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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발표문] 노동자운동과 기본소득 - 금민

작성자맑은사람|작성시간10.05.14|조회수48 목록 댓글 0

노동자운동과 기본소득

 

금민(기본소득 네트워크 운영위원)

 

I. 들어가기: 노동자운동의 위기 -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어디에서?

 

크게는 노동자운동의 위기, 좁게는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공론화 된지도 이미 10년이 지났다. 민주노조운동은 96년 노동법 총파업을 정점으로 97년 외환위기 이후 2007년까지 10년간 신자유주의의 전면적 전개에 비례하여 급속하게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 것도 아니다. 특히 2008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 이상 '위기다 아니다'를 논할 지점을 경과했다. 지도력의 위기, 도덕성의 위기, 관료주의의 문제에서 위기를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측면이 위기의 본령에 해당되는 사항일까? 멀리는 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운동, 적어도 1987년 이후에는 우리 사회에서 엄연한 질서요소가 된 운동이 그만한 문제도 풀지 못하여 위기일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런 종류의 문제라면 민주노조운동은 충분히 해결할 역량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문제들은 빙산의 일각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져 볼 지점이다. 그렇다면 정작 위기의 본령은 무엇인가?

 

현상의 근저로 나아가는 분석, 보편적 계급형성전략

 

그렇다면 대기업노조의 실리주의, 단사중심주의, 정규직 이기주의, 노동자대중의 정치의식의 낙후성과 조직화의 문제 등이 위기의 본령인가? 그러한 문제도 정작 위기의 발현형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정규직의 고용도 보장받기 힘든 불황기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와 단결을 도덕성에 호소해서 풀어가려는 것은 대단한 주관주의일 것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연 2600시간이라는 근로기준법 상의 제한도 어겨가며 장시간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분명 노동자운동의 위기 극복에 역행한다. 하지만 의료, 주거, 보육, 교육, 노후에서의 기본복지조차 수립되어 있지 않는 사회에서 몸뚱이가 지탱하는 동안이라면 한 푼이라도 더 벌고 보자는 특근을 도덕적으로 개탄하는 것은 사태에 대한 원인 해명도 아닐뿐더러 정작 조준해야 할 과녁을 벗어난 비난이 될 것이다. 일자리 나누기와 고용창출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2008-2009년과 같은 불황기에는 생산량 위축으로 인하여 노동시간단축의 효과가 고용증대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덕적 개탄은 더욱 더 설 자리를 잃는다. 노동자대중의 정치의식의 보수화와 집단적 정체성의 해체라는 문제도 집단적 도덕의 재무장으로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물론 민주노총 평조합원들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도 민주노동당 지지가 최대 4분의 1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노동자 대중의 정치의식은 보수적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흔한 핑계거리처럼 정치조직의 분열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어서 민주노조운동의 단일한 정치조직 재건으로 해결될 문제일까?

 

신자유주의의 관철은 성별분업, 국적과 출신의 구별 등을 넘어 노동자대중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했고 개별적 이해당사자로 해체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노동자 대중을 공통적인 보편계급으로 다시 결집시킬 계급형성전략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규직의 양보에 근거한 사회연대전략에서 계급형성전략의 측면을 부각시키는 주장도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과연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규직은 양보할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또는 양보할 용의는 어떻게 조직되나? 계급형성전략이라면 그 이름에 걸맞도록 전체 사회적 범위에서의 이행 경로, 분명한 과제 설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체 사회적 범위에서의 계급형성전략, 그것은 분명 개별공장 단위나 산업부문 단위의 문제 틀을 넘어선다. 그래서 21세기에 들어 와서 많은 사람들은 단사중심의 교섭전략에서 노동자운동 위기의 원인을 찾았고 사회적 의제투쟁을 해법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등장했던 사회적 노조운동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곧잘 노동사회의 내부 의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해결을 지연시키고 초점을 외부 문제로 돌리는 일에만 사용되지 않았던가? 전체 사회적 의제! 분명 문제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그러한 사회적 의제는 노동사회 내부의 의제나 운동과 어떻게 매개될 것인가의 질문을 우회할 수는 없다. 사태의 착잡함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극단화시켜 보자. 단사중심 전략을 대체할 사회적 교섭전략, 곧 전체 노동자대중의 이해와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해를 고려한 보편전략이 제시되지 않는 한에서, 단사중심 교섭론만을 마냥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현실을 비아냥거리는 꼴이 되지 않는가? 사회적 노동운동 또는 보편적 노동자운동! 당연히 옳은 이야기다. 특히 현재는 실용주의건 전투적 조합주의건 단사중심의 교섭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된 불황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문제는 산별강화와 같은 교섭전략의 조직적 재편으로 해결될 성격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서구의 산별체계조차 교섭주체로서의 지도력을 잃어가는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산별체계 강화만으로는 보편전략의 부재로 인한 위기가 극복될 수는 없다. 문제는 보편적 계급형성전략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에 놓여 있을 뿐이다. 위기 극복의 대안은 단순한 방향 제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위기의 원인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형태에 놓여 있다

 

위기 극복책으로 등장하는 각종 윤리적 언설들은 위기의 원인을 주관적 요소에 돌리는 오류를 저지른다. 반면에 사회적 노조주의의 여러 변형태들은 비록 해결의 방향을 어렴풋이 지시하고 있을지 몰라도 구체적인 해결 방식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사태가 단순히 방향 제시만으로 해결될 문제라면 이미 1996년경에 제시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은 왜 위기를 예방하지 못했을까? 아울러 노동자운동의 위기는 이미 산별강화나 정치조직의 통합 등 구래의 조직적 해법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분기점을 경과했으며, 그러한 방식은 위기의 시대적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인식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20세기 이래로 전승된 조직 방식을 답습한다고 해서 위기가 해결될 것도 아니며 반대로 모든 원인을 마냥 조합주의 문제로 돌리고 조합운동이 아닌 새로운 조직형태를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과잉 기대하는 것도 주어진 과제를 외면하는 꼴이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위기의 원인과 실질적인 해법이며, 이 문제가 분명해진 다음에 남는 문제는 그러한 해법이 전 사회적으로 관철되기 위해서 '노동자운동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래서 노동자운동의 위기는 위에서 거론한 현상적인 문제점들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위기의 원인은 해고로 이어지는 구조조정도 아니고, 노동유연화도 아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주요한 현상은 그 자체로 보자면 사회적으로 다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발전'의 산물이며, 다만 신자유주의적 해결방식이 위기를 만들어낼 뿐이다. 결국,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신자유주의이다. 한편으로 고용축소의 문제, 다른 한편으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에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것은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조직의 발전에 위기의 원인을 찾는 꼴이 되고 만다.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조직의 발전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특정한 사회적 형태를 부여하는 신자유주의, 곧 이 시대 자본주의가 문제일 뿐이다.

 

20세기형 완전고용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이 진보일까?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기술진보와 사회적 생산력의 비약적 진보는 사회적 총노동량의 감소로 이어진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자면 적게 일하고도 같은 정도로 많이 또는 더 많이 생산한다. 특히 정보혁명 이후 오늘날의 경제는 이미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했다. 경제 성장으로 일자리가 창출되고 고용률이 높아지던 시대는 지나갔다. 기술 혁신과 산업 재편성으로 일자리가 없어지는 속도가 신규 산업부문의 등장으로 추가 고용이 창출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른 시대이다. 만약 사회적 총노동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노동자 대중의 일부분은 대량해고 당할 수밖에 없으며 반면에 다른 일부분은 기술발전과 사회적 필요노동량의 총량적 감소와 무관하게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긴 노동시간을 일하게 된다. 기술진보의 결과 그 이전보다 적은 사회적 총노동량으로 그 이전보다 많은 재화가 생산되는 상태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임금노동 총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고용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현재와 비교할 때 어마어마한 생산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러한 생산 확대가 과연 생태적으로 바람직한가? 또는 경제적인 측면에만 문제를 좁히더라도, 확대된 생산량은 과연 누가 소비해 줄 것인가? 근본적인 해법은 개별적 고용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사회적 총노동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임금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시간단축은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창출되기 이전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동일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라면 이는 무엇보다도 임금삭감을 의미하고 소득저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하나의 가능성이겠지만 개별자본의 입장에서 이는 임금이 단축된 시간의 비율만큼 상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 문제를 개별자본이 선진적이길 기대하지 않고 사회적 총자본의 비용으로 해결하는 길, 일괄적으로 전체 사회적 방식으로 해결할 길은 없는 것일까? 물론 있다. 의료, 주거, 보육, 교육, 노후에서의 기본복지가 보장될 뿐만 아니라 고용노동을 통해 획득하는 시장임금 이외에도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소득이 고용 여부와 무관하게 보장된다면 개별적인 고용노동자의 입장에서도 노동시간단축은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이 되며, 이를 통해 노동시간단축에 기반을 두는 사회적 총노동의 재분배도 또한 가능해진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해법일까?

 

완전고용사회의 종식은 노동자를 고용노동자와 실업자로 양분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안에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로 내부화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비정규직은 유연화된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화된 고용형태에 근거한 저임금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러한 방식의 비정규직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실업부조는 항상 노동연계형 최저보장의 형태를 띠고 결국 실업자는 임금소득의 획득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충분한 생계소득이 고용 여부와 무관하게 보장되는 사회적 조건이라면 정규직 고용축소가 저임금 비정규직의 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사회적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 상태에서 완전고용사회의 회복이 과연 진보적인가를 따졌듯이 여기에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으로의 전환은 정작 진보적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해법으로 보는 사람들은 문제를 유연화 그 자체로 간주한다. 그런데 문제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비정규적인 고용형태를 통해 소득저하가 일어나는 유연화, 노동시간의 길이와 시간대별 배치가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유연화, 달리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시간주권이 박탈되고 소득저하가 일어나는 유연화가 문제일 뿐이다. 유연화 그 자체가 임금삭감 및 소득저하로 이어지지 않고, 노동시간의 길이와 시간대별 배치에 있어서 노동자의 노동시간주권이 보장되고, 기본복지가 수립되어 있다면, 유연화는 생산조직상의 발전을 의미하고 노동자에게 유리하다. 비정규직의 전원 정규직화는 장시간 노동으로 자유시간을 박탈당하고 시간당 임금므오 보면 저임금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정규직을 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는 꼴이 된다. 이는 또한 완전고용사회로의 복귀론과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생산확대를 가정한 해법이다. 결국 문제는 유연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유연화 형태에 있다. 신자유주의적 형태가 제거된 새로운 사회적 조건에서의 유연화는 오히려 고용노동에 대한 개별노동자의 시공간적 선택 폭을 늘릴 수 있으며 고용노동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활동' 시간이 증대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덧붙이자면, 유연화가 전체 노동자에게 좋은 유연화일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신자유주의에서 공급되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같은 최소안정성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유연안정성'이 공급된다면 유연화도 노동자에게 좋을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정작 좋은 유연화란 노동자의 시간주권, 자유로운 활동시간 보장에 있다는 점을 가려 버린다. 신자유주의적 '유연안정성'은 유연화를 통해서도 고용노동의 안정성이 크게 침해되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유연안정성'론은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마찬가지로 고용노동 중심적이다. 하지만 고용축소 시대에 과거 방식의 고용창출은 진보적 대안전략일 수 없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고용안정성이 보장될 것이라는 위안도 거짓말에 불과하다. 고용노동의 축소와 유연화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규정형식에 맞서 이러한 계기를 자유로운 활동의 증대 계기로 삼는 사회재편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은 과거의 완전고용사회에서의 복지전략과 같은 고용노동 중심의 좁은 틀이 아니라, 완전고용상태가 붕괴하고 더욱 철저한 자본의 노동에 대한 사간주권적 포획이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큰 틀에서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의 위기 극복은 신자유주의 극복의 대안을 계급형성전략으로 할 때에만 가능하다.

 

노동자운동의 위기는 운동 내부의 주체적 요인보다 거대한 사회변화에 근본적 원인을 두고 있고, 또한 위기의 극복은 고용축소나 유연화와 같은 개별적 위기 양상에 대하여 이를 신자유주의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 방식, 즉 정규직 완전고용, 풀타임 노동자를 재건하는 방식, 또는 그러한 전제에 입각한 사회보험체계 등을 재건하는 방식일 수 없다. 노동자운동의 위기 극복은 신자유주의적 사회형태,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운동형태 전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러한 대안에 입각한 사회적인 재편을 수행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개별적으로 해체된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재형성 역시 그와 같은 포괄적 대안을 새로운 계급형성전략으로 전개해 갈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아래에서는 1) 일체의 자산 심사나 소득 심사 없이, 2) 노동이나 활동에 대한 강제나 의무 없이, 3)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충분히 보장해 줄만큼의 액수로, 4) 국가나 지방자치체 등 정치공동체로부터 5)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오직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격에만 기초하여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의 중심으로 설정하며, 나아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서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과정이자 경로로서 기본소득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또한 이 글은 단순하고 강력한 아이디어인 '보편적 기본소득'이 노동시간단축, 최저임금제, 고용노동 등 노동사회 내부 의제에 대해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살펴보면서 보편적 기본소득 쟁취운동이 새로운 방식의 계급형성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검토해 볼 것이다. 미리 밝혀두자면, 아래에서 논의는 노동자운동의 위기라는 현 상황에 매개된 논의보다 주로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방식을 따른다. 노동자운동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 무엇이 요구되는지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거론했기 때문이다.

 

 

II. 화폐로 측정되는 노동과 자유로운 활동의 사회형식적 분리

 

기본소득과 노동사회, 기본소득과 노동자운동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논의는 노동과 활동, 즉 임금노동 및 자영업자의 상품생산노동을 포함하는 화폐와 교환되는 '직업노동'(Erwerbsarbeit)과 '자유로운 활동'의 개념 구분, 양자의 관계 규명, 첫 번째 범주 속에서 두 번째 범주의 발현가능성 등의 문제이다. 이와 같은 출발점은 전통적인 노동 범주를 좀 더 포괄적이고 본원적인 범주로 확장하고 노동 범주에 대한 사회형식의 규정성과 구속성 문제를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출발점이다. 이와 같은 출발점을 확보함으로써 보편적 기본소득이 이와 같은 양 범주에 어떻게 관계 맺으며 또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더욱 엄밀하게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서는 고대 이래로의 '관조적 명상적 삶'(vita contemplativa)의 '적극적 활동적 삶'(vita activa)에 대한 우위가 역전되고 전 사회적인 노동숭배가 시작된다. 하지만 동시에, 공장노동의 고통스러움과 자유로운 시간의 박탈로서의 노동개념은 근대 경제학의 초창기부터 예감되었다. 아담 스미스는 한편으로 노동을 휴식과 자유, 행복의 희생으로 보았고 고통스런 일로 인식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의 원천, 부의 원천으로서 노동을 찬미한다. 이처럼 근대 자본주의의 벽두부터 등장한 노동혐오증과 노동숭배의 분열은 비록 노동은 자유와 향유 시간의 희생이지만 사회적 필요는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자연적 필연성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근대 전체를 통틀어서 한편에서는 긍정적 노동관이, 다른 한편에서는 부정적 노동관이 등장한다. 한 극단에서 우리는 노동이 아니라 게으를 자유를 역설하는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로부터 '만국의 노동자여! 이제 그만 일하자'를 역설하는 노동거부파의 전통을 만난다. 다른 극단에서는 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 이래로의 시민적인 노동찬미론, 사회적 부의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계급을 중심에 두는 노동자적 좌파적인 노동찬미론, 노동자와 생산자본을 한편에 위치 지으며 소재적 부를 창출하지 않는 금융자본만 적대시하는 대단히 파시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노동찬미론 등 각종의 노동찬미론을 만나게 된다. 적어도 노동찬미라는 관점에서는 '부르주아적 노동사회 옹호론', '노동자계급 맑스주의', '구조적 반유태주의'는 거의 상호간의 내적 차별성과 적대성도 드러내지 않으며 구별 없이 한 항에 정렬한다. 그래서 근대 자본주의의 초창기로부터 전승된 노동 대 반노동의 패러다임 대립은 현존 자본주의 사회의 형태적 특수를 결정짓는 정작 중요한 대립과 적대를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구성체 전체의 미래와 인간 존재 그 자체에 관련된 매우 추상적인 논쟁을 유발한다.

 

이와 같은 대립이 정작 풀어야 할 문제의 표층에만 겉돌고 있음을 밝히기 전에 각각의 입장으로부터 산출되는 사회구성적 원칙들의 일면성과 정치적 맹목성을 드러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부르주아적 노동찬미론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 그 유명한 로크의 예처럼 - 정의의 원칙으로 제시하지만 구상노동의 실행노동에 대한 지배와 포섭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노동자계급 맑스주의의 전통적인 흐름에서 임금노동은 한편으로 인간 일반의 합목적적인 대상적 활동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관계에 의해 소외된 활동으로서 이중적으로 파악된다. 거기까지는 그다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노동이 더 이상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소외된 활동이 되는 것을 멈추는 일, 곧 노동해방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원래의 문제는 또 다시 되풀이될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임금노동이길 멈추는 것인가? 즉 더 이상 자본주의적 형태규정성의 옷을 입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필요로 인한 활동으로서의 성격이 줄어들고 자유로운 활동의 성격이 점차 늘어나는 것인가? 하나는 사회형식으로부터 규정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의 발전 정도로부터 규정되는 것이라고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생산의 사회적 형식과 내용을 단지 개념적으로만 구분하는 일이 될 공산이 크다. 모든 소재적 발전과 그 사회형태적 전개가 개념적으로는 비록 구분될지라도 서로 얽혀 있으며 형태를 떠난 내용은 수립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다른 측면에서, 소외된 노동의 해방 전망이 장기 유예될 때 노동자계급 맑스주의는 더욱 더 속류화할 위험을 가진다. 즉 20세기에 그것은 고용노동만을 신성화하고 고용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대단히 노동신성주의적인 배제를 의미하는 속류화를 너무 자주 일으켰다. 20세기의 노동자계급 맑스주의의 본래적인 문제점과 그 속류화의 파국성에 대해 더 자세히 성토하는 일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닐 것이기에 이는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자. 노동찬미론의 가장 희화화된 형태는 일국주의적이거나 파시즘적인 노동찬미론이다. 거기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아니라 생산하는 자본과 빨아먹는 자본의 대립이 가장 주요하며, 전자는 토착자본이며 후자는 늘 해외투기세력으로 표상된다. 전개되는 사태의 표층에 대한 서술로서 그다지 틀리지 않을 수 있는 이러한 인식의 맹목성은 생산하는 자본과 생산적 노동의 일체화, 노동의 이름을 빌린 국적자본 애국주의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화는 현실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뒤에 한 번 더 따져 보겠지만, 노동과정을 경유하는 착취와 일체의 노동을 매개하지 않는 수탈의 구분 못지않게 두 계기가 전일적인 자본운동의 두 가지 형태임을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와 같은 전일적인 인식에 근거할 때에만 착취와 수탈의 구분은 사회형식적이고 실천적인 구분으로서의 의미, 곧 그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노동찬미론이 드러내는 실천적 맹목성과 마찬가지로 노동거부와 노동혐오 역시 일면적이고 맹목적이다. 노동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연필연성으로서의 노동이 자유로운 활동으로 전화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필연으로서의 노동사회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의 왕국'으로 접어들 물질적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문제 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거부론이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로 한정되어야 하고, 이는 다시 본래적인 의미의 노동자계급 노동찬미론에 특유하게 나타나는 구조, 즉 '본원적인 노동에 대한 찬미와 임금노동에 대한 부정'의 틀로 환원되어 버린다.

 

긍정적 노동관이냐 부정적 노동관이냐의 문제 틀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한편으로는 임금노동의 축소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자본의 '수탈적 포섭'이 증대되면서 전통적인 노동 패러다임이냐 아니면 탈노동 패러다임이냐의 선택의 문제로서 실천적으로 결코 우회할 수 없는 문제인양 취급되기 시작했다. 불안정노동의 증대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활동에 대한 정보자본 등의 무상 취득, 곧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대한 자본의 '수탈적 포섭'이 강화되면서 네그리의 경우처럼 이와 같은 현상을 착취 개념의 확장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들도 등장한다. 양적으로 측정불가능한 활동이 화폐량적인 증대를 고유의 합목적성으로 하는 자본운동에 포섭되면서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활동이 사회적 부의 창출에 기여한다는 인식도 등장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사회에서 가치법칙과 같은 측정가능성의 기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도 수반되었다. 노동 패러다임이냐 탈노동 패러다임이냐의 문제는 전통적 노동자계급 중심이냐 아니면 새로운 범주로서 사회적 노동자 중심이냐는 '주체의 문제'로서 이해되었고 임금노동의 대량축소와 불안정화 현상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표층만을 맴돌 뿐 결코 사태의 본질의 해명이나 사회실천적 범주들의 확정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여기에서 노동 개념과 활동 개념, 그리고 착취 개념과 수탈 개념을 어떻게 유의미한 사회실천적 구분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긴급하게 된다. 이 문제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노동은 인간의 합목적적 대상적 활동으로서 자연필연적이지만, 이와 같은 자연필연성은 언제나 사회적 형태를 통해 재규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시장에서 그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 임금노동의 형태로 등장하거나 자신의 생산물의 가치를 평가받는 독립적 상품생산자의 노동의 형태로 등장한다. 이 두 범주를 묶어서 '화폐와 교환되는 (직업)노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다면, 그러한 노동은 그 스스로가 상품이거나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이와 같은 노동은 언제나 시장을 통해 측정가능하고, 적어도 반드시 측정되어야만 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와 같은 측정이 엄밀하지 않으며 시장의 자의에 내맡겨져 있음과 시장이란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영역이 아님은 별도의 문제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화폐에 의한 측정 방식이 수립되어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이처럼 화폐로서 측정 가능한 노동 개념에 대한 반대 개념이 '자유로운 활동'이다. 그것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측정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측정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실업자의 생명활동, 재생산노동, 가사노동의 형태를 띤 돌봄노동 등과 팔리지 않는 상품을 생산한 상품생산자의 실패한 노동 등이 그렇다. 거기에 대해 노동이라는 이름을 붙이든 활동이라는 이름을 붙이든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활동과 노동의 구분은 본원적 구분이 아니라 사회형식적 구분이며, 자본주의에서 하나는 가치를 창출하고 다른 하나는 가치를 창출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이라 이름붙일 수 없는 것으로 구별될 뿐이다. 이와 같은 구분은 생산자 대중을 임금노동자와 실업자로 구획하는 구분이기 때문에 사회실천적으로 중요한 구분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노동으로 측정되지 않는 활동에 대한 자본의 수탈적 포섭으로부터 착취 개념의 확장을 끌어내고 화폐로 평가되는 노동과 화폐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활동의 구분이 가지는 사회적 분단선으로서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은 사회비판적인 범주구성이 결코 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착취와 수탈의 구분, 화폐로 측정되는 (직업)노동과 (자유로운) 활동의 구분을 유지함으로써만 신자유주의적 사회화 형태와 그로부터 기인하는 사회적 대립의 지점들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2) 인간의 합목적적 대상적 활동으로서 본원적 노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노동과 활동의 구분은 불필요해진다. 본원적 노동은 사회형식적 범주가 아니라 자연필연적 범주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본원적 노동은 특정한 사회형식을 통해서만 등장한다. 자본주의에서 본원적 노동은 소외된 노동의 형태로 등장한다. 둘은 개념적으로 구분되지만 임금노동이라는 소외된 형태 속에도 노동의 본원성은 통일되어 있으며 한 몸을 이룬다. 칼로 잘라내듯 어디까지가 본원적이며 어디까지가 소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소재적 생산활동의 측면은 본원적이고 사회적 전유형식은 소외된 측면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도대체 왜 그토록 어마어마한 형태로 생태적 파괴를 감행해야 하며 그와 같이 파괴적인 소재변형이 과연 인간의 본원적 자연필연성인가를 질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사회형식적 측면 이외에 자연필연성의 관점에서 노동과 자유의 관련을 살펴보자. 맑스는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Briefe uber Das Kapital, 184)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일 년은 고사하고 단 이주 동안만이라도 노동을 중단한다면 그 어떤 국가라도 쓰러져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어린애들도 알고 있다." '필연의 왕국'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인류사의 전사(前史)'가 앞으로도 더 많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회형식의 제약을 도외시하더라도, '자유의 왕국' 또는 '사태의 꼬뮨주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노동사회의 종식과 자유로운 활동에 입각한 사회로의 이행 조건은 비록 성숙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유의 왕국'으로의 이행은 어떻게 일어나나? 여기에 [자본] 3권의 유명한 구절을 끌어들이자. “자유의 왕국은 실제로는 필요와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상 본래적인 물질적 생산의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 필연성의 왕국 너머에서 자기 목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계발, 즉 참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필연성의 왕국 위에서 이것을 기초로 하여서만 번성할 수 있다.” 즉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을 위한 합목적성의 활동이 불필요해질 만큼 합목적성의 활동이 번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이 충분히 번성했다면 - 맑스의 말대로 - “노동시간의 단축이 (자유의 왕국으로 나아가는) 기본조건”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노동의 단축을 통해서만 자유의 증대가 일어나지만 이는 오직 노동의 번성과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화폐증식만을 맹목적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의 합목적성에 대한 거부가 자기 목적으로의 본원적 노동의 합목적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없다. 이 둘이 '화폐로 측정되는 노동'이라는 형태 속에 불가분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에도 둘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작 자유로운 활동이 전면적이 되는 것은 본원적 노동의 합목적성조차 불필요해지는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위에서 전개한 (화폐로 측정되는) 노동과 (화폐로 측정되지 않는) 활동의 개념 구분에 의지할 때, 노동해방이란 노동으로부터 활동의 해방인가 아니면 또는 노동사회 안에서 노동자의 해방인가라는 문제 제기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양자택일적으로 제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노동사회 안에서 노동자의 해방은 20세기의 전유사회주의나 분배사회주의가 생각했던 거처럼 단순히 소유와 분배문제에만 국한될 수 없으며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되찾아 오는 일을 포함하고, 그래서 노동시간단축 정치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활동들을 기본소득과 같은 방식을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단지 임금노동 이외의 활동 범주에 사회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사회 안에서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문제에도 기여한다. 아래에서는 과연 기본소득이 이와 같은 두 가지 작용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III. 기본소득: 활동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노동사회 안에서 노동자 해방

 

1. 기본소득과 활동사회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기본소득은 활동에 대한 화폐적 측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적 자격에 입각하여 동등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활동들을 화폐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화폐적 인정일 뿐이다. 인정인가 평가인가를 엄밀히 나누는 것은 기본소득이 활동을 그 차이가 화폐로 표시되는 노동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활동에 대한 인정이라는 계기를 통해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의 중심성으로 인해 무가치한 일로 평가되는 여러 활동들을 해방시킨다. 기본소득은 노동사회로부터 활동사회로의 전환을 촉진한다. 정보혁명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노동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활동을 수탈적으로 포섭한다. 기본소득은 활동의 수탈적 포섭이라는 문제에 대결하는 대안이다.

기본소득의 적극적이고 전환적인 의의는 임금노동의 형태를 벗어난 자발적 노동이 등장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자본에 고용되어 이윤을 창출하는 임금노동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여러 활동을 사회가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기본소득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서 수행하는 노동 등 임금노동을 벗어난 자발적 노동에 사회적 기초를 부여한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노동의 사회적 형태와 성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의 질적 변화도 촉진한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참여하며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액수의 기본소득은 창의적인 지식기반노동으로의 전환, 경제구조를 지식산업 중심으로 고도화하는 전화의 필요조건을 형성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은 비자발적 실업으로부터 독립적ㆍ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노동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의 틀 밖에서 노동의 또 다른 사회적 형태가 수립될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임금노동으로부터의 배제가 역설적으로 임금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기본소득이 담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환이야말로 이전에는 가치로 측정할 수 없는 영역으로 밀쳐두었던 여러 활동들을 영리화하는 방식으로 완전고용사회를 다시 달성하려는 시도보다 미래적이며 전환적이다. 임금노동 축소와 불안정화의 시대에 고용불안정이 소득불안정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도록 한다는 점은 도리어 기본소득의 소극적 의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독립적ㆍ자발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의 확대를 통해 임금노동 사회를 넘어서는 길을 연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로 속에서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의 사회를 넘어 모두의 일이 인정받는 사회적 필요활동의 사회로 나아가는 적극적 전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2, 기본소득과 노동사회

 

1) 기본소득, 노동시간단축 정치, 고용노동의 재분배

 

노동사회의 재구성과 노동사회 안에서의 노동자 해방에 대해 기본소득이 작용하는 가장 큰 매개 고리는 노동시간단축 효과이다. 두 가지 점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시간단축은 자본이 주도하는 유연화와 연계된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종류의 노동시간단축이 노동의 시간주권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유연노동화를 동반하는 노동시간단축은 설령 임금삭감이 없다 할지라도 노동사회에서 열위에 있는 이주노동자나 여성노동자 등의 초과착취를 대가로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함을 뜻한다. 두 번째는 지식기반노동으로의 전환 경향과 관련해서 프로젝트별로 일하는 지식기반노동자에게 공장 또는 사무실이라는 형태로 공간적으로 구획된 노동시간의 길이가 자본과 노동 간의 시간주권 투쟁의 핵심사항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완수를 위해 필요로 하는 탈공간적인 노동시간, 곧 노동시간과 활동시간의 공간적 구분이 없어서 활동시간의 잠식까지를 포함할지 모르는 노동시간이 핵심사항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를 예견한다면 노동시간단축만이 아니라 활동시간의 주권 문제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며, 활동의 사회적 인정과 보호로서 기본소득은 매우 적절한 대안이 된다.

 

기본소득은 개별 노동자로 하여금 자본에 대한 교섭력을 강화시키고, 특근 등의 초과노동을 축소시키며, 노동시간단축 효과를 발생시킨다. 아울러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전체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부합된다. 즉 a) 노동시간단축이 정규직의 소득저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며, b) 유연화와 연계된 노동시간단축으로 인하여 노동시장에서 열위의 비정규직이 초과착취 당하지 않도록 하며, c) 노동시간 주권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활동시간의 주권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나아가, 전 사회적으로 도입되고 전 사회적으로 효과를 미치는 기본소득은 사회적 총노동량의 재분배를 가능하게 만든다. 즉 기본소득은 고용노동 범주 밖에서의 사회재편이지만 고용노동의 재분배를 통하여 고용을 확대하는 효과도 가진다.

 

기본소득 도입으로 이와 같은 효과가 발생할 수 없는 시기에서도 노동시간단축은 여전히 그 자체로서 중요한 노동의제를 형성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사회적 생산의 발전에 걸맞은 규모로 전 사회적이고 급진적인 노동시간단축을 이끌어내고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유도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불황기에는 더욱 더 많은 장애 요소가 작용할 것이다.

 

2) 기본소득과 최저임금제

 

근대는 노동사회로 출발했고 최저임금제는 그 벽두부터 프랑스혁명기의 자코뱅들도 주장했던 최소안전 장치이다. 기본소득의 도입을 전제할 때 최저임금제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노동여부와 무관하게 충분한 기본소득이 지급되는데, 최저임금제가 왜 필요한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기본소득과 최저임금이라는 두 제도가 각기 작용하는 영역이 다르고 유발하는 효과도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둘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단지 소득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오류이다. 기본소득은 활동의 인정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즉 노동사회의 외부에서 노동사화 내부로 작용한다. 반면에 최저임금제는 노동사회 내부에서 착취의 한계를 사회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최저임금제를 대체하지 않는다는 점은 최저임금제가 없다면 아무리 후한 기본소득을 부여해도 최저임금 이하의 저임금 자본가에게 전체 사회가 임금보조금을 지급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더라도 최저임금제는 존재해야 하며 기본소득 액수처럼 최저임금도 명목 GDP 상승에 연동되어야 한다.

 

3) 기본소득과 교섭력, 보편적 계급형성전략

 

기본소득은 교섭력을 부여한다. 우선 기본소득을 통해 보장되는 일정 범위에서의 경제적 독립성은 개별 노동자의 교섭력 증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섭력이 단지 개별 노동자의 교섭력에 그치고 말 것이고, 결합노동자로서 노동조합의 교섭력은 약화되며 개별화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이다. 기본소득을 통해 부여되는 교섭력은 종래의 교섭력과는 종류가 다른 새로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개별화된 교섭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가정이다. 개별적 교섭력 상승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따져 본다면 오히려 노동자계급이 기본소득을 통해 획득하게 될 교섭력의 달라진 성격을 알 수 있다. 공장체계에서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교섭력은 생산자로서의 집합체적 성격에 근거한다. 반면에 기본소득 도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교섭력은 생산과 소비, 노동과 활동 모두를 포괄하는 전 측면적인 사회적 교섭력의 성격을 띤다. 이는 기본소득이 노동자 각인이 생산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결합성에 근거하여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 가지는 보편적 자격에 근거하여 부여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될 문제이다. 20세기에는 협약임금제도를 통한 임금투쟁 정치나 생산중심주의에 근거한 계급투쟁 정치가 노동자계급을 결합된 생산자계급으로서 형성했다. 신자유주의적 조건에서 기본소득 도입은 노동자계급을 생산에만 한정되지 않는 전 측면적인 보편계급으로 재구성한다. 생산과 노동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보편성, 노동과 활동 모두를 아우르는 보편성,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보편성, 인류의 구성원으로서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기본소득은 노동자계급을 형성하는 전략이다.

 

 

IV. 마치며

 

신자유주의적 사회형태 전반에 대한 대안을 전략으로 할 때에만 현재의 노동자운동의 위기가 극복될 것이다. 전통적인 해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장기불황기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위에서 이 글은 기본소득을 그러한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덧붙여야 할 점은 - 알래스카처럼 자연자원의 분배를 통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국가가 조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다시 재분배하는 제도, 즉 분배제도가 아니라 재분배제도라는 점이다. 이는 기본소득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따라서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 극복의 대안으로서 가지는 의의가 더 많은 범위에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금융적 수탈이나 지대적 수탈에 대한 조세를 통해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기본소득을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국가재정혁명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방식의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의 축소와 소득의 재분배의 시급함, 노동사회로부터 활동사회로의 점진적 전환이라는 기본소득 논의가 서 있던 본래의 지평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시키고, 케인즈 혁명과 신자유주의 혁명 이후의 위기시기에 필요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재정혁명의 차원으로 기본소득의 위상을 끌어 올린다. 역사를 살펴보면, 명예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 러시아10월혁명, 케인즈혁명, 신자유주의 보수혁명 등 모든 혁명은 국가재정혁명을 시발로 했다.

 

첨부파일 노동자운동과기본소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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