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 강 대 아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라고 써 놓고 보니 나 자신 대단한 유명인이여, 젊은 날의 이성편력을 자서전으로 옮기는 것 같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현실에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들려주던 고전 중에서 가장 듣기 좋아했던 게 우 미인가 였다. 어머니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우 미인처럼 되고 싶었고, 그 우 미인을 사랑한 초패왕 항 우 장수를 사모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자라서는 우리나라 전래동화보다 세계명작동화집을 먼저 접하게 되었고, 그 동화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좋아했었다. 피터 팬이나 소공자. 어린왕자를 사랑한게 아닐까? 사춘기를 지나면서 세계고전을 읽게 되었고, 그 중에서 브론테 자매의 소설을 좋아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사랑하는 캐더린을 찾아 휭한 눈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머리갈기 날리며, 황량한 바위언덕을 헤매는 히드클리프를 동경했다.
못생긴 여자도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그래서 내게 자신감을 갖게 해 줬던 샤롯 브론테의 제인에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정신병이 있는 여자와 정략 결혼한 그 불행했던 에드워드 로체스터 백작을 동정했고. 제인 에어의 사촌, 온화한 마음씨와 너그러운 품성으로 사랑하는 제인을 지켜보는 그녀의 사촌오빠 세인트 존 에어목사를 가슴 저리게 그리운 사람으로 마음속 깊이 새겨 넣기도 했다. 어떤 책도 한 번 이상은 안 읽는데, 유이하게 세 번씩이나 읽은 소설이었다.
얼굴이 하얗고, 눈이 맑고, 손가락이 가늘고 긴 결핵환자 같은 사람도 사랑했었다, 그도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현실에서의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을 키우지 못했다. 사랑을 안한 게 아니고 사랑할 기회가 없어서 못해 본 것 같다. 집안에 남자형제가 없으니 오빠의 친구를 만날 기회도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니 놀러 다니며 좋은 사람을 만 날 수도 없었다. 직장을 다니지 않았으니 동료이성을 만나는 일도 없었고. 길을 걸을 때도 헛디뎌 넘어질까 봐 언제나 발 놓을 자리만 내려다보고 걸음을 떼어 놓았으니, 좋은 사람과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좀 더 멀리 더 높이 바라보며 시야를 넓혔어야 했는데, 세상이 두렵고 무서워 우물안 개구리로 스스로 가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친오빠나 동생은 없었지만 외사촌이나 이종사촌들이 많았다. 휴일이며 그 오빠들은 무슨 의무처럼 얇은 주머니를 털어, 영화도 보여주고 음악 감상실에도 데리고 다녔다. 오빠들 덕에 최소한의 상식을 넓혔고, 연애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옛날의 우리영화는 내용이 뻔해, 주로 외국영화를 보게 되었다. 자연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소설 속의 주인공에서 영화 속의 인물로 바뀌게 되었다.
빈틈없이 잘 생긴 알랭 들롱이나 케리 쿠퍼보다는 해리슨 포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같은 배우가 좋았다. 몇 년 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본 클린트, 나이 들어도 저렇게 멋이 있을 수도 있구나 또 다시 설렘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바람 끼가 많았나보다.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괜찮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을 바꿔가면서 좋아했으니? 팔에 턱을 고이고 긴 숨을 쉬며 먼 하늘만 우러른 텅 빈 삶이었음을, 알뜰한 추억거리 하나 없음에 허무를 느낄 때, 이제는 소설속에서 내가 아니,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애인을 만들어간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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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가네 작성시간 04.11.10 하하, 꽃무릇님. 가을인가 봅니다. 저는 사랑한 여인이 너무 많아 여기서 다 얘기하지 못한답니다. 바람둥이 소리를 들을 것 같아요. 모두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지요. 그렇지만 꽃무릇 대아님처럼 후회는 하지 않는답니다. 그냥 고이 간직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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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사랑초 작성시간 04.11.10 ㅎㅎㅎ 꽃무릇님 이제라도 고개 들고 다니시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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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진랑 작성시간 04.11.10 아니...제가 좋아했던 사람들을 꽃무릇님도 좋아하셨다니...그 나이에 짝사랑 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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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별꽃 작성시간 04.11.12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읽으면서 미소가 떠오릅니다. 꽃무릇님이 사랑한 것은 개개인의 얼굴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고결한 영혼이잖아요. 죽을수 밖에 없는 운명을 걸머지고도 다정하고 강인한 영혼들땜에 우리들 삶이 팍팍하지 않고 따뜻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