 의천의 등장이후 더욱 심화된 선종과 교종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선을 중심으로 한 교의 통합이론인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써 회통시키고자 하였다.

 

   둘째는 정혜결사를 통한 불교개혁과 수심불교의 전통을 세운 것이다.

 

   당시 명리를 탐하고 세간의 이익을 구하면서 타락한 불교계를 결사의 정신으로 정화하려한 지눌의 선풍은 오늘날까지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셋째, 근기에 따른 수행문의 시설이다.

 

   그는『간화결의론』,『염불요문』,『수심결』,『계초심학인문』등 많은 저술활동과 교육자적 자세로 결사를 이끌면서 많은 대중들이 누구나 돈오에 바탕한 닦음을 통하여 깨침의 완성에 다다르는 길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지눌의 선풍은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전통으로 지속되고 있다.

 

   넷째는『절요』와 『간화결의론』의 저술을 통하여 간화선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한 사실이다.

 

   이후 조계종의 수행법은 중국 임제종 양기파의 간화선법의 법맥을 전수하게 되는데, 지눌이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정착되었다는 사실은 조계종의 수행법을 확립하였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섯째는 중국의 백장회해가 청규로서 선종을 독립시켰듯이 청규를 제정하여 조계종이 선종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태고보우가 중국으로부터『칙수백장청규』를 들여와 새롭게 청규를 보강한 것도 이러한 지눌의 정신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4.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의 중흥조로서의 위상

 

   중국 선사들로부터 불립문자 견성성불의 불법을 이어받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이르러 형성된 구산선문의 법맥은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고려중기 보조지눌의 수선결사운동에도 불구하고 거의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이라는 뛰어난 선승들이 배출됨으로써 다시금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다만 태고보우만을 중흥조로 명기하고 있는 이유는 태고보우가 도의가 창수한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은 양주 회암사의 광지선사의 문하로 출가하였다는 사실과 임제계통의 석옹청공으로부터 인가받은 사실, 또한 왕사인 나옹혜근과는 달리, 국사라는 영향력이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수행법에 있어서도 임제의 간화선풍을 직접 이었다는 측면과 청규의 보강등도 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즉, 당시 그 명맥이 다해가고 각자 분열되어 있던 구산선문의 제종을 포섭하고 교종인 5교를 널리 홍포하여 원융회통적인 한국불교의 전통을 중흥하였다는 측면과 임제스님의 18대 법손인 석옥청공화상을 만나 구경결택과 함께 임제선법을 받아와 간화선의 수행체계를 확립하였다는 측면에서 그를 중흥조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그의 법은 환암혼수 - 구곡각운 - 벽계정심 - 벽송지엄 - 부용영관을 거쳐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양대법맥으로 이어진다.

 

 

5.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양대법맥

 

   1) 청허휴정 (淸虛休靜, 1520~1604)

 

   청허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약한 승병의 총수로 서산대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 불교사상이나 법맥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선승이다. 청허는 고려시대 이래로 계속되어오던 선과 교의 논쟁을 종식하고 선교통합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여 선종 단일종파로 통일시켰다.

 

   또한 배불정책으로 피폐되어 있던 조선불교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다.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밀려나 있던 산승선가의 가풍과 종통을 확고하게 일으켜 세웠으며 조선 조계종의 한 법맥으로서 계계승승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선승이 그의 법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선가귀감』,『선교결』『심법요초』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모든 사상과 수행법의 중심은 선이 자리잡고 있었다. 비록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는 전제로서 선교일치를 주장하지만 그것은 대등함이 아니라 선이 중심이 되고 교학이 뒷받침하는 선주교종(禪主敎從)의 입장에 입각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제자는 1천여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만 7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사명유정, 편양언기, 소요태능, 정관일선으로 청허문하의 4대문파를 이루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 부휴선수 (浮休善修, 1543~1615)

 

   청허와 사명이 왜병을 물리친 호국활동으로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부휴도 임진왜란 때 승장의 한사람으로 전쟁터에 나아가 구국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내전과 외전을 모두 통달하였으며, 문자의 소견을 뛰어넘은 격외선의 도리를 종지로 삼았다. 이러한 부휴의 문파는 비록 그 선풍이나 활동, 법통인식등에서는 청허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독자적인 계파의식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부휴계가 송광사를 거점으로 하여 보조지눌의 유풍을 강조하고 지눌의 선교겸수의 선풍을 진작시켰다는 측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벽암각성 - 취미수초 - 백암성총 - 무용수연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청허계와 함께 조선시대 조계종의 양대 법맥으로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였다.

 

 

Ⅲ. 결 론

 

   지금까지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상에 나타난 종조와 중흥조, 그리고 그 사법관계를 살펴보았다. ‘조계종 종조와 법통설에 대한 논쟁은 근대 이후 1세기 가까이 진행되었지만, 아직까지도 한국불교사를 전공한 학자들간에는 조계종의 종조와 법통설에 관한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법통설은 과거 신라시대부터 이미 정립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17세기 전반, 휴정의 문도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비된 것이다. 휴정의 문도들은 휴정을 중심으로 법맥을 소급하여 고려말의 태고보우에 이르렀으며,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태고법통설’이 공론화되어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억불숭유의 정책으로 크게 위축된 조선의 불교를 일으킨 청허와 사명당의 구국적 활약이 가지는 영향력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 조계혜능의 남종선법이 가지산문의 개창과 더불어 최초로 전해지고 이후 보조지눌의 결사운동을 거쳐 태고보우와 그의 법손들인 청허와 부휴의 양대문파로 전해졌다는 측면에서 조계종의 종헌은 태고보우에 좀 더 무게를 싣고 있는 듯하다.

 

   물론 보조지눌의 결사운동과 청규의 제정을 통한 선종가풍의 확립이라는 점도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법통설의 이해에 있어서 그 사실성 여부에 대한 과도한 논쟁은 오히려 법통설이 가지는 근본의미를 훼손시킬 소지가 있다.

 

   따라서 조계종의 종헌 또한 이러한 법통설에 대한 논쟁을 포섭하고 조계종의 근본 종지를 드러내고자 그 사법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비록 조계종의 공식적인 명칭이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중국의 6조 조계혜능이라는 남종선의 종조로 하여 그의 법이 가지산문을 통하여 도의로부터 태고보우를 거쳐 청허, 부휴의 양대법맥으로 이어진 사실을 기술함으로써 역사적 유구성과 정통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태고보우의 임제 간화선법의 체계적 정착뿐만이 아니라, 보조지눌의 수선결사 정신과 청규에 바탕한 선종교단의 체계확립이라는 수행가풍적 사상성이라는 측면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道義 明寂의 韓國禪宗史的 位相과 特徵』(眞月 李英浩 <東國大 禪學>)

 

•『宗團 法令集』(법장編,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서울, 2004)

 

•『韓國佛敎의 法脈』(이성철, 장경각, 2001)

 

•『조계종사-고중세편』(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編 , 조계종출판사, 2004)

 

•『한국불교사』(김영태 著, 경서원, 2006)

 

•『韓國曹溪宗의 成立史 硏究』(불학사학회 編, 민족사, 1989)

 

•『한국불교사상』(서윤길, 운주사, 2006)

 

•『佛脈』(김신곤 外, 우리출판사, 2004)

 

 

 

< Abstract >

 

The Darma Lineage of Jogye Order in Korean Buddhism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is established by the porport that Pointing the Human mind for seeing one's true nature and saving the sentient beeings. The studies of The Lineage of Jogye Order will be a foundation that the Order can be a representative religious teaching in the future of korea.

  In 784, Doui visited China to take the Darma teachings of Huineng. He visited Xitang Dicang and recived Darma and renamed as Doui from him. After that, Doui return to his nation, and try to propagate the teaching of the Chan tradition of Jogye Huineng. However, at that time the society of silla is not prepared to take the progressive Chan teaching. So he retired to Jinjeonsa temple in Mt. Seolak, teaching and cultivating his disciples. As a result, Chejing, his grand disciple, is establised the Gajisammun (Gaji Mountain Chan school) and regarded his master Doui as a founder. after that time, the 9 Moutain Chan school is gradually founded.

   In the Mid-term of Gorye Dynasty, The monastics of Chan and Gyo (the scholatic Buddhism) are opposed to each other. also the society is very confussed. the Monastics are morally ruined. Jinul, the Preceptor of Gorye insist that the Monastics must return to Buddha's true nature, and hold a 'Jeonghye-Gyuelsa'. his great power of practicing Chan and moral attitude are the model of the Korean Chan Buddhism. and the end of the Gorye Dynasty, Bou, that succeed the Lineage of Gajisammun and Sukok Chunggong who succeeded Yimjae's dharma of Chan, included all orders of korea, revitalized the Korean Buddhism. Also he settled the Chan method of Ganwha.

   Jinul and Bou's conrtibutions to the establishment of Jogye Order take very important posi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So Jogye Order regard them as the Revival Patriarchal Master of the Order.

   Taego Bou's Dharma Lineage is transmitted to Chungheo and Buhyu, the patriarch of Joseon Dynasty. Both Lineages become the principal Dharma successions in Korean Buddhism.

   Today, The Arguments that which Theory of Dharma Lineage are continued. Now we must recognize the important duties of Jogye Order in Korea, will take a rational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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