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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라" 서평(김세균)

작성자강연자|작성시간10.06.29|조회수129 목록 댓글 0

진보평론 44호(2010년 여름호) 게재된 글입니다.

 

"1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라"(2010, 매일노동뉴스) 출판에 부쳐

 

기본소득 보장론, 어떻게 볼 것인가? :

 

 

 

김세균 (서울대 교수, 정치학)

 

‘기본소득’ 보장을 위한 운동이 한국에서도 유력한 새로운 정치사회운동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소득(basis income)이란 “어떠한 자산 심사나 노동 요구도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생활을 충분히 보장하는 수준에서 매월)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을 뜻한다. 최근 민주노총연구원이 󰡔1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라󰡕(매일노동뉴스, 2010)라는 책을 출판했다. 책 제목 만을 보면 학벌 사회 비판서 정도로 보이는데, 책 내용은 기본소득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것이다. 기본소득의 보장이 1등만을 중시하는 경쟁사회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연대사회 출현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책 이름을 그렇게 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책에 수록된 글들의 집필자는 민주노총 기본소득 프로젝트팀이 발의해 출범시킨 기본소득네트워크 소속 회원들인 이수봉(민주노총 사무부총장), 류청오(아카데미아 코뮤닉스 회원), 곽노완(서울 시립대 교수), 김원태(마부르크대학교 박사과정), 강연자(진보평론 편집실장), 강남훈(한신대 교수), 안현효(대구대 교수), 백승호(가톨릭대 교수), 권문석(사회당 기본소득위원장), 김미정(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부원장)이다. 우선 이들이 집단적 작업을 통해 기본소득과 관련되는 제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룬 이 책을 출판한 것에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집단적 지성이 만들어 낸 최근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게다가 이 책은 한국의 연구자-활동가들이 기본소득에 관한 외국에서의 논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고, 기본소득에 대한 우파적 버전을 좌파적 버전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출판이 지닌 의의는 더욱 크다.

 

그런데 기본소득 보장론의 목소리가 커짐과 더불어 그것의 실현가능성과 의의 등에 대한 논란 역시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보기엔 지나친 의의 부여와 편견에서 나오는 맹목적인 거부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논의를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이와 관련, 나는 이 글에서 책에 실린 글 하나하나를 검토해 보기보다는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 자신의 견해를 제출하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할까 한다. 그러기 위해 논란 과정에서 제기된 몇 가지 오해부터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기본소득 보장’ 요구를 ‘무조건적인 평등주의적 균등소득 보장’ 요구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차별 없이 균등하게 기본소득을 보장할 지라도 노동소득에 따른 소득 차이가 발생하므로 그런 이해는 오해일 따름이다.

 

둘째,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차별 없는 균등한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것은 장애인과 같은, 더 많은 사회적 배려가 있어야 할 소수자들에 대한 긍정적 의미의 차별적 복지 제공의 의의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것을 그런 긍정적 의미의 차별적 복지제공까지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셋째, 기본소득 보장 운동을 보편적 복지체제 수립을 지향한 기존의 운동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는커녕 기본소득 보장 운동은 기존의 복지체제가 지닌 한계를 극복해 그 체제를 완성시키려는 운동이다.

 

기본소득 보장이 지닌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 기본소득 보장 요구는 어떤 사회체제도 인간의 생존권과 행복향유권의 보장 없이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본 소득보장은 소유권 등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권과 행복향유권을 인간이 사회 속에서 누려야 하는 신성불가침한 제일의 권리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기본소득 보장은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는 ‘평등적 자유’(egalitarian liberty)를 실현시키는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강력한 방책이다.

 

둘째, 기본소득 보장은 기존의 복지체제가 지닌 여러 허점과 문제점 및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보편적 복지체제의 수립을 가능토록 만든다. 가장 단순하다는 것은 복지 제공에 어떠한 자산 심사나 노동 요구도 조건으로 달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강력하다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소득을 균등하게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기본소득 보장은, 만일 온전한 형태로 도입될 수만 있다면, 노동권력을 강화시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의 철폐, 노동과정의 인간화, 노동시간의 단축 등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간 눈부시게 진척된 과학기술혁명과 사회구조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은 갈수록 많은 사람들을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실업자로 만들고 있고, 많은 노동자들을 최소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변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런 현실에 비춰 볼 때 기본소득 보장은 많은 대중의 염원을 반영하고, 이들을 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할 수 있는 대중적 요구가 될 수 있다.

 

다섯째, 기본소득 보장을 위한 재원 마련과 관련, 근로소득에 대한 조세 부여 등에 중점을 두는 견해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한 재원 마련을 가장 중요한 방책으로서 제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안에 따라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극소수의 불로소득층을 제외한 모든 근로소득층이 혜택을 입게 된다. 이 점에서 기본소득 보장 요구는 노동자계급과 다른 모든 근로소득층의 굳건한 동맹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책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여섯째,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한 기본소득 보장 운동은 자본주의적 수탈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가 금융적 수탈 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점에 비춰 이 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수탈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으로서 커다란 현실적 의의를 지닌다.

 

일곱째, 기본소득 보장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도 ‘필요에 따른 분배’ 원리를 확장하고 그 원리를 보다 완벽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기본소득 보장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생활을 영위함에 필요한 소득, 즉 ‘필요’ 충족을 위한 소득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기본소득 보장은 “일한만큼 분배한다”는 원리가 작동하는 가운데에서도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원리를 확장시켜 나가는 기제가 된다. 게다가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든 하지 않든’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 2단계의 분배 원리로 제시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원리가 지닌 한계를 교정한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메슬로우(Abraham H. Maslow)의 지적처럼, 인간은 기본욕구의 충족이 보장되는 조건 속에서는 보다 가치 있는 상위 욕구의 충족을 위해 나서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 보장은 각인이 자신이 지닌 잠재력을 무한히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제공해 주며, 이는 사회 전체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무임승차자가 나올 수 있겠지만. 이로 인한 비용 지불은 기본소득 보장이 가져다주는 공동체 전체의 이득에 비한다면 하찮은 것이다.

 

위에서 든 이유로 기본소득 보장 운동이 지닌 의의는 막대하다. 그렇지만 이 운동이 사회변혁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견인차가 되기 위해선 이 운동이 사회변혁운동 상에서 차지해야 할 합당한 위치와 운동 방향 등에 대해 더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점들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기본소득은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이므로 사회 공공영역의 확장과 같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복지와는 일정하게 구분된다. 이 점에서 ‘현물 기본소득’과 같은 개념을 도입해 그런 영역까지 기본소득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렇게 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념의 지나친 확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럴 경우 기본소득 운동의 일차적 운동 목표 설정 등에 혼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와 관련, 기본소득 보장 운동을 ‘개인들에게 지급되는 현금소득의 재분배 운동’으로 한정하고, 이에 기초해 ‘비시장적인 사회 공공영역의 확장’과 ‘기본소득 보장’을 보편적 복지체제 수립을 위한 운동의 두 축으로 삼는 것이 옳은 듯하다.

 

둘째, 사회 공공영역의 확장과 기본소득 보장 운동은 착취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의 성격을 지닌 저임금 철폐 운동, 노동시간 단축 운동, 비정규직 철폐 운동 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노동운동은 착취체제에 대한 저항을 중심축으로 삼고, 수탈체제에 대한 저항을 보조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기본소득 운동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노동운동이 기본소득운동을 자신의 중심적 운동과제로 삼는다면, 이는 착취체제에 직접적으로 포섭되어 있는 노동자대중을 저항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며, 이는 다시 기본소득 보장 운동의 성장-발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금융적 수탈 등은 현대 자본주의체제의 본질적 구성 부분의 하나이지만, 그런 수탈은 착취가 가능케 하는 것이고, 또 수탈이 착취를 강화시킨다는 점이 더욱 깊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수탈만을 문제 삼으면 자본주의체제가 노-자 적대관계에 기초해 있음을 무시하고, 한때 경실련의 이론가 등이 주창한 ‘(산업자본가와 노동자로 구성되는) 생산계급 대 (불로소득층인) 기생계급’과 같은 오도된 인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나아가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인 소득재분배 체제가 도입될지라도 그것은 완성된 기본소득 보장체제의 도입을 위한 단초가 마련된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뿐, 많은 한계를 지니고 극히 불안정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자본주의체제 하에서도 의미 있는 기본소득 보장체제가 정착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엔 환상이다. 이와 관련, 롤즈(John Rawls), 센(Amartya Sen), 월쩌(Michael Walzer) 등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egalitarian liberalists)’의 분배정의론이 사회주의적-맑스주의적 분배정의론과 놀랍게도 일치하는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이들의 분배정의론은 기든즈 류의 ‘제3의 길’론의 주창자들이 제시하는 분배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당함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내가 보기엔 사회주의자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의 대화는 가능해도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주의적 분배원리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킨 ‘제3의 길’론자와 사회주의자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분배정의의 구현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에서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점에서 이들이 사회주의자들과 차이를 지닌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완성된 모습의 기본소득 보장체제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체제 하에서만 도입이 가능하다. 이 점에서 수탈체제에 대한 비판은 그런 수탈을 가능케 하고 강화시키는 착취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한다.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한 기본소득 보장 운동의 대중적 정치사회운동으로의 성장-발전은 계급투쟁을 격화시킬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그 운동을 생산수단의 사회화, 생산수단의 집합적-민주적 관리를 위한 운동과 결합시키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기본소득 보장이 자본주의체제에서도 가능하다고 보거나 그것을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꿈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사회체제 등에 대해 상이한 견해들을 지닌다고 할지라도, 그 꿈은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꿈을 대중의 꿈으로, 나아가 대중이 그 꿈을 실현시키는 진정한 주제로 나서도록 만드는 일이다.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그 꿈을 진정 실현시켜야 할 꿈으로 여기면 여길수록,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운동이 성장-발전하면 할수록 그 운동은 갈수록 더욱 더 분배체제만이 아니라 생산체제도 문제 삼는 변혁적-혁명적 운동으로 성장-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 잠재력을 일깨우고 현실화시켜 나가는 것은 좌파의 몫이다. 체제내적 논리로, 또는 생뚱한 논리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그 운동이 지닌 변혁적-혁명적 잠재력을 폄훼할 필요는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보장론을 헛소리,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가로막는 반동적 주장 정도로 공격하는 지극히 편협한 교조주의적 비판은 옳지 않다. 그러기 보다는 기본소득 보장을 대중적 구호로 만드는 데에, 나아가 그것이 지닌 변혁적-혁명적 잠재력을 일깨우고 현실화시키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좌파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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